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사관의 백제>와 <대륙사관의 백제> 통합은 고대사학계의 과제 !!(4)
한반도백제와 중원대륙백제 (4) : 조국 백제의 재인식을 향하여
임승국
중국사필의 위장기록(僞裝記錄)의 例
이제 이런 이런 위장기록(僞裝記錄)들을 열거해 본다.
初夫餘居干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而不設備 燕王皝 遣世子儁 帥慕容軍 慕容恪 慕容根 三將軍 萬七千騎 襲夫餘 儁居中指 授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자치통감 孝宗穆皇帝 永和二年]
이 기사를 평(評)한 「역사과학」(1967년•제3호•PP•51)『중국 요서지방(遼西地方)에 있었던 백제의 군(郡)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 기록은 346년 이전에 요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세력이 독자적인 정치•군사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고 하였다. 주지하는대로「역사과학」은 북한발행의 학술지이다.
(해석)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만주농안지방(滿洲農安地方)]에 있었는데 백제에게 침략을 당하여 부락이 쇠산(衰散)해졌다. 그래서 서쪽으로 연나라 근처로 옮겨 아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5호(五胡)•16국(十六國) 전연(前燕)의 1대왕(一代王)인 모용황(297~348, 재위 333~348)은 세자(世子) 모용준을 파견, 모용군•모용각•모용근 등 세장군을 통수케하여 만칠천기(萬七千騎)로써 부여를 습격했다. 모용준[세자(世子)]은 중지(中指)[중군(中軍)]에 위치하고 군사를 모두 모용각에게 수임(授任)하여 부여를 함락시키고 그 왕(王) 현(玄)[부여 현?]을 사로잡고 부락의 5만구(五萬口)를 사로잡아 환국(還國)했다. 모용황은 부여왕 玄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주어 처(妻)로 삼게하였다.』
만주농안지방(滿洲農安地方)에 있던 부여를 침략한 백제가 한반도•남단의 백제일 수는 없다. 때는 영화2년[346년 동진(東晉)]이니 前記「역사과학」의 논평은 옳다.
皝記室參軍封裕諫曰……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爲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使不得散在居人,知國之虛實. (晉書·109·모용황條)
『모용황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인 봉유(封裕)가 간(諫)하여 말하기를…
「구려(句麗)•백제(百濟) 우문(宇文)•단부(段部)의 백성들은 모두 그 세(兵勢)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 땅에 와서 살고 있으나 중국에 온 것이 그 의(義)를 사모하여서 온 이 아니니 모두 귀국코저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민호(民戶)가 10만에 이르렀는데 좁은 주(湊)의 도성에 살고 있으나 머지않아 국가를 위해서는 좋지 못한 일이 될 입니다. 마땅히 저들의 형제종속을 분리하여 서경(西境)의 여러 성(城)으로 옮겨 살게 하고 은혜로서 어루만지며 또 법으로써 이들을 다스리어 저들이 흩어져 살 수 없게 하고 저들로 하여금 나라의 허실을 알 수 없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장을 보고 좀 이상히 생각되는 것은 바로 위의 자치통감에서도 부여인 4만여구(四萬餘口)가 모용황에게 사로잡혀 간 기록이 있는데 구려•우문•단부와 함께 부여가 열거되지 않고 엉뚱하게 백제가 열거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모용황의 전적(戰績)을 보면 단씨(段氏)를 치고 략호5천호(掠戶五千戶) 고구려를 파하여 5만여구, 우문부를 멸하여 5만여구를 창려(昌黎)에 옮기고, 부여를 쳐서 3만여구를 포로로하고, 후조(後趙)를 쳐서 3만여가(三萬餘家)를 노략(虜掠)했다. 더욱이 부여인의 노략은 AD285년을 전후하여 왕성했으니 봉유가 부여를 빼고 백제를 든 것은 양자(兩者)가 동류(同類)이고 또 실제로 병거(竝居)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반도백제와 대륙백제의 둘로 대별된다. 그런데 이 두 백제의 왕래~교섭경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물론 육로(陸路)와 해로(海路) 두 가지였을 것이다. 백제의 건국초기에는 대방고지[금주지방(錦州地方)~산경(山京)~산해관(山海關)]에서 고구려의 서방을 차지하여 백제가 건국했다. 이 때는 오늘날의 요서~요동 및 한반도서해안에 걸쳐서 강역을 갖고 있던 마한의 한 부족국가로서 백제가 발족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사의 기록을 보면
『馬韓在西 辰韓在東 辯韓在辰韓之南 馬韓北與樂浪接則所轄在今蓋平復州寧海
辰韓北與濊接濊地卽夫餘境也 馬韓辯韓之南 皆與倭接……三韓在夫餘挹婁二國之南所統凡七十八國 合方四千里……』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卷八·강역(疆域)]
[(註) 삼국지ㆍ후한서ㆍ구당서ㆍ요사ㆍ금사지리지ㆍ통고(通考) 진서등 모든 기록을 종합한 것이 상기(上記)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기록이다.]
