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백제·남부여·왜·신라·가야·발해

백제의 역사 복원03

monocrop 2007. 10. 16. 00:13

5. 백제는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었다 (3)

3) 375 년, 백제 땅 한반도에 신라가 침공했다

韓半島에 伽倻는 없었다. 伽倻는 揚子江 하류에 있었다. 韓半島에 伽倻가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지역에서 出土되는 갑옷은 百濟와 新羅의 것이 혼재되어 있다.

◀ 몽고발형투구와 갑옷 : 갑옷은 몸을 보호하는 쇠로 만든 옷으로 따로따로 주조된 철판을 결합하여 만든 판갑옷과 작은 비늘을 가죽이나 천에 덧대어 만든 비늘갑옷(찰갑)으로 구분된다. 판갑옷(단갑)은 일단 착용하면 몸의 신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보병용으로, 비늘갑옷은 몸의 움직임이 자유로워 기병용에 적합하다. 투구에는 차양이 달려 있지 않은 세모꼴 투구, 차양이 달려 있는 몽고발형 투구가 있다.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 蒙古는 蒙古高原에 없었다. 大震國이 蒙古高原 이북에서 일식관측한 기록이 日本 역사책에 日本의 일식기록으로 둔갑해 있다. 高句麗는 蒙古高原 이서, 이동에서 일식관측했다. 蒙古高原 역시 高句麗 땅이다. 그러나 韓半島에는 高句麗가 없었다. 溫祚가 黃河 하류, 渤海灣, 滿州, 黑龍江 중, 하류로 이어지는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는 百濟의 투구(胄)였던 것이다.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가 북방민족의 영향이 강한 투구라고? 북방민족은 없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면서 날조 해냈을 뿐이다. 中土 너머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는 北匈奴와 鮮卑, 蒙古 등이 있었고, 中土의 서쪽에는 南匈奴와 靺鞨이 있었다. 모두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은 종족이다. 당연히 우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蒙古와 北匈奴는 일찌감치 중앙아시아로 빠졌다.

伽倻 古墳에 부장된 中國系, 북방 유목민족의 물품? 揚子江 중, 상류 이남은 百濟 영토였고, 揚子江 이북에는 高句麗가 있었다. 오르도스형 동복(銅復)? 오르도스는 高句麗 영토다. 그러나 百濟가 高句麗에서 갈라진 나라이기 때문에 똑같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일식기록은 도무지 염두에 두질 않는가 본데, 우리나라 영토가 중국 대륙을 포함한 東아시아라는 명백한 증거다.

유목민족을 중국이 날조한 蒙汗이나, 金汗, 遼汗 등으로 생각 해서는 안된다. 蒙汗, 金汗, 遼汗은 高麗의 역사를 배당받은 나라다. 실제의 유목민은 현재의 蒙古나, 티벳의 유목민에 불과하다. 천막 하나 쳐놓고, 온 가족이 기거하며, 천막만 걷어서 손쉽게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주하는 민족이다.

오늘날 蒙古의 도시나 티벳의 도시는 현대화된 산물이다. 그 옛날 蒙古가 그처럼 우수한 문화를 개발 했다면, 蒙汗 이후에는 퇴보만 거듭했다는 것인가. 일례로 유목민족의 하나인 濊貊族은 “穴居生活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았다(常爲穴居冬以豕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作於中廁之而居 三國志 魏書)” 우리나라의 은혜에 기대어 빌빌대며 柴達木盆地에 살기 전에는 熟女眞도 저랬다.

韓半島는 百濟의 퇴직관리들이 이주한 땅으로 휴양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 땅을 중국 대륙에서 黃海를 건너온 新羅軍이 기습 상륙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新羅가 韓半島로 진출한 시기는 언제인가. 新羅는 百濟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물(奈勿) 麻立干 37 년(393)에 이르러 高句麗 편으로 돌아선다. 高句麗가 강성하다 하여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냈다(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 大西知子實聖爲質 三國史記)고 하지만, 실은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 함으로써 百濟와의 관계가 악화 되었던 것이다. 이를 감추느라 新羅가 강자 편에 붙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三國史記에 百濟에 漢字가 들어온 해로 기록되어 있는 375 년(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三國史記)이 新羅가 韓半島로 침공한 해이다. 우리나라를 모두 집어넣은 韓半島에 新羅가 상륙작전을 펼칠 수는 없으니까, 百濟에 漢字가 들어온 해라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漢字는 우리나라가 개발했다. 漢字의 원형 甲骨文字가 발견된 黃河 하류는 三國의 영토가 맞닿은 곳이다. 글자없는 甲骨, 즉 `無字甲骨'이 발견되는 지역도 滿州를 포함한 韓半島 전역 등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西滿州 渤海灣 북쪽에서 出土 되었다. 지금의 漢字꼴은 渤海灣 지역과 山東半島에서 먼저 나타났다.

“丙申年(B.C. 925)에 漢水 사람 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天王께서 좋다고 하시며 三韓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丙申漢水人王文作吏讀法以獻天王嘉之命三韓如勅施行 番韓世家 下).” 이 당시 벌써 漢字가 개발 되었기에 吏讀法을 지었다. 黃河가 漢水다. 漢字조차 우리나라가 개발한 것이다. 漢字는 커녕 甲骨文字 조차 중국이 개발한 문자가 아니다.

400 년의 이 사건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 년대,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이 끝나면서다. 4 세기 말 까지도 금관가야는 고분 묘광의 크기가 10 m 이상이고, 그 안에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는 아주 광대한 세력 이었다. 그런데 5 세기 초 이후에는 김해지역에서 묘광 크기가 2 m 이상 되는 고분이 나오지 않는다.
400 년 무렵부터 철갑옷을 함께 묻은 대형 고분들이 돌연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가야가 멸망한 6 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지던 대형 고분이 가야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금관가야에서만은 5 세기 초엽에 중단된다
(역사스페셜 1권)

금관가야(金官伽倻)가 古墳에 철갑옷을 부장품으로 넣지도 못할 만큼 무장해제 되었다면, 盟主의 지위를 다른 伽倻가 넘겨 받았다면, 상식적으로 국력이 신장된 나라가 金官伽倻를 멸망 시켰을 것이다. 그 결과 金官伽倻 지역에는 새로 떠오른 伽倻가 지배자를 파견했을 것이고, 여전히 大型 古墳에, 철갑옷이 발견되어야 한다.

新羅가 375 년에 韓半島를 침공하고, 393 년에는 高句麗 편으로 돌아섰다. 전투가 한창인 지역에 큰 고분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철갑옷 제작에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전쟁 중에 부장품으로 넣어줄 수도 없다. 金官伽倻로 착각하는 지역에 新羅가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新羅는 중국 대륙에서 黃海를 건너 韓半島에 교두보를 마련했으니까, 고분 제작자를 충분히 동반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古墳은 만들어야 하니까, 古墳의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북아 전체가 百濟 영토인 상황에서 중국 동부의 新羅가 배 타고 黃海를 건너와서 韓半島에 직접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륙작전은 육상작전보다 훨씬 어렵다. 新羅는 南海의 섬을 전진기지화 했던 것이다. 前進基地는 진공목표 지점에서 가까운 對馬島이다.

韓半島는 百濟人의 휴양지 같은 곳이라, 帝王의 근위대 및 치안 유지군이나 있었을까 전투병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 만 내지 2 만명 으로도 韓半島에 橋頭堡를 마련할 수 있다. 교두보 확보에 성공하면, 증원군은 對馬島를 거치지 않고 韓半島로 직행했다.

상륙지점은 金海 부근이다. 新羅軍은 對馬島에서 金海 부근으로 침공했다. 金海는 3 세기에는 수심 5 m 내외의 灣이었고, 4 세기에는 평야였다. 金海가 육지화 되었다면, 灣이 물러난 지역에 상륙했다.

韓半島 철갑옷의 90 %가 伽倻 지역이라 착각하는 곳에서 발굴 되었다는 사실에서 百濟軍과 新羅軍은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도의 철기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百濟였다.

