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백제·남부여·왜·신라·가야·발해

교토 명문호족 진주공-양잠업 일전파 시조

monocrop 2007. 11. 14. 05:20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55>

 

교토 명문호족 진주공

신라 비단 직조기술 日 전파한 양잠업의 시조
 ◇일본 교토 서부에 위치한 오사케신사는 양잠과 비단 직조 기술을 일본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신라 진씨 가문의 하타노 사카기미(진주공)를 신주로 모시고 있다.
일본 교토(京都) 서부 일대는 신라인들의 개척 역사 숨결이 짙게 흐르고 있다. 교토산대 고대사연구소장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교토를 관류하는 가쓰라강(桂川)에는 고대 신라인 ‘하타’씨(秦氏, 진씨) 가문에서 관개 농업용으로 축조한 큰 댐 가타노오이(葛野大堰) 유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면서 “이 지역 최대 도래인 가문인 하타씨는 토목과 관개 기술을 일본에 들여와 농업 생산력 발전에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단정했다. 교토의 명문 호족인 하타씨는 고대 경상도 울진(蔚津)으로부터 왜나라로 건너왔다고 알려졌다.

하타씨 호족의 활동 지역은 현재 2만5000명이 거주하는 우스마사(太秦) 1∼3가에 이르는 큰 도시권이다. 우스마사 1가에는 7세기 초 신라 진평왕이 보낸 일본 국보 제1호인 목조 불상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관하고 있는 고류지(廣隆寺) 가람이 위치해 있다.

리쓰메이칸대학 사학과 하야시야 다쓰사브로(林屋辰三郞) 교수는 우스마사라는 지명 어원이 “백제계 유랴쿠왕(雄略, 456∼479 재위)이 존경한 야마시로(山城, 교토) 땅의 하타노 사카기미(秦酒公, 이하 진주공)에게 ‘우스마사’(太秦)라는 왕명 성씨를 부여하면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주공은 우스마사라는 고대 교토 땅 신라인 터전에서 180개 조직을 동원해 거대한 뽕밭을 일구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짠 뒤 이를 일본 조정에 진상함으로써 유랴쿠왕의 환심을 산 것으로 전해진다.

진주공이 신라로부터 누에치기와 비단 짜는 기술진을 거느리고 건너왔다는 설도 있는데 우스마사 고류지 바로 뒤쪽에는 진주공을 신주로 모신 오사케신사(大酒神社, 대주신사)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곳으로부터 1㎞ 떨어진 지역에는 ‘가이코노야시로’(누에사당)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일본 전국의 직물업자들에게 두터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누에사당은 이름 그대로 ‘누에’와 ‘베틀’의 신(神)을 섬기는 신사로서 ‘고노시마니이마스 아마테루 미타마신사’(木島坐天照御魂神社)라고도 부른다”면서 “진씨 가문은 신라에서 건너와 이 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누에사당’을 짓고 양잠과 베틀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설명했다.

우스마사 지역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 비단의 최초이자 최고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다. 특히 우스마사 우교구(右京區)에서 생산되는 ‘니시진오리’(西陣織)라는 견직물은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있어 일본 최고급 명품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왕실과 귀족들의 전통 의상에 사용돼 왔다. 지금도 이곳 골목길에 들어서면 직접 비단을 짜는 베틀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옛 신라인들의 베 짜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일본 인문지리학계의 태두로 평가되는 이시바시 고로(石橋五郞·1877∼1946) 전 교토대 지리학과 교수는 1929년 저술한 ‘일본지리학대계’에서 “긴키지방(교토, 오사카 등지)은 예로부터 신라인과 백제인 문명이 전해져 온 곳으로 물질 문명뿐만 아니라 학문, 종교,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높게 평가했다.

◇오사케신사 인근에 위치한 누에사당.(왼쪽)◇누에사당의 석등.

고대 신라의 비단 직조 기술을 우스마사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앞장선 진주공은 거문고를 잘 뜯기로도 이름을 떨쳤다. 유랴쿠왕의 총애를 받아 재무장관을 지내기도 한 진주공은 왕의 요청으로 궁궐로 행차해 거문고를 즐겨 뜯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왕 재위 시절 왕궁 건축가로 빼어난 기술을 가진 잘 생긴 ‘이나베노 마네’(猪名部眞根, 저명부진근)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건축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루종일 열심히 목재를 다듬지만 자귀날을 돌판에 부딪혀 날을 상하게 하는 실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랴쿠왕 13년 9월 어느 날 왕이 그가 일하는 곳에 다가와 이나베노 마네에게 “한번도 실수로 돌판에 자귀날을 부딪힌 적이 없었느냐”고 넌지시 묻자 이나베노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궁녀들을 불러 모아 몸을 벌거벗기고는 아래쪽만 하대로 간단히 가리게 한 채 벌거숭이로 씨름을 하게 했다.

