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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비사막엔 `전설의 보물성`이 있다

monocrop 2009. 7. 17.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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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로그의 /정치,외교/면에 있는 [몽골지도부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 한국에 제시]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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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사막엔 '전설의 보물성'이 있다

오마이뉴스 ㅣ  2008-04-15 10:19 기사원문보기
[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서하왕릉의 릉탑. 릉탑은 본래 7층의 목조건물이 외관을 아우른 구조였다.
ⓒ 모종혁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중국 서북부에 한 제국이 건국됐다. 오늘날 중국 닝샤(寧夏)회족자치구의 수도 인촨(銀川)에 도읍을 정한 제국은 쓰촨(四川)성에서 활동하던 유목민 탕구트족(?項族)이 세운 나라였다.

제국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황무지를 개척하고 실크로드의 중계무역을 장악하며 2세기 동안 번성했다. 동북으로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 및 여진족의 금나라, 동남으로는 송나라와 중국 대륙을 삼분했던 제국, 바로 '대하'(大夏)였다.

7세기 중국 대륙에는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오랜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킨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잇단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면서 쇠망의 길을 걸었다. 수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당나라는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고 서역의 고창국과 북방 초원의 돌궐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늘려갔다.

티베트 고원에서는 걸출한 영웅 송첸감포왕이 나타나면서 분열된 부족들을 잇달아 통합해갔다. 송첸감포가 세운 토번(吐蕃)이 날로 강성해지자, 티베트 계열의 종족으로 쓰촨성 송판(松藩)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탕구트족은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고향을 떠난 탕구트족은 100여 년 동안 간쑤(甘肅)성을 거쳐 산시(陝西)성 북부에 정착했다. 탕구트의 수령 중 한 명인 탁발사공(拓跋思恭)은 황소의 난 때 당이 장안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 황실의 성인 이(李)씨를 하사받았다.

당 말기에 접어들며 독립된 지방세력으로 성장한 탕구트족은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틀을 갖춰갔다. 11세기 초 탕구트의 족장 이원호(李元昊)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송나라의 행정조직을 모방해 독자적인 관료제도를 정비했다. 1028년 송의 대군을 격파한 이원호는 1036년에는 고유 문자까지 창제했다.

1038년 이원호는 송과 맺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면서 스스로 황제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국호인 대하는 중국 최초 왕조인 하(夏)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송은 자신의 영토 서쪽에 있다하여 '서하'라 불렀다.

서하의 건국을 인정치 않은 송은 대군을 출병시켜 전쟁을 일으켰다. 1040년 삼천구(三川口), 1041년 호수천(好水川), 1042년 정천(定川) 등의 전투에서 잇따라 대승한 서하는 화의를 요청했다. 대하와 요의 동맹을 우려한 송에서 이를 받아들여 1044년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서하는 송에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으로부터 매년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근 등을 받고 국경 무역장을 개설, 교역하는 막대한 실리를 얻은 조약이었다.

 

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된 개국황제 이원호의 밀랍 인형.
ⓒ 모종혁
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된 서하문자 창제규칙도. 6000여 자가 만들어진 서하문자는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형태였다.
ⓒ 모종혁

고유문자 창제하고 실크로드 무역로 장악해 번성한 제국

 

서하는 면적이 한반도의 5배나 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영토는 오늘날 동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바이터우(包頭), 서로는 간쑤성 위먼관(玉門關), 남으로는 란저우(蘭州), 북으로는 중·몽 국경선에 달했다.

송과 서역의 중간에 위치한 덕분에 서하는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을 장악했다. 서하는 중계무역로를 독점하여 세력을 크게 넓히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서하는 한족과 농경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탕구트와 유목 문화에 접목, 발전시켰다.

건국 초기만 해도 송의 관제를 모방했던 서하는 차츰 고유의 체제로 정비했다. 관직은 크게 문·무관에 상사, 중사, 하사 3계급으로 나뉘었다. 4부, 11주, 7군, 6현, 8진의 지방행정조직을 설치하여 제국을 원활히 통치했다.

서하 문자로 쓰인 <천성구개신정금령>(天盛舊改新定禁令·1149), <광정임신신법>(光定壬申新法·1212), <저년신법>(猪年新法·1215) 등 법전은 서하가 고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서하는 불교를 국교로 정해서 승려를 교육, 배출시키는 화상공덕사와 출가공덕사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각지에 사찰을 건립했다.

서하어는 티베트-미얀마 언어 계통으로, 중국어와 문법·발음 체계가 전혀 다르다. 서하문자는 6000여자가 창제됐는데,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문자로 어떤 자수는 40획이 넘기도 했다. 서하문자는 서하가 멸망한 이후에도 16세기 초까지 쓰여 24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했다.

서하는 문자 보급을 위해 각자사(刻字司)라는 인쇄국을 두어 음운과 단어를 정리한 교과서 <운서>(韻書)를 출판했다. 제국 곳곳에 설립된 학교에서는 서하어로 번역된 중국 고전 <논어>, <맹자>, <사기> 등이 가르쳐졌고 각종 불경 교육도 이뤄졌다.

국교가 불교였던 서하는 수많은 불교 미술 작품을 남겼다. 찬란한 서하의 불교 예술은 카라호토(黑水城)에서 발굴된 불상·불화·불탑 등에서 잘 나타난다. 고비사막에 은빛 사토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 카라호토는 실크로드 거점도시로 동서양의 온갖 진귀한 보물이 가득 찼었다.

1908,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카라호토를 찾은 러시아 코즐로프탐험대는 수십 점의 불상, 500여 점의 불화, 2만4000여 점의 고문서를 발굴했다. 코즐로프는 지인에게 "보존이 완벽한 고대 도서관을 발견했다"고 편지를 써서 보낼 정도였다. 한낱 퇴역군인이었던 코즐로프는 카라호토 발굴을 통해 세계 고고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서하왕릉에서는 다량의 벽화도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 국교였던 불교의 경전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 모종혁
서하왕릉에서 발굴된 인두신조는 서하가 티베트 밀교까지 받아들인 다원적인 문화였음을 보여준다.
ⓒ 모종혁

찬란한 서하 문명을 보여주는 보물창고, 카라호토·서하왕릉

 

인촨에서 25㎞ 떨어져 있는 서하왕릉은 서하의 찬란한 문명을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다. 서하왕릉은 1970년대에 측정과 조사가 시작되어 30여 년 동안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서하왕릉은 허란(賀蘭)산 동쪽 기슭 황량한 사막에 위치해 있다. 50㎢ 되는 면적에 모두 9곳의 황제능원과 200여 채의 귀족 무덤이 있다. 서하왕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왕릉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베이징의 명십삼릉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서하왕릉의 황제릉은 각기 독립된 건축물이다. 왕릉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고 네모꼴로 제전, 내성, 외성, 전대의 계획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릉탑은 거대한 흙덩이가 봉분처럼 솟은 팔각추 모양으로 지하에는 계단 모양의 통로가 있고 가장 큰 직경은 34m에 달했다.

릉탑의 윗면은 5층과 7층 겹겹 구조로 된 목조건물로,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릉탑에서는 서하 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수많은 유물과 부장물이 출토됐다.

9곳의 서하왕릉 중 3호 능원은 부지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된 황제릉이다. 개국황제 이원호릉으로 추정되는 3호 능원에서는 조형이 완벽한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두신조'(人頭神鳥)가 발견됐다.

