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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가 신라김씨의 진짜 조상일까?

monocrop 2009. 1. 29. 14:10

김일제가 신라김씨의 진짜 조상일까?

 

글 : 솔본 / 2009-01-26

 

얼마전 이리저리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신라김씨의 조상이 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라는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이 주장을 근거로 KBS에서 다큐멘터리도 했더군요.
그런데 제가 좀 연구해 보니까 이건 좀 해도 해도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지식이 짧은 일반인들이 보면 좀 혹 하겠지만 잘 드려다 보면 엉망진창입니다.

저는 신라김씨가 흉노계였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신라의 문화는 유라시아적인 면모가 많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일제라는 역사적 인물이 신라김씨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얼토당토 않다는 생각입니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아들이고 그는 곽거병에 의해 포로가 되어
광무제의 말치기가 되었다가 무제의 암살위기를 방어함으로써 신임을 얻고
투후(秺侯), 곧 '투'라는 지방의 제후로 임명되었더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김일제는 나라를 잃고 무제의 노예가 되었다가 그의 목숨을 구한 댓가로 경호실장에 올랐고 그 덕으로 잘먹고

잘 살은 사람입니다.

신라김씨의 조상이 결국 광무제의 경호원출신이라는 이야기인데...
저는 뭐 그런 문제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우선 그러한 주장을 편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
이라는 분의 글 원문"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를 인용하며 검토해 봅니다.

우선 김씨는 신라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
이라는문장을 오독하면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로 해석합니다.
저는 도대체 이분이 한문을 공부한 분인가 싶습니다.

첫번째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의 해석을 문장대로 하면

"투후가 하늘에 제사지냄(祭天)이 이어져(胤) 전하길(傳) 일곱대(七葉)에 이르고..".

또는 "투후의 천제를 지내는 후손이 전하여 7대를 이르고"입니다.


胤은 자손이라는 뜻과 이어지다라는 두개의 뜻이 있습니다.
葉은 이파리라는 뜻외에 '세대'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만으로는 투후와 신라김씨간의 연결고리를 단정할 수없는데
대개 비문은 과거 역사의 이야기를 전거로 삼는 예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문무왕비문의 마모가 심해서 문장들을 서로 연결해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고
판독되는 부분만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김씨는 이 문장의 '투후'를 보고 감명받아 중국에 있다는 투후 김일제묘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죠.

오히려 중국에 가서 김일제의 이름을 '미티'(miti)라고 부른다며 오히려 의아해 하죠.

==> "일제의 묘는 현지에서 ‘미티(Miti)’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그가 누구인지 왜 이런 묘를 만들어 두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저는 그런 고백을 보고 그야말로 배꼽빠지게 웃었습니다.
미리 공부 좀 하고 가시지...
김일제와 김알지가 발음이 비슷했던 것에 흥분하셨다가 좀 실망스러웠나 봅니다.

김일제를 'MiTi'라고 하는 것은 선우를 일컫는 투르크어 '메테'(MeTe)의 변음입니다.

따라서 김일제의 日은 아마도 目자를 잘못 쓴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김알지하고 '김미티/킴메테'는 일단 발음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구요.

문무왕비문에는 '투후' 말고도 여러 이름들이 언급됩니다.

==>"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
④ 투후(?侯): B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위에 열거된 사람들이 문무왕의 조상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왜 모른답니까? 저는 금방 찾았는데..

더 가관인 것은,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화관지후는 순임금이 아니라  바로 불의 신 축융의 후예들로 彭(팽)씨를 비롯
8개의 성씨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좌구가 지은 국어(國語)에는
"火官祝融之后,八姓之一有彭姓" (화관축융지후,팔성씨 지일 유팽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8성씨는 :“祝融之后,八姓,己、董、彭、秃、女、斟、曹、芊,周灭之"죠
金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고요..

진백(秦伯)은 진의 목공이 맞고요
여기에 가주몽?이 등장하는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성한왕(星漢王)이 김일제의 4대손 김성이고
이 김성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죠.

김씨는 성한왕 김성과 김일제 사이에 놓인 가주몽(駕朱蒙)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안합니다. 살짝 건너뛰는 애교?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김일제의 아들이고 성한왕은 주몽의 아들인셈인데..

그렇다면 주몽은 고씨가 아니라 김주몽????

문무왕비에 주몽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위에 열거된 이름들은 문무왕의 치적을 찬양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인용한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업적을 문무왕에 비교하면서 문무왕을 그 반열에 놓으려는 것이지요.

