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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야, 임나, 임나일본부설

monocrop 2007. 11. 2.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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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인사)

지금 우리는 ‘가야’가 어떤 나라였는지 그 개괄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지난 시간에 못다 짚은 ‘가야’라는 명칭에 대해서 몇가지를 더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가야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홍익대 김태식 교수가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에서 정리해 놓은 학설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하죠. 

 

낭독자  첫 번째로,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가야가 ‘멍에 가(駕)’자를 쓰는 가나(駕那)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얘기한다. 소나 말의 목에 얹어서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이 멍에는 구부러진 막대 모양인데, 가야 사람들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중국 사람들이 가야를 일컬어 고깔 변(弁)자의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 또한 멍에의 모양을 본뜬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안재홍은 가야 제국이 낙동강가에 있었으므로  강(江)을 나타내는 ‘가람’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였고 최남선은 ‘겨레’라는 우리말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병도의 경우 ‘주변의 나라’를 뜻하는 ‘갓나라’(邊國)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설> 이 외에도 ‘신의 나라’ 혹은 ‘큰 나라’의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가야의 어원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가야의 어원과는 별도로, 인제대학의 이영식 교수는 가야라는 말이 처음에는 ‘마을’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인서트-1. 테입<137> 이영식

   (23:02 가야라고 하는 마을의 일반명사가 결국은 가야국이라고 하는 기원 전후로 한 시기에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등장을 할 때 최초의 국명으로 우선 김해가 가야국으로 붙여진 것 같습니다. 그 단계부터는 이건 일반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가 되는 거죠. 이 관계는 우리가 생각을 해 보면 지금 충남 지역에도 가야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가야왕비릉이 있다고 해서, 함창에 있는데 함창에 가야사가 전개된 적은 없습니다. 가야의 역사가 전개된 적이 없는 그런 영역에도 가야라고 하는 지명은 남아 있거든요.23:50)

 

<해설> 가야와는 상관이 없는 충남지역이나 경북 상주의 함창지역에 ‘가야’ 라는 이름의 지명이 보이는 것은, 가야가 ‘마을’을 지칭하는 일반명사 였다는 증거다, 이런 분석이지요. 그러다가 김해에 건국한 나라 이름이 가야가 되면서 고유명사로 굳어졌을 것이란 얘깁니다. 또한 가야는 본래 이름이 ‘가라’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이 김해에 세운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가락국기’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락국’은 도 어디서 비롯된 말일까요?

 

*인서트-2. 테입<137> 이영식

   (25:09 가락이라고 하는 지금은 기역 받침을 쓰지만 시옷 받침하고도 사실 같은 겁니다. 그건 우리가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용례가 있습니다. 나랏말싸미, 뭡니까. 나라의 말싸미입니다. 시옷이나 ? 하고 나는 발음이 시옷이나 기역으로 표기되는 것, 그런 겁니다. 가락국, 그러면 지금 우리가 기역 받침을 쓰지만 가라의 나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원래 김해 지역의 국명도 가라국이라고 쓰는 게 좋은데, 고령 지역도 가라국 이라고 하는 게 나오니까, 구분을 한다면 김해 지역은 가락국이라고 쓰는 게 괜찮겠다.25:54)

 

<해설> 가라 밑에 붙은 받침 기역(ㄱ)은 사이시옷(ㅅ)과 같기 때문에 가락국은 ‘가라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런 해석입니다

그 다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천 년 이상 이른 시기에 기술된 중국의 삼국지에는 가야지역의 13개 나라를 나열하면서 개 구(狗)자가 들어간 ‘구야국’이라는 국명이 보입니다. 그것은 또 어디서 연유된 이름일까요?

 

*인서트-3. 테입<137> 이영식

    (27:09 우선 구야국 같은 경우에는 개 구(狗) 자를 썼습니다. 야는 가야하고 같습니다. 물론 구야 자체도 가야하고 발음이 비슷하긴 합니다마는 사실 그게 풀어집니다. 어떻게 풀어지는가 하면 그게 개 구 자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을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을 표기할 때에는 좋은 글자를 안 썼죠. 대개 동물이 들어가는 이름이라든지, 일본 사람도 다 작기만 한 것도 아닌데 작을 왜 자 해서 왜인이라고 부른다든지. 그건 자기네가 세계의 중심이고 문명이고 나머지는 오랑캐들이니까 비하해서 부르는 이름들 때문에 그렇고.27:52)

 

<해설> 그러나 이영식 교수는, 중국인들이 가야를 특별히 비하하기 위해서 그런 글자를 갖다 붙였다기보다는 김해 지역의 사투리 때문에 ‘가야’가 ‘구야’가 된 것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인서트-4. 테입<137>  이영식

    (28:15 이 지역 분들이 가 발음을 개라고 발음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노인네들도 가야 그러면 개야라고 발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건 실제로 기록도 있습니다. 김해읍지에 보면 가라봉, 구지봉, 가락국의 건국 신화의 무대인 구지봉을 가라봉 이라고 하는데요, 가라의 봉우리입니다. 그런데 김해읍지에는 개라봉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향언에 따르면. 즉, 이 지역 사투리에 따르면 개라봉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에서는 가와 개가 통하는 거죠28:55)

 

<해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중국의 사신이 왜국으로 가는 길에 김해의 가야에 들렀는데, 통역을 가운데 두고 가야 사람들과 대화를 했겠지요.

