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일본의 기원과 한국

[스크랩] 오사카市의 ``백제니사`` 유적

monocrop 2008. 1. 26. 03:07

오사카市의 ''백제니사'' 유적


일본 제일의 항구도시 오사카는

고대 행정 지명이 ‘구다라스’(百濟洲·백제주)였다. 1922년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1910년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는 ‘구다라고리’(百濟郡·백제군)와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북백제촌), ‘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남백제촌) 등이 널리 존재했다. 도쿄 치도세고교

역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는 “구다라고리의 ‘고리’라는 말은 한국어의 ‘고을’에서

생긴 표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구다라스 왜왕실에서

일종의 교육장관인

가후치노후미노오비토(西文首)를 지낸 백제인 왕인 박사는 ‘고금집’(905)에서 오사카 항구를 ‘나니와쓰’(難波津·난파진)라 최초로 표현했다.

오사카 남쪽 번화가인 ‘난바’(難波, ‘나니와’로도 부름. )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또 필자가 발굴한 1098년 구다라스 고지도에도 현재 오사카 시내 한복판인 구다라초(久太郞町) 지역이 구다라리(久太郞里)로 명기돼 있다.



구다라초 동남쪽에 위치한 ‘시텐노지’(四天王寺·사천왕사)는 고대 ‘백제 여승 사찰’(百濟尼寺) 유적 발굴로 유명해진 곳이다.

시텐노지는 고대 백제로부터 건너온 ‘니승(尼僧)’이라는 수많은 왕족 또는 귀족 출신 여승들이 구다라스의 나니와쓰에 있는 백제인 왜왕실 관할 ‘백제니사’에 살면서 왜인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파했던 곳이다. 1996년 12월 ‘사이쿠다니 유적 발굴 조사’를 통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백제니사 유적은 현재 그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새 도로와 35층짜리 아파트 건설 공사로 굉음만이 들린다. 오사카시 문화재협회의 사쿠라이 히자유키(櫻井久之)는 “고대 백제 여승의 터전으로 당시의 백제 그릇을 포함해 각종 유물과 우물터가 발견된 이 지역은 2002년부터 시작된 개발로 옛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사이쿠다니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100여 점 중 일부는 현재 오사카역사박물관 전시실 유리창 진열대 속에 조용히 놓여 있다.

당시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토기는 30여 점이며, 2개의 항아리(지름 26cm, 높이 18cm)에는 백제 여승들의 사찰 명칭인 ‘백제니’(百濟尼)와 ‘백니’(百尼)라는 먹글씨가 또렷하다. 또 5개의 접시(지름 16∼20㎝)의 바닥면에도 이 같은 먹글씨가 적혀 있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이곳에서 ‘백제니사’의 존재가 토기면의 붓글씨(묵서)와 기와들의 발굴로 확인된 것은 매우 가치가 큰 백제 불교의 지대한 영향력을 입증한다”면서 “특히 백제 여승의 친아버지 이름이 적힌 나무패(목간) 통행증명서가 발굴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당시 이곳에는 남승을 비롯한 일반 남성들 통행이 금지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목간에 쓰인 글자는 ‘상화니부남부왕구지’(上和尼父南部王久支)인데, ‘상화’는 여승의 이름이고 ‘구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추정된다고 가도와키 교수가 설명했다. 하지만 필자는 상화니(上和尼)가 ‘백제왕족인 화씨 가문 여승이며 승직의 계급이 상좌 승려’로 간주하고 싶다. 당시의 승려는 왕족이나 귀족 가문의 자제만이 될 수 있었으며, 더구나 화(和·야마토)씨는 6세기 초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 왕실의 왕성(王姓)이었으므로(연재 43회 참조) 백제니사에 건너갔던 최고위 승려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사이쿠다니 유적’ 발굴 현장은 35층짜리 고층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이와 함께 목간은 여승들만의 백제니사 사찰 출입용 통행증명서라기보다는 신분증명서인 ‘호패’가 아닌가 한다. 호패에 적혀 있는 아버지의 신분은 백제 남부 지역을 관할한 왕족 구지(久支)였으며 ‘왕’이라는 글자는 ‘왕족’을 일컫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 역시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같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사이쿠다니 유적 발굴조사 현지 설명회에서 “이곳은 당시 왕궁 ‘난바궁’(難波宮) 다이교쿠덴(太極殿) 전각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불과 2㎞ 떨어진 스자쿠대로(朱雀大路)에 위치한다”는 점이 주목됐다. 당시 발굴 주최였던 오사카시 교육위원회는 “백제니, 백니사라고 적힌 나라시대 토기가 발견된 것은 구다라지와 함께 이곳 사이쿠다니 유적도 ‘구다라오씨’(百濟王氏·백제왕씨)에 의해 경영된 사원으로 여겨진다”고 보고했다.

◇발굴된 백제식 수막새와 암키와.(맨위) 니사(尼寺)라는 먹글씨가 적혀있는 밥그릇(가운데)과 유물이 보관된 오사카박물관


사이쿠다니 유적에서는 백제니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다수의 먹글씨 토기를 비롯해 기와지붕 대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백제식 망새(치미)와 기와들도 출토됐다.

