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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monocrop 2007. 10. 5. 02:49
"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 ( 3 )
중국은 양자강(揚子江)을 漢江(한강)으로 표기 했다
 
박병역 위원
 
▶ 백제의 공주, 전주, 광주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

 ◉ 중국은 양자강(揚子江)을 漢江(한강)으로 표기 했다 

[단독보도 제25편]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는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진한, 마한, 변한)과 중국 대륙에서 건국 되었던 아세아적 대국의 3국(신라, 백제, 가야국)을 마치 한반도 속에서 건국된 것처럼 왜곡 축소하여 편찬된 조선사(현행 국사)로 대한민족의 기상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즉 인류의 4대 문명을 주도한 문명의 종주국을 세계에서 문명이 제일 뒤 늦은 열등한 민족으로 변조하고, 거룩한 성군(聖君)을 무능한 조상으로 철저히 폄하(貶下)하고, 역대 제왕들의 허물을 과장해서 청소년들이 자국의 조상님을 멸시하도록 변조하여 거짓 가짜로 조선사(국사교과서)를 편찬했다. 라고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잘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 왜곡의 증서로 삼았던 [삼국사기]의 진실된 본문은 삭제, 왜곡하고, [삼국사기의 현재 지명을 조작]하여, 일제식민지시대의 [1910년 전국을 13도 12부 317군으로 개편한 지명]과 본래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편찬 된 조선사(현행 국사)와 교묘히 얽어 맞추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였던 황하강(양자강:한강)은 우리나라 3국이 위치한 영토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국을 통일한 신라는 백제지역에 熊州(웅주), 全州(전주), 武州(무주)의 3주를 설치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과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熊州(웅주)를 지금의 공주(公州)라 하고, 全州(전주)를 지금의 전주라 하고, 武州(무주)를 지금의 광주(光州)라고 [지금(현재)의 지명을 조작]했던 것입니다. 과연 백제 영토의 熊州(웅주), 全州(전주), 武州(무주)가 한반도 속의 공주, 전주, 광주인가? 철저히 관찰해 봅시다.

[1].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는 부여(扶餘:공주)입니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古典記(고전기)를 살펴보면 백제의 시조 온조는 前漢鴻嘉(전한홍가) 3년 계묘(서기전 18년) 졸본 부여에서 나와 (1),慰禮城(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389년을 歷年(역년)했다. 13세 近肖古王(근초고왕)은 고구려 南平壤(남평양)을 쟁취하고 도읍을 (2), 北漢城(북한성:楊州(양주)으로 옮기고 105년을 歷年(역년)하였다. 

제 22세 文周王(문주왕)은 도읍을 (3),熊川(웅천)으로 옮기고 63년을 歷年(역년)했다. 제26세 聖王(성왕)은 도읍을 (4), 所夫里(소부리)에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고 제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2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의자왕 재위 20년(서기 660년)에 신라의 김유신과 당(唐)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토벌하여 평정되었다. (중략)

상기 본문과 같이 백제의 도읍지는 1,위례성⇒2,북한성(남평양) 3,웅천⇒4,소부리(남부여)로 4번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병도는 3,熊川(웅천)⇒4, 所夫里(소부리)를 같은 지역의 지금 공주(公州)로 지정하여 백제가 도읍을 3번 천도(遷都)한 것처럼 왜곡 했습니다. 백제의 제26세 聖王(성왕)은 도읍을 所夫里(소부리)에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했습니다. 

▶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삼국유사)

扶餘郡(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이며 혹 所夫里郡(소부리군)이라 칭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聖王(성왕) 26년 戊午(무오) 봄에 도읍을 泗沘(사비)에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남부여)라 하였다. 注解(주해)에서 그 地名(지명)의 所夫里(소부리)를 泗沘(사비)라 하였는데 지금의 古省律(고성진)이며, 所夫里(소부리)는 扶餘(부여)의 다른 이름이다. 