중국인  여기 참 살기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나라 이름이 무엇입니까?

가야인  아, 우리나라 이름이 뭐냐꼬요? 개야 아입니꺼?

중국인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

통역관  아, 나라 이름이 개야라고 얘기합니다.

중국인  개야라, 개야…나라 이름을 적어가려고 하는데 개야를 어떻게 적어야 할 지 모르겠네. ‘개’가 무슨 뜻이오?

가야인  지금 이 사람이 뭐라카노?

통역관  아, ‘개야’의 ‘개’자를 한자로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물어보는 겁니다.  개가 무슨 뜻입니까.

가야인  무슨 뜻이기는 개는 ‘멍멍’하는 멍멍이 아입니꺼.

 

<해설> 그래서 중국인이 개 구(狗)자를 써서 가야를 구야로 적어가서 사서에 올렸을 것이다, 이런 얘기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러면 삼국유사의 이른바 ‘5가야조에 나오는 가야의 이름들을 살펴 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가락기찬’에 의하면 한가닥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여섯 개의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로 뿔뿔이 돌아가고 한 개가 이 성안에 남았다고 한다. 즉 한 개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 개가 각각 가야의 추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관국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해설> 이상은 다섯 가야의 이름을 소개하기 전에 작은 글씨의 할주(割註)로 설명해놓은 부분이고, 금관국을 제외한 다섯 가야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낭독자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등이요, 본조 ‘사략’에는 일렀으되 태조 5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그 첫째는 금관이요, 두 번째는 고령이요, 세 번째는 비화(非火)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

 

<해설> 이상이 삼국유사 5가야조의 기사 내용입니다. ‘금관가야’는 가야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면서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명칭인 ‘금관주’의 ‘금관’을 가야 앞에다 붙인 것으로서 가야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는 부분은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지요? 어쨌든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하면서 외웠던 6가야가 바로 삼국유사를 근거로 해서 교과서에 실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중국사서인 삼국지에 가야 지역에 열두 나라가 있었다고 소개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야를 여섯 나라라고 설명 한 삼국유사의 내용은 옳지 않습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삼국유사에 실린 5가야, 금관가야까지 합해서 6가야 운운한 기사는 조작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인서트-5. 테입<136> 김태식

    (42:33 조작되었다고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는 그렇게 돼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이나 고려사의 김해조에도 가락국 건국 신화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하늘에서 끈이 내려왔는데 그 상자 속에 알이 하나만 있었다. 그래서 그 알이 하나만 있는 거기서 사람이 나와서 그 사람이 김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전세계의 신화를 다 보면 알이 대개 하나만 나오지 여섯 개씩 나오지는 않습니다. 43:16)

 

  <해설> 알 여섯 개가 하늘에서 김해지역으로 내려와서 그 속에서 여섯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김해에서 건국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각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런 얘긴데, 김해를 제외한 다른 가야국들의 처지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될뿐더러, 건국신화로 삼기에는 불만스런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인서트-6. 테입<136> 김태식

    (43:36 함안 사람들이 김해에 내려온 여섯 개의 알 중의 하나가 우리 동네로 와서 그 사람이 우리 왕이 되었다고 하면 함안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리고 고령 사람들도 그건 이해 못할 겁니다. 어떻게 김해에서 내려온 알이 왜 우리 동네로 와서 왕이 됐느냐. 이것은 이 가락국기가 김해 지방의 자기의 김해 지방 사람들 위주로 조작된, 후대에 조작된 설화를 토대로 자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왜 맹주가 돼야 되는가를 내세우는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후대의 역사로 이렇게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44:25)

 

<해설> 그런데, 여섯 가야 운운의 이 신화가 조작됐다면  언제, 어떤 세력이 무슨 의도로 조작을 했을까요?

 

*인서트-7. 테입<137> 이영식

    (36:24 가락국기에 있는 건국신화가 최초의 출발인데요, 거기에 분명히 여섯 개의 알로 하고 있으니까 그건 일연 스님이 그렇게 고쳐 쓰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원래 고려시대 일연 스님 이전에 금관주지사 문인 찬, 이렇게 돼 있으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김해시장이 써 놓은 것을 일연 스님이 축약을 해서 삼국유사에 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미 육란이, 여섯 개의 알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걸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언제의 인식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여러 논란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거슬러 올라 가더라도 가락국 시대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37:12)

 

<해설> 이영식 교수에 의하면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이미 알여섯 개가 등장하는 육란(六卵) 신화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어쨌든 이 신화는 김해에 터를 잡고 일어선 가락국을 띄우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교수는 이 신화를 ‘김해판 용비어천가’라고 규정합니다.

 

*인서트-8. 테입<137> 이영식

    (37:27 가락국의 용비어천가가 사실은 가락국기에 보이는 가락국 건국신화거든요. 자기네 알을 가장 크게 묘사를 하고 주변의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작은 알로 묘사를 해서 자기가 중심적 위치에 있다, 이런 걸 드러내려고 하는 김해판 용비어천가죠. 그러니까 그 가락국의 건국신화 속에서 즉, 가락국을 높이려고 하는 건국신화 속에서 나머지 다섯 개의 알이라고 하는 것은 보조장치로 같이 들어와 줘야 합니다. 혼자 크다고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다른 작은 게 있어야 상대적으로 자기네가 커 보일 테니까요.38:07)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럼 이번에는 이런 내용의 신화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혹은 언제 조작되었는지 그 시기를 점쳐보기로 할까요?

