TEXT/또다른 세상

[스크랩] 아름다운 팬들이 좋은 선수를 만든다. (세상을 읽는 눈 님의 글)

monocrop 2009. 10. 25. 13:10

  다니엘 디포우의 ‘로빈스 크루소’는 누구나 알만한 소설이다. 두어 차례 영화로도 찍혀서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주인공 홀로 무인도에서 벌이는 모험담만큼 열 살짜리 사내아이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도 없었다. 어떤 책이든 두고두고 곱씹곤 했지만,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다시 꺼내든 그 소설은 거듭 새로웠다. 흥미는 사라지고 무인도가 갇힌 사회로 다가왔다. 자신이 구해준 원주민 프라이데이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크루소가 부모의 불화로 가슴앓이에 시달리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그 작품은 모험소설이자 환경에 얽힌 사회소설이요, 개인의 삶을 다룬 인물소설로도 갈린다. 무릇 한 권의 책도 아는 만큼 헤아려 세상을 살필 힘을 길러준다. 먼저 나무를 봤더라도 눈길을 숲으로 옮겼다가 다시 나무를 담아야 하는 이치다. 심리학에서 천재를 상대적인 연합사고영역이 발달한 자(者)라고 정의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 3년간 시니어 피겨 시즌은 우리 국민에게 하나의 절기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김연아 선수 자신이 하나의 문화였다. 외국 관계자들이 놀이공원 링크를 오가는 딱한 아이라고 혀를 찰 때마다 이를 악문 채 경기에 나섰던 여린 소녀가 위대한 선수로 우뚝 올라서기까지 그 가족과 함께 보여준 감동어린 여정은 뭇사람들을 무섭게 빨아들였다. 아이스쇼 단체 하나 없는 나라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불러들여 공연도 꾸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관련 상품의 소비자로 나선다. 지난 8월, 캐나다로 떠나며 연아양이 그 뜨거운 사랑을 고마워하면서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이 있다. 그 중에 ‘피겨선수의 삶은 짧지만, 최선을 다한 오늘이 앞으로 살아갈 더 긴 인생의 일부임을 알고 있습니다’하는 구절이 나는 새삼 떠오른다. 토씨는 좀 틀릴지 몰라도 의미는 그대로다. 항상 알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는 너르고 깊은 속내다. 지난 12년간 피겨를 통해 배워온 그녀의 꿋꿋한 삶과 정직한 기술의 아름다움이 이 글 속에 눅눅히 녹아들어 있다.

 

  인터넷 사이트를 드나들다 보면 나는 종종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그 12년 세월이 국제연맹이 들어섰을 때부터 117년 역사로 다져온 기술을 따라잡았던 과정인데, 일부 팬들은 오로지 연아양을 통해 피겨를 가늠한다. 아마 중계방송조차 여자싱글만 골라볼 사람들이다. 피겨를 배우는 데 도움이 크건만, 남자싱글을 비롯해 페어나 아이스댄싱은 거들떠보지도 않지 싶다. 아니, 올해 세계선수권자가 되자 뒤늦게 그녀의 경기 동영상만 돌려본 사람들일지 모른다. 기껏해야 못난 이웃집 불구경하듯 일본선수 영상이나 찾아볼 성싶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겨를 잘 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좋아한다고 말할 뿐이다. 연극과 방송에서 연출가로 살았던 지식을 조심스레 담아내는 데 지나지 않다. 고등학생 때까지 중거리 육상선수였던 경험도 살려낸다. 자잘한 기술들이야 30년을 채워가는 오랜 눈매와 틈틈이 꿰찬 책들로 풍월은 읊는 편이다. 어쩌면 연아양을 아끼는 마음은 나보다 그들이 더 깊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본다는 말이 있다. 환경이나 입장, 생각에 따른 차이점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 드셀수록 폭넓게 생각하는 힘은 떨어진다. 행복에 겨운 제 욕심이 감사나운 탓이다. 그 이치로 진정한 사랑을 나란히 뻗은 평행선에 견준다. 맞바라보기라는 예쁜 우리말도 있다.

 

