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묻혀있던 광개토태왕비가 처음 발견된것은 1880년경 일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후, 1882년 첫 탁본이 떠져서 이듬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일본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5년 동안
내로라하는 일본내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연구케하여 변조작 작업을 진행한다.
이렇게 태왕비가 일제에 의해 변조작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접어두고, 이 비의 발견으로 현재와 같이 장군총,또는 장수왕릉이라고 부르게 된것인데 이 동북대륙 최고, 최대의 능은 비를 발견하기
이전엔 뭐라고 불렀을까?
흔히, 실록등에서도 이 능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더우기 청의 봉금지역내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에 비가 발견되기 전 까지는 누구의 무덤인지 조차 몰랐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능의 존재가 18c-19c의 조선이 관찬한 여러 고지도에 "황제묘" "황제릉(皇帝陵)"이라고 표기했었던 사실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황제릉이라 표기한 가장 이른시기는 1706년 관찬한 '요계관방도'에서 보인다.
18c 전기 경에 제작된 해동지도집의 평안도 강계군 지도와 조선여진분계도에도 표기되어 있고
( 이점은 일전에 게시한 서양고지도상의 평안도 경계가 현재보다 훨씬 북쪽으로 그려진것과 일치한다.)이후 19c 초엽까지 편찬된 여지도,광여도,지승등의 여러 지도집에 각기 수록된 '조선여진분계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이런 여러 표기들은 '皇帝陵'과 함께 '皇帝坪'을 표기하고 있는데, 이 황제평을 국내성터로 보는 서길수 교수의 견해에는 동의 하지 않는다.
황제평이란 일전 솟대님이 보신데로 황제릉을 관리하는 집단이나 지역민에 내려진 경작지역을 말하는 것이라 봄이 옳을 것이다.
19c 전기 편찬된 '광여도'집의 조선여진양국경계도 일부 (규장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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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조선의 입장에서 황제라는 칭호는 함부로 갖다 붙힐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조선말의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와 더불어 조선조의 2대국치이며 삼전도비로 대표되는 병자국치(병자호란,1639년)를 겪고 난 조선이 관에서 편찬한 지도집에 "황제릉"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은 만주왕조인
청(淸)도 그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이 된다.
비록 조선이 누구의 능인지도 몰랐고 중원까지를 장악한 청왕조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그와같이 표기
했다고 하더라도 만주왕조인 청이 옛 부터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든 규모의 측면에 의한 것이든 "황제릉"이라는 것를 인정했기에 여러 지도상에도 표기될 수 있었던 것이고, 현재 장수왕릉이라 부르는 대총은 적어도 조-청 시대엔 '황제릉'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청이 이 대총을 황제급의 능이라 보고 황제릉이라 칭했다면, 동북대륙에서 그들 자신이 황제라 부를 만한 존재가 누구일까 정도는 생각해 봤을 것이다하는 결론에 이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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