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백제·남부여·왜·신라·가야·발해

[스크랩] 가야 어떤 나라인가?

monocrop 2007. 11. 2. 04:20

 

<해설> (인사)

청취자 여러분은 ‘가야’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학교를 어느 시기에 다녔느냐에 따라서 가야 역사에 대한 인식이 각각 다르겠지요. 1990년대 이전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라면, ‘신비의 왕국’이라든가 ‘5가야’ 혹은 ‘6가야’, ‘우륵의 가야금’ 정도의 코드로 가야사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효과> (중학교 교실-아이들 웅성)

학생    선생님, 이번 국사 시험 범위 좀 가르쳐 주세요. 가야도 나와요?

교사    그럼 가야도 나오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교과서에 몇 줄 안 나오니까 달달 외워라. A.D 42년에 경상도 김해 땅에 가락국을 세운 시조는 누구?

학생들  “김수로왕이요!”

교사    여섯 가야가 무엇 무엇이라 그랬지? 어디 순서대로 한 번 말해보자.

학생들  (입 맞춰서)“금관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소가야.”

교사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때는 언제?

학생들  “532년이요”

교사    경상북도 고령에 있던 대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때는?

학생들  “562년이요”

교사    됐다. 그만하면 가야사 문제는 100점이다!

 

<해설> 학교 교육 현장에서 가야사에 대한 대접이 대체로 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제7차 교육과정에 의거해서 2003년에 발행된 국사교과서의 경우 가야사에 할애된 분량도 늘었을 뿐 아니라 기존의 ‘6가야설’이 가야 당시의 것이 아니고 신라말 혹은 고려초에 성립된 개념이라는 분석에 따라, 가야사를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분류하는 등, 가야의 역사를 다루는 틀 자체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는 그 시간적 분량이나 가야가 차지했던 강역(疆域)에 비해 턱없이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불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대 사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분야가 바로 가야사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의 연구에 의해서 기존의 가야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가야가 차지하고 비중이 어느 만큼인지, 청취자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해설> 먼저, 청취자 여러분에게 가야사 전반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주요 쟁점들에 대한 견해를 얘기해줄 두 사람의 가야사 전문 연구자를 소개하도록 하죠.

우리의 고대사학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이외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도외시되고 있던 상황에서, 1980년대에 과 감하게 가야사 연구의 외길로 들어선 두 학자가 있었습니다. 먼저, 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가 어떤 계기로 가야사 연구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들어보기로 하죠.

 

*인서트-1. 테입>137> 이영식

    (08:37 제가 개인적으로 가야사를 공부해야겠다, 생각했던 것도, 연표를 이렇게 보면 5백 년, 6백 년 독자적인 역사가 있는데 가야금밖에 아는 게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들은 가야금 이외에는 뭐 한 게 없는가. 그래서 저도 공부를 사실 시작을 했었고요. 그 이후에 약 한 사반세기 정도 지나오면서 가야사 연구는 정말 우리 고대사 연구자뿐만이 아니고 한국 사학계, 한국 역사학계 전체에서 가장 많은 진전을 보인 분야를 들어라, 그러면 아마도 제 생각에는 근대에서 실학이라든지 그것하고 견줄 정도의 고대사에 있어서는 가야사 연구입니다. 제가 가야사 연구자라서만은 아니고요. 09:25)

 

<해설> 당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역사적 가치가 없는 ‘거짓말 책’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 교수는, 그 일본서기를 연구해서 왜곡을 걷어내면 부족한 가야 역사의 상당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 유학, 1993년에 ‘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라는 저서를 도쿄에서 발간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옛 가야의 본거지인 경상남도 김해에 거주하면서 가야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영식 교수가 ‘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를 발간했던 바로 그 해에, 가야의 역사를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체계화한 저서 ‘가야연 맹사 연구’를 발표한 연구자가 있었습니다. 이미 일 년 전인 1992년에 ‘가야제국연맹의 성립과 변천’이라는 논문으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김태식 현 홍익대 교수가 그 사람입니다.

 

*인서트-2. 테입<136> 김태식

    (23:40 그 시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많이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 저보고 공부해 봤자 너는 별로 얻을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그런 상태였는데. 저는 문헌사만 가지고는 가야사는 안 되겠다 생각을 해서 고고학 자료를 종합하고 이것을 고구려나 백제, 신라, 왜의 유물들과 비교 하면서 가야사를 새로이 정립해야 되겠다 하는 역사고고학적인 방법론이라고 할까요, 그러한 것으로 새로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24:21)

 

<해설> 김태식 교수는 2002년에 가야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3권짜리 가야사 개설서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를 발간했는데, '김 가야'라는 별명에 걸맞게, 지금까지 나온 모든 가야사 관련 자료와 연구 성과물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이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자, 그럼, 가야사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50대 초반의 이 두 의욕 넘치는 학자들과 함께 가야의 역사를 탐색해보기로 할까요?