『마한은 서쪽에, 진한은 동쪽에,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 마한은 북쪽으로 낙랑(반도 평양이 아니고 요서 북평근처임)과 접한다면 그 관할하는 곳(마한의땅)은 오늘날의 개평(만주 요녕성 해성현의 서남), 복주[만주 요녕성 복현(復縣)의 치소(治所)], 녕해[만주 요녕성 금현(金縣)]가 된다. 진한은 북쪽으로 예(濊)와 접한다. 예(濊)의 땅은 즉 부여와의 경계(만주 농안 남쪽에서 길림사이)이다. 마한ㆍ변한의 남쪽은 모두 왜에 접한다.……삼한은 부여ㆍ읍루 2국의 남쪽에 있다. 78국을 거느리며 방(方)이 4천리에 이른다.』
한 마디로 마한은 북단(北端)이 낙랑에 접하고 남쪽은 왜(倭)에 접하고 방(方)이 4천리라 하였으니 한반도쪽에서 개평ㆍ복주ㆍ녕해등 요서지방(遼西地方)까지 뻗었다. 말하자면 마한은 종래의 인식처럼 한반도 남쪽에 국한된 땅이 아니라 반도(半島)와 만주요서지방(滿洲遼西地方)에 걸쳐 있던 대강역이었다. 그러므로 대방고지에서 입국(立國)한 백제(百濟)가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伯濟)이며 삼국사기가 전하는대로 백제시조 온조대왕 27년(AD9년)에는 백제가 마한을 멸하고 이를 병합했다. 그러므로 대륙백제가 반도백제로 육속(陸續)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교통수단은 육로(陸路)가 주류룰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로 양분된 시기를 가늠해보건데 이는 고구려의 전성기와 때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ㆍ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전시대(全時代)에 걸쳐서 대륙백제의 기사가 풍부하게 실려 있으나 고구려(高句麗)ㆍ고구양왕(故國壤王)[384~391]에서 장수왕초년(長壽王初年)[413~450]에 해당하는 백제의 아신왕(阿莘王)[392~404], 비유왕(毗有王)[427~455]年間에는 비교적 대륙백제의 기사가 희소하다. 이는 바로 백제의 분립을 뜻하는 것이다. 백제양분 이후의 교통교류수단은 자연히 해로(海路)가 주류(主流)를 이룰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종래의 반도사관으로는「馬韓北與樂浪接」이나 혹「百濟始立國于帶方故地」(백제가 처음 대방땅에서 입국했다) 혹 「百濟南與倭接」의 낙랑ㆍ대방ㆍ왜등의 위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대방을 황해도로 알았으니 백제는 황해도에서 입국남하(立國南下)하였다고 믿었고 그 북쪽이 낙랑 곧 평양지구(식민사관,왜곡사관)에 닿고 남쪽이 왜(倭)에 접했다 하였으니 반도백제 혹은 반도의 마한백제설을 추호(秋毫)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馬韓北與樂浪接則所轄在今蓋平復州寧海』등의 글을 어찌하여 눈여겨 보지 않았던가?하는 것이 모내 궁금하다. 대방군에 대해서 중국정사는 다음같이 전하고 있다.