또 量田帳籍(량전장적)에 의하면 所夫里郡(소부리군)을 田丁柱貼(전정주첩)이라 했다. 지금 말하는 扶餘郡(부여군)은 上古(상고)의 옛 이름을 다시 찾은 이름이라 하겠다. 백제왕의 성이 扶氏(부씨)이므로 扶餘(부여)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혹 餘州(여주)라고 했는데 餘州郡(여주군)의 서쪽 資福寺(자복사)에서 百高座(백고좌)를 행했을 때 [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餘州功德大寺(통화15년정유(997년) 5월 일여주공덕대사] 라고 繡(수)를 놓은 帳簿(장부)가 있었다. 또 예날 河南省(하남성) 林州(임주)에 刺史(자사)를 두었을 때 圖籍(지적도) 속에 餘州(여주)란 두 글자가 있었다. 지금의 佳林郡(가림군)을 餘州(여주)라 하고 扶餘郡(부여군)이라 했다.(중략)

또 虎庵寺(호암사)에 정사암(政事嵓)이란 바위가 있었는데 장차 나라의 宰相(재상)이 될 만한 사람 3,4명의 이름을 函封(함봉)하여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보면 재상이 될 사람의 이름 위에 印章(인장)이 짝혀있었기 때문에 바위 이름을 정사암(政事嵓)이라 했다. 

또 泗沘(사비)의 강변에 한 바위가 있었는데 蘇定方(소정방)이 항상 이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를 하던 중에 龍(용)이 나와 바위에서 龍(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다 하여 이름을 龍岩(용암)이라 했는데 扶餘郡(부여군)에 있다. 백제의 전성시대는 [日山(일산), 吳山(오산), 浮山(부산)]이라는 세 산이 있었는데 각국의 神人(신인)들이 그 산위에 날아와 安居(안거)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며 끊어지지 않았다. 고 한다.

또 사비의 절벽에 십여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한 바위돌이 있었다. 백제왕은 王興寺(왕흥사)로 행차하여 부처님에게 禮佛(예불)하기 전에 먼저 바위 돌을 바라보고 佛(부처)님에게 절하면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 졌다 하여 그로 인하여 이름을 <온돌 바위>라 하였다. 

또 사비강은 양쪽에서 떨어지는 물은 마치 병풍 그림과 같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백제왕은 매일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어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였다 하여 지금은 大王浦(대왕포)라 칭한다. 또 시조 온조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이 중후하여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友愛(우애)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 했다. 또 多婁王(다루왕)의 성품은 관후한 덕망과 위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 沙沸王(사비왕 일명 沙伊王(사이왕)이라 하였는데 왕이 돌아가시자 仇首(구수)가 後嗣(후사)의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政事(정사)를 맡을 수 없으므로 즉위를 폐하고 古爾王(고이왕)이 즉위하였다. 혹은 至樂初(지락초) 2년 己未(기미)에 沙沸王(사비왕)이 돌아가자 古爾王(고이왕)이 옹립되었다. [본문 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본문]을 살펴보면 熊州(웅주)=泗沘(사비)=扶餘(부여)=所夫里(소부리)는 각각 이름은 다르지만 다 같은 한 곳의 지명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는 공주, 청주, 예산 등의 지명으로 둔갑했습니다.

[2]. 삼국사기의 기록과 현세인 들의 엉터리 지명 연혁

[제1]. 삼국사기의 웅주(熊州:공주)

[삼국사기 권 제 36 잡지5-지리3]

<웅주>는 본래 백제의 옛 도읍지 였으나 唐高宗(당고종)이 소정방을 파견하여 평정하고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으나 신라의 文武王(문무왕)이 그 지역을 쟁취하고 神文王(신문왕681~691))이 熊川州(웅천주)로 개명하여 都督(도독)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년) 熊州(웅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公州(공주)이다. 

2현(縣현)의 尼山縣(이산현)은 본래 백제 熱也山縣(열야산현:논산군 노성면)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淸音縣(청음현)은 본래 백제의 伐音支縣(벌음지현)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新豊縣(신풍현:지금 공주역내)이라 한다.

西原京(서원경)은 神文王(신문왕) 5년에 처음 西原小京(서원소경)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西原京(서원경)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淸州(청주:지금 청주시)이다.

大麓郡(대록군:지금 천원군 목천면 일대),嘉林郡(가림군:지금 부여군 임천면 일대) 西林郡(서림군:지금 서천군),伊山郡(이산군:예산군 덕산 일대) 彗城郡(혜성군:당진군),扶餘郡(부여군:소부리군) 任城郡(임성군;예산군 대흥면) 黃山郡(황산군:논산군) 比豊郡(비풍군:대덕군) 潔城郡(결성군:홍성군) 燕山郡(연산군:연기군) 富城郡(부성군:서천군) 湯井郡(탕정군:아산군) 이상 12군이다. 참고 => [ 지명의 ( )는 이병도가 임의로 지정한 현 지명임] 

본래 백제의 任存城(임존성)을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大興郡(대흥군:예산군)이라 하며 二縣(두현)이 있다. 靑正縣(청정현)은 본래 백제의 古良夫里縣(고량부리현)이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靑陽縣(청량현:청량군)이며, 孤山縣(고산현)은 본래 백제의 烏山縣(조산현)이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禮山縣(예산현:예산군)이라 한다. 