 

<음악>  (브릿지)

 

<해설> 우선 가야의 역사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를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가야 관련 기록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가야왕  신라국 대왕마마, 소인은 금관국왕이옵니다. 소인이 다스리던 가락국을 대왕마마께 바치겠사옵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법흥왕  오, 금관국왕이 왕자들을 데리고 와서 가락국을 바치겠다 하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짐이 그대를 높은 벼슬로 예우할 것이니라.

낭독자  법흥왕 19년, 금관국왕 김구해가 왕비와 장남 노종, 2남 무덕, 3남 무력과 더불어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나라를 내어주므로, 왕은 이를 예의로써 대우하고, 제일 높은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그가 다스리던 가락국을 그의 식읍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해설> 김해에 자리하고 있던 금관국 즉 가락국의 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바친 때가 서기 532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서기 562년-.

이사부  대왕마마,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옵니다.

진흥왕  무어라 하였느냐? 아니 되겠다. 기병5천을 내어줄 것이니 장수 이사 부는 사다함과 함께 당장 출동하여 가야를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오도록 하라!

이사부  예, 대왕마마. 자, 가자!

 

<효과> (군사들 몰려가는)

낭독자  진흥왕 23년 9월, 대가야가 모반하므로 왕은 이사부에세 명하여 이를 토평하게 하였다. 사다함을 그 부장(部將)으로 삼았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진격하여 성안으로 들어가 백기를 세워 놓으니 성안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가야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야사의 맨 끄트머리는 서기 562년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가야의 출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할까요? 삼국유사의 연표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낭독자  건무18년 임인(壬寅) 3월에 수로왕이 알에서 나서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알 속에서 났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해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도, 건무18년에 하늘에서 알이 내려와 그 속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그가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건무는 중국 후한 광무제의 연호인데 건무 18년이면 서기로는 A.D 42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가야의 역사가 기원후 42년에 시작되었고, 고령에 있던 대가야가 마지막으로 신라에 통합됐던 때가 서기 562년이니까, 가야는 520년간 존재했다, 이런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가야서 연구자들은, 가야사의 출발이 기원 후 42년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인서트-3. 테입<136> 김태식

    (01:20 고고학적인 유적이나 이런 걸로 봤을 때는 가야사도 백제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1세기 초 정도에 시작이 되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초에 시작됐다고 보고. 끝나는 것이 A.D. 562년이니까 그것은 백제가 멸망하는 A.D. 660년보다 98년 앞선 시기입니다. 그래서 가야사 전체의 시기로 봐서는 우리가 보통 삼국시대라고 하는 시기의 한 100년 정도 빼고 나머지 600년 이상이 포괄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가야사는 삼국시대의 전체 시기의 거의 대부분을 망라하는 시간을 점유하고 있어서. 02:12)

 

<해설> 김태식 교수는 옛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유적 등으로 미뤄볼 때 가야가 기원후 42년에 건국된 게 아니라 백제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1세기경에 시작됐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편찬자인 승려 일연은 왜 기원후 42년에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했다고 적었을까요?

 

*인서트-4. 테입<136> 김태식

    (04:06 신라가 7세기 중엽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한 이후에 자신이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였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삼한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마한, 진한, 변한이고, 그 중의 변한이 가야의 전신인데요.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98년 전 정도에 멸망시켰던 가야에 대해서는 이미 처음부터 신 라 땅인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습니다. 04:46)

 

<해설> 무슨 얘기냐 하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삼한을 통일하였다’고 선언합니다. 본래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이고, 변한은 가야의 전신이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삼한을 통일했다는 얘기는 마한의 백제와 변한의 가야를 진한의 신라가 접수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신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간주해서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한 것을 삼한을 통일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셈이죠.

 

*인서트-5. 테입<136> 김태식

    (05:31 현재 삼국사기를 보면 가야의 모든 영역이 처음부터 박혁거세 창건 때부터 신라 영역인 것처럼 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내용인데 그렇게 돼 있고, 이러한 인식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거치면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야가 뭔지 모르고 고구려, 백제, 신라만 한국 고대사에 있는 줄 알고 지내 왔기 때문에 가야사가 그렇게 없는 것처럼 오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06:12)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이영식 교수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하죠. 이 교수 역시 가야의 출발을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기원전 1세기경으로 잡습니다. 그 근거로서 옛 가야지역인 남해안에서 발굴된 무덤 유물을 들고 있는데요,

 

*인서트-6. 테입<137> 이영식

     (01:32 남해안에는 지금 청동기 문화 단계의 고인돌이라고 하는 유명한 무덤이 있고요. 그 다음에 그 뒤의 시기가 되면 나무로 관을 짜는 목관묘라고 해서 그때부터 철기가 나옵니다. 철기 문화 단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무덤이 등장합니다. 남해안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가 교체가 되는 게 대개 기원전 2세기 내지 1세기, 대개 그 시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가장 큰 획기적인 전환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대개 기원 전후로 한 시기에 수로왕의 가락국 건국 이야기를 맞춰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고. 02:17)

 

<해설> 다시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 세력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고인돌을 무덤으로 쓰던 토착민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경에 묘제가 목관묘 형태로 바뀌면서 부장품으로 철기가 나온다, 따라서 수로왕 세력이 기원전 1세기경에 선진문물인 철기문화를 가지고 김해지역에 나타나서 청동기문화 세력인 토착인들을 제압하고 가야를 세우게 되었다, 이런 분석입니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습니다.