遼西部 有帶方山ㆍ禿黎山 松山 (요서부 유대방산ㆍ독려산 송산)
(隋書ㆍ地理誌中ㆍ 遼西郡)
[대방산 있는 곳이 대방군(帶方郡)일 것은 정(定)한 이치이다)]
古帶方國 漢末曺操置郡 在遼東之東 屬平州 括地志云 帶方故城 在樂浪界(遼東志略)
『고대방국에 조조가 대방군을 설(設)했는데 요동의 동(東)쪽에 있으며 평주(平州)[만주 요녕성열하성(熱河城)을 포함하는 주(州)로 주치소(州治所)는 창려(昌黎) 곧 열하성 조양현(朝陽縣)의 경계]에 속한다. 괄지지(括地志)[당태종의 4자(四子) 위왕태(魏王泰)의 찬ㆍ총550권]에서는 『대방의 고성(故城)이 낙랑(北平地方)의 경계에 있다』고 했다.
송령산맥(松嶺山脈) 서쪽에서 발원하여 남만주 금주(錦州)지방을 흐르는 물이 있는데 그 강물이 금주(錦州)지방에 이르러 열하성에서 흘러내리는 다른 강물과 합류하여 발해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 두줄기의 물이 금주지방을 끼고도는 모습이 마치 허리띠와 같아 이 지방을 대방(帶方)이라 부르며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의 註「帶方 西至帶方入海」의 대수(帶水)가 바로 그것이며 帶水는 후대에 소능하(所凌河)~한수(漢水)로 개칭되었다. 온조즉위전기(溫祚卽位前記)에서 말하는 북대한수(北帶漢水)도 바로 이 소능하인 것이다.
三國史記에 실린 大陸百濟記事
이제 삼국사기ㆍ백제본기에 실린 대륙백제의 기사를 다음에 간추려 본다.
百濟始祖溫祚王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 爲拒守之計
『…왕께서 군신(羣臣)에게 말씀하셨다.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접해있다. 말갈인은 용기가 있으나 속임수가 많다. 마땅히 병기(兵器)를 수선(修繕)하고 군량(軍糧)을 쌓아 이를 방어할 계획을 짜야하나니…』
(註) 말갈족은 고구려이외의 만주족에 대한 수당이래(隋唐以來)의 총칭인바 만주족-말갈에 대비하는
이 기사는 결코 한반도남단의 이른바 반도백제(半島百濟)의 기사로는 볼 수 없다. 이하 말갈에 관
한 기사는 모두 대륙백제(大陸百濟)의 기사인 것이 분명하다.
※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ㆍ王帥動兵 急擊大敗之
※ 八年 春二月 靺鞨賊 三千來圍慰禮城
※ 十年ㆍ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 十三年 二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註) 일찍이 단제(丹齊)도『國家東有樂浪…』은 西有樂浪』의 오기(誤記)이며 우리 상고어(上古語)의 동방(東方)이 시方[아시ㆍ새ㆍ시는 동방(東方)을 뜻함]이기 때문에 서방(西方)과 혼동된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백제의 건국지를 금주(錦州)의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더 전진하여 락하(濼河)를 넘고 백하(白河)를 넘어선 땅이라 할때 낙랑은 『東有樂浪』이라는 표현이 옳다. 항차 백제(百濟)라는 국호(國號)가「십제(十濟)」를 비롯하여「初以百家濟 因號百濟」처럼 숫자적(數字的)인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백하(白河)[북경 북방 락하(濼河) 남쪽사이의 강]를 건느다」라는 뜻에서 지명적(地名的)인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런지? 또 백하는 옛날의 패수(浿水)인데 우리민족은 고조선이래(古朝鮮以來)로 패수물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만(衛滿)의 도(都) 왕검성(王儉城)의 패수ㆍ낙랑군의 패수 역시 모두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 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내습(來襲)해온 말갈의 추장(酋長)을 사로잡아 마한으로 압송하고 나머지 말갈인들은 생매장해 죽
였다.』[註 :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는 마한의 속국(屬國)이었다.]