만일 김해 세력이 가야 여러 나라들의 맹주국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이 신화를 만들었다, 이렇게는 볼 수 없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그 시기에 존재했던 모든 소국들의 이름을 다 거론했을 텐데 6개국만 내세웠다는 점이 우선 맞지 않고, 무엇보 삼국유사에서는 ‘함녕’이라는 곳에 고령가야가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령은 대가야가 건국된 경상북도 고령(高靈)이 아니라 편안할 녕(寧)자를 쓰는 고령입니다. 어쨌든 함녕은 지금의 경상북도 함창으로서 그 곳은 가야토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지역으로서 가야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말하자면 지명으로 미루어볼 때, 여섯 가야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 건국신화는 신라말 고려초에 만들어졌다는 얘기죠. 

 

*인서트-9. 테입<136>  김태식

    (46:04 나말여초 시기에 각 지역에서 반 신라의 움직임이 막 일어날 때 신라가 아닌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는 가야였다라는 것을 내세우기 시작을 했고 그러한 것이 김해 중심 사람들에 의해서 포괄이 돼서 나말여초에 육가야라는 관념, 그리고 여섯 개의 알이 김해에서 다 퍼져 나갔다는 관념, 그런 것이 성립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은 신라 말, 고려 초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가야에는 육가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성기 시기에는 가야 전체 지역으로는 소국이 서른 두 개가 있었고요, 한 시기에 있었던 소국만 해도 22개국이 포괄하는 연맹체 국가였기 때문에 여섯 개만이 가야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47:00)

 

족장1   지금 북쪽에서는 궁예가 옛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해서 세를 뻗치고 있고, 견훤은 스스로 후백제의 맹주를 자처하고 신라 조정과 대립관계로 돌아섰습니다. 우리라고 힘 빠진 신라 왕실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족장2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야문명을 대물림한 가야의 후예들입니다. 가야의 옛 땅에 살고 있는 우리도 살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금관가야의 왕손으로서 그 권리를 주장할 것이오!

 

족장1   나는 이제부터 성산가야국의 후손으로서 조정에 나가 당당하게 발언할 것입니다.

 

<해설> 신라말 고려초에, 옛 가야지역이나 그 인근에 근거해서 살고 있던 지방호족들은 옛 가야 소국시절의 명칭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의 지명을 끌어 붙여서 금관가야니 고령가야니 성산가야니 하는 식의 이름을 내걸었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고려초에 가야의 이름을 바꿨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그대로 올라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삼국유사 5가야 조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태조 천복 5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첫째는 금관이요, 둘째는 고령이요, 셋째는 비화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

 

<해설> 천복은 중국 후진 고조의 연호로서 천복 5년이면 서기 940년에 해당되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입니다.

왕건    (에코)음, 그동안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등으로 불렸는데, 앞으로는 다음과 같이 바꿀 것이니 차질 없도록 하라. 김해부의 금관가야를 비롯해서,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를 5가야로 삼을 것이다.

 

<해설> 고려 태조 왕건이 이렇게 선포를 했다는 얘깁니다. 대가야와 소가야를 빼고 그 대신에 금관가야와 비화가야를 대신 넣은 것인데, 가야의 새로운 나라로 들어간 비화는 지금의 창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태조 왕건이 제아무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가야의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농단해서 가야연맹체의 소국의 위치와 이름을 멋대로 바꿔버렸다는 것이 이해가 가십니까?

 

*인서트-10. 테입<137> 이영식

   (39:21 태조 왕건이 통일 전쟁을 후삼국의 통일 전쟁을 수행을 할 때 태조 왕건에게 얼마만큼 기여를 하고 얼마만큼 장애를 주었냐에 따라서 고려의 행정구역은 높낮이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른바, 고려 같은 경우에는 주군 속군 제도가 있어서, 심지어는 속군 같은 경우에는 주군의 세금을 한꺼번에 자기네가 내야 되는 그런 정도의 불편. 간단히 말해서 역적이 나오면 주에서 강등이 돼 가지고 군으로도 되고요, 또 충신이 나오면 현에서 승격이 돼서 군도 되고 주도 됐던 거죠. 그게 고려 행정구역의 특징인데. 고려 초에 삼국통일전쟁에 기여한 공에 따라서 각 지역의 높낮이를 정하는데. 40:13)

 

<해설>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협조를 했던 세력은 논공행상을 하고, 적대적인 행동을 보였던 지역의 호족들에게는 그 지위를 강등시켰는데, 공이 있는 호족들에게 성씨를 내려서 중앙호족으로 대접했던 사례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인서트-11. 테입<136> 김태식

    (48:22 자기한테 협조적이었던 지역의 호족들에게는 사성(賜姓)을 합니다. 성을 주어서 네가 이 지역의 토착 지배자다, 라는 것을 인정을 해 주고 그것을 사족으로 인정 했거든요. 선비 사 자를 쓰는 사족(士族)으로 인정해 주는 건데, 그걸 본관이라고 합니다. 본관을 받게 되면 유명한 호족이 되는 거고, 그 유명 호족들은 고려시대 때 대개 과거 시험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을 얻는 것이거든요. 49:05)

 

<해설> 그렇다면 가야의 이름과 지역을 왕건이 마음대로 바꿨다는 것은 무슨 얘길까요?