 

학자1   (책장 넘기고)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신라편향의 서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야 부인 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삼국유사에 올라있는 기원후 42년 건국 기록을 못 믿을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학자2   남해안 지역의 출토유물 중에서 기원전 1,2세기경에 고인돌이 목관묘로 바뀌고 청동기 문화와 철기문화의 교체가 일어나는 걸 두고 그 시기를 가야의 건국시점으로 잡기 보다는, 저는 차라리 기원후 2,3세기쯤을 가야의 출발지점 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자1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학자2   같은 목관묘지만 그 시기에 이르면 무덤의 크기가 대형화되고 부장품의 질적인 수준도 이전의 목관묘보다 훨씬 높습니다. 따라서 그 시기에 김수로왕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도래하여 가야를 건국하지 않았겠느냐…

 

*인서트-7. 테입<137> 이영식

    (02:40 똑같은 무덤인데 목관묘가 대형화된다든지 그 안의 부장품이 고급화된다든지 그게, 약 한 2세기로 잡는 분도 있고 3세기로 잡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야 건국의 처음으로 보는 그런 생각도 있는데, 저는 그런 똑같은 무덤의 규모의 확대 또는 부장품의 고급화가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단계, 그게 바로 보다 더 큰 이 남해안 지역에서 처음 가야 연합이 형성될 때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게 바로 가야사의 시작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03:22)

 

<해설> 일단 가야의 역사가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엇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다고 보면, 서기 562년에 멸망했으니까 그 역사가 600년에 이릅니다. 이영식 교수는 고대사 연표를 펴놓고 가야의 600년 역사가 차지하고 있는 시간적 길이를 가늠해보라고 권유합니다.

 

*인서트-8. 테입<137> 이영식

     (03:06 고령의 대가야가 망하는 게 562년인데 백제가 망하는 게 660년입니다, 신라에 통합되는 게. 그로부터 8년 뒤에 고구려, 저 어마어마한 고구려가 통합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가야가 우리 고대사의 무대에서 종말을 감춘 지 꼭 백 년 뒤의 일입니다. 그 백 년과 그 앞의 5백 년 정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독립적인 역사와 문화를 영유했던 우리 고대사의 한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5백 대 백, 이렇게 되겠지만 지금까지는 백 년 먼저 망한 사실이 오히려 중시되어 왔습니다.04:51)

 

<해설> 가야는 백제보다 불과 100년 먼저 망했을 뿐, 망하기 이전 500년 동안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된 세력으로 그 문화를 지켜왔기 때문에 우리 고대 역사에서 가야가 홀대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항변입니다.

 

*인서트-9. 테입<137> 이영식

   (05:16 이 점을 간과를 하면 우리 고대사, 가야사 자체의 부당한 대우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민족 고대사 전체의 복원에 있어서도 이 빠진 복원이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간단한 산술적 계산에서 나오는 의미조차도 지금까지 우리가 별로 크게 주목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가야사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 지역에 있어서는 이 지역 고대사의 문제도 있고, 고대 영남인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 우리 민족사로 보면 우리 고대사의 완전한 복원,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 가야사는 새롭게 조명돼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05:57)

 

<해설> 고구려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일정부분 고구려 편향으로 사고를 하고, 백제나 신라의 전공자들 역시 자신이 전공한 나라를 중심에 두고 견해를 피력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가야사를 연구해온 학자들 역시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가 차지했던 시간과 공간의 크기에 비해 가야의 역사가 너무 푸대접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영식 교수는 앞에서 가야의 역사가 고대 영남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언급을 했는데요, 김태식 교수로부터 당시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차지했던 강역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들어보기로 하죠.

 

*인서트-10. 테입<136>  김태식

   (02:35 크게 봐서 가야 연맹체의 중심지역은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 그리고 소백산맥의 동쪽,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면서 가장 강역이 넓었을 때는 낙동강을 넘어서 창녕, 양산, 부산 지역을 포함하고요. 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을 넘어서 전라남도의 여수, 순천 일대, 그리고 전라북도의 남원, 임실 일대를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 남한 전체 영역의 한 3분의 1. 03:28)

 

<해설> 이들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야의 역사가 고스란히 그 지역의 고대사이기도 하다, 이런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김태식 교수는 자신의 저서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의 서문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라는 말 대신 가야를 포함해서 ‘사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의 어느 지점부터를 4국시대라고 불어야 한다는 얘길까요? 문제는 삼국시대 혹은 사국시대라고 얘기할 때 들어가는 나라 국(國)자의 이미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서트-11. 테입<136> 김태식