※ 二十二年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ㆍ 遇靺鞨賊 一戰破之
『부현(斧峴)의 동쪽에서 사냥하다 말갈적(靺鞨賊)과 조우(遭遇)하였으나 한번 싸워 이를 파(破)하다』
※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 二代 다루왕(多婁王)[AD28~77]年代
※ 三年冬十月 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 四年秋八月 高木城 昆優與靺鞨戰 大克斬首二百餘級
※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燒百姓廬屋
※ 秋八月 靺鞨侵北鄙
※ 二十九年 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註) 동부흘우(東部屹于)나「동부(東部)」로 하여금 성(城)쌓게 하고 혹 전투하게 한 것을 보면 말갈의 위치가 백제동부에 치우쳐 있음을 알만하다.
▲ 三代 기루왕(己婁王)[AD77~128]
※ 三十二年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 救之
▲ 五代 초고왕(肖古王)[AD166~214]
※ 四十五年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 四十九年 命北部 眞果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ㆍ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 六代 구수왕(仇首王)[AD214~234]
※ 三年 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城主固拒 賊退歸
※ 四年春二月 設二柵於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赤峴城卒或之
※ 七年 冬十月 王城西門火ㆍ靺鞨寇北邊 遣兵拒之
※ 十六年 十一月 大疫ㆍ靺鞨入牛谷界 奪掠人物
▲ 八代 고이왕(古爾王)[AD234~286]
十三年(246年)秋八月 魏幽州刺史毋丘儉 與樂浪太守 劉茂ㆍ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246년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인 무구검(毋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는데 이때 백제의 고이왕은 그 허(虛)를 틈타서 좌장군 진충을 보내 낙랑의 변두리를 습취(襲取)했다』
(註) 이 사료는 매우 중요한 전거(典據)다. 종래에는 『고이왕이 낙랑변민을 습취했다』한 이 대목을 겨우 황해도정도를 습취한 기사로 보았다. 그것은 낙랑을 평남도(平南道) 평양근방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주자사(유주는 오늘날의 북경~산동반도북쪽) 무구검은 삭방(朔方)[陝西省 청윤현(淸潤縣)의 西]태수와 낙랑태수를 대동하여 고구려를 공동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폈다. 그렇다면 낙랑태수도 역시 요서지방의 유주나 삭방근처에 있었다는 확인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 않고 고구려의 땅을 뛰어넘어 평양근처에 있는 낙랑과 공동작전을 펼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발견은「王乘虛… 襲取樂浪邊民」에 있다할 것이다. 고이왕의 백제는 이때 한반도 남쪽에 있었든 것이 아니라 요서지방에「유주~낙랑」과 이웃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 허한 틈을 엿보아 낙랑군의 변두리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확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래 이기사를 백제의 요서(遼西)진출의 효시(嚆矢)를 이룬 사료라 했다. 항차 이 기사는 다음 25사가 전하는 백제군의 기록 가운데「진시(晉時)[265~420ㆍ서진265~316, 동진 317~420]云云」과 거의 같은 때이기 때문에 더욱 신빙성(信憑性)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삼국사기의 말갈(靺鞨)기사만 보더라도 백제는 대방고지(帶方故地)[요서(遼西)]에 입국(立國)한 이래 그곳을 떠난적이 없었으므로 요서진출의 효시라는 개념이나 인식은 이제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참 고>
⊙ 百濟 晉時 略有遼西 百濟治所 謂之晉平郡 晉平縣(宋書ㆍ百濟傳)
⊙ 百濟ㆍ晉世 亦據有 遼西 晉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ㆍ百濟傳)
⊙ 晉世 百濟 亦據有 遼西晉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南史ㆍ百濟傳)
⊙ 百濟與句麗在遼東之東 晉世 句麗旣略 有遼東 百濟亦據有遼晉平二郡地矣 自治百濟郡 今柳城北平之
間(通典ㆍ百濟傳)
※ (古爾王) 二十五年春 靺鞨長羅渴 獻良馬十匹
▲ 청계왕(靑稽王)[일명 책계왕(責稽王) 286~298]
※ 元年…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원년−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이 백제에 원군을 청했다. 이 보다 앞서 왕은 대방왕녀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맞았더니 그러므로「대방은 나의 구생(舅甥)[외삼촌과조카]의 나라이니 불가불 도와줘야겠다」라 하시고 마침내 원병을 보내 구해 주었다.