*인서트-12. 테입<136. 김태식

    (49:09 그 본관제의 실시 초기가 고려 태조 때가 됩니다. 그래서 가야는 연맹체였기 때문에 5가야가 어디다, 라고 이렇게 되면 그곳 중에 있는 호족들이 고려 태조에게 협력한 사람도 있을 거고 반대로 신라 쪽에 연합되었던 사람들도 있을 거거든요, 협조를 했던. 그래서 아마 원래의 지금 현재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5가야가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보기에 그 5가야 중에 어떤 것 두 개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그걸 빼고 5가야는 이게 아니고 이거야 하고 다른 걸 넣은 거거든요.49:59)

 

<해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른바 5가야조 기사의 명칭들은 이렇듯 후대 사람들의 의도가 작용해서 소국들의 숫자도 틀리고, 그 이름들도 상당부분 잘 못 올라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5가야나 6가야라는 말도, 그리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는 가야소국들의 잘못 된 이름들도 올라 있지 않습니다. 가야사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를 근거로 한 ‘6가야 연맹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음악> (브리지)

 


<해설> 그러면 이번에는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았을 ‘임나’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느 시기에 어떤 세력에 의해서 어떻게 변용돼 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임나’라고 하면 일본 인들이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어쨌든 임나라는 이름은 주로 일본서기에 자주 나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라는 말의 사용사례가 세 가지로 나타는데요,

 

*인서트-13. 테입<137> 이영식

   (40:52 한강이남 전체를 가리키는 용례가 있고. 그러니까 백제와 신라를 다 포함해서 임나라고 가리키는 경우가 있죠. 또 하나는 가야 열두 개 나라를 다 아울러서 가리키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김해나 함안이나 고령을 각각 따로 가리킬 때. 즉,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 대국의 위치에 큰 나라의 위치에 있었던 그 나라들을 가리킬 때에도 임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용례 중에서 첫 번째 것은. 하여튼 세 가지 용례가 있습니다. ) 그래서 주로 일본서기에만 보이는 용례니까, 임나라고 하는 것이 고대 일본인들의 이른바 韓 남부 경영론을 펼치기 위한 그런 작명이 아니냐.41:43)

 

<해설> 다시 설명하면 임나라는 말은 가야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본인들이 고대 한반도의 한강 이남을 자신의 식민지처럼 다스렸다는 황당한 주장을 제기할 때 내세우는 것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기 때문에, ‘임나’란, 그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지어낸 이름이 아니냐, 이런 의심을 가질 만하겠지요. 그런데, 임나라는 말은 일본 서기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기록에도 등장합니다.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 멈춘다)

신사신   (내리고) (다급)고구려국 대왕마마, 소인은 신라에서 온 사신이옵니다.

광개토  지금 짐은 궁궐을 떠나 평양성을 순행 중인데 신라 사신이 어인 일로 이곳까지 달려왔는고?

신사신  대왕마마, 지금 저희 신라의 국경에 왜인들이 가득 몰려와서 성(城)을 마구 파괴하고 있사옵니다. 저희 신라국 대왕께서 고구려국 대왕마마께 간곡히 도움을 청하라 하였사옵니다.

광개토  알겠느니라. 짐이 곧 군사를 내어 출병할 것이니 그리 알리도록 하라. 

 

<해설> 서기 399년,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긴급히 구원 요청을 하게 되고, 이듬해인 서기 400년-.

광개토  가자!

 

<효과>  (기병들 출진하여 달려나가는)

 

<해설>  광개토왕은 5만 명이나 되는 기병과 보병을 출동시켜 왜적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합니다. 당시 신라를 공격했던 세력은 왜군뿐만 아니라 백제와 가야군도 연합하여 참전하고 있었는데, 고구려 군사는 내친 김에 가야까지 쳐들어갑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낭독자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러 계속 추격하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해설> 여기서 가야를 ‘임나가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서트-14. 테입<137> 이영식

   (42:15 종발성은 성 이름이니까 놔두고, 그 앞의 나라 이름이 임나가라라고 되어 있고요. 가라라고 하는 건 가야를 가리키는 가라고, 거기에 임나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414년에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비를 세울 때 장수왕이 가야를 임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거죠. 고구려인이 임나라고 썼습니다. 그 다음 신라인 같은 경우에는, 머리가 강하다고 해서 强首라고 하는 분의, 신라의 유명한 문장가로서 저명한 역사적인 인물인데요, 그분의 고향이 두 가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43:04)

 

<해설> 삼국사기 열전편에서 ‘강수’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찾아보면 그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낭독자  강수는 신라 중원경 ‘사량’ 사람으로 그 부친은 ‘석채’였다.

 

<해설> 중원경은 지금의 충청도 충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태종무열왕에게 불려가서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강수   대왕마마, 신은 본래 ‘임나가량’ 사람이온데 이름자를 자두(字頭)라 하옵니다. 

 

<해설> 여기서 임나가량(任那加良 )은 물론 임나가라를 일컫습니다.