    (09:18 실질적으로는 국가 발전 형태는 신라가 먼저가 아니라 고구려가 제일 먼저 건국을 했고 그 다음에 백제, 신라의 순으로 건국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건국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강역을 갖춘 고대 국가를 건설했느냐, 아니면 조그마한 군장 사회에서 조금 더 나아간 소국, 작은 나라를 건설했는가에 따라 다른데요. 신라가 고대 국가로서의 신라를 건설했다고 하는 것은 대개 4세기 후반 나물왕 때나 5세기 전반의 눌지왕, 이런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10:00)

 

<해설> 우리가 백제사 탐색과정에서 살펴봤듯이 온조 일행이 북방에서 내려와 처음 한성에 터를 잡았을 때는 마한 54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국가로 쳐서 삼국시대라고 부른다면 옳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한 것으로 보이는 4세기나 5세기 때부터 삼국시대라고 부른다면 그 이전의 역사를 또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김태식 교수가 분류한 고대의 국가별 시대구분 내용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음악> (빠른) UP & BG… 

낭독자  -기원전 2333년부터 고조선이 멸망했던 기원전 108년까지는 고조선시대라고 부른다.

         -고조선이 멸망한 뒤,  낙랑 대방군이 멸망한 서기 314년까지는 북쪽에 부여, 고구려, 동옥저, 동예가 있었고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여러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열국시대라고 칭한다.

         -그 이후 부여가 멸망한 서기 494년까지는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다섯 나라가 각축을 벌였으므로 5국시대라 부르고,

         -부여 멸망 후 가야가 멸망했던 562년까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라 해야 마땅하며,

         -이후 서기 660년에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는 모름지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였다.

 

<해설>  그 뒤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와 신라만 남았을 시기는 2국시대,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하기 이전의 30년간은 신라만이 존재했으므로 통일신라시대가 되고, 남쪽에 신라 북쪽에 발해가 존재했던 시기는 남북국시대라 불러야 한다, 이런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김태식 교수의 시대별 분류에 의하면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존재했던 시기는 가야가 멸망한 후 백제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100년에 불과하고, 그 이전에는 가야를 포함해서 사국시대라 해야 하는데 가야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뭉뚱그려서 삼국시대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얘기지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럼 지금부터는 우리 학계에서 가야사가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지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야가 우리 역사에서 홀대받은 가장 큰 이유는 문자기록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유일무이한 기본 자료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인데, 거기에는 글자 그대로 삼국의 역사만을 위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서트-12. 테입<137> 이영식

    (06:22 삼국사기 같은 경우에 이미 이름이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의식한 삼국사기가 됐고. 사실은 삼국사기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연 스님이 쓰셨다는 삼국유사도 사실은 삼국이라는 틀, 고구려, 백제, 신라 이외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특히 삼국사기 같은 경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 삼국만의 본기를 설정을 했고 가야는 신라본기에 관련되는 기사로 나올 뿐입니다. 삼국유사 같은 경우에는 오가야조도 있고요, 가락국기라고 하는 것도 다시 축약을 해서 싣기도 하셨지만 기본적으로 서명은 삼국유사였습니다. 07:07)

 

<해설> 무려 6백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가야인 자신들이 남긴 기록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해지는 가야사에 관련된 기술들은 훨씬 후대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 자체도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전쟁을 했거나 외교교섭을 했던 상대방이나 제3국이 기술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전기 가야의 역사를 전하는 최초의 기록은 중국 사서인 삼국지인데요, 삼국지 위서동이전 변진(弁辰)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낭독자  변진은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다. 그 12개국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악노국(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었다.

 

<해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삼국지의 이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가야가 6개국이었다는 설정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실린 기록 중에서 또 하나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보이는데요, 다름 아닌 철기문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낭독자  그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낙랑과 대방에도 철을 공급하였다.

 

<해설> 그 다음, 가야사의 단편을 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우리 문자 기록으로 광개토대왕릉비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록에는 가야가 임나가라와 안라(安羅)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다음, 일본서기에는 가야사와 관련된 가장 많은 양의 기록이 눈에 띄지만, 고대 일본의 소중화주의적인 역사관에 의해 기술돼 있어서 비판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위주의 고대사에 가려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가야사를 연구대상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들이었습니다. 김태식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3. 테입<136. 김태식

    (18:13 가야사를 연구하는 실학자들은 대개, 육가야 연맹설이라는 게 나오고 있는데, 삼국유사에요, 그래서 가야는 육가야가 있었고 그 육가야가 어디 어디였는가 하는 위치를 비정하고, 가야 발전의 원동력은 뭐였는가, 그래서 주로 해양으로 발전한 것에 있었다 하는 것을 두고 실학자들은 가야는 무역을 위주로 발전해 온 나라였고 그 중에 김해가 맹주국이었다, 이런 정도의 연구 성과를 거두면서 막 활발하게 되려고 했었습니다, 가야사 연구가.19:02)

 

<해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는 주로 삼국유사 등 문헌에 나오는 가야 관련 지명이 어디냐 하는, 지명 고증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이영식 교수의 논문 ‘가야사 연구의 성과와 전망’에 실린 실학자들의 가야사 연구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낭독자 실학자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변한을 백제의 기원으로 보거나 고구려의 전신으로 보는 것을 비판하고 변한이 가야의 전신에 해당 한다고 주장하였다.

