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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의 역사] 풍납토성 발굴과 문화재 훼손

monocrop 2007. 11. 2. 03:01
[현실 속의 역사] 풍납토성 발굴과 문화재 훼손
 
1. 머 리 말

한국 고대사연구의 최대의 난점은 사료의 부족이다. 특히 백제사와 가야사의 경우가 심각하다. 가야사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국내 사료나 {삼국지} {일본서기} 등의 국외사료를 가지고 아무리 합리적인 틀을 만들어도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1970년대까지 가야사연구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중심으로 하는 왜곡된 고대 한일관계사의 상을 부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 이후 호전되었다. 부산 복천동고분군, 김해 대성동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말산리고분군 등 중요 가야유적이 발굴조사되면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가야사의 모습은 문헌사료보다는 오히려 고고학적 자료에 힘입은 바가 크다. 가야사 복원의 일등공신은 고고학자들이었던 것이다.

백제의 경우 가야에 비해 문헌자료의 양은 좀더 많은 편이다. 다만 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시점과 관련된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3세기의 고이왕, 혹은 4세기의 근초고왕 이전의 관련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을 것인가, 전면적으로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믿을 것인가 하는 자세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현재 백제 초기사의 모습은 연구자마다 천차만별의 상태이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는 길은 고고학적 자료의 확보에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가야고고학이 눈부신 발전을 보인 데에 비해 백제지역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였다. 가야를 구성한 각 지역에서 활발한 조사가 진행되었던 영남지역의 사정과는 달리 대개의 경우 백제는 웅진(공주)시기, 사비(부여)시기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막상 백제역사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한성(서울)시기의 문화와 역사는 오리무중의 상황이었다.

80년대 이후 석촌동고분군과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조사의 목적이 학술적인 데에 있었다기 보다는 88서울 올림픽과 관련하여 유적의 정비복원에 두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를 다량 확보하는 데에도 실패하였고 기존 문제점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그 결과 9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는 가야사의 전개과정이 대체적인 윤곽을 그리게 되었던 데에 비해 백제 초기사의 전개과정은 오리무중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석촌동고분군은 이미 백제고분공원으로 정비되었고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조사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풍납토성이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처지는 더욱 열악한 것이었다.

2. 풍납토성에 대한 연구의 역사

풍납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대규모 토성유적이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성벽의 일부가 붕괴되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청동제 자루솥[ 斗] 등 중요 유물이 우연히 출토되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사적 11호로 지정되어 성벽은 보존되었으나 성 내부에는 보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196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간단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변변한 보호대책 없이 30여 년이 경과하면서 성 안팎은 인구밀집지역으로 변모하였다. 1500년을 잘 버티던 유적은 불과 30년 사이에 급격히 훼손되었다. 심지어 조선왕조의 서울정도 580주년 기념행사가 이루어지던 1994년에도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은 전무하였고 내부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때맞추어 토성 내부의 가옥들을 고층 아파트로 재건축하는 바람이 불면서 풍납토성은 빈사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蛇城에 비정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고 심지어 일본 학계 일각에서는 대방군의 치소로 비정하는 견해가 나오기도 하였다. 성의 평면이 장방형을 띠고 있어서 중국식에 가깝고 내부에서 중국제 물품이 나왔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소수이나마 국내 학계 일각에서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간 풍납토성에 대한 조사가 매우 부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심화된 논의는 불가능하였다.

1997년에 상황은 돌변하였다. 1월 초 풍납토성 내부의 아파트 터파기 공사장에서 지하 4M지점부터 백제 문화층이 잔존해 있음이 이형구교수(선문대)에 의해 확인되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긴급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매우 제한된 면적만을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줄로 돌아가는 환호(環濠)가 확인되었고 수혈주거지, 다량의 토기류와 함께 막새기와를 비롯한 기와류가 발견됨으로써 몽촌토성에 버금가는 중요 성지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삼중환호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본격적인 성토축성 이전에는 환호가 주된 방어시설을 담당하였음이 밝혀졌으며 이는 풍납토성에서 주민집단이 거주한 시기가 상당히 올라감을 증명한다. 실제로 몽촌토성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소위 중도식 무문토기 문화층이 풍납토성에는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후 풍납토성에서는 아파트 건축에 선행한 구제발굴과 학술발굴이 수 차례 진행되었다.

1999년 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진행된 성벽조사에서는 기저부 폭 40m, 높이 10m 이상의 대형 판축토성임이 확인되면서 하남 위례성 논쟁은 중대한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왕성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1999년 9월 이후 한신대학교 박물관은 토성 내부의 중앙부에 해당되는 경당연립지구를 발굴조사하였다. 각종 중요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풍납토성은 학계는 물론이고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발굴조사 막바지에 유적 훼손행위 마저 발생함으로써 우리 나라 문화재정책의 현주소, 문화재보호와 주민재산권행사의 충돌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3. 풍납토성 조사에서 드러난 성과와 문제점

1997년 이후 현재까지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성벽 및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의 성과를 경당지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백제 전기 고고학적 문화에 대한 편년자료의 확보