남아 있는 787 년 이후의 新羅 日蝕의 최적 관측지가 慶州보다 저위도다. 교두보를 확보 하자마자 天文臺부터 세웠음을 알 수 있다. 北崖도 揆園史話(1675년)에서 첨성대가 천 수백 년이 지났다고 했다. 華夏族과 濊貊族은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 했다고 날조 했으니까, 瞻星臺 건립 연도까지 날조할 이유는 없다. 新羅가 韓半島에서 天文觀測하기 시작한 것은 400 년 이전 이었던 것이다. 文武 19 년(684) 8월 10일(양력) 새벽에 일어난 太白入月 현상도 慶州가 아니라, 南海岸에서 관측했다(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三國史記). 남아 있는 新羅의 기상현상 까지 500 년 이후는 韓半島에서 발생했다. 기상현상 관측도 천문관측과 동시에 시작 했거나 약간 나중일 것이다.

 

慶州로 瞻星臺를 옮긴 것은 李氏朝鮮이다. 한 장소에서 천문관측 했다면 통상 首都에서 천문관측하기 때문이다. 新羅의 예에서 우리나라는 영토를 확보하면, 天文臺 부터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天象列次分野之圖에 나타나는 李氏朝鮮 初의 하늘이 38.4°인 것으로 보아, 新羅는 三國統一 후 韓半島에서 두 군데(남해안과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 수지형금동관 : 전남 나주군 신촌리 9 호분 을호(乙號) 옹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나뭇가지 모양을 한 입식을 장식한 외관(外冠)과 반원형 동판 두 장을 맞붙여 만든 내관(內冠:모자)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가지형(樹枝形) 금동관(金銅冠)? 고작 교두보만 마련한 지역에 왕급 인물을 파견했을 리도 없고, 무덤 부장품도 일반적으로 만드는 물건으로 추정된다. 羅州 新村里 9 號墳에서 출토된 金銅冠 역시 新羅 것이다. 韓半島의 왕이라면 百濟 候王과 7 세기 전후의 新羅 侯王 뿐이다.

伽倻가 멸망한 6 세기 중엽까지 계속 만들어 지던 大型 古墳이 伽倻의 출발지이자, 절대적인 맹주였던 金官伽倻에서만은 5 세기 초엽에 중단된” 것은 新羅가 교두보를 넓혀 가면서 新羅의 지휘관들도 전쟁터에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金海지역은 新羅의 후방이 되었던 것이다.

4 세기를 기준으로 목곽묘(木槨墓)의 부장품 위치가 달라진 것은 新羅 진출이 원인이다.

4 세기 이후 편두(褊頭 : 두개골이 뒤쪽으로 치우치게 인위적으로 만든 머리)人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金海지역을 百濟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百濟人은 褊頭人이 아니다. 무엇보다 韓半島 일대의 무수한 고분 벽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褊頭人은 없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褊頭(今辰韓人皆褊頭 魏書 東夷傳)”라는 三國志가 사실 이라면, 중국 대륙 중부와 黃河 하류, 大興安嶺山脈 이남 사람들이 모두 褊頭라는 소리다. 그러나 三國志는 魏, 蜀, 吳의 역사로 배당한 책이고, 魏, 蜀, 吳는 3 세기에 존재한 나라다. 辰韓을 물려받은 나라가 高句麗이고, 百濟가 高句麗에서 나왔으니까 결국 高句麗와 百濟人이 모두 褊頭라는 소리다. 요컨대 티벳고원 北部와 중국 동부를 제외한 東아시아인이 전부 褊頭라는 소리다. 百濟人이 褊頭라면, 百濟 식민지 日本에서도 褊頭人骨이 발굴 되어야 한다.

그런데 褊頭人은 이 땅의 사학자들이 伽倻라고 착각하는 협소한 지역에서 극소수만 출토 되었을 뿐이다. 高句麗, 百濟人은 褊頭人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褊頭人은 어디서 왔을까.

百濟가 嘉陵江 이서 즉 티벳고원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티벳고원 북부는 中土였다. 百濟는 과거 吳, 越, 燕, 齊, 魯가 있었던 中土의 상당부분도 지배하고 있었다. 漢委奴라는 말까지 만들지 않았던가. 실제로 百濟人 상당수가 華夏族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百濟王은 곤핍해서 男女生口 一千人과 세포 천필을 내어 헌납하였다(而殘王因逼獻□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廣開土境大勳跡碑).”는 날조기사에서 보듯이 옛날에는 사람으로 朝貢을 하기도 했었다. 中土의 南朝로 날조된 나라들은 자신들의 노예를 百濟에 바친 것이다. 百濟人이 韓半島로 이주 하면서 華夏族(中土族) 출신의 노예들도 함께 데려온 것이다. 新羅는 中土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中土族을 노예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五胡가 中土에 나라를 세운 지도 백 년이 지났을 때라, 褊頭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五胡가 中土의 토착민에게 褊頭를 강요할 리 없고, 五胡를 막기에 여념이 없던 南朝(?)에서도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어 褊頭風習도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百濟에 中土 출신의 노예는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褊頭를 강요하지 않으니까, 2 세 이후로는 무시무시한 풍습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中奴가 褊頭였다는 사실은 현 역사책에도 남아 있다. 三國志 에서는 “지금 辰韓 사람 모두 褊頭”라고 했고, 後漢書 에서는 “辰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고 했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褊頭”라는 기술은 秦나라 유민 다시 말해 中奴가 褊頭라는 뜻이다. 中奴는 역사책을 날조 하면서도 제 조상들이 褊頭였다는 사실을 없애지 못한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褊頭가 그 당시 미인의 조건 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그랬다면 전세계로 褊頭風習이 퍼졌다. 오히려 褊頭는 희귀풍속이다. 그보다는 종족식별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慈烏支 한웅이 정복한 이후 中土로 우리민족이 상당수 이주했다. 中土의 미개 토착민들이 우리민족의 노예로 전락 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전적 교류까지 막을 수는 없다. 특히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토착민 여자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토착민 여자를 괴상한 모습으로 바꾸었던 것이 아닐까.

中土로 들어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土着民과 유전적 교류를 하지 않았음은 낙빈기(駱賓基 1917~1994)에서도 알 수 있다. 慈烏支 한웅이 우리민족을 대거 이끌고 中土로 들어가기 전까지, 楡罔 집안과 黃帝 집안은 누비혼인을 했다. 楡罔 집안의 남자는 대대로 黃帝 집안의 여자한테 장가가고, 黃帝 집안의 남자는 대대로 楡罔 집안의 여자한테 장가갔던 것이다. 褊頭가 美의 조건 이었다면, 中奴는 기꺼이 제 역사라 인정했다. 褊頭가 노예식별 표시라서 中奴가 제 풍속임을 부정했던 것이다.

(종교의식과 관련된 고대 이집트 조각품에 등장하는 6 천 년 전의 여인이 褊頭인 것은 어떤 이유 에서인가. 巫女는 神에게 바쳐진 처녀다. 褊頭는 태어난 직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니까, 스스로 원해서 巫女가 된 것이 아니다. 일반인과 생김새가 똑 같다면, 모든 巫女가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요컨대 종교의식을 神聖視하는 시대에 巫女의 도주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간난아기를 데려와 褊頭로 만들고 巫女로 키운 것이다)

그러나 褊頭人骨이 中土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中土의 예속민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았다.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벳고원은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인골은 토굴이나 땅속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209 년 陳勝의 亂 때 番朝鮮에 귀순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인(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 北夫餘紀)”의 상당수도 褊頭人 이었을 것이고, 百濟가 遼西를 지배할 당시, 華夏族을 노예로 거느렸으므로 티벳고원 남부 에서도 褊頭人骨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百濟 땅에서는 中奴들도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는 걸 자제했을 테니까, 티벳고원 남부에서 褊頭人骨이 발견될 가능성이 더 높다 하겠다.

순장제도(殉葬制度)는 百濟 문화(高句麗 문화)이다. 그러나 殉葬 제도의 특성상, 피매장자나 매장자의 선호에 달렸지, 모든 지배자의 무덤에 殉葬을 한 것은 아니다. 3 세기 말부터 등장하는 殉葬制度는 百濟가 首都에서 韓半島에 侯王을 파견한 시기가 3 세기 중반 이후라고 추정할 근거가 못 된다.