※ 十三年(298年)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한(漢)과 맥(貊)인이 내침(來侵)하여 왕 이 이를 나아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시해(弑害)되다.]
(註) 여기 한(漢)이라 함은 서진(西晉)을 말함인 듯, 성한(成漢)[304~329]은 아직 성립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 10代 분서왕(汾西王)[298~304]
※ 七年(304년)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薨
『304년 2월에 낙랑서현(樂浪西縣)을 기습하여 점령하니 10월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刺客)에 의해 시해되시다.』
(註) 백제의 요서진출과 관련된 기사로 주목되어 왔으나 본기사(本記事)에서 보는대로 「잠사(潛師)」나「견자객(遣刺客)」이 가능할 것으로 보아 백제와 낙랑은 요서지방에 국경을 맞대고 병존(竝存)한지 오래인 듯 하다. 역시 대륙백제의 기사이지 한반도의 백제라고는 할 수 없다.
※ 十一代 비류왕(比流王)[304~344], 十二代 계왕(契王)[344~346], 十三代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 十四代 근구수왕(近仇首王) 및 十五代 침류왕(枕流王)[384~385]의 80年間(304~385)은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아니한다.
▲ 十六代ㆍ진사왕(辰斯王)[385~392]
三年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 不捷夏四月 靺鞨攻陷北鄙 赤峴城
(註) 十七代 아신왕(阿莘王)[392~405]ㆍ十八代 농지왕(膿支王)[405~420]ㆍ구이신왕(久爾辛王)[420~427]ㆍ二十代 비유왕(毗有王)[427~455]年代(392~455)에는 대륙백제의 기사가 보이지 않으며 이십일대 개로왕(蓋鹵王)[455~475]때에는 위(魏)나라에 국서를 보냈는데 예의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ㆍ장사(長史)ㆍ용양장군(龍驤將軍) 帶方太守司馬等 대륙백제의 관제를 엿볼 수 있는 기사가 풍부하게 실려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필(史筆)은 문주왕(문주왕)[22대ㆍ475~477]서부터 이하 의자왕(義慈王)까지는 난조(亂調)를 일으키고 있다. 기술(旣述)한대로 백제칠백년삼십일대(百濟七百年三十一代) 대왕들 가운데 동성왕년대(東城王年代)는 대륙백제(大陸百濟)의 전성기(全盛期)요 중국 25사 남제서는 온통 동성왕의 기사로 꽉 차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동성왕 십년조(十年條)에서「魏遣兵來伐 爲我所敗」라는 한줄을 남겼을 뿐이다.(10年條의 설명은 旣述했음)
그러나 동성왕조(條)에서 그 4년조(年條)에「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云云」에서 한산성(漢山城)이라는 기사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산, 남한산은 반도내(半島內) 서울~경기도의 山이지만 실제는 대륙의 다른 한산(漢山)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한산 또는 북한산의 기사는 모두 대륙백제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예「비유왕(毗有王) 15年條」ㆍ비류왕(比流王) 24年條]. 아울러 백제 도성인 한성(漢城)[예ㆍ麗王巨漣帥兵 三萬來圍王都漢城云云의蓋鹵王20년]이나 한수(漢水)[=帶水, 小菱荷]는 반드시 반도(半島)의 서울이나 한강으로 보아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문주왕(文周王)[22대ㆍ475~477]−의자왕(義慈王)[31대ㆍ641~660]사이의 주목할 만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威德王 十八年 高齊後主 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 諸軍事 東靑州刺史」 (註ㆍ이 기사의 해설은 旣述하였음)
※ 義慈王 十五年 八月 王與高句麗 靺鞨攻破新羅三十餘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 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 侵我北界 設三十餘城
(註) 여기 고구려와 함께 출동한 말갈은 고구려의 말갈부사(靺鞨部師)를 뜻하는 것이므로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이「말갈=고구려」라고는 할 수 없다. 다음 기록은 실로 중요한 사료이다. 의자왕조(條)의 제일 말미(末尾)에 있는 기록이다.