인두신조는 불경에 기재된 '쟈릴핀가'로, 히말라야산맥에 살며 묘한 울음을 낸다는 전설상의 새. 한자로 번역하면 '묘음새'라 불리는 인두신조는 불교 극락세계를 횡보하는 새로 서하의 건축물에는 모두 장식돼 있다. 3호 능원에서는 북방유목문화의 형태를 보여주는 도깨비 형상을 한 남녀 조각의 주춧돌도 발굴됐다.

현재까지 서하왕릉에서는 14만 점의 기와 등속, 200점의 건축장식 그리고 각종 문화재가 출토됐다. 작년 9월 발굴이 마무리된 6호 능원에서는 금수 무늬 장식의 암막새와 와당, 치미, 망새 등도 쏟아져 나왔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서하왕릉이 고대 한족 황실능원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불교건축을 융합하고 탕구트와 북방유목민족의 전통을 더한 독자성을 창조했다고 인정했다. 붉은 벽과 석회 기와로 장식한 왕릉 성벽 구조는 서하 황실의 장중하고 웅대한 기질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서화왕릉은 중국 전통문화와 차별되는 서하문화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인촨 도심에 있는 청톈스(承天寺)탑은 1050년에 지어진 11층, 64m의 서하시대 벽돌탑이다. 18세기 지진으로 파괴된 것은 1820년 다시 지은 이 탑은 서하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 모종혁
번영을 누렸던 서하도 용맹한 몽골군 침입에는 어쩔 수 없었다. 서하와 벌인 전쟁에서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몽골군은 서하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와 학살을 감행했다.
ⓒ 모종혁

몽골군에 멸망당한 서하, 중화민족 블랙홀에 사라진 탕구트

 

서하는 동서문화의 영향을 고루 받아들여 중국의 유교, 티베트의 밀교, 서방의 이슬람 문화까지 흡수한 고도의 문명을 창조했다. 독자적인 문자와 문명을 꽃피운 유목왕조는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개국황제 이원호에서 마지막 황제 이현까지 서하 황실은 10대에 걸쳐 번영을 누렸다. 서하제국은 실크로드 무역로를 장악하고 영화를 누렸지만 13세기 들어 강대해진 몽골 칭기즈칸의 위협에 직면했다.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유목민 부족을 재편하고 서하에 침입했다.

서하는 제국 유지를 위해 몽골에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의 딸을 칭기즈칸과 혼인시켰다. 몽골과 함께 금에 대한 전쟁도 벌여나갔다. 그러나 금나라를 상대로 한 오랜 전쟁은 서하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었고, 이에 1226년 칭기즈칸의 서정 참가를 거부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직접 이끈 몽골군은 서하를 침공했다. 서하는 몽골 대군에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칭기즈칸은 전투 중 사망했다. 칭기즈칸은 죽으면서 "(서하인을) 섬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말라. 멸망시키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칭기즈칸 유언처럼 몽골군은 서하인을 철저히 도륙했다. 후대 사서는 "성곽은 불태워졌고 주민은 닥치는 대로 살해되어 백골이 사방에 널렸고 수천 리가 황폐해졌다"고 기록했다.

처절한 파괴와 학살은 오랫동안 서하의 존재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근세기 들어 발굴된 서하왕릉, 카라호토의 유적을 통해 서하는 다시금 빛을 발하게 됐다. 카라호토 일대에서는 칭기즈칸 대군에 결사 항전했던 흑장군 바텔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져온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흑장군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을 포위한 몽골군에 거세게 저항했다. 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성안의 맷돌까지 깨어 성벽을 타고 오르는 몽골군에게 퍼부었다. 3차례에 걸친 진공전에 실패한 칭기즈칸은 성안에 흐르는 강물을 막아 수원을 없애버렸다. 최후를 예감한 흑장군은 성안 모든 보물을 빈 우물 속에 던지고 처자식까지 죽인 뒤,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에 나가 전투를 벌였다. 아름다운 카라호토 성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흑장군은 저주의 외마디를 남기고 죽어갔다.

서하가 멸망한 것은 몽골의 침략도 있지만, 유목민의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서하는 정착민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면서 재부와 안정은 누렸지만, 유목민의 강건함과 용맹은 차츰 잃었다.

멸망의 참화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탕구트족은 옛 거주지로 되돌아왔다. 쓰촨성 서북부에서는 현지 원주민인 티베트인과 강(羌)족으로 분류되지만,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 체계를 지닌 탕구트족의 후예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서하왕릉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서하제국이 멸망하면서 흩어진 탕구트족은 '중화민족' 속에 융합됐다"고 말했다. 탕구트족은 중화민족이라는 블랙홀에 삼켜졌지만, 그들이 세운 제국은 역사의 발자취를 깊게 남겨 오늘도 빛나고 있다.

카라호토여, 카라호토여, 전설의 성이여….

칭기즈칸은 성안의 보물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초록색 비늘을 번득이는 커다란 뱀 한 마리,

그것은 저주를 품은 흑장군의 원혼이라네.

카라호토여, 카라호토여, 아! 전설의 성이여….

그 후로 아무도 성 안에서 살 수 없었다네,

그 후로는 아무도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네.

- 카라호토를 노래한 현지 민요 중에서

 

쓰촨성 주자이거우(九寨溝)에 거주하는 티베트인의 민족공연. 쓰촨 서북부에서는 탕구트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부족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 모종혁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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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에서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최초 확인(신동아.2004.2)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 새로써야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심백강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펌]중국 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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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와 뿌리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역사를 중국 정통역사서가 뒷받침해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신동아 안영배기자>

 

 

 

‘역사왜곡 바로잡기’ 또 하나의 밑거름 [중앙일보]

 

 

동북공정·임나일본부 등 동북아시아의 ‘뜨거운 감자’인 ‘역사 전쟁’을 풀기 위한 한국 측 관계자들의 노력이 잇따라 결실을 거두고 있다. 중국과 일본 측이 입맛에 따라 내놓는 ‘일방적’ 주장에 맞서기 위해 우리 쪽에선 사료적 근거를 찾는 데 집중해 왔다. 역사서에 남은 기록보다 더 객관적인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올 초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펴낸 『한국고대사료집성-중국편』(전7권)과 2003년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심백강)이 펴낸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동이(東夷) 사료』(전4권) 등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東亞三國關係史料全輯)』(전5권·이하 『사료전집』)이 중국 옌볜(延邊)대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육사(二十六史)』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 등에 실린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수록했다. 무엇보다 기존 자료집보다 수록된 자료가 방대하다.

이번 『사료전집』이 다루는 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는 요순시대부터 1912년까지다. 옌볜대·지린대·랴오닝대 등 9개 단체의 중국측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99년 시작해 올해까지 8년이 걸렸다. 총 7500쪽 분량이며, CD롬으로도 제작했다. 남겨진 숙제는 역주(譯注) 작업이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 역사책을 저본으로 옌볜대출판사에서 출간했지만, 제작 전 과정을 한국 관계자들이 책임졌다. 후암미래연구소장이자 한국불교신문 사장인 차길진(60·사진)씨가 기획·출간 등을 총괄했다. 제작비 5억여원은 이재욱 한국노키아 명예회장이 후원했다.