(1), 엉터리로 맞춘 공주군(公州郡:웅주)의 연혁

백제의 문주왕이 475년 북한산(北漢山)으로부터 이곳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고부터 538년(성왕 16) 사비성(泗沘城:부여)으로 천도할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문화의 꽃을 피운 중심지이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5방제에 따라 북방(北方)이 설치되어 예하의 군을 관할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이곳에 660년 웅진도독부를 설치했으나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웅천군(熊川郡)으로 삼았다가 685년에 웅주(熊州)로 바꾸고, 757년에 다시 웅주도독부로 개칭했다. 신라 말기에 후백제의 영토에 속했다가 고려조에 들어 940년 현재의 이름인 공주(公州)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의 983년 공주목을 설치했다가, 995년에는 안절군절도사(安節軍節度使)를 두어 하남도(河南道)에 속했으며, 1012년 안무사로 바꾸는 등 지방행정제도의 변화가 심했다. 1018년 지부사(知府事)로 강등되었으나 속군(屬郡)으로 덕은(德恩)·회덕(懷德)·부여(扶餘)·연산(連山)을, 속현(屬縣)으로는 시진(市津)·덕진(德津)·진잠(鎭岑)·유성(儒城)·석성(石城)·정산(定山)·이산(尼山)을 두었다. 1341년 공주목으로 승격했다. 

조선시대에도 공주목이 유지되어 충주·청주·홍주와 함께 충청도 4대 고을로 지칭되었으며, 충청우도 중부이남, 즉 차령산맥 이남의 중심지역이었다. 인조·현종·영조·정조대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별호는 회도(懷道)였다. 1894년 남북접을 통합, 북상하던 동학군이 공주시의 남부 우금치(牛金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워 패했다. 고읍(古邑)으로 지금은 대전광역시의 일부분이 된 유성현·덕진현·충순현(忠順縣)·신풍현(新豊縣)·광정현(廣程縣) 등이 있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공주군이 되면서 공주부가 설치되어 27개군을 관할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충청남도 공주군이 되었다. 

일제식민지시대에 공주군은 1906년 월경지 정리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자 공주는 백제 이래 지녀왔던 충청 지역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대전에 넘겨주고 성장이 위축되었다. [허허참]

1931년 공주면이 읍이되었고, 1986년 공주읍이 시로 승격, 공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시대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으로 공주군이 공주시에 통합되어 도농 복합형태의 새로운 공주시가 되었다.

 (2). 엉터리로 맞춘 청주시(淸州市)의 연혁

청주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685년(신문왕 5)에 청주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서원경(西原京)으로 개칭되어 정치·군사상의 요지였음이 행정구역에도 반영되어 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청주(靑州)를 뒤에 청주(淸州)로 이름이 바뀌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牧)을 둘 때 청주목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전절군절도사(全節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가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했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67년, 1681~89년, 1804~13년, 1826~34년, 1862~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청주의 별호는 낭성(琅城)이었다. 1895년에 공주부 청주군,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비입지인 주안면이 회덕군으로, 덕평면이 전의군으로, 두입지 수신면이 목천군으로 이관되어 청주의 면적이 줄었다. 1908년에 충청북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북도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에 의해 문의군이 폐지되고 청주군에 병합되었다. 이때 청주군의 26개면이 13개면으로, 문의군의 7개면과 회인군 1개면이 5개면으로 폐합되어 총 18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동주내면·북주내면·남주내면의 일부는 통합된 청주면이 1931년에 청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에 청주읍이 청주부(府)로 승격되었다가 1949년에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청주시의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1963년에 사주면, 1983년에 강서면이 청원군으로부터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 상당구와 흥덕구 2개구가 신설되었다.