결정적인 오류는 맨 처음 김씨가 지적한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
의 7대를 위에 열거된 사람들에 꽤맞춘 것입니다.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투후위로 화관지후, 진백,파경진씨 3대가 놓이는데 이게 어떻게 투후이후 7대라는 문장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문무왕비에 등장하는 이름들에 이어지는 문장들은 대개 이러할 것입니다.

화관지후(火官之后)는 황제의 덕을 만방에 펼쳐 세상을 이롭게 했고 진백(秦伯)은 지혜로운 자의 덕을 입어 진나라의 위상을 드높혔으며
파경진씨(派鯨津氏)는 ......했고
투후(?侯)의 천제는 7대를 전해왔다. (그 만큼 하늘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주몽(朱蒙)이 마한을 세운이래...(당시 고구려를 마한으로 인식했음)
성한왕(?)으로부터 삼한을 지켜내고
문무왕에 이르러 ......하였도다.

그러나 저러나 혹시 김씨는 중국과 한국에 金이라는 성이 김일제가 최초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김일제에게 金이라는 성을 하사한 무제, 그의 어머니가 바로 김씨였지요.
그녀의 이름은 Jin Wangsun (金王孫) 이었는데 무제를 낳기전에 이미 평민과 한번 결혼했던 여자였고 무제와는 배다른 딸들이 있었지요.

김씨는 소호금천으로부터 비롯된 성씨가 맞습니다.
그것은 동이족계열의 성씨였구요..
김일제와 김알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성이 박씨였던 알지 거서간, 그리고 김알지의 알지는 아마도 alchi라는 흉노계 종족의 칭호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것은 '뛰어난, 독보적인'이런 뜻이랍니다.

아울러 우리 성 金은 소벌(蘇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소벌蘇伐은 금을 뜻하는 흉노계 언어인데 金을 자신의 종족표시로 했던 suvar 족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신라의 소벌공이 제일 먼저 박혁거세의 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신라6촌 중 소벌씨가 가장 상위였는데 박씨라는 외래세력에 눌렸다가 후에 권력을 잡으면서  소벌가문이 金을 칭했다고 생각되는군요.

사실 박씨는 Bagh이라는 흉노계 투르크어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영웅,군주라는 뜻이죠.

적어도 우리 신라조상님이 지나 임금의 말치기에서 경비원으로 승진한 따까리출신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무왕비에 '소호금천'이라는 문구가 단 한 줄이라도 등장한답니까?
저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 같던데...

혹시 화관지후(火官之后)를 소호로? 에이 설마...
배울만큼 배운 분들이...그런..


-솔본-






돌비 (2009-01-27 10:22:32)  

솔본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화관지후 ~ 문무왕까지의 해박한 선생님의 견해에 대해서도 일반인으로서 한수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 자구의 해석은 어찌 되었던 왜 하필이면 문무왕비에

중국 귀퉁이의 한 제후에 불과한 투후를 언급했을까요?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말치기하다 경호실장에 이르는 한마디로 따까리가 왜 문무왕비에 등장할까요?

요즘 인터넷을 읽다보면 저도 와전된 지식을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추적 방송이후 잘못 이해하여 마치 투후 김일제 본인이

직접 신라로 온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투후’ 자체가 하나의 역사추적의 코드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로 이주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왕망의 난에 연루되어...) 김일제는 따까리에서 경호실장으로 최후에는 제후가 됩니다. 이주해온 것은 제후의 후손들이란 말이지요!
더 이상 따까리는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 사서에서 보이듯 초기 신라는 제손으로 사신 하나 꾸미지 못해 백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작은 부족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전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지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사서나 자구의 해석 이외에 몇가지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일제의 후손은 김왕망의 난에 연루되었다가 도태되어 도피한 정치집단의 이주로 봅니다.

왕망의 신나라는 몇십년 지속되지 못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왕망전(화천)이 신라, 가야, 일본지역에서 발굴됩니다.

이런 동전은 역사의 시기를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아닙니까? 먼 이역 땅인 신나라에서 잠시 쓰였던 화폐가

신라지역 등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꼭 김일제 후손이 아니더라도 이미 신나라와 신라간에 누군가는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뜻이죠!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투후지역에서 신라 땅으로 이주는 해상루트였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상루트도 나중에는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는 동복(청동솥)입니다. 왜 기마민족의 상징인 동복이 신라고분에서 출토되었을까요?
요즘말로 동복은 유목민의 이동시 캠핑도구입니다. 김일제의 후손은 누굽니까? 한때 한나라도 정벌했던 휴도왕의 후손입니다.