『而其地 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 國系遂絶』
『그리고 백제의 강역은 신라와 발해와 말갈 때문에 갈라지고 국계(國系)는 마침내 단절되었도다.』
백제의 땅이 신라의 땅이 되었다 한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겠으나 뒤에 만주에서 건국하는 발해(渤海)[698~926]에 의해서 또는 말갈(靺鞨)에 의해서 그 땅이 분할되고 저들의 차지가 되었다하니 백제가 대륙과 한반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선명한 기록을 남겼다.
又北史云 國有五方 方管十郡ㆍ舊唐書云六方 各管十郡 則爲郡且五十六 而定方所得 偉三十七郡 未得者尙五分之二 此必餘衆所保 第爲渤海契丹所隔故 不復相聞耳 若其聲明文物之盛與新羅埒史 言俗重騎射兼愛墳史 信矣 其國內 衆建侯王 以酬勳? 自宋齊時己然則 又地廣民稠之驗也(欽定ㆍ滿洲源流考 卷三ㆍ末尾)
또 북사(北史)에 가로되「백제국에 5방(五方)의 행정구역이 있는데 1방(一方)이 각각 十郡을 관할한다」라 했다. 또 구당서에서는 가로되「백제국에 6방(六方)이 있는데 各方이 十郡을 거느린다」했다. 그러므로 백제국은 50~60郡이 된다. 그런데 소정방(蘇定方)이 점령한 군이 겨우 37군에 불과하다. 아직도 점령 못한 군(郡)이「5분지2(五分之二)가 남아있다. 이것은 반드시 백제의 나머지 백성들이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뒤에 발해국과 글란(契丹) 때문에(대륙백제의 소식은) 간격이 벌어지게 되었는 고로 다시는 소식이 들리지 않게 된 것일 뿐이다.
(註) 만주(滿洲)의 글란(契丹)과 발해국(渤海國)때문에 가로 막혀서 중원대륙에 잔존했던 백제소식이 한반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륙백제의 존속년대는 서기 660년 곧 반도백제의 멸망 뒤에도 엄존(儼存)했다는 말이된다. 백제문물의 번성함이 신라와 같으며 (北)史가 말하는데로 『그 풍속은 기사(騎射)를 존중하며 고서(古書)와 고사(墳史)를 아낀다』(북사의 백제전)하였다.
백제국 안에는 여러 개의 후(侯)와 왕(王)을[제후제왕(諸侯諸王)을] 두었으며[대륙사의 백제는 제후를 거느린 천자국(天子國)임이 무위(無違)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훈(功勳)ㆍ미행(美行)을 보상해 준다. 宋나라, 齊나라때부터 이미 이러 했은즉 땅은 광대하고 백성들은 많았음을 가히 증험(證驗)할만 하다.
한편 양서(梁書) 五十四, 백제전이 전하는 기록 가운데 삼국사기ㆍ백제전ㆍ무령왕조(武寧王條)의 기사와 상위(相違)하는 다음 기록은 대륙백제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晉太元中,王須;義熙中,王余映;宋元嘉中,王餘毗;並遣生口。餘毗死,立子慶。慶死,子牟都立。都死,立子牟太。齊永明中,除太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天監元年,進太號征東將軍。尋為高句驪所破,衰弱者累年,遷居南韓地。普通二年,王余隆始復遣使奉表,稱「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為強國(梁書ㆍ五十四ㆍ百濟傳)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東夷)인바 (東夷엔) 세개의 한국이 있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그것이다. 변한ㆍ진한이 각12국이오 마한이 54국인데……백제도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후에 백제는 점점 커져서 여러 작은 나라를 어우르고 그 나라(百濟)가 본래 고구려(高句麗)와 함께 요동(遼東)[락하(濼河)=요동의 동쪽 곧 오늘의 만주대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265~316 서진) 고구려는 요동(만주대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遼西)ㆍ진평(晉平)의 二郡땅을 점거소유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