 

*인서트-15. 테입<137> 이영식

   (43:30 충주를 임나가라라고 가리킨 이유가 뭔가 했더니 사실은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통합이 되고 거기 사람들을 사민을 시킵니다. 반란의 여지가 있으니까 백성들을 떼어 가지고 사민을 시키는데, 제일 많이 사민을 시킨 중의 하나가 충주였습니다. 충주에 가야금을 탔던 탄금대가 있지요. 우륵으로 관련이 돼서 유명합니다. 우륵이 거기에 사민이 된 셈이죠. 망하기 전에 가긴 갔었습니다마는 사민이 된 셈입니다. 우륵의 예를 봐도 대가야 사람이 사민된 곳이 충주가 저명하다. 바로 그 충주 출신인 강수가 자기는 임나가라인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바로 원래 대가야 계통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거죠.44:22)

 

<해설> 다른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임나라는 말이 일본서기에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장수왕도 광개토왕의 비문에 가야를 임나라고 적었고, 신라 역시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니, 임나라는 말이 일본인들이 지어낸 이름은 아니다, 이런 결론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렇다면 임나라는 말은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요?  우선 일본서기 수인왕(垂仁王) 기(記)에 나오는 설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 ‘에도시대’ 국학의 전통적인 견해를 소개하면, 임나는 ‘미마나’에서 비롯됐다는 설입니다.

낭독자  숭신천황 때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배를 타고 와서  포구에 다다랐다.

가왕자  나는 가라 국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도노아 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라 합니다. 일본국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고 합니다. 처음 혈문(穴門)이라는 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 도도비고(伊都都比古)라는 사람이 자신이 왕이라면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포구와 섬을 맴돌다 이제와 왔사옵니다.

 

<해설> 그런데 가야 왕자가 왜 조정에 도착해보니 이미 숭신천황은 죽은 뒤였습니다. 어쨌든 그 가야왕자는 다음 천황인 수인천황으로부터 벼슬을 얻어서 지냈는데, 3년이 지난 후 그 이제 가야에 돌아가겠다고 얘기합니다.

왜국왕  너희 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지?

가왕자  그렇습니다.

왜국왕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왕을 뵙고 모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너희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가왕자  어떻게 바꾸면 되겠습니까?

왜국왕  돌아가신 미마키(御間城) 천황의 이름을 따서 바로 너희나라 이름으로 하라.

낭독자  이렇게 해서 그 나라의 이름을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서트-16. 테입<136> 김태식

   (51:50 임나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미마나에서 비롯된 것이고, 미마나는 일본의 미마키라는 천황이 있었는데 그 일본서기에 나오는 설화를 보면 가야의 어떤 왕자가 미마키 천황을 흠모를 해서 찾아왔다가 못 보고 그 천황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못 보고 그 다음 천황 때에 가게 되는데, 그 다음 천황이 너는 미마키 천황을 보러 왔다가 못 보고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너희 나라 이름을 미마나로 해라, 그래서 미마키의 나라라고 해서 미마나로 고쳤다라는 설화가 나옵니다. 52:36)

 

<해설> 김태식 교수는 이 주장의 경우 너무 뻔하게 조작의 냄새가 나는 유치한 주장이라고 일축합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오는 변한 12국의 아름들 중에서 미오야마국이 있는데 그 미오야마국을 한자로 임나(任那)로 표기했을 것이다, 그런 학설입니다. 김태식 교수의 얘기 이어집니다.

 

*인서트-17. 테입<136>  김태식

    (53:17 그 미오야마국은 고령일 것이다, 고령 지역의 옛 이름일 것이다, 이렇게 본 설이 있었는데, 그것이 실학자 한진서의 학설입니다. 그런 설이 있는데. 저는 미오야마국이 임나라는 것은 동의하는데 미오야마국은 아마도 창원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원 지역과 A.D. 4세기 당시에 창원 지역과 김해 지역이 하나의 정치체로서 임나가라라고 불렸는데 그것 때문에 그에 연유해서 임나라는 것은 나중에는 김해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54:04)

 

<해설> 그런데 임나라는 말이 우리 말 ‘님의 나라’에서 왔을 것이다,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김해의 별명이 임할 임(臨)자 바다 해(海)자의 임해이기 때문에 수로왕비인 허 황후가 처음 와서 배를 댄 곳이라는 데서 기원하여, 그 포구의 이름은 ‘님개’가 되고, 나라 이름은 ‘님의 나라’라는 의미의 ‘님라’로 됐을 것이란 설명이죠. 그 부분은 이영식 교수의 설명으로 들어보지요, 

 

*인서트-18. 테입<137> 이영식

   (46:35 김해에는 저쪽 용원의 포구 쪽에는 사실 주포, 주군의 주(主)하고 포가 있습니다. 개의 포(浦)가 있는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거기의 원래 지명은 님개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포는 우리말로는 님개입니다. 주하고 님하고 통하는 건데요. 님개, 주포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가락국의 건국자가 왔다고 하는 전승에서 지명이 붙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걸 한 가지 근거로 한다면 님의 나라, 님나, 그게 한자는 맡길 임자는 님으로도 또 발음할 수 있으니까요, 임나로 지금 전해지게 된 게 아닌가.47:27)

 

<해설> 이 교수는 개인적으로 임나의 어원이 ‘님의 나라’에서 왔다는 견해에 찬성합니다. 김해가 다른 가야에 대해서 우리는 ‘주(主)의 나라다’ 즉 ‘님의 나라다’ 라고 했던 데서 임나가 생겨났다는 얘긴데, 김태식 교수는 삼국지에 기록된 변진 소국들 가운데 미마나가 미오야마가 되었고 거기서 임나가 나왔다는 실학자 한진서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얘기합니다.