중국 역사서에서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만든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 』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부분을 새롭게 밝혀낼지 주목된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시안의 대상(실크로드를 오가던 낙타 상인 집단) 조각.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도 시안 일대에서 활약했다.[중앙포토]
차 소장은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인다 해도 앞으론 이런 일을 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북공정 여파로 최근 중국 측의 견제가 심해져 사료를 수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570여 만여 자의 한자를 CD로 만드는 작업도 어려웠다고 한다.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 소장은 “이번 『사료전집』의 목차를 후암미래연구소 홈페이지(www.hooam.com)를 통해 공개해, 원하는 이들에게 복사비만 받고 내용을 제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민덕식 교육연구관은 “학자 개개인이 엄청난 규모의 사료를 혼자서 다 찾아볼 수는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바로 선택해 볼 수 있게 한 이 같은 사료집의 편찬은 중요한 작업”이라며 “지금까지 학계에서 확인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이들 사료집을 통해 새롭게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배영대 기자

2007.07.31 05:08 입력 / 2007.07.31 05:56 수정

 

 

 

 

 

개천절은 한웅천황이 신시배달국을 건국한날 BC3897 - BC2333... 금년 2008년은 신시개천 (神市開天) 5906년입니다.
개천절이 시작된 것은 국조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에서 1900년 1월 15일 교문(敎門)을 다시 열면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경하식을 거행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천절은 단군조선 개국일이 아닌 한웅천황의 배달국 개국일입니다.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개국하시기 이전부터 배달 한겨레(동이계, 흉노계, 융족계)의 역사는 존재했었는데,

한국(3301년), 배달국(1565년), 단군조선(2096년)으로 이어져 내려온 시대를 우리는 삼성조 시대라 이야기합니다.

주나라도 사실 배달갈래왕조입니다.
특히 주나라가 주목해야 할 것이 이 때부터 민족구성이 약간 기형적인 왕조가 되는 것이죠.
상(은)나라를 무너뜨리면서 은나라에 여전히 충성을 바치던 가문들을 배제하는 과정 중에 중간관리 다수를 화하족을 끌어들여
상위지배층과 하위백성들은 배달 동이족이 대부분인데, 중위지배층이 화하족인 이상한 구조가 되죠.

이때부터 서서히 왜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공자의 가문 역시 은나라에 충성하던 가문 중 하나인데 그것 때문에 주나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까지 배척을 많이 받았던 하나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의 아버지는 동이족이고 어머니는 화하족인데, 아버지가 공자가 아주 어릴때 돌아가셔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면도 커죠.

기형적인 왕조였던 주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춘추전국이죠.
춘추전국시대의 대부분 나라 역시 모두 배달갈래민족이죠.

배달겨레 중 환족과 웅족 그리고 범족이 배달의 정통성을 두고 일시 다툽니다. 그래서 환족과 웅족은 몽골,만주,연해주,한반도로 퍼지고 범족은 중원대륙으로 퍼지죠.
환족과 웅족의 후손들은 북쪽에서는 흉노로 동쪽에서는 북부여를 세웁니다.
흉노족이 나중에 유럽의 헝가리를 이룩한 훈족,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 터키와 위구르의 돌궐족, 북중원을 차지한 거란족, 유라시아를 통치한 몽골족 등 여러 민족으로 다시 나누어집니다.
몽골의 원나라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제국은 티벳의 강족 같은 배달계 융족과 배달계 흉노의 일파인 몽골, 돌궐 등이 합쳐진 나라죠.
그래서 중앙아시아 역시 여러 배달겨레의 혼혈입니다.
그 과정 중에 일부 백인과도 피가 섞이게 되죠.

동쪽은 예족,맥족,숙신,말갈족 등으로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리며 성장하게 되죠. 배달계 말갈족이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립니다. 짱골라들이 마치 다른 민족인 것럼 조작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북부여의 뒤를 이어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 백제(남부여), 대진국(발해) 등이 세워지며

고구려,발해의 후예를 자처했고 그들의 역사서에도 분명하게 남긴 여진족의 금나라,청(후금)나라 등이 일어나죠.
신라는 일부 흉노족이 섞인 배달갈래왕조입니다.
중세고려는 이들 겨레구성 모두를 다시 융합하여 이어가게 되죠.

중원대륙으로 들어간 배달 범족은 하나라,상(은),주,춘추전국으로 왕조들을 이어갑니다.

헝가리나 터키 등이 우리와 모습이 많이 다른 이유는 지역적인 이유로 황인종의 피에 백인종의 피가 꾸준히 유입된 결과입니다.
몇 대를 거쳐 어느 인종의 피가 다수를 점하면 그에 따라 그 농도가 진해지죠. 

만약 황인종의 피가 백인종보다 더 많이 오래동안 유입되었다면 그 농도에 의해 황인종의 모습이 더 많이 남았겠죠.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는 서양의 침략과정 중에 워낙 많은 피가 섞여 같은 친부모 아래에서도 황인종,백인종,흑인종 다양하게 태어납니다. 친자식이 어느 인종으로 태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죠.
그래서 친형제인데도 불구하고 형은 흑인 동생은 백인,황인 이런식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많죠.
KBS나 MBC 혹은 BBC 등 국내외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죠.

 

직접적으로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시작은 유방의 한나라 때부터입니다.
이 때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집필하는 등 여러 역사조작 왜곡을 시작합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많은 서적들과 자료들이 불타버린 관계로 조작하기가 한층 쉬웠죠.

옛날(B.C 200) 쥐나의 사마천은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쥐나의 역사를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짱골라의 역사를 편찬했습니다.
그것이 쥐나의 사기입니다. 소위 말하는 춘추필법으로 말이죠.
즉 자기들은 한껏 올리고 주위의 국가나 민족은 한껏 깎아 내리는 못된 필법으로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약간 양심은 있었던지....)
그것이 약 300년 후에야 정식 쥐나의 사서로 채택된 것입니다.
그것도 후대의 왕들이 자기들을 높이기 위해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번 생각해봅시다.
2600여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그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식역사라고 할만한 사료가 그때까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마천은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단숨에 정립(?)했던 것이죠.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史記25권......
진시황의 분서갱유 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당시까지 제대로 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마천이 그 많은 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따라서 사마천이 서술한 역사들은 거의 꾸며낸 짱골라 위주의 재미있는 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그것을 정식역사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죠.

 

짱골라는 역사를 삭제,왜곡하는 등의 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이四夷라 하여 북적,동이,서융,남만으로 나누어

배달 한겨레를 흉노,동호,몽골,선비,묘족,말갈(여진)족,돌궐,거란,강족,오환,저족 등으로 계속 분리되도록 유도해왔습니다.
이夷란 뜻마저 오랑캐로 변질시키기까지 했죠.
반면에 짱골라는 서로 다른 민족과 결합되도 양친 중 한명만이라도 짱골라면 그 혼혈인은 짱골라다라는 정책을 편 것이죠.
누구는 결합되면 민족이 사라지고 누군 마찬가지로 결합되도 민족이 불어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계속 한 것이죠.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 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후예들로 농경과 유목기마를 함께 하는 대표적인 반농반목민족국가이고 몽골,돌궐 등은 전형적인 유목기마민족국가죠.
배달 한겨레는 여러 지역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퍼져 살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보고 그것이 모두를 대표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어불성설입니다.
배달 한겨레는 농경민족이면서도 유목기마민족이며, 그의 후예 백제나 왜열도 등 해상민족이기도 한 것입니다.

 

유방 한나라 이전에는 짱골라가 존재하지 않았죠. 아니 없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화하족은 낙양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죠. 시간이 흘러 화하족은 배달민족들에게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유방의 한나라 때부터 자신의 치부를 가릴려고 조작하게 되면서 짱골라 개념을 갖고 나오게 된 것이죠.
한나라가 영토확장하려다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에게 대패해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살아가는 속국으로 전락하죠. 이런 상황 등이 그들에게 조작,날조하도록 더욱 부채질하게 되죠.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조작하기는 더욱 쉬운 것은 말할 필요없죠.
짱골라들이 타국을 침략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나라의 사고에 있는 역사서나 수많은 저서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운 것이었죠.
지들이 저질러놓고 그것을 믿으라 하는 심보가 정말 가관입니다.
지들이 없애놓고 니네는 원래 그런 것 없었다 하면 말이 됩니까?