전형적인 기마민족인 동이인의 후손이죠! 이 코드를 신라에 와서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이를 이용한 집단이 화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지금도 투국지역에 金鄕이 있는데 이곳이 금성이었답니다. 신라의 경주가 금성이죠! 지역의 명칭 일치가

단순한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보통 이주민들은 자기의 고향을 칭한 이름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박씨 석씨로 시작된 신라가 어느 정도 경과하자 김씨로 성갈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주한 김씨 세력이 처음부터 권력을 잡지는 못한거로 보입니다. 여러부족간의 이해관계가 맞추고 세력을 규합하며

17대 내물왕에야 비로소 김씨 왕조를 시작합니다. 특히 가야지역의 병합이 신라의 큰 힘이 됩니다.

(여기서 저의 조상 창녕 曺씨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음에 기회에...)

제 생각에 김알지는 알지> 알치> 알티 > 알타이 결국 ‘金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성한왕은 ‘김알지의 아들 세한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부터 금장식 등 이것 저것 금을 쓰는 사람들의 집단 이주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솔본 선생님의 견해에 대하여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솔본 (2009-01-27 14:24:36)  
문제는 문무왕비에 기록된 명문의 전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어휘들을
신라김씨조상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왕망전의 신라시대 출토는 교역의 정황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동복의 출토 역시
그것이 증거는 되기 어렵죠. 예를들면 신라 호우총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신라의 금성은 金을 수바르(suvar)라고 불렀던 흉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제가 이미
Suvar=> 소벌>서벌과 같은 맥락에서 말씀드릴 수 있고요..
이는 소벌공파가 주도했던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라 봅니다.

그것이 김일제와 어떤 관계냐는 것은 지금 미국의 주류를 이루는 앵글로잭슨족 가운데
누가 이민의 주인공이었느냐는 질문과 다를 바 없는거죠.

신라초기에 김씨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님의 추정은 저와 같습니다.

알지=알치=알티=알타이의 동원관계는 충분히 의미있습니다.
다만 김일제는 당시에 미티(MiTi)라고 불렸는데 이와는 관계가 없죠.

결론적으로 저는 대륙의 흉노계가 김씨의 조상일 것이라는 심증에는 찬성합니다.
사실 박혁거세조차도 기미민족의 이주와 관계가 깊다고 봅니다.

실제로 예니세이어중에 케트어족의 단어에는 우리 고대사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가능성이 많은 어휘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흉노어의 근간으로 이 예니세이 케트어를 지목하는 학자들도 있죠.

케트어로 버커커지 (berkekeji)는 통치자(Ruler)를 의미하고 Senang은
샤먼적 존재 즉 우리말로 서낭/성황을 뜻합니다.


-솔본-
솔본 (2009-01-27 14:33:29)  
이어서.. 사실 제 심증은 대륙의 흉노나 신라김씨,박씨 모두 한 공동체로부터
분기되었다고 봅니다. 다만 신라의 역사가 흉노보다 후대이기 때문에 흉노가 신라의
조상이거니 할 뿐이죠.

삼국사기에는 신라를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고조선과 그 이전의 정치공동체로부터 흉노-선비-고구려-신라등이
분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솔본 (2009-01-27 14:45:31)  
아..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출자되었으니 당연히 상대에 포함되겠죠.^^;
大東民族史 (2009-01-27 19:31:24)  

KBS 역사추적에도 거론되었던 부분이군요. 그렇다면 신라의 김씨 왕족이 고구려, 백제 사람들과 언어가 달랐다는 문헌 기록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옳을까요?

솔본 (2009-01-27 20:42:25)  
大東民族史 / 음.. 신라김씨 왕족이 고구려,백제와 언어가 달랐다... 그런 문헌기록이 있던가요?
전 금시초문인데...

혹시 '신라의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후 중국과 통했다'라는 기록을 말씀하시는가 보군요...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오히려 신라와 백제의 언어가 같았기 때문에 신라는 중국에 통역해 줄
백제사신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대구사람이 중국에 가서 상담을 하려하는데 중국어를 모르는 관계로
광주사람이 통역을 해 준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그럼 광주 사람과 대구사람은 당연히 말이 통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