위로는 국왕 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天神)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 지냈다. 뒤에는 혹은 평지에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지(表識)를 하였다. 이는 신시(神市)의 세상에서는 능묘(陵墓)의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에 중고(中古)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부유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 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모나게도 하여 지극히 사치스럽게 장식 하였으며, 높이・크기・넓이・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잘 정돈하고 정교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上自國王皆遷置於隧穴並配天神以祭後或有平地而葬之環植檀柳松栢以識之是以神市之世無陵墓之制然後至中古國富族强養生得贍送死亦侈祭之有禮治墓頗隆或圓或方克厥侈飾高大廣狹方正有䂓內壁外墳均整兼巧至于高句麗陵墓䂓制冠於天下 太白逸史 神市本紀)

高句麗 때 기술이 따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中古時代는 朝鮮時代이다. 國王이라 함은 배달의 제후들이다. “평지에 장사 지낸다(平地而葬)” 함은 고인돌을 말한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朝鮮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든 墳墓를 三國時代의 것으로 몰아간다. 三國史를 기술하는 것을 보면, 이 땅의 사학자들 대부분이 배달, 朝鮮史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옹관묘는 기원전부터 사용된 고대 무덤 양식의 하나인데, 황해도 일부와 경기 이남 전지역에서 해안에 고루 분포한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수많은 옹관들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은 6 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역사스페셜 1권)

◀ 독무덤(옹관묘) : 토기를 관으로 사용한 묘를 말한다.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묘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보이고 있으며 토광을 파고 항아리 1 개를 직립시켜 뚜껑 돌을 덮어 묻은 단식 옹관과 항아리 2-3 개를 아구리를 맞붙여 놓은 합구식옹관의 2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옹관묘(甕棺墓)가 분포하는 지역이 해안이나 평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인구가 적은 시대에는 살기 편한 해안과 평야에 몰리는 게 당연하다. 榮山江을 비롯해서 韓半島 서해안은 우리나라 중심지가 있는 중국 대륙 으로의 연안항해도 가능한 교통의 요지다. 그러나 百濟와 新羅의 전쟁은 내륙, 해안을 가리지 않고 韓半島 전역을 무대로 벌어졌다. 그러니까 百濟와 新羅가 甕棺을 만들었다면, 해안, 내륙을 가리지 않고 甕棺墓가 분포해야 한다.

◀ 출토된 옹관 : 약 3 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옹관묘가 해남군 송지면 영평 마을 뒷산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옹관묘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지역의 고대사뿐만 아니라 옹관묘 연구에 큰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韓半島에는 배달시대의 고인돌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전세계 고인돌의 60~70 %가 韓半島에 몰려 있다. 배달의 중심지가 韓半島 일대라서 그렇다), 朝鮮時代의 고분은 없다. 물론 이 땅의 사학자들이 朝鮮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날조사에서 周나라, 漢나라로 접어 들면서 甕棺 사용이 점점 쇠퇴·소멸 했다고 한 점에서 甕棺은 朝鮮時代의 풍습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宋書에 “옹관은 東胡의 풍습”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소멸시기에는 시차가 있다. 宋書를 기준으로 甕棺이 6 세기 까지 사용 되었다고 하는데, 역사책은 그 나라가 존속할 당시의 풍속을 적는 것이지, 역사책을 쓸 당시의 풍속을 적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明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끼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 않았으니까, 5 세기 까지 甕棺이 사용 되었다고 단정할 근거조차 못 된다.

甕棺墓가 韓半島에서 사라진 시기는 몇 백 년은 더 빠르다. 큐슈(九州)의 甕棺墓는 기원전 3 세기부터 韓半島人들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甕棺은 東胡의 풍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염(殮)을 할 때도 관에 넣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장사 지내는 도구가 없으면 시체를 들 가운데 버려 땅강아지, 까마귀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두었다.”는 풍습은 어떻게 된 것인가. 高麗圖經의 저 미개 풍습은 明初까지 지속된 中土의 풍습이다]

 


◀ 복암리 고분군 : 사적 제404호로 지정되어있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 아파트형 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羅州平野가 있고, 榮山江이 흐르는 지역을 百濟軍이 순순히 포기할 리도 없고, 新羅軍이 지나칠 리도 없다. 新羅軍을 구축하기 위해 列島에 식민지까지 세운 百濟이다. 新羅 역시 榮山江 유역을 확보하고 나서 중국 대륙의 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는 항구로 사용했다. 榮山江 유역은 지형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百濟軍과 新羅軍의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6 세기 중엽 까지는 韓半島 남해안 대부분이 전장으로 화했다. 남해안 동부는 위쪽으로 밀려난 百濟軍이 상실한 땅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고, 新羅軍은 남해안 서부로 진출하고 있었다.

375 년에 상륙작전을 실시 했는데, 2 백년 가까이 남해안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이 치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新羅軍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百濟軍이 점점 더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百濟의 반격이 거세 질수록 新羅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분을 제작할 여력이 없으니까 대안을 찾아야 했다.

榮山江 유역의 상당수 甕棺들은 이전 甕棺의 피매장자를 바꾸면서 부장품까지 새로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에 이겼다 해도, 다음 전투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서둘러 무덤을 마련해야 했다. 사망자는 계속 나오고 古墳을 만들 시간은 없고 해서 이전 무덤의 피매장자를 꺼내고, 사망자를 매장한 것이다.

古墳에 묻히는 인물은 승자의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귀족이므로 나주에 있는 500~600 개(상당수의 고분이 멸실되었다고 보면, 원래 고분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에 달하는 古墳의 被埋葬者 전부가 전투 중의 사망자는 아닐 것이다.

◀ 복암리 옹관묘에서 발굴된 금동신발 : 복암리 고분은 1996 년에 발굴이 시작 되었는데, 도굴을 당하지 않았던 3 호분에서는 놀라운 유적이 발굴되었다. ‘96 석실'로 이름 붙여진 이 무덤양식은 독특하게도 석실안에 옹관이 놓여져 있을 뿐 아니라 금동신발, 큰칼, 구슬, 토기 등 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다. 뿐만 아니라 총 일곱 종류의 묘제에 41 개의 유구가 확인되어 학계를 놀라게 하여 아파트형 복합묘제 고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고분은 묘제의 변천과정으로 보아 400 여년간 사용된 고분이라는 것도 밝혀져 영산강 유역 세력과 백제후국인 한반도 묘제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높이 6 m의 복암리 3 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일본 고대문화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또 무덤에서 발굴된 유리구슬의 경우 그 원료의 산지가 중국 북부로 밝혀지기도 하였으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옹관 3 개에서 출토된 인골 10 조각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모두 동일 모계 이거나 부부일 경우 근친혼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羅州 고분의 피매장자 상당수가 전몰자인지 아닌지는 시신의 성별을 확인하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전투에서 사망하는 사람은 남자지만, 평화 시에는 부부가 같이 묻히거나 인근에 묻히기 때문이다.

羅州 복암리(伏岩里) 3 호분 96 석실에서 출토된 羅州 金銅신발은 百濟나 新羅 것과는 다르다? 장인이 다르면, 작품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甕棺墓가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 韓半島人의 무덤이고, 7 세기 초의 부장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新羅가 羅州를 차지한 후에 완성된 고분이다. 羅州 伏岩里 3 호분은 수십 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묘로 시작했다. 가족묘로 사용할 고분을 만든 것을 보면 그 지방의 지배층에 속하는 집안 이었을 테니, 新羅가 진출 하고도 그 땅에 눌러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상층의 고분은 가족묘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百濟가 먼저 倭와 밀통하여 倭로 하여금 新羅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百濟先與倭密通使之聯侵新羅之境).” 太白逸史에도 百濟가 倭를 시켜 新羅를 침범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伽倻[6 伽倻. 夫餘라는 이름은 3 천년을 두고 6 번이나 등장한 나라지만, 伽倻는 동시에 여섯 나라나 있었다고 한다. 여섯 나라가 일시에 伽倻라는 국호를 사용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新羅 동쪽에 小國이 여섯이나 된다면, 당장 新羅에게 정복되고 만다. 이 역시 우리나라의 전쟁을 가상의 나라에 배당하기 위한 수법이다. 또한 중앙집권 국가로서 발달하지 못하고 聯盟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이다.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中土의 나라다.三聖紀全 上篇의 “燕나라 ‘酋長’이었던 衛滿(丁未漢惠時燕酋衛滿)”에서도 알 수 있듯이]를 침범 했다는 기록은 없다. 伽倻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百濟 영토와 직접 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武漢 일대에서 건국한 新羅는 黃山江(揚子江) 이남의 百濟 영토까지 진출하며 성장한 나라이다. 百濟는 高句麗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으니까, 新羅가 자국 땅을 침공할 여력을 갖지 못하도록 倭로 하여금 新羅를 수시로 침입하게 한 것이다.