 

민족에 의해 그 역사가 탄생하는 것이지, 영토에 의해 역사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토의 변화가 있을 뿐이죠.
짱골라들이 내세우는 역사관의 맹점은 시간의 연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공간(영토)를 확보하여 날조,삭제하려고 ㄱㅐㅈㅣ랄을 떠는 것이죠.

 

복희, 신농, 공손헌원,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배달 한겨레입니다.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배달 흉노계 국가죠.
실제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며 이들이 설쳤던 세월은 고작 수백년 밖에 안 됩니다.
한나라는 북쪽 배달계 흉노와 동쪽 배달계 북부여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며 연명했고,
송나라는 배달 흉노계 거란족의 요나라와 고구려,발해 후예인 배달 부여계 여진족의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힘겹게 속국으로 살아가다 배달 흉노계 몽골족의 원나라에 병합되어 사라집니다.
명나라 역시 고구려,발해의 후예 여진족의 청나라(후금)에게 망합니다.
(+고구려,발해의 백성이었던 배달계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이것 역시도 짱골라들이 고구려,발해 후예인 그들 배달계 말갈족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단일민족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겨레가 여러 계통으로 나누어졌죠. 그래서 지금으로서가 아닌 오래전부터 우린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그 후에는 남남이 되어 다시 서로 만나 부둥켜 살아가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배달 한겨레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원은 배달 한겨레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부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분파된 민족의 고유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지, 시대적인 영토변화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토의 변화가 있을 뿐이죠.
원나라의 역사는 몽골 그 자신들의 것이고, 훈제국의 역사는 헝가리의 것, 오스만투르크(돌궐족)의 역사는 터키의 것,
부여,고구려,백제 등의 역사는 대한민국인 것처럼 우리 배달 한겨레 형제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짱골라들이 문제입니다.
치우천황이나 복희,신농,공자,묵자,징기스칸 등 남의 조상도 자기 조상이라 하고 수많은 배달갈래왕조들이 이룩한 발견,발명,업적 등을 자기 것이라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짱골라의 억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정확히 민족을 분류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를 논리적으로 반박할 뿐이죠.
만약 누가 우리 자신이 역사나 민족을 너무 확대시킨다고 성질을 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은 사대주의 매국노나 짱골라,쪽바리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배달 한겨레가 시간이 지나 이렇게 여러 민족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끝내려 하나 짱골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니 그것에 대해 배달 한겨레가 나누어졌다고 말하는 이상의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죠.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문제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짱골라나 쪽바리에게는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타박한다면 말이 안 되죠.
그런 어리석은 짓은 공정하지도 못 할 뿐더러 스스로를 자학하는 꼴이죠.

 

민족이란 용어가 근대 국민국가 이후에 생겨났다고 해서 '배달 한겨레'가 부정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겨레'라는 순수 우리말을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겨레는 같은 혈족,언어,풍습,문화 등을 공유하는 용어입니다.

 

고대의 배달겨레가 크게 동이계,흉노계와 융족계 등으로 나누어졌지만 그 뿌리는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달민족이 먼저 생긴 개념이고, 이것이 후에 광의의 동이족, 협의의 동이족 개념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배달계통이 흉노,예맥,말갈(여진),돌궐,동호,거란,선비,묘족,오환족, 강(티벳)족, 장족 등으로 좀더 세분되어집니다.
배달민족이란 용어 안에는 흉노계나 융족계,동이계 등 모두 담을 수 있는 말이지만 동이족이란 말은 그렇지 못 하죠.
그리고 한웅배달시대가 단군조선시대보다 더 이전의 시대니 당연한 것이죠.

 

요하문명 전시회도 심양이나 대련에서 열고 있는데 짱골라들은 그 유산들과 우리 배달 한겨레의 연관성을 숨기려고 엄청 노력을 하더군요. 그래서 역사공정을 더욱 펼치는 것이죠.

드러나는 한웅배달국의 홍산문명이나 단군조선국의 요하문명 등 여러 고대 유적들과 학자들의 발표로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죠.
세계 학술대회에서도 여전히 홍산문명을 주제로 벌어지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2006년 생방송으로 국회방송도 했었습니다.

 

홍산배달문명의 발견으로 러시아,독일,미국 등 세계 학자들의 유적 방문조사가 보다 대대적으로 벌여지려 했으나 짱골라들이 이를 막아서 모든 게 지지부진하게 지체되어 있는 중입니다.
지금 짱골라들이 그 고대 유적들을 조사 못 하게 군사통제구역으로 설정해서 출입을 아예 틀어 막고 있으며 그 유적들의 일부는 물에 수장시키거나 나무를 심는 등 여러 방법으로 파괴하고 또다른 일부는 유적지 자체를 들어내어 거기에 인위적인 장치를 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도 알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유적과 유산들로 인해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실존은 점점 확정되고 있거나 확정되었습니다.
이번 2007년 국사교과서부터는 단군조선국의 역사가 편입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 결과로 통해 본인 역시 홍산문명의 한웅배달국과 요하문명의 단군조선국 실존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지만 한웅배달국 이전의 환국시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유보중입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랑캐라 치부하던 치우천황이나 단군,징기스칸 등을 지금에 와서는 짱골라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까지 우기는 코미디도 연출하고 있죠.

실제 복희,신농,요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배달민족일 뿐 아니라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 흉노계 국가이니 이미 말 다 했죠.
남의 조상,역사,업적 등을 빼앗으려 하는 짱골라들.
한,송,명 3왕조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배달왕조들에게 지배당한 짱골라들.
그래서 짱골라들은 배달 한겨레에 대해 그렇게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쳐있나 봅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 황제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로 무려 7만9천여권에 달합니다. 고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원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 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죠.
만약 고대부터 청나라때까지 역대 중원대륙 모든 왕조들의 역사서들을 그 출처로 하여 종합편찬한 <사고전서>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그 출처였던 중원대륙의 모든 사서들마저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죠.
청나라의 <사고전서>나 근세조선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어 일반인들도 확인이 가능하죠.

 

실지로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며 오히려 짱골라들이 배달계왕조들의 지배에 있었고 혹은 속국으로 살아간 노예종족입니다. (실지로 짱골라족 자체가 허구의 개념입니다. 조작,날조를 시작하면서 허구의 종족을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배달 흉노계 선비족 국가이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 흉노계 국가이니 이미 말 다 한 것이죠....


유적발굴이나 역사를 알아가는데는 역사학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고학자,인류학자,사회학자,화학자,생물학자,지질학자,지리학자 등 인문사회계열 및 이공계열 여러 관련분야의 학자들이 동원됩니다.
그 유물,유적에서 나온 물질을 분석도 해야 하는 등의 여러 상호관련되어 진행되는 것이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방관적인 태도랑 중립적인 태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중립적이면서도 공정한 태도는 학자들뿐만이 아닌 기자,판사,일반인 등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당연한 행동인 것입니다.

