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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발해는 북부퉁구스어(고구려)를 썼던 황제국, 신라와 통역 필요 없이 소통

monocrop 2008. 4. 18. 01:15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펴내
김영번기자


발해의 대외 교통로, 크게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다.
걸걸중상, 걸사비우, 이진충, 이해고, 설인귀…. TV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익숙해진 이름들이다.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 인물들은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만큼이나 발해를 한민족사의 중요 구성요소로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말갈족의 나라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고구려를 승계한, 한민족의 국가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사진)는 이같은 중국측 주장을 총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책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동아시아의 당시 질서가 당나라 중심이었지만, 이같은 국제적 질서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발해 왕에 대한 당나라의 ‘책봉’은 주변 왕조에 대한 외교적 승인 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는 아니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7-04-24   <문화일보>

 

 

 

 

출처 : 슈뢰딩거의 고양이
글쓴이 : 레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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