倭가 新羅城을 함락시킨 것(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廣開土境大勳跡碑)은 시기적으로 新羅가 韓半島를 침공한 뒤에 일어난 사건이다. 新羅가 韓半島를 침입하자, 百濟가 보복에 나선 것이다. 百濟가 倭에 무기를 공급하고 사주한 것이지, 伽倻軍이 주축이 되어 倭와 합동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다.

三國史記에서 伽倻에 관한 기술을 대량으로 빼버린 것은 李成桂와 朱元璋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中國史로 둔갑 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三國의 역사 였지만, 三國의 역사를 훔치면서 伽倻의 역사를 남겨두면, 三國史記가 아니라, 伽倻國史가 되니까, 같이 빼버린 것이다. 하긴 伽倻國史도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다. 5胡 16國의 소국 들이나 春秋戰國 시대의 小國들에 배당해야 할 역사도 있어야 하니까.

日本의 최초의 왕은 應神이다. 古事記나 日本書紀에는 神武가 최초의 왕이라고 적혀 있지만, 18 세기 이후 역사왜곡 하면서 꾸며낸 것이고, 다무라 엔초(田村圓澄) 등 일본학자들도 應神 혹은 仁德을 일본 최초의 왕으로 본다.

仁德이 일본 최초의 왕이 아닌 이유는? 결정적인 증거가 仁德[닌토쿠 313~399. 干支 두 바퀴에 해당하는 120 년만큼 끌어 올려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井上三下)의 주장에 따르면, 仁德은 대략 433 년에서 519 년 사이에 百濟 侯王으로 있었던 인물이다]이 매(鷹)를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仁德이 생전 처음 보는 새를 보고 주군(酒君)에게 무슨 새냐고 물었다. 그러자 酒君이 “百濟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고 했다.
(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12/nd99120450.html 참조 )이 매를 길들이게 하고 실제로 매가 수많은 꿩을 잡은 날, 비로소 응감부(鷹甘府)라는 부서를 설치했다고 니혼쇼키(日本書紀)에도 나온다. 中國倭라면, 매가 百濟, 新羅 땅에는 날아 가면서, 新羅, 百濟에 인접한 倭만 피해 날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仁德은 列島에서 태어났고, 應神이 일본 최초의 왕이다.

列島倭(百濟倭라고도 한다. 물론 신라왜도 있지만)가 中國倭가 옮겨간 것이 아니라면, 倭라는 국명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倭는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서 왜(倭)가 아니라면 倭라 이름 붙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倭國者古倭奴國也......倭國自惡其名不雅 舊唐書) 의미가 좋지 않은 말이라서 일본도 왜(倭)라고 부르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日本은 18 세기 이후 야마토(大和)라고 부르면서 倭 외에도 和, 大倭, 大和(倭는 百濟 식민지이고, 大和는 新羅 식민지이다. 하지만 日本史를 늘리기 위해 中國倭도 列島倭에 슬쩍 포갠 일본이다. 新羅 식민지도 百濟 植民地에 포개 버렸다)까지 만들어 냈다. 倭, 和, 大倭, 大和의 吏讀式 발음이 모두 야마토(大和)라고 하면서. 이유는 應神이 中國倭의 王 이었거나 왕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應神은 百濟人이다.

왜는 倭 혹은 委라는 두 가지 음에 倭國, 두르다, 순하다, 추하다는 뜻이다. 왜국은 왜(倭)라는 국명이 생겨난 후에 파생된 의미다. ‘왜소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는데, 褊頭人骨이 난장이라는 지적은 없다. 華夏가 난장이가 아닌데, 같은 종족 倭奴가 난장이일 수는 없다. ‘矮小하다’는 말은 日本의 先住民 아이누族과의 생물학적 교배가 활발히 이루어진 후에 생겨난 말이다. 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가 성행한 천 년 전에. 무엇보다 왜소하다는 말이 국명조차 바꿀 정도로 “아름답지 못한” 이름은 아니지 않는가.

주목할 것은 옛날에는 ‘순종하다’라는 의미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르다, 순하다에서 파생된 의미라고 한다(http://www.paikmagongja.org/new_files/outside/japen_3.htm). 中國倭가 華夏族 출신이다 보니까, 中奴가 玉篇을 만들면서 삭제해 버린 것이다. 倭의 의미는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上國 百濟가 멸망하자, 국명을 바꾼 것이다.

 

七支刀는 百濟 皇帝가 新羅軍을 협공할 목적으로 應神을 倭王으로 임명 하면서 하사한 칼이다.

태화 4 년 5월 16일 丙午날 정양(正陽)에 무수히 거듭 단근질한 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이 영도를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작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辟百兵宜(復)供侯王口口口口作 前面]
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왜왕을 위해서 만들었으니 이 칼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後面]

泰和는 近肖古帝의 年號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泰和 4 년은 369 년이 된다. 하지만 新羅는 375 년에 韓半島를 침공했다.


▲ 칠지도의 모습



七支刀는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다이쿠우시(大宮司)직에 있던 스가 마사토모(菅政友)가 자신이 손을 댔다고 실토했고, 깎인 銘文도 있다. 그 뒤 스가 마사토모(菅政友)의 행적에서도 七支刀가 날조됐음을 알 수 있다. 스가 마사토모(菅政友)는 日本 內閣과 도꾜(東京) 大學으로 자리를 옮겨 百濟王이 倭王에게 七支刀를 갖다 바쳤다며 任那日本府說을 주장했다. 그러나 날조명문에도 供侯王이라 되어 있다. 侯王에게 준다는 뜻이다. 倭가 植民地라는 뜻이다. 侯王이 바쳤다면 侯王供이라고 써야 한다. 이런 것도 내버려두고 任那日本府를 설치했다고 우긴 것이다.

무엇보다 판독됐다는 七支刀 銘文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글이다. 百濟의 太子가 자신을 世子라 하고, 父王을 王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 당시 百濟는 嘉陵江 이서에서 揚子江 이남, 中國 東部, 東北亞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다수의 諸王과 諸侯를 거느린 東아시아 제1의 大國 이었다. 太白逸史와 三國史記도 百濟가 齊, 魯, 吳, 越, 燕 등의 땅을 평정하고 땅을 나누어 王과 諸侯를 封했다고 했다. “백제는 병력으로써 齊나라 魯나라 吳나라 越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했다(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設官署索籍民戶分封王爵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百濟 太子가 만들게 한 칼 이라면, 百濟 皇帝가 하사한 칼조차 아니다. 그러나 太子가 侯王을 임명할 수는 없다. 칼 한 면은 百濟 皇帝가, 다른 면은 太子가 만들라고 지시 했다는 것도 우습다. 일부만 깎아내고 다시 쓰면 그 부분이 함몰되니까, 새로 만들었거나 양면 혹은 한 면 전체를 다 깎아내고 새겼을 것이 분명하다. 高句麗 皇帝를 烈帝라 불렀으니까, 百濟皇帝도 溫祚帝, 多婁帝, 己婁帝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太白逸史에 보면 長壽弘濟好太烈帝가 “新羅 매금(寐錦), 百濟 어하라(於瑕羅)와 남쪽 平壤에서 만나 納貢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長壽弘濟好太烈帝......與新羅寐錦百濟於瑕羅會于南平壤約定納貢戌兵之數 高句麗國本紀).”고 했다. 그런데 寐錦이라는 호칭은 卑稱이 아니라고 한다. 新羅가 세운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에서도 新羅皇帝를 寐錦王 이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 하였는데 , ......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朱蒙帝)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朱蒙帝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칭찬하고 召西弩를 어하라(於瑕羅)라고 책봉했다(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爲於瑕羅 太白逸史)

召西弩는 北夫餘 6 世 檀君 高無胥의 둘째 公主로 朱蒙聖帝와 혼인 했으니까, 高句麗의 皇后다. 그런데 朱蒙聖帝가 또 다시 於瑕羅에 책봉할 수 있는가. 지위가 높다한들, 高句麗 皇后만 하겠는가, 高句麗 皇帝와 동격 이겠는가. 召西弩를 於瑕羅에 책봉 했다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다음에 오는 글도 모조리 엉터리다.