 

[소위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확립된 위에 이뤄져야 [진정한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 국가의 역사교육,민족교육,국민교육이 바로 [그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이죠.
[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갖춰 야할 [보편적인 윤리/덕목]을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교육]은 없고 [시민교육]만 한다는 찌질이의 절규에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옛날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은 [너는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먼저 덴마-크 인이 되라]고 했죠.)
유태인들이 부르짖는 시온주의, 독일의 게르만주의 운운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도 다민족국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민족사회,인종사회로 굴러갑니다.
그에 따라 인종차별도 심하고... 그래서 미국 정치계에서 스패니쉬계나 흑인종,동양인 등을 비롯한 각 단체들의 힘겨루기가 극심합니다

근데 미국내 한국인사회만 결집이 안 되는 편이죠. 그래서 미국에서 부당한 이익을 받는 면이 더 큽니다.
흑인이나 스패니쉬계 등은 각각의 정치의원이나 이익,인권 등 다양한 수단을 마련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주어 보다 많은 것을 이끄는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고 있는 유럽공동체마저도 각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

그런 기반이 되는 정체성교육도 없이 세계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누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보스니아 내전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내전과 같은 위험을 안게 되는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나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것이나 구소련이 무너진 후, 여러 국가가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는 한울타리의 세계화라는 이면의 '신민족주의'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여튼 자신의 주변도 살피지 못 하면서 인류애,세계화를 부르짖는 찌질이들이 된다면 우리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전야의 풍전등화같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겁니다.

 

최근 유엔에서 한국 순혈주의 운운하며 마치 인종차별을 낳는 식으로 민족주의가 나쁘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데 참 황당합니다.
민족주의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저 중립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혼동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군요.
어떤 이들은 애국심과 배타성을 구분 못 하더군요.
미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 위해 애쓰면 애국심이고, 한국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애쓰면 국수주의,배타성입니까??
도대체 이런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을 잃어버린 나머지 외부에서 무슨 소리를 하면 쉽게 흔들리더군요.
그리고 도움도 안 되는 체면을 위해 손해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똥고집은 엄청 부리죠.
중세고려 아니 후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실리추구를 하는 면이 강했는데 중기에 들어서면서 유학이란 학문을 변질적인 유교로 받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유교로 포장하는 것도 실은 불완전한 후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죠.
그래서 백성과 현실을 도외시한 채 양반만의 정치, 체면과 허위허례의식의 유교로 똘똘 뭉쳐 종국에는 국방력을 모두 말아먹고 외세에 침입에 쉬이 당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몇 가지 더 인용하면서 말하겠습니다.

단일민족론의 기원은 근세조선 유교 쥐나사대주의에 비롯합니다.
단일민족이론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은 근세조선조 이후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죠.
‘조선왕 독살사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등의 저자인 역사 연구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씨는 ‘소쥐나’ 사상에 경도된 유학자들을 단일민족이론의 시초로 꼽습니다.
이씨는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쥐나와 일체화하기 위해 같은 민족이었던 동이, 몽골, 만주족을 오랑캐로 내몰았다”면서 “민족 개념이라는 것도, 봉건시대에서 통일국가로 이행했던 유럽이나, 왜국의 경우에는 맞아 떨어질지 몰라도, 나라의 개념이 하나뿐이었던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단군신화를 순수혈통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한 조상이라고 해도, 여러 지류가 흘러 큰 물을 이루는 넓은 개념으로 해석하면 다문화, 다민족 사회를 가로막는 요소로 보기 힘들다”고 덧붙였습니다.

 

고대에 이미 배달겨레가 크게 동이계,흉노계,융족계로 나누어집니다.
이들이 서로 다시 여러 민족으로 갈라지며 합쳐지는 등의 변천을 거듭했죠.
곧 우린 이미 배달겨레의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입니다.
그래서 단일민족이니 뭐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서양인들이 헛소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죠.
더욱이 그들의 혼혈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 지배로 통한 것이니...
더군다나 그들의 현사회에서도 오히려 인종차별이나 민족차별이 심하면 심했지 못 하진 않죠.
지들 주제도 모르면서 남에게 뭐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거죠!

그리고 유엔에서 한국의 민족 운운하는 헛소리들은 정확히는 유럽에서의 논란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입니다.

본인은 외국의 사례인 스킨헤드, 시오니즘, 네오나치, KKK단 등은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표리 부동한 그들에 대해서 비판은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이 왜 다인종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관용(똘레랑스 ㅗ 먹이셈)따위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제국주의 시대에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끌고온 것이었으며, 2차대전 이후 경제성장에 있어 3D업종에 종사시킬 사람들을 충당하기 위해 그나마 연관성이 있는 식민지인들을 데려온게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신생아 출생 감소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그것으로 인해 다원사회를 이룩하였으면서, 그들이 본질적으로 관용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을뿐입니다.

 

어차피 한국도 20년내 고려인 역이주.
50년내 타국민 이민을 받아들여 인구수 8000만 유지해야만 하는 �가 옵니다.
통일한국이 되면 더욱 가속화되겠죠.
순리가 그러니까 제발 먼저 설레발 치지 않길 바랄뿐입니다.
그 잘나신 프랑스도 타인종 관리 못해서 폭동이나 일어나게 만드는 주제에, 자신들이나 잘 관리하길 충고할 뿐입니다!
똘레랑스 좋아하고 자빠졌다. {-_-}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시작해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죠.
하지만 중세시대의 미쳐버린 종교때문에 건축기법 중 시멘트공법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암울한 시대죠
하지만 아랍의 문명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를 이루어 과거의 학문,문화 등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하죠.
세계최초의 종합병원이나 도서관 아라비아 숫자 등 뛰어난 동양 아랍문명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죠.
하물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의 여러 고대 저서 등이 아랍의 도서관에 보관되지 않았다면 아마 서양의 문명은 벌써 사장되어 한참이후에나 다시 발전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EBS교육방송에 방영된 BBC역사관련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나왔던 내용입니다.


한웅배달국부터 시작하여 고구려,발해까지 위대한 선조들이 이룬 업적을 짱골라에게 우리 조상까지 다 빼앗기고 역사마저 빼앗기게 만든 그 후손이 못 나서 그렇지 그 조상이 못난 것은 아니죠. 아무리 뛰어나도 그 후손이 못 나면 아무 소용없죠.
우리의 전례뿐만 아니라 잉카,마야,캄보디아의 크메르, 인도의 여러 문명,종교때문에 모든 발전이 거의 정체되게 된 근동,중동의 아랍문명 등등...
서양 역시 마찬가지죠. 동양의 문명이 없었으면 다시 르네상스를 일으키지도 못 했죠.

또 회계제도는 우리나라도 개성상단의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훌륭한 복식부기법이 예전부터 사용되어왔고 시스템도 현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숫자는 한웅배달시대에는 산목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산대 등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 근세조선에 들어서는 쥐나의 숫자나 조선산이라는 고유숫자도 사용했습니다.
물론 숫자표현체계는 아라비아숫자가 더 쓰기 편한듯 싶습니다
이 우리부기법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있어 1910년대 오스트리아 경영학회에 보고되어 고려의 회계시스템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왜국의 학자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당시 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 나라의 상황때문에 묻히게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 대한 앞선 사용 또한 마찬가지죠.


참고로 서양이 동양을 서서히 따라붙다가 17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분야의 발전 에서 조금씩 추월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양이 세계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배경 중 자연의 영향도 큽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은 소빙하기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최북단에 있던 영국은 식량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 상공업을 장려시키고 과학을 위시한 학문을 공부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컸죠.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전세계에 미국,호주,뉴질랜드 등의 영연방이 생기게 된 기저가 되죠.

솔직히 서양인들이 배가 부른 때라 해 봤자 기껏 '그리스, 로마시대'와 '산업혁명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300년 정도'입니다.
이를 제외하면 수천년동안 아랍과 동아시아 등 동양의 지배에 있었던 야만인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는 실증주의와 과학 등을 믿으며 전적으로 학문은 공정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현재 많은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사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문은 정체된 것이 아닙니다.