임나라는 말이 어디서 기원했든, 임나는 김해의 가락국만을 지칭하기도 했고, 고령의 대가야를 지칭하기도 했으며, 혹은 가야소국연맹체 전체를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되었던 임나는 곧 가야를 일컫는 말이었지요.

 

<음악>  (브릿지)

 


<해설>  임나가 가야를 지칭한다는 얘기를 앞에서 했습니다만, 일본 측에서 ‘임나’라는 말 뒤에 ‘일본부’라는 말을 붙이면서 한일 양국간에 지루한 논쟁이 벌이지게 됩니다. 우선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임나일 본부를 뭐라고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할까요?

낭독자  -당시 조선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있었는데 대화(大和) 정권은 임나(任那)라는 땅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 곳에 일본부를 두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가 있었다.

         -변한지방에 진출한 왜인은 대화정권을 배경으로 한반도 경영에 나서 김해가라를 근거지로 하여 낙동강 유역을 공략하여 임나를 세웠다.

         -이곳 임나일본부에는 대화정권으로부터 파견된 역인(役人)들이 주재하여 군정(郡政을 폈다.

 

<해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내용들이지만, 식민사관에 근거한 이런 터무니없는 내용들이 버젓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면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문제점들은 무엇인지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태식 교수가 헤아려 집계한 바에 의하면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일본부라고 줄여 쓴 것까지 포함해서 모두 15번이라고 하네요.

 

*인서트-19. 테입<138> 김태식(2)

    (12:22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일본서기에 5번 나옵니다. 5번. 그리고 일본부라고만 그냥 나오는 것도 있어요. 그걸 합치면 15번이 나오는데 그것은 시기적으로 봐서는 540년부터 50년 사이, 대개. 그 시기 한 10여 년 동안 그 관계기사 속에 나오거든요. 그래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이 명칭상으로는 잘 못 됐어요. 왜냐 하면은 일본이라는 명칭자체는 7세기후반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야는 이미 6세기 중엽에 멸망했는데 그 대 임나일본부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1·3:00)

 

<해설> 우선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명칭에서부터 왜곡의 증거가 잡힙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때가 7세기말경입니다. 임나에 일본부를 두어서 한반도를 식민통치했다는데 임나의 다른 이름인 가야는 이미 6세기 중반에 멸망하고 없었습니다. 설령 한반도 남해안에 무슨 기구를 두었다손 치더라도 그 명칭이 일본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죠.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사료는 다름 아닌 일본서기입니다. 일본서기는 서기 720년에 씌어졌는데요,

 

*인서트-20. 테입<137> 이영식

   (50:21 그 당시가 중국의 중화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720년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에 받아들여서, 일본도 ‘우리도 세계의 중심이다’, 라고 생각을 해서 우리 이외의 만주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나라들은 제후의 나라다, 자신들은 황제의 나라고, 그런 위치 부여를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간단히 말해서 고대 일본족 중화사 상이라든지 소 중화사상이라든지 또는 그게 율령이라고 하는 법 제도 속에 정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율령국가사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51:05)

 

<해설> 임나일본부설을 구성하는 한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황당한 내용의 설화 한 토막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서트-21. 테입<138> 김태식

     (02:08 일본의 제14대 천황에 중애(仲哀)천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금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자면 금모으기가 취민데 그래서 여러 지역을 일본내에서 정벌하는 정복왕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그 중애천황이 하루는 구마소(熊襲)라는 국가를 정벌하려고 했습니다, 구마소는 지금의 규슈 남부지방을 가리키는데요, (그래서 구마소를 정벌하려고 했는데-삭제) 그렇게 이제 중애천황은 민심을 몰아갔어요. 구마소를 정벌해야 된다, 하는 것으로 몰아갔는데 어느 날 그 부인인 신공황후가.          02:54)

 

왜국왕  구마소가 감히 복종을 하지 않고 있으니 짐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구마소를 치고 구마소에 있는 보물을 가져올 것이오.

왕비    구마소 정벌은 아니 되옵니다.

왜국왕  아니, 황후는 어째서 반대하는 것이오?

왕비    구마소는 힘이 없고 쓸모가 없는 나라인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친다 하십니까. 보물이 아주 많은 나라가 바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눈부신 금과, 그리고 비단이 수두룩합니다.

왜국왕  그 나라가 어떤 나라요? 그리고 황후가 어찌 그런 나라를 알고 있다 하는 것이오?

왕비    어제 밤에 하늘의 신이 소첩에게 신탁을 내려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神)    (에코)보물이 많은 나라는 신라국이니라. 네가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낸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 나라가 반드시 항복해올 것이니라!

낭독자   그러나 왕은 신의 말이 믿기지 않아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았으나 넓고 멀기만 할 뿐 그 나라는 보이지 않았다.

 

<해설> 결국 중애라는 그 왕은 신의 말을 무시하고 구마소라는 나라를 정벌 하러갔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신공황후가 임신한 몸으로 신라정벌에 나섭니다.