於瑕羅가 臣下의 지위에 해당 한다면, 百濟 皇帝는 於瑕羅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百濟와 高句麗는 모든 면에서 경쟁국 이었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나와 있는 百濟 皇帝에 대한 卑稱은 잔주(殘主)이다. 高句麗 皇帝를 烈帝라 하고, 新羅王을 寐錦이라 하는 것처럼, 百濟 皇帝는 於羅瑕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七支刀의 원문을 되살려 보면 아래와 같다.

선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황제 아신(阿薪) 어하라(於瑕羅)가 왜왕을 위해서 만들었으니 이 칼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皇帝於瑕羅阿薪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七支刀는 369 년(近肖古帝 4 년)이 아니라, 395 년(阿薪帝 4 년)에 만든 칼이다. 395 년에 日本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이다. 應神은 百濟 皇帝가 韓半島의 新羅軍을 驅逐하기 위해 植民地 王으로 임명한 인물이다. 應神을 倭王으로 封하면서 新羅軍을 물리치라며 칼을 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忠誠을 다하라고 下賜한 칼이지, 應神과 그의 後世를 축복하기 위해 하사한 寶刀조차 아니었다.

百濟 皇帝가 七支刀는 하사 했지만, 列島에 植民地를 건설하는 것은 韓半島의 侯王에게 일임했다. 曇徵도, 王仁도, 阿直岐도 다 韓半島의 侯王이 보내 주었다. 應神을 제외하면, 倭를 세운 百濟人들은 대부분 韓半島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應神이 세운 나라는 百濟 侯王의 지원을 받는 2 류 侯國 이었던 것이다. 蓋鹵帝가 高句麗軍의 공격으로 사망한 뒤로는 百濟 皇族들이 안전한 列島로 가서 살았으니까, 이후에는 百濟 皇帝의 직접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列島에 植民地를 세우는 계획이 얼마나 갑작스레 결정 되었는지, 應神이 列島에 도착한 지 14 년 후에야 재봉사를 보내 주었다고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역시 百濟王이 바쳤다고 뜯어 고쳤다. 재봉사도 韓半島의 百濟 侯王이 보내 주었다. 그래 놓고도 이때 간 재봉사 眞毛津이 日本의 의봉시조(衣縫始祖)라는 대목은 내버려 두었다.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6)은 그의 저서인 쇼오꼬오하츠(衝口發 1781)에서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하여 이렇게 밝혔다.

오우진(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배달 시대부터 양잠을 하고 베를 짰다. 韓半島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았을 리는 없고, 先住民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列島에 짐승마저 귀해서 닌토쿠(仁德)는 매조차 본 일이 없고, 新羅와 百濟가 온갖 동물을 하사했다. 그러니 나라가 서기 전에는 짐승 가죽조차 걸칠 수 없었던 것이다.

토우테이칸(藤貞幹 : 藤原貞幹 후지와라 사다모토 라고 표기 하기도 한다)은 에도시대(江戶時代) 사람이다. 韓服이라 함은 李氏朝鮮의 복식과 똑같다는 얘기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朱元璋이 高麗의 服飾을 그대로 입자, 李成桂는 해결책으로 그 옛날 百濟의 복식을 되살렸던 것이다.

그 당시 스이코(推古) 여왕을 비롯해서 백제계 여왕들은 한국식과 조금도 다를 데가 없는 똑같은 모양의 비단 치마인 어상(御裳)과 양 어깨와 소매에 걸쳐서 큰 용을 수놓은 곤룡포(袞龍袍)인 어대수를 입었다. 지금의 한국 버선과 똑같은 코끝이 오뚝한 버선을 신었다. ...... 그뿐 아니라 왕이 정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면류관, 왕의 신발인 어석(御舃), 심지어 여왕과 왕후들의 옥패물인 어옥패(御玉珮) 등등 이 모든 왕실 복식 제구 등은 고대 한국 왕실의 복식 제구와 동일한 것들이다(일본문화사, 홍윤기)

古代 韓國 王室이라 함은 李氏朝鮮을 말한다. 倭는 百濟의 侯國이다. 李氏朝鮮도 明의 侯國이다. 그러므로 李氏朝鮮王이나 日本王은 百濟 皇帝의 복식과 제구를 할 수 없었다. 百濟 侯王의 복식, 제구였던 것이다.

應神은 급히 列島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책 한 권 안 가지고 가서 應神의 아들이 성인이 되자, 王仁이 건너가서 글자부터 가르쳐 줘야 했다. 그러니까 王仁이 건너간 것은 405 년이 아니라, 420 년대 이다.

韓半島 남해안을 잠식한 新羅軍을 협격 하려면 倭軍의 출발지점은 어디라야 하는가. 北九州이다. 바로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이 있었다고 우기는 곳이다. 하지만 邪馬台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應神은 北九州에 도착 했다가, 카와치(河內)로 향했다. 北九州는 군사기지화 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韓半島人들을 병사로 훈련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은 기원전 3 세기에 건너간 韓半島人과 4 세기 말에 건너간 百濟人의 유적이 혼합되어 있다.

배달은 기원전 27 세기에 鐵器時代로 진입 했는데, 기원전 3 세기에 건너간 韓半島人은 靑銅器를 사용한 이유는? 未開 땅으로 이주 하고픈 철기 제작자는 없다. 韓半島에 있어도 대우받고 사니까. 韓半島人이 列島까지 간 이유는 韓半島 에서는 희망이 없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列島로 간 극소수의 韓半島人은 문명이 후퇴하여 靑銅器부터 다시 제작해야 했던 것이다. 고인돌 역시 韓半島 에서는 배달시대에나 사용했던 분묘제도이다. 列島로 건너간 韓半島人들은 전체적으로 문명이 퇴보한 것이다.

倭는 국가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건설한 식민지이고, 원래 목적이 列島의 軍事基地化에 있었기 때문에 철기 제작자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農耕的, 呪術的이고 평화롭게만 살”던 列島의 韓半島人이 어째서 12 m나 되는 망루대가 필요 했을까. 바다풍경을 감상 하려고? 倭軍이 百濟軍과 협공 하니까, 新羅軍이 北九州까지 공격범위에 넣은 것이다.

400 년 무렵 일본열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갑작스레 새로운 형태의 철갑옷이 출현 하는데, 여기에는 가야의 정결기법이 그대로 도입되어 있다. 이때를 경계로 일본 철갑옷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 이라고 할 수 있다(역사스페셜 1권)

韓半島에 교두보를 마련한 新羅軍을 협공하기 위해서 倭에서도 철갑옷을 만든 것이다. 당시 日本에는 철 수입권을 장악하는 것이 힘을 키워 나가는데 중요 했다는 말은 사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러므로 伽倻 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 벽옥제품(璧玉製品), 청동투검창(中廣形銅矛) 등은 교역의 산물이 아니라 百濟가 만들었다. 列島가 百濟 식민지라서 百濟의 물건들이 건너간 것이다. 스에키(須惠器)도 伽倻가 아니라, 百濟 土器이다.

농경적, 주술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의 유물은 기원전 3 세기 이후 건너간 韓半島人의 遺物이다. 5 세기 이후가 되면서 鐵劍, 馬具, 甲胄와 같이 전투적이고 한편 귀족적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이 강화되는 갑작스런 변화를 보이는 것은 應神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新羅를 韓半島에서 구축하기 위해 百濟가 列島에 倭를 세우고, 무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이전 까지는 미미했던 고령(高靈)의 대가야 지역에서 400 년대에 접어들며 이전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철갑옷이 등장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에 출현한 판갑(板甲)과 같은 양식이다.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위시한 권위의 상징물도 출토된다. 이를 통해 대가야 지배층의 권력이 강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역사스페셜 1권)

韓半島는 百濟人들의 휴양지 이니까, 군대가 없었을 것이다. 新羅가 침공하자, 그제서야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新羅 침공을 미리 감지 했다면 예상 상륙지점에 군대를 집결 시켰겠지만. 그러니까 전장에만 군대가 몰렸다.