연구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업데이트가 되는 것입니다. 일례로 우리 주변의 과학발달의 결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짱골라들이 유적조사 등을 못 하도록 무수한 방해로 인해 전세계 학자들이 동아시아 고대문명에 대해 연구 진행이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진실을 밝혀내는 학자들이 그나마 역사적 사실을 조금씩이나마 밝혀낸 것도 대단한 것이죠.
허구의 종족 짱골라 그들이 그렇게 남의 조상,발견발명,역사 등을 빼앗으려는 서북,서남,동북공정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허구를 가리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약탈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입니다.

 

이옥순, 이종득, 이태주, 이평래, 이희수, 조흥국, 한건수 등 많은 대학교수들이 함께 저술한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란 책을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이 편견,오류였는지 자기검증도 할 수 있어 유익할 것 같습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들. 매일 하는 것이라고는 남의 것 훔치는 것 밖에 없으니....
짱골라들은 한국의 수도 서울을 지금도 공공연히 한성이라 하며 무시합니다.

서울시가 서울의 쥐나어 표기를 '한청'(漢城)에서 '서우얼(首爾)'로 바꿨지만 쥐나쪽은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지들끼리 공공연히 한성이라 합니다.
‘서울’의 쥐나어 표기 ‘首爾(서우얼)’이 쥐나어로 ‘서우얼’로 발음돼 ‘서울’과 비슷한 데다 ‘首’가 수도를 뜻하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지만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 쥐나어 발음이 ‘서울’과 좀 닮았긴 하나 우리의 한자어 발음으로는 ‘수이’일 뿐입니다. 또 ‘首’가 수도의 의미를 풍기긴 하나 ‘爾’는 쥐나에선 변방 지명에 주로 사용되는 글자입니다. 쥐나의 서북쪽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와 동북쪽 하얼빈(哈爾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금 쥐나가 고구려를 쥐나의 변방 역사에 편입하는 동북공정과 티벳과 신장 등의 여러 소수민족들을 살육하며 서북,서남공정을 추진하고 거의 끝나가는 마당에 우리가 자진해 쥐나의 변방임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소수의 의견이라서 진실이 아니다란 식으로 말하는데, 진실이 다수결로 이루어집니까???

그렇게 따지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 자체가 처음부터 진실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거짓을 부르짖은 것이었군요.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세뇌된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무턱대고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놈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의지조차도 없으면서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들 역시 나와 같은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여전히 활개치는 몇몇 식민사관학자들때문에 많은 선량한 강단학자들마저도 도매급으로 욕 먹게 됩니다.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강단학자들이 왜 일반인들에게 식민사관학자로 엉뚱한 오해를 받아야 합니까.....
식민사관학자와 강단학자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그리고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을 저술한 우실하씨 등을 비롯 몇몇 교수분들이 우리 동아시아 역사를 한국,몽골,일본,쥐나,티벳,위구르,중앙아시아 등 모든 민족이 함께 공유하는 동북아시아 시원을 밝하려 했지만 쥐나의 서남,서북,동북공정으로 거의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학자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쥐나 공산당 정부의 충실한 개노릇을 하는 짱골라학자들에게 뭘 바랄 수 있겠습니까만....

솔직히 실제의 종족인 배달겨레의 조상,발견발명,유산,업적들이 허구의 종족 짱골라에게 눈 뻔히 뜨고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기가 찰 일입니다.

 

부디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모든 것에 공정한 시선으로 봤으면 합니다. 그것이 소수의 학설이든 다수의 학설이든지간에 말입니다.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에는 수가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진실이 다수결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다수의 학설은 무조건 옳고 소수의 학설은 틀리다란 생각을 고쳤으면 합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학설도 처음에는 소수의 주장으로 시작했지만 종교시대에 억압받고 있던 무지몽매한 어리석은 다수를 결국에는 진실로써 일깨웠지 않습니까.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지금이야 상식으로 알지만 발견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그리스신화의 일부로 봤었죠. 그래도 슐리만은 다행이었습니다. 트로이유적을 조사한다고 누가 방해하지는 않았으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거 우리의 터전이었던 만주,몽골,연해주,중원 등에 있는 유적들을 조사하려 해도 짱골라들의 방해가 너무나 극심하죠. 있던 사서나 사료도 오랜 세월 동안 전부 왜놈이나 짱골라들이 훔쳐가거나 훼손했고..... 왜제시대 35년동안 우리의 20만권의 사서들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압수되고 불태워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 때 목록을 보면 대부분 20세기 초반 저서들이 대부분이죠. 다만 우리의 진짜 사서들은 모두 교묘히 빼돌려 왜왕실이나 혹은 일본대학도서관 등에 잠들어있습니다. 왜제시대 35년뿐입니까? 그 이전 임진왜란이나 수많은 왜구들의 침략으로 도자기,서적,장인 등 사람,물건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것을 약탈했습니다. 사서를 통해 연구하려 해도 짱골라와 왜놈들이 숨기고 안 보여주니 더더욱 답답할 뿐이죠. 왜왕실에 수많은 우리 사서들이 숨겨져있는 것에 대한 신문기사자료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과학이 발달하고 깨인 강단학자들이 많이 늘어서 다행이지만 아직도 우리 역사를 찾으려는 길은 멀기만 합니다. 과거 2~30년전만 해도 식민사관학자들의 폐해가 컸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암운이 아직 걷혀지지 않고 있지만 뭐 뉴라이트가 버젓이 이명박을 앞세워 더더욱 극성을 부리는 시대니.....

 

역사를 밝혀나가는데는 역사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딸랑 사서만 보고 밝혀내는 것도 아니고요.....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사회학, 천문학, 생물학, 화학, 지질학, 지리학 등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을 비롯한 수많은 관련분야 교수나 박사들이 함께 연구하며 진행되는 일이 많습니다.
"몇몇 이들은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문명과 역사를 판단하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하고 짧은 생각입니다.
문명과 기후, 지형 변화 등 다각도로 그 상황에서의 여러 관계들을 함께 끌어들여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과거의 땅이었던 것이 지금은 바다로 되어 있는 것도 많고 또 이전에는 초원지대가 지금에 와서는 사막이 된 자역도 많죠.
한마디로 오판하는 그들은 지구의 환경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따라서 지구의 환경변화를 중심으로 문명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재차 당부하지만 유적발굴이나 역사를 알아가는데는 역사학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 등 관련성 있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동원됩니다.
그 유물, 유적에서 나온 물질들을 분석도 해야 하는 등 여러 일들이 상호관련되어 진행되는 것이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방관적인 태도랑 중립적인 태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기 위해 중립적이면서도 공정한 태도는 학자들뿐만이 아닌 기자,판사,일반인 등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당연한 행동인 것입니다.
역사란 현실의 거울이요 미래의 지표라고 합니다.
진실되고 확실한 역사관정립은 분명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우리 미래의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일반인들에게도 공정함이 필요하지만 학자들에게는 더욱 엄격히 지켜져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분야의 학자가 되었든지 말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 한성백제시기 같은 경우 위례성의 위치에 관련하여 '몽촌토성이다 아니다... 풍납토성이다'라고 설전이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몽촌토성이 자료와 논거가 더 확실하여 풍납토성이라는 주장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자료가 더 발굴되면서 풍납토성이 현재는 다수설이죠. 이처럼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학문은 업데이트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는것이 아니라는겁니다.