 [제2]. 삼국사기의 전주(全州:전주)

<전주>는 본래 백제의 完山(완산)이였으나 眞興王(진흥왕) 16년에 州(주)로 하였다가 26년에 州(주)를 폐지하고 神文王(신문왕) 5년에 다시 설치하여 完山州(완산주)라 하였으나 경덕왕 16년에 全州(전주)로 개명하였다. 三縣(3현)의 杜城縣(두성현)은 본래 백제의 豆伊縣(두이현)이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伊城縣(이성현:정주군)이며, 金溝縣(금구현)은 본래 백제의 仇知只山縣(구지지산현:금제군)이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高山縣(고산현:완주군)은 본래 백제의 縣(현)이나 경덕왕이 州郡(주군)이름을 고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 完山(완산)에 대한 이병도 註(주)를 적는다

이 기재는 撰者(찬자:김부식)가 犯(범)한 또 하나의 杜撰(두찬)으로 유명하다. 진흥왕 16년에 比斯伐(비사벌)에 完山州(완산주)를 설치한 것은 지금의 전주 완산이 아니라 지금 경남의 창령이였다. 이 당시 전주의 완산은 엄연히 백제의 판도에 있었던 것이다(본기 참조)라고 삼국사기를 편찬하신 김부식을 빈정거리며, 질타하고 있습니다. 

南原小京(남원소경)은 본래 백제의 古龍郡(고룡군)이나 신라에서 합병하고 神文王(신문왕) 5년 처음으로 小京(소경)을 설치하고 경덕왕 16년에 南原小京(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 지금은 南原府(남원부:남원군)라 한다.

大山郡(대산군:정읍군) 古阜郡(고부군:정읍군 고부) 進禮郡(진례군:충남 금산군) 德殷郡(덕은군:논산군 은진면) 臨陂郡(임피군:옥구군), 金堤郡(김제군:김제군) 淳化郡(순화군:순창군) 金馬郡(금마군:익산군) 壁谿郡(벽계군:장수군) 任實郡(임실군:임실군)의 9郡(군)이 있었다. 

  ▶ 엉터리로 맞춘 전주시(全州市)의 연혁

삼한시대에 마한의 영토였던 이곳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로서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다가 565년에 폐지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757년(경덕왕 16)의 행정구역개편 때 전주(全州)로 개칭하여 1소경 10군 31현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후 전주는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고장이 되었다. 

신라시대의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광주)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했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전주의 별호는 완산(完山)·견성(甄城)이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전주부 전주군, 1896년에 전라북도 전주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양양소면을 연산으로, 비입지인 동일면·북일면·남일면·남이면·서일면과 두입지인 우북면을 익산으로, 비입지인 이동면·이서면·이북면을 만경으로 이관함으로써 전주군의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 때 고산군이 폐지되어 합속됨으로써 다시 행정구역이 확대되었다. 1935년에 전주면이 부로 승격되어 독립하고 1949년에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1987년에 완주군 조촌읍이 전주시로 편입되고, 완산출장소와 덕진출장소가 구로 승격되었다. 1995년 김제군에 속했던 백구면의 도덕리·도도리·강흥리가 전주시 덕진구에 편입되었다.

 [제3] 삼국사기의 광주(무주(武州)

<무주>는 본래 백제의 지역이였으나 神文王(신문왕) 6년(686년)에 武珍州(무진주)라 하였으나 경덕왕이 武州(무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光州(광주)이다. 三縣(3현)의 玄雄縣(현웅현)은 본래 백제의 未冬夫里縣(미동부리현)이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南平郡(남평군:나주군 남평면)이라 하며, 龍山縣(용산현:나주)은 본래 백제의 伏龍縣(복용현)이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다시 옛이름으로 하였다. 祁陽縣{祈陽縣:기양현}은 본래 백제의 屈支縣(굴지현)이나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은 昌平縣(창평현:담양군 창평면)이라 한다. 

分嶺郡(분령군:순천시 및 승주군) 寶城郡(보성군:보성군) 秋城郡(추성군:담양군) 靈巖郡(령암군:영암군) 潘南郡(반남군:번남군),岬城郡(갑성군:장성군) 武靈郡(무령군:영광군) 昇平郡(승평군:순천시 승주군) 谷城郡(곡성군:곡성군) 陵城郡(능성군:화순군 능주면), 錦山郡(금산군:금산군) 陽武郡(양무군:강진군) 務安郡(무안군:무안군) 牢山郡(뇌산군:진도군) 壓海郡(압해군:나주군)의 十五郡(15군)이 있었다. 끝 상기 한반도 속의 현재지명 ( )은 고증에 준거한 지명이 아니고,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조작해서 만든 지명들이다. 