金官伽倻라고 착각하는 지역을 新羅에 빼앗겼으니까, 밀려난 지역에서 또 다시 철갑옷을 만들고 무기를 제작해야 했다. 그 지역을 이 땅의 사학자들은 大伽倻라고 부른다. 철갑옷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 변화되어 가는 것도 百濟軍이 계속해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金官伽倻에서 大伽倻로 권력이 넘어 갔다는 역사스페셜의 저 글은 유적, 유물의 자의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중국 대륙의 우리 遺跡, 遺物을 중국의 것으로 쉽게 둔갑 시켰던 것이다.

日本의 倭가 新羅軍을 구축하기 위해 세운 百濟 식민지 이니까, 百濟와 같은 무기, 같은 유물이 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당시 궁월군(弓月君)이 列島의 倭軍을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 위의 그림은 《신찬성씨록》을 현대일본어로 번역해 놓은 사이트[http://www.h4.dion.ne.jp/~munyu/ookimikeizu/siryo.htm]의 좌경제번(左京諸蕃)上에 수록되어 있는 태진공(太秦公 우즈마사の키미)스쿠네 부분을 캡쳐한 것인데, 이를 살펴보면 출자(出自)는 진시황의 3 세손인 효무왕(孝武王)이라는 것이고, "그 아들 공만왕은 츄우아이(仲哀)천황 8 년에 내조하였고, 다른 아들인 융통왕[혹은 궁월왕(弓月王)이라 한다]은 오우진(應神)천황 14 년에 27 현의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귀화하여 금·은·옥·비단 등의 물건을 바쳤다"는 것과, 그리고 "닌토쿠(仁德)천황 치세에 127 현의 하타(秦)氏를 여러 군(郡)에 나누어 설치하고 곧 누에를 치고 실크를 짜서 바치도록 하였다"는 것과 함께, 닌토쿠천황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秦王=궁월왕이 바친 실, 목화솜, 명주실로 짠 비단은 짐이 입어보니 유연하고 따뜻한 것이 마치 사람의 피부[肌膚 hada)와 같다」라고 하였다는 것, 그로 인하여 하타(波多)라는 姓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날조기사이다.

 


◀ 미륵사지 터

全羅北道 미륵사(彌勒寺)가 三國遺史에 써 있는 대로라고? 三國遺史는 한단사(桓檀史)부터 철저히 날조된 책이다 [三國遺史가 얼마나 날조 됐는지는 朝鮮에 대한 기술이 하나의 기준이 된다. 완전 엉터리다. 三國遺史는 어이없게도 中土로 들어간 三皇 五帝로 시작한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싸 복희를 낳았고, 용이 여등(女登)과 관계를 맺어 염제를 낳았으며......(虹繞神母而誕羲龍感女登而注生炎......)]”

기이(紀異) 같은 소리! 다 사람 자식이다. 무지개(虹)가 아니라 태우의(太虞儀) 한웅이고, 龍이 아니라 少典이다. 결국 신모(神母)의 실체는 太虞儀 한웅의 부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太虞儀 한웅의 長子는 6 대 한웅(多儀發한웅)이 되어 대제국 배달을 다스리는 최상의 위치에 있었지만, 막내 伏羲는 中土로 들어가 미개 토착민과 더불어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했다. 기술하는 투가 누구라도 中奴가 뜯어 고쳤다고 하지, 우리나라 사람이 썼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으로부터 2 천 년 전에 檀君王儉이 있었다(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三國遺史가 1200 년 경에 쓰여 졌다니까, 2 천년 전이면 기원전 800 년 이라는 소리이다. 그럼에도 堯와 같은 시기라고 했다. 堯는 기원전 2400 년 때 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堯는 檀君王儉의 제후였다. 하도 무능한 인물이라, 檀君王儉이 내쫓아 버렸다. 그래도 中奴들은 태평성대 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더 중요한데, 三皇五帝는 中土의 토착민이 아니고,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다.

三國遺史에는 神檀樹로 내려온 1 세 한웅 居發桓이 熊女와 혼인하여 檀君王儉을 낳았다고 했지만, 檀君王儉은 18 세 한웅 거불단(居弗檀)의 아들이다. 한웅 居發桓과 혼인한 熊女는 熊族의 女王이었고, 한웅 居弗檀과 혼인한 熊女는 熊族의 王女였다. 熊族이 王儉(배달의 제후)을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배달 개천 이후 천 년이 지나서 이다.

“周나라 武王이 즉위하던 己卯年에 箕子를 朝鮮에 封하였다. 檀君은 藏唐京으로 옮겼다가, 그후 阿斯達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산신이 되었다(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三國遺史).” 周나라는 11 세기인지 12 세기인지 개국연대가 아리송한 나라다. 1 世 檀君王儉이 기원전 800 년경에 있었다면서 마지막 檀君이 11 세기인지 12 세기에 생존 했다는 것이다. 箕子朝鮮도 없었던 것이 箕子의 姓은 成이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자신의 조상이 ''숨어 살면서''라고 쓸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날조와 왜곡이 우리 역사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는지를 이해 하겠는가?

그런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三國遺史 紀異編이 민족 자주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民族 自主的일 필요가 없는 나라다. 동아시아의 지배자 였으니까. 민족 자주적이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의 속국 이었던 중국, 일본 등이나 찾아 헤매야 할 시각이다.

“아! 사악(四岳)이여. 넘실대는 홍수는 넓은 땅을 뒤덮고 질펀한 물은 산을 잠기게 하며, 언덕 위에 오르는 거친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아래로 백성들이 이를 한탄하고 있는데, 누가 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嗟四岳湯湯洪水滔天浩浩懷山襄陵下民其憂有能使治者 史記)”하고 堯 임금이 묻자 모두 곤(鮌)이라는 사람을 추천 했다고? 史記와 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티벳고원에 홍수가 날 수 있는가. 450 mm 밖에 안되는 건조기후대 이다. 그 옛날에는 中土의 연간 강수량이 4500 mm 였던가.

檀君世紀에도 甲戌 67 년(B.C. 2267) 太子 扶婁가 塗山에서 虞司空에게 五行治水法을 전해 주었다(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扶婁與虞司空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고 했지, 洪水가 났다는 기술은 없다. 中土가 건조기후라 관개 농사법을 알려준 것이다. 五行治水法으로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太白逸史는 역사가 날조된 李氏朝鮮 중기의 책이다. 丁巳 50 년(B.C. 2284) 朝鮮에 홍수가 났을 당시의 상황(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 檀君世紀)을 기록한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베꼈던 것이다. 神人王儉이 팽우(彭虞)에게 물을 다스리게 한 것을 곤(鮌)으로 슬쩍 바꿔치기 한 것이다.

中奴는 彭虞를 삭제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檀君이 홍수를 만나자 팽우(彭虞)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였다(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檀君世紀)”가 漢書·食貨志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檀君이 洪水를 만나자 팽오(彭吳)를 사신으로 보내 산천을 다스리게 하였다(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우리나라 역사책을 가져가 베끼면서 문장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베꼈다면, 우리나라 역사책은 얼마나 방대해야 하는가. 기원전 58 년(한단고기에 따른 高句麗 건국 연도)부터 해서 668 년 까지의 高句麗, 百濟, 新羅 등의 역사를 漢(BC 202∼AD 8), 新(8~22), 後漢(25~220), 魏(220~265), 蜀(221∼263), 吳(222∼280), 西晉(266∼316), 東晉(317∼419), 5胡 16國(304~439), 宋(420~479), 齊(479~502), 梁(502~557), 陳(557~589), 隋(581~618), 唐(618~907)의 역사로 분해 한다고 해보라. 三國史記는 40 권이 아니다. 高句麗 留記도 100 권이 아니다. 大震國史도, 高麗實錄도 실로 방대한 문헌 이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다 빼가고 남은 것이다. 그 뿐인가. 朝鮮, 北夫餘의 역사는 殷, 周, 漢이 차지했다.