여러 교수들과 함께 코리안루트 탐사원정으로 고대유적과 그 문명들을 파헤치고 있는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풍납토성의 발굴에 참여했던 학자입니다. 그리고 최근 그는 홍산문명과 요하문명 등에 관한 탐사자료 일부(코리안루트를 찾아서)를 경향신문을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

 

 

 

-참 고 자 료 - 

 

국내외 신문, 방송 자료

국내외 과학기관 자료

KBS 역사스페셜, KBS일요스페셜, SBS, MBC, EBS, 히스토리채널, BBC,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여러 영상자료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 풀빛, 2001.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최몽룡 외, 주류성, 2004
「고조선, '역사'의 발자취를 찾았다」, 박종진, 주간한국, 2007.3.6
「청동기 주역 ‘퉁구스 예맥족’이 주역」, 유홍준, 문화일보, 2004.11.25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한국 지석묘 연구』, 유태용, 도서출판 주류성, 2003
「고인돌 왕궁-고조선」, 『역사스페셜 4』, 효형출판, 2003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유산』, 제주국립박물관, 2005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한국 지석묘 연구』, 유태용, 도서출판 주류성, 2003
「평양일대에서 새로 발굴된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에 대하여」, 석광준, 『조선고고연구』, 1995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지석묘는 무엇을 말하는가?」, 유태용, 『대한문화재신문』 제16호, 2004년 7월 15일
「고조선의 석각천문도」, 김동일, 조선고고연구, 2003년 1호
「고인돌 무덤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 추정에 대하여」, 김동일 외, 조선고고연구, 1999년 4호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렬되어 있는 구서리고인돌무덤 발굴보고」, 김동일, 조선고고학학회, 2005년 3호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박창범, 김영사, 2002
「고인돌 무덤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 추정에 대하여」, 김동일 외, 조선고고연구, 1999년 4호
「대동강 류역 고대성곽의 성격」, 남일룡, 조선고고학학회, 1999년 1호
「청암동 토성에 대하여」, 남일룡 외, 조선고고학학회, 1998년 2호
「평양지방의 고대 토성」, 남일룡, 조선고고학학회, 1995년 2호
「평양 일대 고대 토성의 축조연대에 대하여」,남일룡, 조선고고학학회, 1996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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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토막상식~~~~~~~~

 

 

배달 흉노계에서 선비, 돌궐(투르크), 거란, 몽골족 등이 분파됩니다.
돌궐(투르크)족에서 분파된 것이 지금의 터키와 신강 자치구의 위구르족입니다.
유럽의 대제국을 건국한 아틸라의 서흉노족 후예가 지금의 헝가리입니다.

 

배달 융족계와 흉노계의 혼혈이 현재 티벳의 장(강)족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입니다.
반면에 광서성의 장족은 옛백제의 후예입니다.

 

배달 동이계는 중원대륙과 동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 왜열도 등의 지역에서 우이(嵎夷), 회이(淮夷), 도이(島夷), 내이(萊夷), 서융(西戎)으로 혹은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 예족, 맥족, 숙신, 부여족, 말갈족 등으로 분파됩니다.
갑골문으로 유명한 상(은)나라의 후예가 지금의 묘족입니다.
북부여, 졸본부여(고구려), 대진국(발해) 후예들인 금나라와 청나라(후금)는 배달 부여계 말갈(여진)족의 왕조입니다.
고구려,발해의 백성이었던 배달계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이것 역시도 짱골라들이 고구려,발해 후예인 그들 배달계 말갈족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대놈, 땟놈 >> 대국이란 말에서 나온 말로, 이 용어를 쓰면 짱골라를 오히려 큰 사람, 큰 나라사람 하며 칭찬하는 꼴이 됩니다.

짱개 >> 계산대란 말로 영어로 번역하면 프론트, 즉 이 말을 쓰면 짱골라를 주인장이라 부르는 꼴이 됩니다.

짱골라 >> (썩을 장, 장례 장) (뼈 골) 즉 장골라란 말에 강세가 붙은 말로서 해석하면 '썩은 냄새나는 좀비같은 버러지'란 뜻.
바퀴벌레 족속들에게는 짱골라란 말도 과하죠.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씻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에게 나는 냄새가 고약하죠. 세계인들이 질겁을 합니다.

쪽바리 >> 왜놈들이 신는 버선이 돼지발을 닮았다 하여 족발이,쪽발이,쪽바리로 변음된 것입니다.

물론 더러운 돼지와 연관시켜 부정의 의미도 함께 담겨 있죠.

짱골라가 과거 주변 여러 나라들이 자기의 연호를 쓴다고 자신들의 속국이라 억지를 부리는데, 실지로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며 오히려 짱골라들이 배달계왕조들의 지배에 있었고 혹은 속국으로 살아간 노예종족입니다.

(실지로 짱골라족 자체가 허구의 개념입니다. 조작,날조를 시작하면서 허구의 종족을 내세운 것에 불과합니다.)

서력 2007년 10월 14일 현재, 짱골라는 서력을 쓰니 서양의 속국이군......

 

 

 

'배달 한겨레'에 대해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똘똘 뭉친 짱골라들....

 

그들의 무뇌무개념탑재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매일 끊임없이 자행되는 짱골라들의 엽기적인 소식들.

무조건 우기면 다 되는 줄 아는 억지의 대명사!

세계 모든 사람들은 바퀴벌레같은 짱골라들을 보며 그저 비웃음만 흘릴 뿐이다.

 

 

 

 

과거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고대 로마의 영광이 컸다고 본다.

 

허구의 종족 쥐나 짱골라는 '서남, 서북, 동북공정'으로 

 

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 신강, 티베트 등 배달겨레들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한다.

 

우리는 거짓인 지도 모르고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외부로부터 이식된 고정관념에 벗어나서 그 진실을 보려 해야 한다!

많이 알수록 끊임없이 노력할 수록

 

유럽의 변방에 불과한 독일이 일어났듯이.

징기스칸이 세계 대제국을 건설했듯이.

왜놈들이 강대국에 올라섰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다시 한웅배달국이나 단군조선국 같은 거대한 제국으로 다시 거듭나지 않을까....

흥망성쇠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

다시 우리가 다물하여 세계가 자랑하는 팍스 코리아나 시대를 열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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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선박)의 역사], [역사스페셜 - 고구려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다, 광개토...], [역사스페셜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졸본부여(고구려) 음악 대탐사],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 [왜국의 역사조작 실태], 

[주몽은 한나라를 몰랐을 수도 있다], [요동,요서,한사군 등 고대 지명 자료를 통한 '고구려 ...], 

[신완순 "중국은 애초부터 실체가 없었다!"],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동영상)], [대진국(발해)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옥저·발해 온돌 발견], [한민족사의 일부 '대진국(발해)' >>> 동영상...], [졸본부여(고구려)의 후예 '대진국(발해)'],

[발해 화폐로 추정되는 금화 첫 공개],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5],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6 ~ 9],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0 ~ 12],

['대조영의 땅' 아무르江 유역에서 발해유물 발견], [한반도는 공룡의 ‘에덴동산’], [공룡들의 무덤, 몽골의 고비사막],

[한국공룡, 천년부경룡(Pukyongosaurus)], [한국의 공룡, 울트라사우루스(Ultrasaurus)],

[한국의 공룡, 코리아나사우루스(Koreanosaurus)], [한국의 공룡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를 지은 한국],

[세계최초의 신석기가 한국에서 발견], [한국 전곡리 유적 30만∼35만년 전 것 - 네안데르탈인보...],

[한반도-만주 8천년 전에도 동일문화권 입증], [빙하기 바이칼에 한민족이 살았나], [세계 最古목선 발견],

[英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최소 2600년전 '절구공이'와 '농사용 인공 저수지' 발...], [중세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 나라 지도의 역사 그리고 김정호], [4대 발명품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 모두 쥐나 짱...], [쥐나(중화)사상과 쥐나족(한족)],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주변국들이 인식했던 제국 졸본부여(고구려)],  