 

*인서트-22. 테입<138>  김태식

   (04:26 일본의 공식 15대천황은 應神천황으로 돼 있는데 응신천황이 뱃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응신천황한테 신공황후가 물어봐요. 왜 나오실 때가 됐는데 안 나오느냐? 임신한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그러니까 응신천황이 나는 신라를 정벌하기 전에는 안 나오겠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신공황후가 그렇다면 자기가 섭정이 되어서 15대 응신천황의 섭정으로서 신라르 정벌하러 갑니다. 임신 만삭의 몸으로. 05:11)

 

<해설> 설화의 내용이 길어서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신공황후가 만삭의 몸으로 출동해서 신라에 당도하자, 신라의 왕이 싸우기도 전에 바닷가에 나와 있다가 항복을 합니다.  신공황후는 항복 받았다는 징표로 들고 있던 창을 신라 궁궐 앞에다 꽂았는데 큰 나무로 자라났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백제와 고구려도 찾아와서 앞 다투어 신공황후에게 항복을 했다, 뭐 이런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설화입니다.

이것을 신라정벌이라고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다 정벌했다고 해서 삼한정벌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아이가 태어나서 응신천황이 되는데, 나이가 어리니까 신공황후가 섭정을 시작해서 무려 70년가량이나 섭정을 하고, 응신천황은 70세에 왕권을 물려받아서 다시 70년 정도를 다스린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신공황후 섭정 49년째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낭독자   탁순국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군사를 늘려주도록 요청했다. 백제장군 목라근자 등에게 정병을 이끌고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녹국(碌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해설> 그런데 이 때 평정했다는 나라들이 대체로 가야의 소국들입니다. 그 소국을 치는데 신공황후가 백제 장군에게 군사를 동원하도록 명령해서 친 것으로 돼 있을 뿐 아니라 군대를 서쪽으로 옮겨서 고해진(古奚津)이라는 곳과 전남 강진에 비정되는 침미다례를 빼앗아서 백제 근초고왕에게 선물로 주었다, 뭐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얘기들이 일본서기에 수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그 가야7국을 치고 나서부터는 그 지역을 임나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 때 만일 점령했다는 가야 지역에 일본부를 두어서 지배했다면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내용이 나와야 할 텐데 나오지 않다가, 150년가량 지난 뒤에야 임나일본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인서트-23. 테입<138> 김태식

    (08:12 그 후대 6세기 기록을 보면은 임나의, 한 2백년 뒤로 추정이 되는데, 일본부라는 것이 있다고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쭈욱 엮은 거예요. 그 이야기를. 일본, 일제시대 때 학자들이. 그래서 그것을 죽 엮어서 임나일본부라는 (그 이 지금과-삭제)조선시대 때 조선 총독부와 같은 게 김해지역에 200여년 정도 있으면서 그 지역을 주욱 다스렸다는 이야기 스토리가 예날 전설과 일본서기의 후대기록을 토대로 해가고 막 이렇게 엮어져서 만들어진 게 임나일본부설이고 그 일본수설은 후에 역사적인 학설이 돼서. 08:57)

 

<해설> 일제 강점기에 그들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와 관련된 황당한 전설과, 앞뒤가 맞지 않는 가야정벌 기사, 그리고 한참 뒤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말을 버무려서 일본과 조선은 조상이 같다는 이른바 ‘일선동조론’과 연결 짓는가 하면, 한강 이남을 고대 일본이 2세기 동안 경영했다는 남선경영론을 유포함으로써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이죠.

<음악>  (브릿지)

 


<해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학자들 사이에 통설로 여겨져 오던 학설이 바로 출선기관설입니다.

낭독자  출선기관이란 일본식 표현으로서 출장소 혹은 출장기관이라는 의미다. 고대 일본이 200여 년 동안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하였고, 그 중심적 통치기관이 임나일본부라는 해석이다. 

 

<해설> 그러니까 일제가 한반도 강점기에 내세웠던 바로 그 악의적인 식민사관을 엿볼 수 있는 해석이지요.

70년대 가야사를 연구한 언론인 천관우는 일본 학자들이 얘기하는 임나일본부가 사실은 가야지역에 설치된 백제군사령부였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인서트-24. 테입<137> 이영식

    (55:34 그때 인제 신공황후가 쳐서 백제에 선사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 천관우 선생님이 최종적으로 차지한 건 왜가 아니지 않느냐, 백제지 않느냐. 그러면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라고 되어 있어서 일본이 뭘 점령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아니다. 일본서기 기록에도 결국은 백제왕한테 줬다고 하지 않느냐. 그럼 여기에 설치된 건 임나일본부가 아니고 임나백제부일 것이다. 그 다음부터 일본 학계의 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우리 한국 학계의 근거의 하나, 학설의 하나로서 이른바, 제가 이름을 붙여 드렸습니다마는, 백제군 사령부설. 56:22)

 

<해설>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 하니까 그게 아니라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식으로 맞받아친 셈인데, 가야가 일본의 통치도 받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백제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고고학 유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인서트-25. 테입<138> 김태식

    (10:36 200년 동안 가야를 일본이 통치했다면 일본계통 유물이 많이 나와야 되죠. 그런데 안 나옵니다. 그렇게, 한 3-4%밖에 안 나와요. 또 백제가 가야를 몇 백 년간 지배했다면 백제계통 유물이 많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역시 안 나옵니다. 그러면 신라쪽 게 나오냐, 신라쪽 거랑 제일 비슷해요. 가야가 문화권 상으로는 경상도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기는 하지만 신라와 엄연하게 구분되는 문물이 수백년간 계속 지속되고 바로 가 하나 건너 신라와 전혀 다른 것이 계속 유지된다는 것은.11:21)

 

<해설> 1963년, 북한 학자 김석형은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학계의 발상을 180도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 바로 분국설(分國說)이 그것인데요.