◀ 복원한 미륵사 석탑의 조감도

유적, 유물을 보고 문헌을 고치는 것은 가장 저렴한 역사 날조 방법이다. 武王의 승부수 라면서 중국 대륙이 아닌, 韓半島에다 가람을 세울 수는 없다. 더구나 7 세기의 韓半島 남부는 新羅가 점령했다. 新羅의 가람을 百濟 皇帝(武帝)가 건립한 彌勒寺라고 날조한 것이다. 彌勒寺라고 우기는 유적이 新羅 감은사지(感恩寺址)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에서다.

미륵사 지하공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는 경주 근처의 감은사지,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감은사 금당터에도 이런 지하공간이 있다(역사스페셜 1권)

武王(武帝)의 모친은 사비(泗沘) 남쪽에 살았다면서 무슨 益山의 몰락귀족 서동(薯童)? 12 번(?)이나 전투를 했다는 전초기지에 수십 년의 국력을 결집해서 건축물을 세우는 경우도 있는가. 전쟁 하면서 彌勒寺를 허물겠다는 소리 밖에 안된다.

益山 왕궁평(王宮坪)의 성벽은 新羅가 진출하기 전 百濟가 쌓았다. 그래서 안압궁(雁鴨宮)의 성벽과 건축기법이 같다. 百濟의 성벽을 新羅가 진출 하면서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http://yushin.or.kr/@history/dvd-kbshistory/kbs013.htm 참조)

교토(京都) 청련원(靑蓮院)에서 발견 되었다는, 중국 6 朝[날조사에서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 조(四朝)와 오(吳)·진(晉)을 더해서 6조(六朝)라 한다] 때 편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百濟 무광왕(武廣王)은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했다(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고 나온다고? 중국에 6 朝가 어디 있는가. 티벳고원 북부, 그것도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서 6 朝니, 南朝니 하면서 부를 수 있는가. 靑蓮院이 중국 천태종(天台宗)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중국 문물을 수입 했다고? 날조 중국 6 朝 때 日本은 자력으로 중국 대륙을 갈 수가 없었다.

일본의 이른바 국풍 문화라는 것은 헤이안 시대 후기인 10 세기 이후의 일본문화를 일컫고 있다. 지금까지 1 천여 년 간 거의 완전히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일본문화였다. 그런 가운데 9 세기 이후 부터는 당나라 문화도 조금씩 수용하게 되었다.
설령 일본이 당나라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 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일본에는 당나라에 갈 만한 큰 선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의 견당사나 학승들은 백제배나 신라배를 얻어 타고 고생스럽게 대당 외교나 불교 유학을 겨우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일본문화사, 홍윤기)

마쓰키 사토루(松来藤曉), 다무라 엔쵸(田村圓澄)는 遣唐使(?)가 唐나라(?)에 갈 때도 新羅 선박을 이용 했다고 밝혔다. 唐나라가 아니라, 大震國이다. “日本의 唐나라 學僧이 新羅의 송사(送使)편에 日本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新羅를 경유”(田村圓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大震國이 내륙국 이라서 중국 대륙의 해안을 다 차지한 新羅의 선박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송사(送使)가 아니고, 日本으로 왔다가 本國 新羅로 돌아가는 귀사(歸使)편이다. 그 외 新羅의 무역선을 이용해서 日本은 大震國을 드나 들었다.

百濟 식민지 倭는 百濟 선박에 얹혀서 중국 대륙의 百濟를 드나들며 百濟 문물을 수입했다. 靑蓮院은 韓國 天台宗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한국 문물을 수입했던 것이다. 武廣王? 觀世音應驗記가 眞書라면, 武廣帝라고 써 있어야 했다. 18 세기 이후 있지도 않은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을 떠벌리면서 날조했던 것이다. 日本의 역사 문헌치고 날조 안 된 것은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왕궁리 5층 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이 百濟 석탑을 모방한 統一新羅의 석탑? 新羅가 만들었으니까, 新羅 석탑과 비슷할 수밖에.

列島는 나라조차 없는 땅이지만, 新羅는 列島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韓半島를 침공했다. 先占만 하면 되는 땅을 놔두고 韓半島에서 처절하게 싸워댄 것이다. 列島가 가치를 가진 적은 딱 한 번 뿐으로 2 차 대전 후의 메국(米國)이 유일하다. 列島는 문화의 흔적조차 없는 땅[應神이 列島에 도착했을 당시, 列島는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있었다.(衝口發 : 藤貞幹) 벼이삭은 5 세기 말까지도 손으로 쥐어뜯어 수확했다(古代國家와 天皇 : 田村圓澄), 집? 그런 것도 없었다. 6 세기 까지도 그냥 흙구덩이에서 풀로 지붕이나 가리고 살았다(田村圓澄)]이었다. 百濟의 例에서 알 수 있듯이 列島를 식민지화 하기 위해서는 수 세기를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百濟가 列島에 倭를 세워 協擊하자, 新羅도 列島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倭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변한에서 철이 난다. 韓, 濊貊, 倭가 모두 이것을 가져간다. 마치 돈처럼 사용하며 두 郡(樂浪과 帶方)에 공급한다(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 역시 날조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책의 내용을 바꾼 것이다. 우선 高句麗 때 中土에서 기어나온 濊貊은 柴達木盆地로 들어가 高句麗의 속민이 되었다. 속민 스스로 鐵을 가져다 무기를 만들 수는 없다. 高句麗의 감시 하에 농기구나 만들었을까. 그러나 柴達木盆地는 너무 추워 농사에 적당치 않은 지역이다. 그래도 스가하라(管原道眞)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 193 에 수록되어 있는 일본의 學僧 永忠의 편지에 의하면, 밭농사는 지은 모양이다. 濊貊이 낙후된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百濟와의 전투에서 싸워봤자 아무 도움이 안되니까, 高句麗가 제작한 첨단무기로 무장하고 싸웠다.

高句麗, 百濟 둘 다 스스로를 漢이라 했다. 서로가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해서. 우리나라는 기원전부터 高麗 時代까지 桓, 韓보다는 漢을 즐겨 사용했다.

韓이라 한 것은 朝鮮의 三韓이다. 중국은 역사날조 하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도 않았고(이 경우는 연대를 일치 시키면 우리나라가 고도문명을 이룩했다는 실토가 되니까), 우리나라 강역 전체의 풍속을 番韓이나 馬韓 등 특정지역의 풍속으로 한정 시키는 버릇이 있다. 일례로 後漢書, 三國志에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蠶桑)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 後漢書)”고 했다. 그러나 蠶桑을 알고 솜과 베를 만든 것은 배달의 강역 전체이다.

慈烏支 한웅이 미개 땅 中土를 정복했을 당시에도 中土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누에치며 길삼해서 만든 비단과 베는 미개 華夏族에게 판 것이 아니라, 朝鮮의 諸侯國들과 교역했다. 미개 中族은 宋 때 까지도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설마 비단을 가지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철전(鐵錢)을 만든 나라는 弁韓이 아니고, 朝鮮이었던 것이다. 朝鮮의 강역 전체에서 鐵錢을 사용했다. “癸卯(B.C. 2238) 9 월,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 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檀君世紀)." 中土에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鐵錢을 사용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夫餘가 8 萬戶 라는 三國志의 날조기사는 殷나라나 周나라의 인구라고 전술했다. 8 萬 戶는 토굴 속에 살던 未開 華夏族까지 포함한 수치다. 扶婁 檀帝가 계량형과 가격을 통일할 때, 中土에는 돈을 사용할 만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中土가 鐵錢을 가지고 있었다면, 朝鮮의 제후국과 무역할 때나 사용했다. 朝鮮時代에는 倭가 없었다.

5 세기 무렵 까지 倭는 鐵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때 등장하는 철정(鐵鋌 : 쇠덩이)은 伽倻에서 건너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列島 최초의 나라 倭가 395 년에 성립했다. 당연히 5 세기 이전에는 鐵을 생산할 수가 없었다.

◀ 화천 :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발굴된 화폐의 일종인 화천(貨泉). 중국 新나라의 화폐로 날조 당했다.