  ◈ 무주 군민들의 냉정한 비판을 요청 합니다

[전라남도 무주군 연혁] 무주는 고려말까지 독립현이었던 주계현(朱溪縣)과 무풍현(茂豊縣)을 조선초에 통합하면서 머리 글자를 따 붙인 이름이다. 삼국시대에 주계는 백제의 적천현(赤川縣), 무풍은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적천현은 단천현(丹川縣)으로 개칭해 진례군(進禮郡:금산)의 영현이 되었고, 무산현은 무풍현으로 개칭해 개령군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까지 단천현은 마한·백제 문화권에 속했으며, 무풍현은 변진·신라 문화권에 속했다. 940년(태조 23)에 단천현을 주계현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주계현과 무풍현이 모두 진례군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무풍현에 감무를 두고 주계현도 겸임하도록 했으며, 1391년(공양왕 3) 무풍현에 주계현을 병합함으로써 지금의 무주군의 틀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의 군현제 개편에 따라 1414년(태종 14)에 무주현으로 개칭했고, 중심지를 주계(朱溪)에 두었다. 임진왜란 후에 적상산성에 사고(史庫)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된 것을 계기로 1674년(현종 15)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금산군의 안성면·횡천면을 편입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남원부 무주군리 되고, 1896년에 전라북도 무주군이 되었다. 

1906년의 월경지 정리로 금산의 두입지(斗入地)인 부남면이 무주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부내면, 서면, 북면이 무주면으로, 풍동면,풍남면이 무풍면으로, 신풍면,풍서면, 횡천면이 설천면으로, 상곡면, 유가면이 적상면으로, 일안면,이안면이 안성면으로, 부남면은 그대로 통합되어 6개 면이 되었다. 1979년 무주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끝.

상기 무주연혁은 삼국사기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무주는 깊은 산골이기 때문에 무주구천동이라 칭했습니다. 신라 9주의 무주일까요? 냉정한 비판을 요청합니다.

  [2].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신라의 9주

[3국을 통일한 신라는] 백제지역의 熊州(웅주), 全州(전주), 武州(무주)의 3주에 여러 郡縣(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 남쪽 국경의 漢州(한주), 朔州(삭주), 溟州(명주)의 3주와 신라의 옛 땅 尙州(상주), 良州(양주), 康州(강주)를 3주로 만들어 신라의 9주가 되었다.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 고구려 침략 후의 지도 (현행국사 옮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九州(9주)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다. 신라의 5소경제(五小京制)는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國原小京 ; 지금의 충주)이 설치되고, 선덕왕 8년(639)에 북소경(北小京 ; 지금의 강릉) 등이 설치되었다.

 

신라 삼국통일시대는 아시촌 소경과 북소경은 폐지하고, 문무왕 18년과 20년에 북원소경(北原小京)과 금관소경(金官小京)을 각각 설치하고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과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고 국원소경을 중원소경(中原小京)으로 개칭함으로써, 중원소경․ 북원소경․ 금관소경(동원소경)․ 서원소경․ 남원소경으로 이루어지는 5소경제가 완비되었다.


[삼국사기 34 잡지3 지리1]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마침내 9주를 두었다. 본국 경계 내에 3주의 상주(尙州)는 왕성(王城:경주 금성) 동북쪽의 당은포(唐恩浦)로 향하는 길목에 를 설치하고, 왕성 남쪽에 양주(良州), 경주 서쪽에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 

옛 백제국의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백제의 옛성 북쪽의 웅진(熊津)을 웅주(熊州)라 하고 [경주 금성]에서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다음에 남쪽을 무주(武州)를 설치했다. 옛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3주를 두었는데, 서쪽으로부터 첫 번째가 한주(漢州)이고 그 다음 동쪽이 삭주(朔州)이고 또 그 다음 동쪽이 명주(溟州)이다. 