   결국 사랑이란 소통(疏通)이고 바른 이해일 때 그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한다. 억지춘양에 흥을 낼 순 없는 노릇이다. 진정한 팬은 선수와 함께 호흡한다. 성적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따뜻한 관심과 애정 어린 충고는 물론이고, 어린 꿈나무들이 운동을 즐기며 올곧은 동기부여를 찾아가도록 살뜰하게 살피는 바람직한 팬 문화를 뜻한다. 아름다운 팬들이 좋은 선수를 길러낸다는 말도 있다. 일부 게시판에 올라오는 몇몇 글들은 글쓴이의 인기투표나 다름없다. 피겨를 바탕으로 선수나 여느 팬들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을 받드는 댓글과 추천에 연연해서 다른 나라 선수들을 죄다 마구잡이로 깎아내린다. 자기감정에 들뜬 삐뚤어진 사랑이다. 피겨 스케이팅의 세계는 생각보다 좁다. 일본이야 하는 짓이 밉다지만, 다른 이들은 우리가 아끼는 연아양의 동료다. 경기장 밖이나 아이스쇼 무대에서 함께 어울릴 스케이터들이다. 동료들을 무작정 헐뜯으면 김연아 선수가 돋보이기는커녕 자기보다 피겨를 사랑해달라던 그 고운 마음을 흉보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팬이라면 그럴 까닭이 없다. 상대를 짓밟아 자국 선수를 떠올리는 얌체 짓은 일본이 점수를 퍼 받고, 멀쩡한 점프에 장난질을 쳐대는 돈지랄로 우리 모두 신물이 난다. 지금 세계엔 우리말을 아는 외국인도 많다. 캐나다인 후배 교수가 자국 선수에게 음악과 따로 논다는 어느 생트집을 더듬더듬 읽더니 나나 학생들에게 다 들으라는 듯 “지랄들 하네”하며 굳이 서툰 우리말로 면박을 주는 꼴밖에 나지 않는다. 핀란드 선수 역시 마찬가지다.

 

   안무를 볼 때는 그 흐름을 전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앞뒤로 이어지는 연결동작도 맞춰 봐야 하고, 우선 음악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미 ‘새로운 기준, 그 도전과 응전’에서 모방이 아닌 공유로 짚어주긴 했지만, 나는 한 가지만 더 꼬집고 싶다. ‘세헤라자데’에서 이너바우어에 이어 더블 악셀을 뛴 연아양이 양팔로 물결치는 자세를 잡는다. 그때 음악의 리듬을 따라간 안무다. 음이 고저를 땅땅 때리는데, 어깨 위로 팔을 쳐들면 몸짓이 리듬과 겉돈다. 일본선수가 따라 한다는 그 팔짓을 음악과 다음 연결동작에 맞춰보면 당연히 쭉 올리는 몸짓이 자연스럽다. 예술적 스포츠인 피겨는 장르로 살피면 무대예술이다. 세세히 가리면 시청각예술이자 스케이팅 기술이 덧붙여진 무용에 속한다. 무용에서 음악은 하나의 극본이지만, 때론 스토리텔링이 전혀 없는 음향효과로 쓸 수도 있다. 극본인 음악을 해석하는 방법과 작품세계가 안무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연출가였던 나도 스케이트를 탈 줄 모르는 탓에 30년 관찰조차 모자라 틈틈이 발레와 무용 공연을 보고, 선수들마다 선곡한 음악을 일일이 들어서 편곡으로 밑그림을 그려보며 미리 감을 잡아 경기를 기다린다. 운동선수의 팬이라면 그들이 흘리는 땀부터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 그 두 선수가 뒤쳐진 면은 분명히 있지만, 나름대로 꾸준하고 정직하게 피겨를 가꿔온 좋은 스케이터들이다. 음악을 전혀 모른다고 타박하는 어느 글쓴이들은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음악을 해석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첫째, 원곡을 충실하게 살린다. 둘째론 안무가 자신이 풀어내고픈 의도대로 재해석한다. 선수에게 음악을 맞추느냐, 아니면 음악에 맞는 연기를 하느냐, 이것이 세 번째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방법을 적절히 버무려내기도 한다. 처음 음악을 선곡해 쇼트와 프리 경기시간을 따라 짜깁기를 한 뒤 안무를 짜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이 네 가지 방법에 다 들어앉아 있지만, 선수의 취향과 수행능력의 차이로 구분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을 한껏 살리는 창의적인 안무는 기술과 표현력이 돋보이는 선수를 만나야 한다. 반대로 선수에게 음악을 맞추는 경우는 뒤쳐진 표현력이나 기술을 안무가 가려주기 위한 선택이다. 고정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 때도 선수 중심의 안무를 풀어낸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표현력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조건마저 김연아 선수는 모든 것을 갖췄다고 이야기한다. 가늘고 긴 팔다리만이 아니라 키까지 이상적이다. 연출가는 키 작은 배우를 대극장 무대에 세우지 않는데, 동작이 작아서 표현력과 무대 장악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관중과 교감을 나누는 피겨도 매한가지다.

 