진(晉)나라 태원중(太元中)[376~396]에 근구수왕(近仇首王) [=왕수(王須)ㆍ375~384] 의희중(義熙中)[405~418]에 백제왕 여영(余映) [농지왕(膿支王)ㆍ405~420], (宋)나라 원가중(元嘉中)[425~453]에 백제왕 여비(餘毗)[비유왕(毗有王)427~455]가 나란히 생구(生口)를 보내왔다.[생구는 포로나 노예를 뜻하는 바「百濟還生口」라면 백제가 잡아갔던 양(梁)나라 포로나 혹 북위(北魏)의 포로를 되돌려 준 것이겠으나 「遣生口云云」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비유왕(毗有王)이 훙(薨)하시고 아들 경(慶)[개로왕(蓋鹵王)455~475]이 즉위하고, 경이 薨하시고 아들 모도(牟都)가 즉위하고, 모도가 薨하자 아들 모태(牟太)[동성왕(東城王)ㆍ479~501)]가 즉위하다.[모도는 문주왕(文周王)을 뜻] 영명中에(483~493) 모태(동성왕)에게「都督百濟諸軍事 鎮東大將軍 百濟王」을 제수(除授)했다[이것은 의례적(儀禮的)인 수여다. 오늘 날의 명예박사, 명예시장, 시민권 수여와 흡사한 것]. 천감원년(天監元年)[502년]에 東城王에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의 호(號)를 더해 주었다. [502년이면 동성왕의 사후(死後)요 무령왕(武寧王) 원년이다] 거듭거듭 고구려에게 패하여 백제왕 여륭(餘隆)[무령왕ㆍ502~523]은 남한(南韓)땅[이것이 사실이라면 남한땅은 현요동반도남단(現遼東半島南端)이며 한반도의 남단은 아니다]으로 옮겨 갔다.(三國史記에 이런 사실 全無함) 보통2년(521년) 무령왕은 처음으로 다시 국서를 보내 가로대「번번히 고구려에게 패하여 이제야 비로서 통호(通好)하게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백제는 다시 강국(强國)이 되었다.(梁書卷54 백제전)
무령왕 당대(當代)의 502~521년(곧 천감원년~보통2년까지 19년간)「衰弱者累年 遷居南韓地」하고 다시「更為強國」하게 된 거창하고 파란만장한 사건이 있었다면 삼국사기 무령왕 條에는 비슷한 사건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전혀없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수수께끼에 속하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역시 무령왕(501~523)年間에도 대륙백제를 연상케하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김부식은 이 대륙백제의 기사 다음에 前記 양서(梁書)의「先是爲高句驪所破,衰弱累年」만을 이기(移記)하고「遷居南韓地」라는 주목할만한 대목은 빼버렸다.「遷居南韓地」라는 기사가 대륙백제의 실재(實在)를 암시하기 때문에 이를 기휘(忌諱)한듯 하다. 과연 그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위해 공헌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이었다.
대륙의 백제를 암시하는 무령왕(武寧王)年間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註) 마수성(馬首성) 고목성(高木城)등이 어느 지방에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대륙백제에 유관한 지명인 것만은 틀림없다.
※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 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戰退之
(註) 역시 고목성ㆍ장령성ㆍ한성(서울이 아니다), 횡악(橫岳)등 지명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또 이 기사는「고구려장(將) 고노와 말갈이 모의하여 來侵했다」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혹 삼국사기上의 말갈記事를 모두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는 바, 위에서도 같은 예가 있었지만(의자왕 15年條) 여기의 고려와 말갈은 완전히 별개의 집단인 것이다.
大陸百濟와 韓半島의百濟
백제는 반도백제(半島百濟)와 대륙백제(大陸百濟)의 둘로 구분지어 고찰되어야 한다. 이 두 개의 백제는 해로(海路)로 연결되는가 육로(陸路)로 연결되는가? 백제 건국초(建國初)에서 부터 상당한 기간은 육속(陸續)되었으니까 육로로 연결되었으나 고구려의 팽창결과로 육로는 중단되고 해로에 의한 왕래가 이루어졌다. 삼국사기의 말갈북침(北侵)의 기사는 대륙백제의 잔영(殘影)이라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반도사관과 대륙사관의 구분없이 일정한 원칙없이 닥치는 대로 백제본기(百濟本紀)를 엮었는데 사대사관(事大史觀)에 입각하여 내외사료를 모집했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능히 구득(求得)할 수 있었던 백제의 주체성 있고 영광스러운 사료는 짐짓 외면하고 사대주의사관에 입각하여 무난하다고 여겨지는 사료만을 골라 백제본기를 엮었다.