신라는 9주에 郡縣(군현)을 설치하여 관리한 곳이 무려 450현이었다.(지방향리와 部曲(부곡)등은 복잡하여 그 목록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의 지리는 광활하게 뻗어 실로 극찬 할만 하였으나 마침내 국력은 쇠약하고 정치는 황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그렇게 강활 했던 국토도 날로 쪼그라들어 마지막 金傅(김부)왕을 우리 고려 태조(왕건)께서 귀국시키고 신라의 경주(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끝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주를 적는다]

신라 9주의 완전은 이미 신문왕 5년의 일이지만 경덕왕(742-764년)때에는 단지 그 명칭을 漢式化(한식화)한데 불과하며 또 그 九數(9수)란 것도 중국의 九州(9주)를 모방한 것이다. 9주중 尙,良,康(상,양,강)의 3주는 신라 및 伽倻(가야)의 地(지)이고, 漢,朔,溟(한,삭,명)의 3주는 옛 고구려의 남부이고, 熊,全,武(웅,전,무)의 3주는 백제 故地(고지)에 설치한 것이다. 라고 이병도는 우리민족을 철저히 비하(卑下)하여 註釋(주석)했다. 

▼ 엉터리로 지정한 이병도의 9주 5소경(현재지명 참조 바람)


국명

구분

舊州名(구주명)

改名(개명)

小京(소경)

군수

현수

현지명

비고





1

沙伐州(사벌주)

尙州(상주)

 

10

30

尙州(상주)

경북

2

歃良州(삽량주)

良州(양주)

金官(금관:김해)

12

34

金海(김해)

경남

3

菁州(청주)

康州(강주)

 

11

27

晉州(진주)

경남







1

漢山州(한산주)

漢州(한주)

中原(중원:충주)

27

46

廣州(광주)

충북

2

首若州(수약주)

朔州(삭주)

北原(북원:원주)

11

27

春川(춘천)

강원

3

河西州(하서주)

溟州(명주)

 

9

25

江陵(강능)

강원





1

熊川州(웅천주)

熊州(웅주)

西原(서원:청주)

13

29

公州(공주)

충남

2

完山州(완산주)

全州(전주)

南原(남원:남원)

10

31

全州(전주)

전남

3

武珍州(무진주)

武州(무주)

 

14

44

光州(광주)

전남

합계

9

구명 9주

9주

5소경

117

293

 

 

참고

삼국사기의 신라 9주 현수는 무려 450개이었다.

 

450

 

 

고려는 10도 128개 주에, 449개 현이 있었다

 

449

 

 


한반도 속의 신라 9주의 군수와 인구


구 분

도 명

군 수

현 수

세종(1419-1450년) 때 호수





경상북도

10

30

경상도 48,993

경상남도

23

61

 

강원도

20

52

강원도 15,879





경기도

27

46

경기도 20,729

충청남도

13

29

충청도 19,560

충청북도

0

0

 

전라북도

0

0

 

전라남도

24

75

전라도 15,714

합계

삼국통일의 신라강역

117군

293현

120,875호


상도의 엉터리로 지정한 이병도의 신라 9주 5소경지역의 1,경상북도는 10군과 30현이고, 2, 경상남도에 23군, 61현이고, 3,경기도에 27군, 46현이고, 4,강원도에 20군, 52현이고, 5, 충청남도에 13군, 29현이 있고, 8, 전라남도에 24군, 75현이 있고, 6 충청북도와 7, 전라남도 지역은 1개의 주와 군현도 없습니다. 한반도 속으로 맞춘 괴이한 9주입니다. 

 ▶ 신라는 九州(9주)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다

신라의 영토는 실로 광대하며, 한 곳에 붙어 있기 않고 여기 저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九州(9주)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1, 중원소경(中原小京:충주), 2, 북원소경(北原小京:원주), 3, 금관소경(金官小京:김해), 4, 서원소경(西原小京):청주) 5,남원소경((南原小京:남원)으로 이루어지는 5소경제가 완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병도는 상기 ( )안의 한반도 지명과 같이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마치 한반도 속의 지명인 것 처럼 얽어 맞추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병도가 주장한 것 처럼 한반도 속에 신라가 있었다면 하나의 도읍지만 해도 충분히 통치 할 수 있는 한반도의 그 좁은 땅에 무슨 9주 5소경이 필요하겠는가? 지나가는 개가 한국인을 처다 보고 멍멍 짖는 구나...! 

  [3]. 고구려의 영유왕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 백제의 왕경(王京) 부여성(扶餘城)은 만리장성에 있었다.