또 장식용 금귀고리와 구리쇠 팔찌, 목제 빗과 함께 당대 엽전과 엽전 장식물 등 당시 백제니들의 풍족한 생활상을 밝혀주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세인을 경탄시켰다. 특히 여승들이 사용한 우물터(1.7×1.5m, 깊이 2.0m)도 발굴됐는데 이 우물터에서는 소, 말, 쥐, 개구리, 정어리 뼈도 출토됐다.

백제 여승들이 왜나라 백제계 왕실로 건너갔다는 역사기록은 다음과 같다. “비타쓰왕(敏達·572∼585 재위) 6년(577년) 10월에, 백제국으로부터 왕족인 대별왕(大別王)이 경론을 가지고 왔다. 아울러 율사(律師)·선사(禪師)·비구니(比丘尼)·금사(禁師)·조불공(造佛工)·조사공(造寺工) 등 6명도 건너왔다. 그들은 나니와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살게 되었다.”([扶桑略記])

기록에 따르면 고대 일본의 백제인 왜왕이었던 비타쓰왕은 본국 백제로부터 왕족 대별왕과 함께 여승들도 초청했다. 조불공 등 사찰 건축가들은 이들을 위해 나니와 왕궁 지역에 한국 건축 양식의 사찰을 세우고 불상도 주조해 입주토록 했다. 오사카시 교육위원회는 최초 백제 비구니 사찰 건립시기를 7세기, 아스카(飛鳥·593∼645)시대로 추정된다고 봤다. 물론 그 최초의 여승이 누구인지 알 길은 없으나 어쩌면 사이쿠다니 유적에서 호패가 발굴된 ‘상화니’일지도 모른다.

사이쿠다니 유적 내 백제 비구니 절터로부터 동쪽으로 불과 400m 떨어진 곳에는 백제 사찰로 추정되는 도가시바지(東ケ芝寺)터도 있다. 고대 백제에서는 비구니 사찰을 일반 사찰과 이웃해 지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 본다.

이에 대해 교토대학의 우에하라 마토(上原眞人) 교수는 “사찰을 비구니 사찰과 함께 건축하는 것은 백제의 사찰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이번 토기 발굴은 사찰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 건축가들이 백제 왕족 대별왕을 따라 왜나라에 건너가 불상을 만들고 사찰을 건축하고 그들이 가지고 간 불경으로 불교를 폭넓게 포교한 것은 다양한 역사자료로 고증되고 있다. 특히 577년 대별왕사 건립은 538년에 백제 제26대 성왕이 왜나라 조정에다 불상과 경론, 불구를 보내준 이래 40년 만에 이룬 쾌거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만인 587년, 왜왕실의 군사 담당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587) 대련이 백제 불교에 반기를 들고 훼불 사건을 저지른다. 왜왕실의 최고 대신이며 숭불파(崇佛派)인 우대신(右大臣)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626)는 587년 9월, 백제 왕실로부터 왜왕실로 보내준 미륵보살 석상과 불상을 아스카땅의 이시카와 구다라노무라(石川百濟村)에 있는 자택에 모시고 불전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이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모노노베노 대련이 이시카와정사를 급습, 불전을 불사르고 훼불한 것이다. 그는 소가노 세력으로부터 파멸당한다.

◇‘사이쿠다니 유적’에서 발굴된 우물터(왼쪽)와 우물터의 가상 그림.


이 시기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8) 때이다. 같은 해 11월엔 나니와의 구다라고리에다 시텐노지를 착공하게 된다. 현재 시텐노지에서 해마다 11월 3일 실시하는 ‘시텐노지 왓소 마쓰리’(四天王寺ワッソ祭·연재 45회 참조)는 백제 불교가 일본 오사카 백제 왕실에 건너온 것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587년 백제 불상 등을 세운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일본 최초의 ‘여승 수행자’ 3명을 이시카와정사에 불러들인 일이다.

여승 3명은 아스카 왕실의 백제인 불공 고관(鞍作村主)인 시메 다쓰토(司馬達等 6세기)의 딸 시마(嶋) 등 귀공녀였다. “시마는 젠신노아마(善信尼·선신니)라고 불렸으며 나머지 두 소녀는 젠조노아마(禪藏尼·선장니)와 에젠노아마(惠善尼·혜선니)로 호칭했다”(‘부상략기’)고 전해진다. 이들은 백제 사신 은솔 수신(恩率 首信)을 통해 본국 백제왕의 윤허를 받고 588년 백제로 유학을 떠난 지 3년 만인 590년 3월 귀국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이들은 아스카 도유라지(豊浦寺) 터전(현재)에 입주했다. 당시 도유라지에는 등극 전인 가시키야히메(뒷날의 스이코여왕·592∼628 재위) 공주가 살고 있었다. 사찰 명칭은 사쿠라이노데라(櫻井寺) 또는 고겐지(向原寺) 등 여러 이름으로 바뀌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최근 백제 비구니 절터 일대를 취재한 일본 기자의 탐방 기사 중 지난 6일자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나라시대에 이 주변은 구다라노(百濟野)로 불렸다. 660년 조선반도에서 신라에 망한 백제인들이 건너와 살며 개척한 도래인의 땅이다. 나라시대로부터 헤이안시대에 걸쳐 구다라고리가 설치돼 있었으며, 히가시스미요시구에는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구다라대교, 화물역인 구다라역이 있다. 히라노강(平野川)은 구다라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외대 교수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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