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일본기(續日本記)는 헤이안(平安)시대 초기인 연력(延曆) 16년(797)에 전 40권으로 완성된 고대일본의 칙찬(勅撰) 편년체 정사(正史)로 문무천황(文武天皇) 원년(697) 이래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 10년(791)까지 95년간의 역사를 다룬다.
이 사서가 서술 대상으로 삼은 시기에 한반도에는 신라가, 그 북쪽 일대에는 발해가 군림하면서 각각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다. 그런 까닭에 속일본기에는 그런 사정을 담은 기록이 외려 국내 기록보다 많다.
한데 속일본기는 시종일관 발해(渤海)를 ’발해군’(渤海郡)이라 부르면서 대조영에게서 뿌리를 두는 그 국왕 또한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지칭한다. 이곳 권10 신구(神龜) 4년(727) 12월 병신일(丙申日) 조에는 일본 조정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발해군이란 곳은 옛날의 고려국(고구려국)이다”이라고 말한 대목이 그 대표적 보기다.
740년 정월 1일. 이진몽(已珍蒙)이 이끄는 발해사신단이 일본 천황이 주재한 조회에 참석했다. 속일본기 권13 천평(天平) 12년 춘정월(春正月) 무자삭(戊子朔) 조에는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천황이 대극전(大極殿. 태극전)에 임하시어 조하(朝賀. 신년 조회)를 받았다. 발해군 사신(渤海郡使)과 신라학어(新羅學語) 등도 함께 참석했다.”(天皇御大極殿受朝賀. 渤海郡使新羅學語等同亦在列)
고구려연구재단을 흡수하면서 출범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발해통사로 기획해 최근 완성한 단행본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서 집필진 22명 중 한 명인 고광의 재단 부연구위원은 속일본기 이 대목을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증거로 본다.
그에 의하면,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학생이며, 이런 그가 신년 조회에 발해사신과 나란히 선 이유는 발해사신 말을 통역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어와 발해어는 소통가능했으며, 이런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발해사 전반을 다루고자 한 이번 성과물에 대해 동북아재단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 측 연구성과를 비판하면서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재단은 이와 같은 중국의 발해사 인식이 만주 출신 중국의 역사학자 김육불(1887-1962)이 1935년에 완성한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이라는 저술에 뿌리가 있다고 보면서, 그 비판에 주력했다.
이번 단행본은 ▲당 중심 국제환경이 조성돼 있었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책봉은 주변 왕조에 대한 외교적 승인 행위에 지나지 않고 ▲발해는 독자연호와 시호를 사용하고 자국왕을 황상(皇上)으로 칭한 ’황제국’이란 점 등으로 볼 때 중국학계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강조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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