[증서 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유왕 14년(631)에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수(隋)나라 전사(戰士)들의 해골(骸骨)을 묻은 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 그때 당시 세운 경관(京觀:백제 왕도)을 영유왕이 허물게 했다. 631년 2월에 영유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만리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에서 부여성(扶餘城) 동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만리장성은 하북성 발해만[渤海灣] 연안의 산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북경[北京]과 대동[大同]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황하강을 건너며, 섬서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다시 황강을 건너고, 북서쪽으로 가욕관[嘉峪關]에 다다른다. 만리장성 동북쪽에 부여성(扶餘城)이 있고 동남쪽 산시성[山西省] 리석현[離石縣]부근부터 발해만 부근 산해관[山海關]까지 천여 리는 631년 고구려의 영유왕이 16동안 쌓았던 장성이었다.

 즉 부여성(扶餘城)은 백제의 경도(京都)입니다.

수(隋)나라 전사(戰士)들의 해골(骸骨) 무덤이 백제의 경도(京都) 부여성(扶餘城)에 있었기 때문에 영유왕은 서기 631년 경관(京觀:백제의 경도(京都)을 허물게 했던 것입니다. 일본인과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본문을 경관(京觀:백제 경도)처럼 교묘히 조작했던 것입니다.

 절강성의 오산(吳山)은 변수(汴水)가 흐르고 산동성(山東城)은 사수(泗水)가 흐르고 곧 사비성(泗沘城)이다. 부여성(扶餘城), 바로 사비성(泗沘城)이 백제의 왕경(王京)입니다.

  [4], 백제의 병산(甁山)은 하남성에 있었다

[증서 2], 중국고금지명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은 하남성(河南省)에 공주(公州), 운주(雲州,運州))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 11년(서기전 8)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7월에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의 두 산에 목책을 세워 [요녕성]에 소재한 낙랑(樂浪)과의 통로를 막았다. 즉 병산(甁山)은 낙랑의 남쪽에 소재(所在)하고, 곧 하남성에 있었다는 말이다.

백제의 제2대 다루왕(多婁王)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다루왕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나이 90세에 죽자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가을 9월에 말갈이 마수성(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놓아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겨울 10월에 또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였다. 

신라의 제56대 경순왕(敬順王) 4년(930) 1월에 고려 태조(왕건)가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창군(古昌郡:이병도는 경북 안동, 전북이라 주장함) 병산(甁山) 아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대승을 알리니 경순왕(敬順王)이 답례로 사람을 보내 방문하고 아울러 서로 만나기를 요청했다. 가을 9월 신라국 동쪽의 연해주(沿海州)의 군(郡) 마을 사람들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신라는 평양주에 대교(大橋:큰 다리)를 만들었다

신라 제 18대 실성왕(實聖王)은 의희(義熙) 9년 계축(癸丑; 413년)에 평양주(平壤州)에 大橋(대교)를 완성하였다. 12년(413)조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즉 삼국유사의 신라 제18대 실성왕 편은 평양대교는 신라의 실성왕 때 만들어 졌다. 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곧 신라는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톡)와 평양, 낙랑(樂浪)과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동남쪽은 다 신라의 영토이었다. 현행 국사는 삼국 통일의 신라 강역을 평양은 포함되지 않고 황해도까지로 기록돼 있습니다.

 ▶ 吳山(오산)은 한반도의 전남인가? 중국의 절장성인가?

[삼국유사의 남부여 편] 백제의 전성시대는 [日山(일산), 吳山(오산), 浮山(부산)]의 세 산이 있었는데 각국의 神人(신인)들이 그 세 산위에 安居(안거)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며 끊어지지 않았다. 고 했습니다.

절강성의 항주에 오산(吳山) 보석산, 뇌봉탑, 옥황산,북고봉 등이 있습니다. 오산(吳山)은 서호군산 끝에 있습니다. 산세는 활모양으로 자양, 운거, 청평, 보련, 칠보, 석불, 보월, 낙탁, 아미산 등 십여개의 작은 산으로 이어져있다.오산을 성황산(城隍山)이라고 부른다.



▶ 浮山(부산)은 한반도의 전남인가? 중국의 산동성인가?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제2 문무왕(文武王) 법민(法敏)]성부산(星浮山; 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武珍州)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부산(浮山)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중국 산동성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청도(靑島), 위해, 연태 등 3 도시가 있다. 위해와 연태(양 도시는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위해는 유엔이 세계 10대도시로 지정된 아름다운 도시로서, 동해 해변에 장보고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산동성 청도에 소재한 중국 해양대학교 뒷산이 바로 부산(浮山)이다. <계속>

    
박병역(朴炳譯)/한얼원/올림 
▶ 한국정신문화선양회(韓國精神文化宣揚會) 대표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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