 

낭독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부여나 발해와 마찬가지로 가락과 대가야에 대한 고증을 전개하였다. 가락국과 대가야의 왕계를 채록하고 가야의 판도를 지도에 나타내기도 했다. 지도에서 고령가야와 대가야를 별도로 구분하는 하는 등 혼돈을 빚기도 했으나, 삼국유사와는 다르게 전라도의 동남부 지역까지 가야문화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근거 제시는 없었지만 근래 전북의 남원 임실 장수 진안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가야문화의 고고학 자료와 일치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낭독자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가야에 관해 가장 많은 서술을  담고 있다. ‘삼한총고’, ‘변진고’, ‘ 변한별고’ 등의 가야사 관련 논고(論考)를  남겼다. 가야관련 어우너 및 지명 고증에는 지금도 참고할만한 점이 적지 않다. 근년까지 부산의 동래로 비정되고 있던 독로국(瀆盧國)이 위치를 거제도로 비정하였는데, 거제도의 옛 이름인 상군(裳郡)이 ‘두루기’로 발음 되는 것에서 독로와 두루가 음운상 통한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근년에 거제도에서 관련유적이 확인되기 시 작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다산의 이러하 고증은 다시 빛을 보고 있다 할 것이다.

 

<해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연구로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려던 참이었는데,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분위기를 타고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우리를 병탄함으로써 그 열기가 꺾이게 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일제 강점기는 우리 역사연구 전체의 암흑기였지만 특히 가야사의 암흑기이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가야사를 식민사학으로 분칠하면서 가야의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된 것입니다. 일제는 조선합병을 전후로 해서 일선동조론, 타율성론, 남선경영론 등을 주창했는데-,

낭독자  언어와 형질에서 같은 뿌리를 가졌으며, 고대의 한국과 일본은 형제와 같은 역사를 영위하였기 때문에, 1910년의 합병은 동일한 자손이 다시 합쳐진 것에 불과하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이러한 일선동조론의 틀에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는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었다.

 

낭독자   일제는 러일전쟁을 게기로 만주에 진출하면서 한국사를 중국과 일본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도니 것으로 강조하였는데 가장 자주 거론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임나일본부였다. 고대일본이 가야를 직접 지배하고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하면서 가야에 두었단 통치기관이 바로 일본서기에 기술된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 또는 고구려와 일본의 사이에서 타율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설> 뿐만 아니라 1936년에 조선총독부가 무려 30만권이나 간행했던 ‘조선의 길잡이’에서는 일보이 가야지역을 거점으로 삼아서 한반도의 남부지역을 통치했다는 이른바 남선경영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해방 후 60년대까지 가야사는 거의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들어 옛 가야 지역에서 신라와는 또 다른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그 유물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과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인서트-14. 테입<136> 김태식

    (20:57 김철준 교수는 그걸 토대로 해서 아마 가야는 육가야가 있다가 나중에는 가야가 두 개로 통합이 되어서 양가야연맹체로 있는데 하나로는 통합을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어요. 그러나 그것도 가야 유물, 고고학이 잘 원활하지 않아서, 그리고 또 당시에 고고학 자료들이 잘 정리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느낌만으로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나오는데 70년대 후반부터 가야 지역에서 유물들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21:39)

 

<해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고고학의 수준이 대단히 미약했는데, 이영식 교수가 경험했다는 사례를 들어보시죠.

 

*인서트-15. 테입<137> 이영식

    (07:56 가야사에 대해서 저 앞의 김해평야 같은 경우에는 가락국이 왕국이 어떻게 발달했는가. 저희들이 예전에 시험을 볼 때에는 저 넓은 김해평야에서 나오는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고대 왕국을 일찌감치 꾸릴 수 있었다, 이렇게 쓰면 우리 선생님들은 백 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그렇게 쓰면 빵 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김해평야는 그때 평야가 아니었고 바다였기 때문이죠. 뭘 말씀드리려고 하느냐면 지금은 상식처럼 되어 있는 그러한 가야사의 입지에 관한 기초적인 기록 같은 것들을 과거에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죠. 08:35)

 

<해설> 지금의 김해평야가 고대국가시기에는 바다였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했을 만큼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가야사 연구에 큰 획을 그은 학자중의 한명이 천관우였습니다. 그는 일본서기를 가야사 연구에 비판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 학자이 기도 했습니다. 이영식 교수 역시 천관우의 영향을 받았다는데요,

 

*인서트-16. 테입<137> 이영식

    (11:07  1975년에 돌아가신 천관우 선생님이 처음 복원가야사라고 하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를 하시는데, 지금도 그 냄새가 코끝에 생생합니다. 그때는 등사본이었습니다. 철필로 쓰셔 가지고 그걸 잉크로 당신이 직접 미셔서 저희들한테 나눠 주고 저희가 그걸 발표초를 받아 봤던 기억이. 등사 잉크 냄새가 코끝에 있을 정도입니다. 거기서 처음 천관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일본서기는 거짓말 책은 아니고 흥미로운 책이다, 이런 발언을 하셨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선생님들은 점잖지 못하게 그런 책 보는 거 아니야, 위서로 생각을 하셨죠.11:55)

 

<해설>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일본서기는 복어라는 물고기에 비유되곤 합니다. 중국의 중화사상을 본받아서 일본중심의 이른바 소(小)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기술하다보니 그 왜곡의 정도가 심해서 그대로 받아드리면 치명적인 독이 되지만 잘 걸러내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면 가여서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지요.