["요, 금, 원, 청은 중국사 아니다. 여진(만주)족...], [동양과 서양에 걸친 역사, 또다른 배달겨레의 후예 터...], 

[배달 흉노계 돌궐족의 역사], [우리의 형제 터키(펌글)], [만주쥬신(삼전도의 진실)], [왜열도쥬신], [홍윤기의 역사기행], [몽골쥬신],

[고구려,발해의 또다른 후예 '금나라'], [삼별초가 日류큐왕국 기초 세웠다], [배달민족의 한 갈래 훈족(서흉노)], 

[배달겨레 흉노계 몽골의 후예, 티무르 - 초원의 마지막 ...], [또다른 배달겨레 몽(묘)족의 아픔], 

[역사기행 - 신비의 산악왕국, 남조(南詔)], [김운회 교수의 '역사 바로 보기']를

 

/유물,유적,문화재/면에 있는 [토종 공룡화석 '천년부경룡' 드디어 일어섰다], [1억년 전 한국은 '벨로시랩터'의 사냥 무대였다],

[EBS 하나뿐인 지구 - 시간이 열리는 섬, 사도(공룡화석...], [함평에서 공룡시대 곤충화석 등 다량 발견],

[‘공룡의 무덤’ 몽골서 희귀 화석 쏟아졌다], [세계 고고학史 바꾼 한탄강변 '주먹도끼'], [평창 쌍굴유적서 구석기 유물 출토],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배달겨레 발해문명들 ! ! !],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첨단 측정기술 이용,中에 앞선 유리제조술 밝혀], 

[백제의 탁월한 유리문명 보고서], [나주 조개무지서 유리 工房 흔적], [북한 문화유산 시리즈4 - 고인돌 왕국 고조선],

[BC 7세기 철기유물 강원 홍천서 출토], [한반도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국내 最古 ‘7000년 전’ 토우 발굴], 

[“제천행사 무천은 고조선 풍속"], [세계 제패의 원동력, 한국류 순장바둑],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인가], 

[KBS 수요기획 - 알타이의 제왕 베르쿠치, 독수리 사냥...], [매사냥의 기원과 현황],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연해주 동해안에 고구려ㆍ발해계 성곽 집중&quo...], [우리의 '한지'가 오래 보존되는 이유], 

[어거지 쥐나 짱골라들, 도 넘은 한국 과학유물 왜곡], [팔만대장경은 발해대장경 계승한 것!],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장경각],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를

 

/정치,외교/면에 있는 ['짱골라들의 티벳에 관한 소수민족 정책'], [아직도 살아있는 군국주의 망령 - 쥐나의 티벳침략],

[국교단절 당시 한국과 대만], [몽골지도부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 한국에 제시], [그레이트 코리아]를

 

/음모,테러/면에 있는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대륙붕을 지켜라], [쥐나인민군, 北체제 붕괴시 북한에 파병 추진],  

[쥐나의 흑심 '이어도' (SBS뉴스추적 요약)], [짱골라들, 있지도 않은 암초 이어도해역에 표시], [티벳 독립운동과 쥐나의 압제],  

['동북공정', 북한 붕괴후 흡수통합 전략], [동북공정 역사왜곡 현장에 가다.], [MBC 다큐, 극우파 행동대장 후쿠모토의 약속]을

 

/우리말,국어/면에 있는 [KBS스페셜, 위대한 여정 한국어 3부작], [언어사적 측면에서 본 고구려어의 뿌리], [발해문자 해독 첫 시도],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한자는 우리 글이다],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중국'], [위대한 한글], [일본어의 비밀]을

 

/인물/면에 있는 [신채호....안타까운 현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최태영 박사],  

[주은래(周恩來:1898-1976) - 전 쥐나공산국 총리], [성삼제 교육부 지방교육재정담당관], [광개토태왕 & 연개소문],  

["양태진 “간도-녹둔도 영유권 포기해선 안 된다”...], [연개소문 - 내용 보강 (2007.08.08 에 올린 연개소문 ...],

[고구려 후예 재상 '왕모중'], [동양의 한니발 '고선지' ], [졸본부여(고구려)의 후예 '이정기 (본명 : 이회옥)'],

[대진국(발해) 3대 제왕 '대흠무'], [근세고려시대 비운의 왕 '충선왕'], [화약무기의 아버지 '최무선'],

[미스 고려 기황후, 대원제국을 장악하다!], ['세종'과 '정조' 리더쉽 스타일 비교], [역사스페셜 - 이 순 신 장군],

[다시 조명한다. 임금 광해군]을 

 

/촌철살인/면에 있는 [왜놈과 짱골라의 만행], [일제사진, 그 비밀과 거짓말], [순수한 漢族은 없다],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대규모 시위], ["소련처럼 망할 수도"... 극심한 '해체 공포...],

[‘한국 순혈주의’ 에 대한 서양의 오만과 무지], [이씨조선 금서목록], [모스크바서 고구려/독도 문제 관련 국제세미나 개최],

[배달겨레의 사상과 철학], ["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서울대 소광섭교수팀 “氣실체 주장한 ‘봉한학설’ 입증...], 

[우리가 배운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었다], [삼국지정사(역사서)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소설)의 허구...],

[TV사극 역사 오류·왜곡 심하다”]를

 

/지식창고(과학&생물 등)/면에 있는 [경락의 실체 ‘봉한계’ 그 비밀을 벗긴다], [24절기 및 10간과 12지], [MBC특집 다큐, 곰팡이],  

[위대한 발명품 '지게'와 '온돌'], [지구의 생성과 변천사 해부], [동양인들은 유전적으로 작은 키를 가졌는가?], 

[중세초기 인류의 키는 현재와 비슷해], [빙하기와 온난화], [소빙하기의 영향], [소행성 지구 충돌 시뮬레이션],

[한국 설날, 중국 설날 다른 해도 있다], [해상제국 백제(남부여) - '코끼리는 어디서 왔을까?'], [조선시대에도 UFO가 출현했다?],  

[조선시대, 최신식 어류백과사전이 있었다], [진주MBC, 약초전쟁]을

 

/자주국방다물, 밀리터리/면에 있는 [단군조선과 졸본부여(고구려)의 '무기'와 '성'], [고구려 군대의 편성체제],  

[근세고려시대 우리는 로켓을 쏘았다],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거북선 실물을 그린것으로 추정 - 美서 첫공개],

[거북선에 대해(펌글)], [세계 4대 해전과 이순신 장군], [한국의 核주권 “비핵화선언은 파기됐다, 우리도 농축하...],

[시대별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전력비교], [조선시대 환도 패용법], [배달겨레의 종가인 부여계 국가들이 동아시아를 제패했...],

[조선시대에도 비행기가 있었다?]를

 

/종교/면에 있는 [거짓으로 시작된 기독교의 한계], [크리스마스의 비밀과 동지], [이순신은 사탄...], [중세의 잔혹한 고문과 그 도구들]을

 

/나의 이야기/면에 있는 [대한제국 왕실복원??]을

 

/엽기,황당/면에 있는 [쥐나, '짝퉁' 들고 나섰다가 국제전시회서 망신], [中 광산.건설업자들, 고대 배달겨레문명 발상 유적지 ...],

[쥐나의 잔혹하고도 엽기적인 형벌]을

 

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메모 : 탕구르 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