日本에 있는 鐵鋌은 伽倻가 아니고, 百濟가 만들었다. 그러나 화폐가 아니다. 朝鮮時代에 사용한 鐵鋌이 三國 時代까지 화폐로 사용 하지는 않았다. 新羅가 교두보를 마련한 伽倻라 착각하는 지역의 고분에는 鐵鋌이 많이 발견된다. 전쟁터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에 화폐를 가득 넣어 두었단 말인가. 百濟의 고분이 아니라 평화롭던 朝鮮時代의 고분 이라면, 가능하다. 百濟의 화폐는 鐵鋌이 아니라 해남 군곡리 패총(海南 郡谷里貝塚)에서 발견된 화천(貨泉)이다. 중국 新나라의 화폐로 날조 당했으나, 티벳고원 북부에 화폐가 있다면, 高句麗나 百濟의 화폐로 교역을 할 때나 사용했다.

그렇다면 전투 중에 무기로 제작할 수 있는 鐵鋌을 부장품으로 넣었단 말인가. 韓半島는 百濟 땅이니까, 철기로 생활용품이나 농기구 등을 충분히 제작하고 있었다. 新羅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 동부에서 철 기술자를 다 데려와야 했다. 전쟁터에는 사람이 살 리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으니까, 百濟의 철기 제작자는 무기 제작자로 변신하면 된다. 韓半島의 철 기술자는 百濟가 新羅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패해서 후퇴하는 마당에 철제품을 방치하고 간다면 新羅가 사용할 것은 뻔한 일. 그렇다면 무덤 속에 감추는 편이 훨씬 百濟에게 유리하지 않은가. 그래서 百濟는 고분에다 남은 鐵鋌을 보이는 곳에 쌓아두지 않고 바닥에 묻어둔 것이다.

百濟軍이 무덤 속에 鐵鋌을 감춘 것을 新羅軍은 알았지만 당장 쓸 것만 꺼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전투지까지 운반할 수레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新羅가 아무리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 나다고 해도 중국 대륙 동부에서 선박으로 병력과 말을 수송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수레 제작자 까지 충분히 데려 오지는 않았다. 新羅는 현지에서 전리품으로 조달 하려고 했고, 百濟는 후퇴 하면서 수레를 모두 파괴하고, 수레 제작자는 모두 데려갔다.

日本 최초의 화폐는 텐무(天武) 때 新羅의 부본전(釜本錢)으로 통용 시키지는 못했다. 日本이 본격적인 화폐경제로 전환한 것은 壬辰倭亂 이후이다. 일본은 壬辰倭亂을 통해 李氏朝鮮의 國富를 모조리 긁어갔다. 壬辰倭亂은 李氏朝鮮을 明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부를 약탈하기 위한 전쟁 이었다. 征明假道? 홋가이도(北海道) 조차 정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明 이전에 淸부터 정복해야 한다. 현 揚子江 이북에는 李成桂 당시부터 淸이 있었다.

 

왜성은 일본으로 끌고 갈 조선인이 잠시 머물던 임시 수용소의 역할을 했다. 왜성을 통해 일본에 포로로 건너간 조선인은 15 만명이 넘는다. 왜성은 문화 약탈의 중심지 였던 것이다(역사스페셜 6권)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기간에 축조한 倭城은 남해안을 따라 28 곳이나 되었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 장수들도 이들 倭城에서 전쟁 기간의 절반을 주둔 했다는 사실은 壬辰倭亂이 우리나라의 國富를 약탈하기 위해 벌인 전쟁 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 죽성리 왜성 성벽 : 기장군(機張郡) 죽성리(竹城里)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심한 세월에 잡풀만 돋아나고 있다.

壬辰倭亂을 통해 日本은 우리민족이 5500 년 동안 축적해온 동북아의 막대한 재화와 보물 뿐만 아니라, 陶工과 기타 예술가들까지 납치해 갔다. 납치된 陶工 등이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만든 상품으로 이른바 쇼군(將軍)들은 서양과 교역을 해서 부를 축적했다. 이렇게 손에 쥔 富는 다시 쇼군 밑에 있는 사무라이들을 거쳐 상인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자연히 화폐경제가 발달한 것이다. 그래서 에도시대(江戶時代)는 商人의 時代 라고도 한다.

朝鮮通信使의 가르침과 넘쳐 나는 富로 창출한 것이 겐로쿠 문화(元綠文化)이다. 겐로쿠 문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퇴폐성이다. 기껏 우리나라 문화재와 부를 약탈하고 李氏朝鮮의 陶工과 藝術家를 납치하고 朝鮮通信使를 초빙해서 한다는 짓이 섹스고 퇴폐문화의 융성 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一字無識 했던 사무라이들도 덩달아 겐로쿠 문화에 참여했다.

사무라이들은 미개했던 倭奴 땅에서 朝鮮通信使에 의해 계몽된 마지막 집단 이었다. 朝鮮通信使에 의해서 먼저 깨어난 것은 도시 상공인 즉 쵸오닌(町人) 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이 朝鮮通信使에 의해 직접 계몽 됐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무라이들이 문맹상태에서 벗어 나기로 분연히 일어선 계기는 바로 퇴폐문학의 한 형태인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였기 때문이다.

◀ 가부키 선전 포스터

倭奴의 퇴폐문화는 문학에만 그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가부키의 ‘키’는 원래 기생 기(妓)자였던 것을, 메이지 때 재주 기(伎)자로 고쳤다. 가부키가 기생들의 연희로 출발한 퇴폐적인 것임을 은폐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를 보면, 가부키가 얼마나 음란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歌:노래), 무(舞:춤, 환롱: 자유자재로 꾸며 농락하다), 기(妓:기생)를 쓴다. 한때 가부키는 性의 문란을 가져 온다고 해서 퇴폐적인 일본 당국조차 폐지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그 때문에 300 여 년간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아왔다.

武寧王陵은 가짜다. 어째서 日本은 다른 고분은 모조리 도굴해 갔으면서 武寧王陵(?)만은 온전히 남겼는가. 武寧王陵(?) 역시 도굴 되었었다. 다만 부장품을 바꿔놓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무덤이다 보니까, 韓半島가 倭의 속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百濟는 黃海를 건너지 않았다. 黃海에서 발해만으로 해안을 따라 沿岸航海를 했다(기원전 2 세기에서 3 세기 까지 형성된 郡谷里 貝塚에서 원양어업용 낚시바늘이 나왔다. 百濟는 遠洋漁業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항해술이 뛰어 나다고 해도 사람 및 물품 수송은 가장 안전한 항로를 택하기 마련이다). 육로가 빠르다면 육로를 택했겠지만, 당시 육로수송은 마차가 전부니까, 대량수송은 배로 했을 것이다. 黃海를 왕래한 나라는 新羅였다.

百濟 영토 韓半島에 新羅가 진출 하면서 남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列島의 倭는 韓半島 북부까지 배(백제 선박)로 가서 육로로 이동 하거나 역시 발해만을 거쳐 연안항해를 했다.

百濟가 韓半島에 없었다면, 列島를 식민지화 하지 않았다. 列島는 중국 동부, 渤海灣에서 黃海를 오가면서 식민지를 경영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더구나 식민지를 건설한 5 세기 이후의 百濟는 중국 대륙과 韓半島에서 高句麗, 新羅와 전쟁을 수행하는 것 만으로도 벅찬 상황 이었다.

百濟가 列島를 식민지화 하지 않고, 군사기지화 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百濟의 운명은 달랐졌을 것이다. 植民地로 삼았기 때문에 文明 이라고는 全無한 땅에 온갖 것을 이식해 줘야 했다. 그것도 중국 대륙 에서는 高句麗, 新羅와, 韓半島 에서는 新羅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滿州도 안전지대 임에도 百濟의 皇族부터 줄줄이 列島에 가서 살았다. 기후가 동북아에 비해 온화해서 였겠지만, 이때부터 高句麗에 밀리기 시작해서 西鴨綠江(嘉陵江) 이서와 黃山江(揚子江) 이남을 상실했다. 皇帝로 즉위해야 돌아 오니까, 本國의 귀족들과도 틈이 벌어지고, 정치혼란이 초래된 것이다.

百濟 멸망 전쟁 에서도 列島라는 물러설 곳이 있어서 쉽게 무너졌다. 白江 전투에서 패한 부여용(扶餘勇)은 列島로 가서 왕위(24 대 天智)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