 

*인서트-17. 테입<137>이영식

   (12:40 사실 5세기, 6세기, 일본의 왕대기로 말하면 개체왕, 흠명왕, 그렇습니다. 게타 이 긴메이, 이렇게 얘기하는 두 개의 왕대기를 보면 이건 일본서기, 일본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잘 아시는 분도 계시지만 두 개의 왕대기를 보면 90퍼센트가 전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 관련되는 기사들이고요. 그걸 우리 韓 계통의 관련 기사라고 한다면 그 중의 다시 80퍼센트 가량은 전부 가야에 관한 기술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복어 같은 그런 입장에 있는, 고기는 맛있는데 독이 있어서 독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 기사를 사용 할 수 없습니다. 13:29)

 

<해설> 천관우가 발표했던 가야사 관련 논문으로 ‘복원 가야사’가 유명한데, 그 논문은 고인이 된 후에 발간된  ‘가야사 연구’라는 책에 수록돼 있습니다. ‘복원 가야사’라는 논문의 서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천관우  (노년-에코)가야사는 백제사 신라사에 비해 그 내용이 모호하여 줄 거리조차 세우지 못해온 형편이다. 그것은 물론 사료의 부족으로 온것으로서 가야의 사라면 삼국유사이 가락국기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몇 개의 연대기가 거의 전부요, 그 밖에 약간의 단편적인 기록이 있긴 하지만  가야사의 전과정을 살피기에는 너무도 소략하다. 여기사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하게 된 것은 한국, 중국 고문헌의 재음미와 특히 일본서기의 활용으로써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설> 천관우가 일본서기를 복어에 비유하면서 비판적으로 활용하기를 권했다는  이영식 교수의 얘기가, 이 논문의 서문을 통해 뒷받침 된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천관우는 일본인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너무 염두에 두었음인지, 가야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제의 식민지였다고 설파합니다.

 

*인서트-18. 테입<136> 김태식

    (22:13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명확치는 않지만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라고 임나일본부설에서 얘기하지만 당신 생각으로는 백제의 식민지였을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일본서기에 대한 것을 역사 자료들을 약간 오해하셨다고 할까요. 그러한 생각 속에서 가야를 일본의 식민지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주체적으로 백제의 식민지였다, 이렇게 하면 일본 쪽에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설명했고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죠.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22:58)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가야의 명칭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가야는 ‘가야의 모든 나라’를 의미하는 ‘가야 제국(諸國)’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단일 국가가 아닌데다, 그 명칭이 가야, 가라, 가락, 구야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 같은 가야라는 음을 가진 경우에도 한자로 표기할 때, 더할 가(加)자에 어조사 야(耶)자를 쓰는 가야가 있는가 하면, 그 앞에다 사람 인(人)변을 붙이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역사공부 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영식 교수는 그 이유로서, 가야인 스스로가 자기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3자의 입장에 따라서 마음대로 부르다 보니 그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김태식 교수의 견해도 같습니다.

 

*인서트-19. 테입<136>  김태식

    (27:14 가야가 자기 스스로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멸망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발음 자체는 가야, 가라, 가랴, 이런 것과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것을 아마 중국 사람들이 처음 음차로 했을 때는 구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백제,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라라는 것은 아마도 일본 문화가 백제 계통의 한자 표기법을 통해서 정착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가라는 백제 계통에서 이쪽을 부를 때 가라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이고요. 가야는 지금의 경상도 사람들, 신라 사람들이 부르기에는 가야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28:07)

 

<해설> 가야의 명칭이 다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야가 최후까지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나라의 연맹체로 존재했기 때문에 각각의 이름이 달랐다는 얘기죠.