  작품세계 역시 안무가의 개인적인 취향만은 아니다. 뒤늦게 세계에 나섰지만, 민초들의 끊임없는 항쟁이 흐르던 역사를 바탕으로 가장 빨리 근현대문학을 휩쓸어온 러시아처럼 그 안무가들은 드라마틱한 구성을 좋아하는데, 지나치게 전통을 고집하는 면이 있다. 캐나다는 그와 달리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예술피겨를 꾸려온 나라다. 첫째 방법으로 음악을 살리는 창의력은 지난날 이토 미도리에게 예술성을 덧붙이기 위해 일본이 모셔가기도 했던 데이비드 윌슨을 첫손에 꼽는다. 로리 니콜과 셰린 본은 네 번째로 집어낼 수 있는데, 선수에게 맞는 음악을 골라 그에 맞춰 해석하되 원곡이 지나치게 다치지 않도록 꾸며낸다. 니콜은 미셀 콴 이후 여러 선수들과 작업을 하면서 특이성을 잃어가는 인상도 있지만, 선수를 받쳐주는 안정적인 짜임새는 단연 두드러진다. 윌슨의 안무는 그만큼 예술성에서 앞서고 어렵다. 일본의 어느 선수가 로리 니콜의 안무로 경기했을 때 그나마 자연스러웠음을 떠올려 볼만하다. 현재 코치이자 안무가는 러시아에서 피겨 대모로 불린다. 원래 드센 그 나라에서도 야구딘을 부상으로 몰고 갔을 만큼 지독한 고집쟁이다. 자신의 작품세계에 선수를 우겨넣는다. 때문에 기초가 탄탄한 선수만이 그녀의 안무를 따라갈 수 있다.

 

  어느 선수든 그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음악을 만들었던 시대적 배경과 작곡가며 안무가의 작품세계를 먼저 헤아려 전체 안에서 선수의 몸짓을 평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니니 그렇게라도 바른 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일본선수가 아니고, 안무가 대중의 입맛과 맞지 않아도 점수는 잘 나올 수 있다. 신체점 방식의 허점이다. 연기 면에선 자연스럽지 않더라도 규정에 맞으면 많든, 적든 가산점은 당연히 딸려 온다. 당대에 이름을 떨친 선수들의 안무는 유행을 타기 마련이다. 그 선수가 기준으로 공유를 통해 피겨를 발전시키는 본보기고, 항상 그렇게 도전을 받는 게 정상의 자리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피겨 팬이 아니라 그저 김연아 선수를 좋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보다 길게 살아갈 인생의 밑거름으로 삼겠다며 묵묵히 쏟아내는 구슬땀을 떠올리면 절대 그런 꼴사나운 글쓰기는 할 수 없다. 심지어 2007년 세계선수권 때 영국 해설자가 ‘록산느의 탱고’에서 “저렇게 음악에 맞춰 연기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하고 내뱉었던 감탄사를 역사상 처음 보는 선수로 엉뚱하게 부풀리는 사람들도 있다. 피겨를 깔아뭉개서 그녀를 돋보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올바른 스포츠 정신을 기대할 수 없다. 경쟁경기이긴 하지만, 국제스포츠 사회에서 까마득한 후배인 연아양에게 이르기까지 피겨를 이끌었던 쟁쟁한 선배들이 있다. 그 역사를 내팽개치면서 일본에게 왜곡을 따지면 누워서 침 뱉기일 뿐이다. 요즘은 적절한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만 들어가도 널린 게 피겨지식이다. 자신의 게으름은 돌아보지 못하면서 꼬박꼬박 게시판에 들어와 댓글 달기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종교가 나쁜 게 아니라 잘못 믿는 사람이 문제임이 뻔히 드러난다.

 

   몰이해와 엇나간 애정이 나댈 만큼 우리나라에서 피겨의 인기는 아직 거품투성이다. 우선 전용 경기장이라도 들어서야 그 인기를 갈무리해서 피겨육성으로 몰아갈 수 있다. 피겨나 연극은 관람비가 너무 비싸다고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도 흔하다.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필름을 복사해 수백, 수천 개의 상영관에서 동시에 돌려대지만, 연극이나 피겨는 값비싼 시설이 돌아가는 오직 한 무대에만 설 수 있어 유지비용을 맞추기도 힘겹다. 연극은 올릴 때부터 미리 망했다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내게는 아버지뻘인 러시아 친구가 있다. 나이 차이가 자그마치 32년인데, 모스크바 대학교 석좌교수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라 국립 대학교 석좌교수라는 자리가 낯부끄러울 만큼 생활이 몹시 빠듯하지만, 이 친구는 근근이 나오는 연금을 아득바득 아껴서 꼬박 1년을 불린다. 그리곤 매년 정초에 손자들을 매달고 그들이 자랑하는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보러간다. 좋아하는 보드카를 끊을망정 문화생활은 즐기는 친구다. 비록 경제적으로 무너졌어도 세계가 배우고 따르는 그들의 문화예술을 끈끈하게 지켜온 힘이다.

 

   자기 생활의 편리대로 맞췄다면 오늘의 김연아 선수도 없다. 세계 정상에 올랐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해온 기초기술을 여전히 다잡는 면면을 통해 우리는 기본을 지키는 마음가짐부터 배워야 한다. 캐나다 언론과의 인터뷰로 기억한다. 연아양이 “타고난 면도 있겠지만,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력해보기 전엔 자기 능력을 알 수 없잖아요”하고 자신의 재능에 대해 이야기했던 말을 새겨봐야 한다.

 

운동이나 문화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자기개발을 통한 표현이다. 지금 우리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오롯이 노력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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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맑은아찌수다방
글쓴이 : 해맑은아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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