일본 센슈대 체육과 마쓰나미 겐시로(松浪健四郞) 교수는 “아키타현 요네가와 지방에서는 가뭄이 들면 여자 씨름판을 벌여 기우제를 지냈다”면서 고대 일본에 나체 여성 씨름이 시행된 적이 많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각설하고, 이때 이나베노 마네는 씨름판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귀질을 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자귀날을 돌판에 쳐 이가 빠졌다. 그러자 왕은 대로하면서, “네 이놈! 속이 시꺼먼 녀석이 짐을 감히 두려워하기는커녕 주둥이만 가볍게 놀렸구나”라면서 형리를 불러 이나베노 마네를 반역죄로 처형하라고 명했다. 이를 지켜본 동료, 신라인 진주공이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읊기를 “애석하구나. 이나베노의 뛰어난 기술. 그의 먹줄 치는 솜씨 따를 자가 없거니, 그가 죽으면 뉘가 뒤이어 먹줄을 칠 것인가”라며 탄식하자 이를 들은 유랴쿠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서둘러 신하를 시켜 형장으로 달려가게 해 이나베노 처형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진주공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대목장 이나베노 마네는 신라 건축가 후손이라고 일본인명사전 삼성판(三省版·1978)은 설명하고 있다. 이나베노라는 성씨는 고대 일본 왕실의 신라 건축가들이 세습하여 대를 이었던 가문의 성씨였다. 8세기 때 활약한 이나베노 모모요(猪名部百世, 이하 저명부백세)도 이 가문이다.

일본 12세기 역사서 ‘도다이지요록(東大寺要錄)’에는 “저명부백세는 나라 땅의 대가람인 도다이지(東大寺)의 큰 불상 ‘비로자나대불’의 주조와 대불전(大佛殿) 건물인 전각 건축에 참여했으며, 그 공로로 ‘외종5위하’의 조정의 고관 벼슬을 서품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진씨 가문이 축조한 큰 댐 가타노우이 유적이 위치한 가쓰라강.

진주공은 이나베노 마네의 목숨만을 구해준 것은 아니었다. 불과 1년 전인 유랴쿠왕 12년 10월 10일, 진주공은 또 다른 건축가 쓰게노 미다(鬪鷄御田)의 중대한 실수를 무마해준 적이 있다. ‘일본서기’는 “유랴쿠천황은 목공 쓰게노 미다에게 왕실 누각을 건축하도록 명했다. 쓰게노는 드높은 전각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날 듯이 잽싸게 달리며 일했다. 그 광경을 넋 빠진 듯 열중하여 바라보던 이세(伊勢) 땅 출신의 궁녀가 미타의 재빠른 동작에 놀라서 그만 발을 헛디뎌 정원에 넘어졌다. 이때 궁녀는 쓰러지면서 왕에게 갖다바칠 음식물 그릇을 뒤엎고야 말았다. 왕은 쓰게노가 궁녀를 범했다고 의심하고 그를 죽이도록 형리에게 넘겼다. 이때 진주공이 왕의 곁에서 왕을 깨우쳐줄 생각에 작사 작곡한 노래로 거문고를 뜯으며 읊었다. 노래는 ‘이세 땅, 이세 들판에 자라서 훌륭한 나뭇가지를 잔뜩 꺾어다가 나뭇가지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대왕에게 충성하며 제 목숨도 오래오래 살아가려던 목공은 참으로 가엽게 되었도다’였다. 유랴쿠왕은 진주공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는 그의 죄를 묻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왕실사에 거문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유랴쿠왕 11년 7월이다. 이때 ‘일본서기’에는 “구다라국(백제국)에서 도망쳐 온 자가 있었다. 자기 스스로를 일컬어 구이신(貴信, 이하 귀신)이라고 했다. 또는 귀신은 오국인(吳國人)이라고도 한다. 뒷날의 거문고 연주자 야카타마로는 귀신의 후손이다”는 대목이 있다. 백제인 귀신이 백제로부터 거문고를 왜나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와세다대 사학과 아오키 가즈오(靑木和夫) 교수는 일본 고대 왕실 아악료(雅樂寮) 문헌들을 예시하면서, “당시 왕실 아악기로는 화금(和琴)도 없었고, 대륙 계통의 금(琴)으로 고구려에서 발달한 6현의 현금(玄琴, 거문고)과 신라에서 발달한 12현의 가야금, 즉 신라금(新羅琴)만이 보인다”고 했다.

일본의 음악학자 도쿄음악학교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 교수 역시 “일본의 화금(和琴)은 고구려 거문고에서 전래된 6현의 금(琴)이다”고 아오키 교수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

참고로 신라인 진씨 가문의 전통적인 활동 영역이었던 우스마사에서 진주공의 뒤를 이어 왜 왕실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은 6세기 하타노 오쓰치(秦大津父, 진대진부), 6∼7세기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 진하승), 8세기의 하타노 도리(秦都理, 진도리), 하타노 이로코(秦伊呂巨, 진이여거), 하타노 오이(秦大炬, 진대거) 등 일일이 열거하기 번거로울 정도로 많다.

특히 603년 우스마사 고류지를 창건한 인물은 하타노 가와카쓰인데, 백제계 스이코여왕(592∼628 재위) 조정의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신라 진평왕으로부터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왜국 왕실로 기증받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 사신이 왕도에 입경할 때면 도자(導者)로서 활약했다”고 일본 인명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또한 교토의 신라농신(新羅農神) 큰사당 이나리대사(稻荷大社, 도하대사)를 711년 창건한 하타노 이로코와 707년 ‘신라신’을 모셔다 교토 ‘아라시야마’(嵐山)의 명찰 마쓰노오대사(松尾大社)를 창건한 하타노 도리 역시 진씨 가문으로 고대 교토 발전에 혁혁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