 

*인서트-20. 테입<137> 이영식

    (15:09 우린 육가야라고 배웠지만 사실은 아니고 일본서기라든지 기록을 대조를 해보면, 삼국지와, 열두 개 정도의 나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열두 개 나라들이 최종적으로 신라에 각개격파당할 때까지 통합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라 이름도 우선 기본적으로 열두 개가 있었겠죠. 그 열두 개 이상 있는 나라에다가 또 제3자에서는 열두 개의 나라를 한꺼번에 지칭할 필요가 있는 그런 명칭도 또 있는 거고요. 그런 명칭이 고대 왜인에 의해서 붙여지기도 하고 신라인에 의해서 불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15:48)

 

<해설> 또한 똑같이 ‘가야’로 발음되는 경우에도, 가(加)자 앞에만 사람인(人) 변을 붙이거나, 야(耶)자 앞에만 사람인 변을 붙이거나, 혹은 양쪽 다 붙이는 는 다양하게 표기되는데 그것은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이 승려였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인서트-21. 테입<136>  김태식

    (29:45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일연이라는 스님이 지은 역사서고요, 그분이 가야를 인변이 붙어 있는 가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부다가야라든가 가야성이라든가 하는 석가모니와 관련된 불경 기록에 인변이 붙은 가야를 쓰거든요. 그래서 가야가 옛날부터 불교와 많은 관련이 있는 국가였다라는 것을 하려고 주장하려고 앞에다 인변을 붙여서 가야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오가야, 육가야 하는 것들이 대개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소가야 하는 게 다 인변이 붙어서 나오고 있거든요. 30:28)

 

<해설> 또 하나, 같은 이름이 시기에 따라서 다른 나라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야’혹은 ‘대가야’라는 이름이 어느 시기에는 김해의 있는 나라를 지칭했다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고령의 가야를 칭하기도 했다는 얘기죠.

 

*인서트-22. 테입<136> 김태식

   (37:16 4세기 말, 5세기 초까지는 김해에 있는 가야 고분군에서 큰 고분군이 나오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5세기 이후로는 김해 쪽은 고분이 굉장히 작아지고 고령 쪽 고분이 커집니다. 그래서 가야라는 것은 가야라는 말은 초기에는 가야 연맹체의 맹주국의 이름이었고 그 이름은 김해에 있는 나라, 그게 가야국인데 가야국의 이름이었는데, 후기에 와서 김해의 가야국이 약화되고 고령에 원래 있었던 소국, 이름은 반파국인데요, 반파국이 강해지면서 자기가 가야라는 이름을 써서. 38:09)

 

<해설> 다시 설명하면, 김해에 가야국이라는 맹주국이 있을 때 고령에 있던 나라는 반파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가야제국의 중심이 고령으로 옮겨가서 고령 쪽 세력이 가야, 혹은 대가야를 자처하고 행세할 때에는 김해의 나라는 남가라나 남가야 등으로 불렸다는 것 입니다.

또한 반파국의 경우 본래는 ‘동반하다’ 할 때 쓰는 짝 반(伴)자를 썼는데, 제3자가 호칭할 경우 글자 자체를 다른 글자로 바꿔 부르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경우가 그랬는데요,

 

*인서트-23. 테입<136> 김태식

     (39:21 백제 계통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양직공도라는 곳에서는 반파의 반 자를 반역할 반(叛)자를 쓰고 파 자를 파도 파(波)자를 써 가지고 반역의 파도와 같은 놈들, 이런 식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반파국, 즉 대가야와 백제가 전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나쁜 식으로 기록을 해 놓은 거고요. 원래는 이발음은 반파인데 한자를 뭘로 기록했는지는 각국에 따라 다른 거죠. 예를 들어서 고구려도 광개토왕릉 비문에는 백제를 백잔이라고 해 가지고 욕하는 식으로 쓰지 않았습니까. 40:09)

 

<해설> 지난 시간에 백제의 복식문화를 다룰 때, 양나라에 간 백제사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양직공도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지요? 그 양직공도의 백제구 사신 설명문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낭독자  백제의 주변에는 반파(叛波),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의 소국들이 있어서 백제에 부용한다. 

 

<해설> 여기서 백제의 지배를 받는 부용국으로 ‘반파’를 거론하고 있는데 본래의 글자를 쓰지 않고 배반할 반(叛)자에다 물결 파(波)자를 써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무렵이 백제와 가야가 전쟁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백제 사신이 일부러 양나라에 반파국의 글자를 그렇게 가르쳐 줬던 것이죠.

 

<음악>  (브릿지)

<해설> 삼궁유사에는 김해의 가야를 금관국이라고 표기하도 합니다.

낭독자  한 가닥 자줏빛 노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여섯 개의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로 뿔뿔이 돌아가고 한 개가 성안에 남았다고 하였다. 즉 한 개는 수로왕이 되었는데 그가 세운 나라가 금관국이다.

 

<해설> 분명히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김해의 가야를 금관국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김해의 가야를 금관가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금관이라는 명칭 자체가 가야 당시에는 없었다는 것이 이영식 교수의 설명입니다.