김석형  (에코)에, 선사시대 이래 삼한과 삼국의 주민들은 일본열도에 이주해서, 각기 자신들의 출신지와 같은 나라를 건국하여 모국에 대하여 분국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주민들은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고구려의 분국을 만들었고,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들 분국 중에는 히로시마의 돗부와 오키야마에 걸친 지역에 임나국이 있었어요. 임나국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에는 백제국의 분국이, 동북쪽에는 신라계의 분국이 있었고, 동쪽에는 고구려의 분국이 있었습니다.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이 가야를 식민지배하기 위해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 설치한 기구가 아니라, 일본열도에 있었던 임나, 즉 가야의 분국을 말한다, 그런 분석입니다.

자,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일본학자들 중에서 임나일본부가 ‘가야의 왜’였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나옵니다. ‘이노우에히데오’라는 학자의 주장인데요 들어보시죠.

일학자  (에코)에, 선사시대부터 가야 지역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교류가 무척 활발했습니다. 일본열도에 한반도의 주민들이 이주하여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야지역에도 일부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왜인들, 혹은 왜인과 한인들과의 혼혈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다, 이런 얘기죠. 말하자면 가야지역에 진출해 있던 왜인들의 자치기관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가야지역에 설치한 일본의 통치기구였고 일본이 가야지역을 식민지배 했다면 일본서기든 어디든 통치에 관련된 기록이 나와야 할 텐데 임나일본본부라는 말이 한결같이 외교에 관련되어서만 등장한다는 점도 가야에 대한 식민지배설의 허위를 입증한다고 이영식 교수는 설명합니다.

 

*인서트-26. 테입<137>  이영식

   (57:14 통치를 했다면 세금을 거둬들였다든지 인민을 강제를 했다든지 그런 기록들이 있어야 되는데 임나일본부라고 하는 스물여섯 번의 용례를 다 놓고 보십시오. 그런 기록은 통치에 관련된 기록은 한 자도 없습니다. 전부 외교에 관련된 기록일 뿐입니다. 그러면 군정에 관련된 기록은 있느냐. 가령 예를 들어서 가야에서 가야의 인민을 백제의 군사로 차출을 한다든지 가야의 우마를 백제의 군사 행동을 위해서 징발을 한다든지. 단 한 자도 없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외교에 관련된 기록뿐이거든요. 따라서 이것은 통치기관이라든지 행정기관이 2백 년 동안 있었다면 통치나 군정에 관련된 기록들이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58:06)

 

<해설> 뿐만 아니라, 임나일본부가 당시 가야에 있던 왜국의 대사관과 비슷한 성격의 기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일본서기를 통해서도 증명 됩니다. 

*인서트-27. 테입<138> 김태식

   (19:02 그 당까지는 가야를 통해서 주로 선진문물을 받고 교역을 했었는데 그 때 와서 가야가 좀 약화되고 백제가 막 발전하기 시작하니까 백제를 선진문물 교역선으로 손을 잡을 것인가 또는 가야를 손을 잡을 것인가 이것을 선택해야 됐었어요. 신라에는 아직 그런 외교에는 별로 눈을 못 뜬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그러한 정세를 알아보려고 왜에서 한반도 쪽으로 사신을 파견합니다. 그래서 한 번은 백제 쪽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한번은 신라 쪽으로 사신을 파견하는데 왜의 사신들이 백제를 가든 신라를 가든 일단 낙동강 하구에 들어왔다가 가야 돼요. 그래서 낙동강 하구에 도착을 하면 임나일본부 사람들이 가요. 19:56)

 

<효과> (포구-파도 찰박거리는)

영접사  먼 길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백제에 가는 사절단이 아니옵니까?

왜사신  그렇소. 우리 사절단 일행을 빨리 객관으로 안내하시오.

영접사  예,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이번에 백제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것입니까?

왜사신  당신들은 알 것 없소. 천황폐하의 국서에 담긴 내용을 어찌 당신들에게 얘기할 수 있겠소. 그 내용이 궁금하거든 다음에 백제국왕에게 물어보시오.

 

<해설> 나중에 왜에서 신라로 사신을 보낼 때에도 임나일본부를 경유하는데, 그 때에도 마찬가지로 신라에 무슨 임무를 띠고 가는지 묻는 그들에게 궁금하거든 신락국왕에게 물어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만일 임나일본부가 왜의 지배기관이었다면, 요즘 식으로 치면 자국의 대사관 직원인데 그렇게 따돌렸겠느냐, 이런 얘기지요. 따라서 그들은 혈통상으로 왜인과 아무리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다큐멘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시간부터는 가야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엔딩)

 

-출처:kbs라디오 역사를찾아서 대본-

출처 : 새로운 시작, since 2006.04.02
글쓴이 : 칼리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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