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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인으로 倭왕실 주름잡은 웅혼 아스라히…

monocrop 2007. 10. 9. 23:45
신라인으로 倭왕실 주름잡은 웅혼 아스라히…
    

7세기 교토 땅 우스마사(太秦) 일대는 고류지 사찰을 중심으로 고대 신라인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터전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오늘의 일본 국보 제1호가 된 신라 적송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함께 큰 상투가 특징인 일본 국보, 백제 녹나무 ‘보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그동안 어느 학자나 백제가 아닌 신라에서 백제 ‘보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보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찍이 가와카쓰 세이타로(川勝政太郞) 교수가 “고류지 2체의 반가사유상 중에서 하나는 백제에서 보내왔는데, 그 하나는 ‘보계(상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며, 이 미륵상은 어깨에서 걸쳐 내리는 천의(天衣)가 가죽제(革製)인 것이 진기하다”(‘京都古蹟行脚’ 臼井書房, 1947)고 60년 전에 지적한 점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워낙 이 고류지 사찰은 신라인 진하승의 힘이 넘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보전 안에서 색다른 인물상을 만나게 된다. 나무로 조각된 진하승공의 상반신 신상(神像)과 그 부인의 신상이다. 이 두 신상은 바로 신라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왼쪽 옆 자리에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진하승공의 얼굴 생김새는 똘똘한 눈매에 입을 꾹 다문 야무진 인상이다.

서기 10세기쯤에 조각된 것으로 이 진하승 부부 신상은 중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그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며 숙연해지는 마음이 든다. 목조 신상의 분위기로 보아 진하승공은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 속담처럼 키는 자그마하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 고류지로 7세기에 또 하나의 신라 녹나무 미륵반가사유상이 건너왔다. 그 미륵상은 현재 나라땅 이카루가에 있는 호류지(법륭사) 경내의 주구지(中宮寺)에 모셔져 있다. 그 신라 녹나무 미륵불상은 일명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이다.

이 미륵불상 역시 오늘의 일본 국보다. 이 여의륜관음이라는 신라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스이코 여왕 31년(서기 623년)에 신라에서 보내준 3번째 미륵상으로 추정되고 있다(關晃 ‘歸化人’ 至文堂, 1975).

◇고류지 영보전 안에 모셔 있는 진하승공 부부신상 나무 목조상(중요 문화재).

일찍이 나라 땅 주구지의 녹나무 ‘여의륜관음’을 예술적인 절세의 불상 조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슬며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한 사람은 소설가이자 문화사학자인 도쿄대학 와쓰지 데쓰로(1889∼1960) 교수였다. 우선 여의륜관음에 대한 그의 해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의 일본적 특질의 증거를 살피기 위해서는 조선 사람의 기질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고찰을 하기 위해 바로 썩 어울리는 두 가지 걸작이 경성(서울)의 박물관에 있다(한국 국보 제83호). 하나는 교토 우스마사의 고류지에 있는 몸체가 가느다란 미륵상(신라 적송,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흡사한 것이며, 또 하나는 이 여의륜관음과 닮은 것이다. 어느 것이나 조선에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우수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양식상의 근사(近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사순례’ 초판, 1944)

이와 같이 와쓰지 교수는 일제 말기에 신라 적송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신라 녹나무 미륵상인 ‘여의륜관음’을 합쳐 일본 것으로 왜곡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양식상의 근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렸다.

다시 진하승 장관의 눈부신 활동 시대로 돌아가자. 7세기에 신라가 훌륭한 불상들을 잇달아 왜나라 백제계 왕실로 보내주는 데 진하승 장관의 역할이 컸던 것을 도호쿠대학 사학과 세키 아키라 교수는 다음처럼 밝혔다.

“스이코 31년(서기 623년)에 신라의 사자(使者)가 가지고 온 불상을 고류지 사찰에 봉안하게 되었다. 진하승은 신라 사신들을 왕궁으로 안내하는 신라도자(新羅導者)이기도 했다.”(앞 책)

교토 우스마사의 지도자이며 큰 부호였던 조정의 재무장관 진하승공은 그의 막대한 재력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모국 신라와 왜왕실의 정치 외교 활동에 적극 앞장섰던 점을 짐작케 한다.

◇‘우스마사’(太秦) 거리.

더구나 진하승 장관은 스이코 여왕의 태자인 동시에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정치적 종교적(불교적) 동반자였다. 그러기에 진하승 장관은 당 초기인 서기 603년에 쇼토쿠 태자로부터 왕실의 백제 ‘보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교토 우스마사 땅으로 모셔다 고류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고류지는 특히 고대 일본과 조선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러한 생각은 당연히 오늘의 우리 일본인들과 조선의 관계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반가사유상(일본 국보 1호)의 등 뒤에서, 우리들은 고대 조선과 그 귀화인의 생활을 생각하여 묘사하는 동시에 국토가 둘로 분단된 오늘의 조선, 그 조선인들과 우리들의 관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矢內原伊 ‘고사순례’)

이렇듯 일본의 지식인은 고대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미륵불상을 바라보면서, 그들 일본인들의 조상도 한국 도래인들이었다는 진솔한 심정과 또한 오늘의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까지 동시에 연관지어 연면의 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일인들에게도 존경의 위인인 고류지 창립자 진하승공을 그 후 약 1350년이 지난 오늘날의 고류지 사찰에서, 이 절의 기요타키 히데히로(淸龍英弘) 주지가 1971년에 연혁비를 세우면서 ‘진하승은 진시황제의 후손’이라며 중국인으로 왜곡했다.