 

*인서트-24. 테입<137> 이영식

    (17:22 그 금관이라는 이름이 사실은 가야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금이라는 건 골드는 아니고 쇠입니다. 쇠를 관장한다 그런 뜻인데. 금관이라는 이름은 신라가 김해의 가락국을 통합하고서 김해 지역에서 나는 철을 관장하기 위해서 행정구역 명칭을 금관군이라고 처음 붙입니다. 532년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금관이라고 하는 이름은 신라 인들이 처음 붙인 이름이죠. 그런데 그게 뒤에 가야 자가 붙어서 금관가야가 됩니다. 왜 그렇게 됐는가 하면, 일연 스님이 백제도 아니고 신라도 아닌데 가야는 가야인 것 같은데 무슨 가야인지 정확하게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십니다.18:07)

 

<해설> 신라 김유신이 여동생 문희를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출가시켜 사돈관계를 맺었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지요? 무열왕의 아들이 문무왕 이었는데 문문왕은, 가야가 멸망한 후, 자신의 외가였던 김해지역의 위상을 높이려고 금관군이던 것을 금관주로 격상시킵니다. 고려시대에도 김해는 그대로 금관주였는데,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다가,

일연    (지도 펴고)으음, 이 지역에 김수로왕이 세운 가야가 있었다는데 , 여기 있었던 가야는 무슨 가야였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냥 ‘가야’라고만 하면 다른 가야와 구별이 안 되니까 뭔가 이름을 붙여야겠는데…

선비    스님, 다른 자료가 없으니 지금 부르고 있는 행정구역 명칭을 붙이지요.

일연    어떻게 말인가?

선비    그 곳이 지금 금관주니까 금관국이라고…

일연    으음, 그게 좋겠군. 금관국, 금관가야, 좋아, 그렇게 기록하자구.

 

<해설>  이렇게 정한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금관가야’는 당시 가야 사람들이 불렀던 호칭이 아니라 고려시대 때 삼국우사의 편찬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런 얘깁니다.

또 하나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성산가야’ 역시 마찬가집니다. 경북성주군의 성산은 신라시대까지는 그 이름이 벽진이었습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 최초로 성산부라는 행정구역 명칭을 얻게 되는데, 역시 사국유사를 집필하던 승려 일연이 고려시대 당시의 행정구역 명칭인 성산에다 가야를 붙여서 선산가야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얘기해볼까요? 만일 김해에 가야를 건국했던 시조 수로왕을 보고서 가야시대 당시에 누군가 ‘금관가야 대왕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넨다면 수로왕은 뭐라고 대꾸할까요? 금관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사람 잘 못 봤다면서 그냥 지나치겠지요.

또 한 가지, 대가야 소가야라는 명칭도 가야시대 당시에 불렸던 이름일까요?  대가야라고 불리는 쪽이야 상관없겠지만 작은 가야, 즉소가야라는 호칭은 당사자들이 사용했을 리가 없겠지요.

 

*인서트-25. 테입<137> 이영식

   (20:51 고성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 땅이 작다고 해도 우리는 작은 나라다, 그렇게는 안할 겁니다. 저희는 지금 국호가 대한민국입니다. 대 자도 크고 한도 크다는 뜻이죠. 크고 큰 나라입니다.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닌데도 그렇게 큰 이름을 붙이죠. 누가 스스로 자기네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해도 소가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뒤져보면 사실은 소가 아니고 쇠였습니다. 우리 발음에서 소고기하고 쇠고기가 곧잘 왔다 갔다 하죠. 그래서 기록을 찾아보면요, 지금 고성입니다. 고 자는 딱딱할 고 자입니다, 고체 할 때. 딱딱한 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또 시대가 올라가면 철성이라는 명칭이 있었습니다.21:38)

 

<해설> 애당초는 쇠붙이의 ‘쇠’자가 붙은 쇠가야였는데, 대가야가 있으니까 그 상대개념으로 작을 소(小)자를 써서 소가야라고 기록했다, 이영식 교수의 견해가 그렇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볼까요? ‘가야’라는 말은 어디서 온 말이며 무슨 뜻일까요?

언어학자들은 가야가 가라에서 온 말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렇다면 가라는 또 어디서 온 말일까요? ‘겨레’라는 우리말에서 왔다고도 하고, 마을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가라 혹은 가야는 일반명사였는데 수로왕이 세운 나라에 가야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고유명사가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가야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충남 함창지역에 가야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것은 가야라는 말이 마을이나 땅을 나타내는 일반명사라는 증거다, 이영식 교수의 설명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라에 기역받침이 붙은 ‘가락국’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인서트-26. 테입<137> 이영식

    (25:09 가락이라고 하는 지금은 기역 받침을 쓰지만 시옷 받침하고도 사실 같은 겁니다. 그건 우리가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용례가 있습니다. 나랏말싸미, 뭡니까. 나라의 말싸미입니다. 시옷이나 ? 하고 나는 발음이 시옷이나 기역으로 표기되는 것, 그런겁니다. 가락국, 그러면 지금 우리가 기역 받침을 쓰지만 가라의 나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원래 김해 지역의 국명도 가라국이라고 쓰는 게 좋은데, 고령 지역도 가라국이라고 하는 게 나오니까, 구분을 한다면 김해 지역은 가락국이라고 쓰는 게 괜찮겠다.25:54)

 

<해설> 가라 밑에 붙은 받침 기역(ㄱ)은 사이시옷(ㅅ)과 같기 때문에 가락국은 ‘가라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런 해석입니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출처 : kbs 라디오 역사를 찾아서 대본-

 

출처 : 새로운 시작, since 2006.04.02
글쓴이 : 칼리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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