그 증거로 남제서 백제전 같은 중요사료를 외면한 것과 송서(宋書)ㆍ양서(梁書)ㆍ북제서(北齊書)ㆍ남제서(南齊書)ㆍ북사(北史)ㆍ주서(周書)…등 25사의 백제본기上의「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등 대륙백제의 기사를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통한불기(痛恨不己)의 사건은 대륙백제의 사료가 중국정사가 마지못해 누설하는 사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망실(亡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륙백제국(大陸百濟國)은 반도의 그것과는 달리 제후ㆍ제왕을 거느린 거대한 천자국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其國內 衆建侯王 以酬勳?」라는 한줄의 글은 이를 더욱 확증해 준다.
백제사와 관련하여 아직도 남아있는 최대의 숙제가 있다면 백제의 31代 王中에서 대륙백제의 황제(皇帝)와 반도백제의 대왕(大王)을 구별짓는 방법의 발견이오 두개의 백제(百濟)가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그 강역위치가 양분되는 시기ㆍ양상ㆍ동기등이 규명되는 일이며 또 양분이후의 두 백제의 행정적,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유대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의 다음 기사를 음미해 본다.
普通五年(524年) 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簷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簷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梁書ㆍ百濟傳)
『보통 5년−백제성왕2년…도성을 호(號)하여 고마(固麻)[곰ㆍ곰나루=웅진(熊津)]라 한다. 읍(邑)을 담로(擔魯)라 하는데 중국어의 군현(郡縣)과 같다. 백제엔 22군(담로)이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宗族)으로 나누어 이를 다스리게 했다.』
「皆以子弟宗族分據之」는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를 연상하게 하며 주무왕(周武王)이 멸은후(滅殷後)에 그의 형제 15명을 요소(要所)에 배치하고 동성(同姓)인 희씨(姬氏) 40명을 후(候)로 봉(封)하여 1,500에 달하는 공후백자남(公侯柏子南)의 나라를 감시하게 했던 사기주본기(史記周本紀)의 기사가 연상된다.
송서 백제전에는 개로왕(蓋鹵王)이 그 4년(458) 중국본토내에 지방장관 11명을 배치하는데 그 가운데 부여(餘)씨가 9명이었고 남제서(南齊書)에서는 광양(廣陽)ㆍ조선(朝鮮)ㆍ대방(帶方)ㆍ청하(淸河)의 4태수를 동성왕이 임명하는데 그 중 3인이 부여씨였고 일본을 다스렸던 백제 무령왕의 직할지에 수령(守令)을 임명하였다.
즉 백제무령왕 5년(百濟武寧王 五年)[505年] 일본 경도부지방(京都府地方)에 자리한 가황소전(歌荒巢田)의 수령(守令)을 갱송(更送)할 때 전임자인 사마나(使麻那)가 부여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해임되고 왕의 골족(骨族)인 사아(斯我)가 임명된다. 백제의 일본분국(日本分國)에 대한 연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武烈七(505)年 夏四月百濟王遣期我君進調 別表曰 前進調使麻那者非百濟國主之骨也 故謹遣斯我奉事於朝。遂有子。曰法師君。是倭君之祖也 (일본서기)
『무열7년 여름 4월 무령왕이 사아군, 진조(進調)[관명(官名), 수령(守令)의 稱인 듯]를 파견했다. 별도로 국서(國書)를 보냈는데 가로되 전(前)의 진조인 사마나는 백제국왕의 골족(=부여씨)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사아를 파견하여 귀조(貴朝)에 봉사케 하노라.[「너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노라」가 원문]고 했다. 마침내 사아에게 아들이 있으니 이가 곧 왜군(倭君)의 조상이다.
백제의 일본분국도 그 관제가 제후ㆍ제왕을 거느린 천자국−천황제로 발전하는 바탕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백제의 관제 역시 천자국의 관제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일 사대가(事大家)의 곡필(曲筆)로 횡액(橫厄)을 당한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나 광개토왕비문상(廣開土王碑文上)에 보이는 천자국 술어(天子國述語)들이 어찌하여 삼국사기를 비롯한 이 나라 사서(史書)에는 그 자취를 감추었을까?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끝.
임승국,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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