그러나 일찍이 무라야마 슈이치(村山修一) 교수는 “진씨가 진시황제의 후손이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平安京’ 至文堂, 1966)고 반박한 바 있다. 진시황제의 진(秦)이란 진시황제가 세운 국호, 즉 진(秦)나라의 국명(國名)이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의 중국 고대 역사책에서도 “성명이 영정(瀛政)인 인물은 진(秦)의 시황제”(‘사기’·史記 六)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하승공이 진시황제의 후손이 되려면 진씨가 아닌 영씨가 되어야만 그 후손이라는 게 입증된다.

교토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도 진하승 등 호족 진씨 가문에 관해 구체적으로 “진씨는 본래 남쪽으로 고구려의 파단현(波旦縣), 북쪽으로는 파리현(波利縣)이 있었던 울진군(蔚珍郡)의 호족으로서 5세기에 건너온 데서 비롯된다”(‘飛鳥’,1977)고 단정했다. 그 밖에도 도호쿠대학 사학과 야마오 유키히자(山尾幸久) 교수 등 여러 고대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진하승이 신라인임을 논술했다.

◇고류지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일본국보 제1호·왼쪽)과 ‘금동미륵보살반가상’(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 국보 제83호, 청동)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교대 일본문화연구소장) 교수는 진씨 가문이 신라 이주민으로서, 특히 새로운 선진 농업 기술 등 관개 농업으로 먼저 교토 지방을 개척하고 호족집단으로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백제계 왜왕실에서 고관을 지낸 사실들을 여러 논저에서 활발하게 밝혔다.

그는 “진씨는 간토(도쿄 지방)으로부터 규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고대 국가가 그들의 판도로 삼았던 영역의 거의 모든 지역에 퍼져서 살았다.

고대 사료에 보면 그 발자취에 관한 편협한 대목도 없지 않으나, 진씨의 거주가 전국적인 것만은 확인이 되며, 일본 열도의 거주자로서 그 역사와 문화 창조에 깊숙이 관여하여 왔다”(‘古代の日本と 渡來人’)고 주장했다.

요메이왕(585∼587) 말기 불교전쟁(서기 587년) 승리 이후부터 천하를 주름잡기 시작한 백제인 최고 대신 소아마자(소가노 우마코, 생년 미상∼626)는 계속 조정을 쥐고 흔들면서 뒷날 조카딸 스이코 여왕 시대 중기에 와서는 차츰 그의 외손자인 쇼토쿠 태자를 견제하게 되었다.

이에 쇼토쿠 태자의 사실상 오른손 격인 우스마사의 부호 진하승 장관도 상당한 압력을 받았으리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백제인 대집단 아야씨(漢氏, 아스카 왕실 지역 백제 왕자 아직기 가문세력)가 소아마자 장관의 옹호 대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나라 땅 아스카에 가면 오늘의 ‘아스카공원’ 지역에 거대한 바윗돌들로 웅장하게 엮어진 ‘이시부타이(石舞臺) 고분’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있다. 소아마자 대신의 무덤이란다. 이 고분의 석실은 일본에서 가장 크다. 고분 안쪽의 한 변의 길이가 51m이며, 바깥쪽 한 변의 길이는 약 85m, 현실의 길이는 7.7m이다(‘일본사사전’ 가도가와판).

교토 우스마사 고류지 남쪽 약 1㎞ 지점 주택가(太秦面影町) 골목 안에는 진하승공의 무덤이라는 큰 바윗돌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헤비즈카(蛇塚)’라는 이름의 이 고분은 바깥쪽 한 변의 길이가 약 30m이다. 소아마자 대신의 ‘석무대’ 고분에 비해 약 3분의 1 정도의 규모이나 역시 거대한 바윗돌 무덤이다.

‘사총’이라는 이 고분은 일본에서 석무대 다음으로 큰 바윗돌 고분으로 유명하며 고류지 앞 큰길을 건너서 서쪽 영화촌(촬영소) 방향으로 좀 걸어가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찾아가기 쉽다.

백제계 조정에서 고관으로 활약했던 두 큰 인물의 거대한 바윗돌 묘지를 비교하여 논한 것은 필자가 처음이거니와, 앞으로 두 인물은 보다 구체적으로 비교 연구할 만한 대상임을 굳이 지적해 둔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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