* 경당지구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한성 백제의 문화를 규명하는 데에 필요한 많은 자료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조사된 유구들은 시간적으로 기원을 전후한 시점에서부터 한성이 함락된 475년 무렵까지에 걸쳐 있다. 시기를 달리하는 다양한 유구가 층을 달리하며 분포하였고 때로는 동일한 층에서 시간적 선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 다량의 유물을 동시에 폐기한 폐기장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평면은 타원형, 말각방형, 원형, 부정형 등 일정하지 않고 내부에는 각종 건축물 폐자재 및 토기편, 瓦塼類, 소토와 목탄이 빽빽이 차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유물은 폐기동시성이 인정되기 때문에 한성 백제 토기의 연대결정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절대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중국 西晉代 도기와 남조 청자류 역시 토기편년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2) 다양한 문자자료의 확보

* 일본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를 제외하면 한성 백제기의 문자자료는 전무한 형편이었는데 이번 조사에서 다양한 문자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大夫"銘 직구호, "井"銘 직구호와 함께 "十" "一" "X"등의 문자나 기호가 새겨진 토기, "直"銘 塼, 五銖錢 등이 출토된 것이다. "大夫"라는 관직명은 국내외 사서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나 이번에 실물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의 지배구조 연구에 하나의 문제점을 던진 셈이다. "井"銘은 고구려, 신라는 물론이고 고대 일본에서도 자주 사용된 기호이다. 그 의미하는 바에 대해  邪의 의미라는 해석도 있었으나 앞으로 해결하여야 할 과제이다.

* 총 4점이 수습된 토제 벼루의 존재는 당시 이 성 내부에서 문자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며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지식, 관인층의 존재를 보여준다. 역시 이 성의 성격 규명에 중요한 자료이다.

3) 외래유물의 존재

* 지금까지 인근의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군, 천안 화성리고분군, 원주 법천리고분군, 홍성 신금성 등지에서도 중국제 유물이 종종 출토되었으나 풍납동 경당지구에서는 중국 화폐인 五銖錢, 3∼5세기에 걸친 다양한 도기와 자기가 다량 출토됨으로써 이를 둘러싼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196호 유구에서는 6개체 이상의 중국 도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1점은 어깨부위에 동전무늬가 찍힌 소위 錢文陶器로서 西晉代의 물품으로 판단된다. 나머지는 녹색, 갈색을 띠는 施釉陶器로서 역시 서진대의 물품이다. 전문도기는 지금까지 몽촌토성에서 6점, 신금성에서 4점이 발견되었으나 모두 작은 조각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기형은 알 수 없었다. 이번 조사에서 완형이 출토됨으로써 구체적인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전문도기와 시유도기 모두 290년대에 중국 강남지방에서 제작·사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

우선 이러한 중국 도기와 함께 출토된 백제 토기의 연대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 도기의 제작·사용시점이 3세기 후반이므로 공반된 백제 토기의 연대도 3세기 후반을 소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백제 토기의 편년작업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 다음은 중국과의 교류에 관한 내용이다. 종전에는 백제와 중국의 통교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가 최초라고 간주되었으나 3세기 후반의 서진 물품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미 이때부터 양국간 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확실해졌다. 3세기 후반 서진과 마한의 빈번한 교섭사실을 전하고 있는 {晉書}의 의미를 재해석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3세기 후반에 이미 원거리교역을 실시할 정도로 성장한 정치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지, 이러한 위세품을 대량 수입하여 소유한 특수계층의 존재는 백제의 국가형성 시점과 관련지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도 중요한 내용이다. 아울러 시유도기와 전문도기가 중국의 강남지방에서만 제작·사용되었기 때문에 백제의 교류 상대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이 요망된다.

* 신라-가야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토기가 상당수 출토됨으로써 문헌에서는 분명치 않던 백제와 신라·가야의 교류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유물의 연대는 대체로 5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외래유물이 풍납토성에서 출토되는 정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4) 특수 유구의 확인

경당지구에서는 일반 주거지나 저장공 등의 시설 이외에 특수용도의 시설이 다수 확인되었다.

* 9호 유구 : 장축 13.5m, 단축 5.2m, 최대 깊이 2.4m의 장타원형 수혈로서 횡단면은 V자 형을 이룬다. 내부에서는 80여 상자 분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가 대종을 이룬다. 특히 "大夫"명 직구호·"井"명 직구호·고배·삼족기·뚜껑·완 등의 비중이 높으며 등자와 다량의 말뼈가 출토되었다. 말뼈는 머리뼈만 12개체 분에 달한다. 이밖에 홍색·황색·청색의 유리구슬, 소형의 원형 금판, 동물의 몸통으로 여겨지는 소형 토우, 과실의 씨앗, 성격 미상의 slag 등이 물채질 과정에서 검출되었다.

이 유구의 성격을 단정짓기는 곤란한데 출토되는 토기류가 대개 반으로 깨진 상태로 산포되어 있는 점, 토기제작수준이 매우 높으며 흑색마연토기가 상당수에 이르는 점, 당시 매우 귀하였을 말의 유체가 다수 발견된 점 등을 고려하면 특수한 용도의 시설물로서 그 기능은 창고나 제사로 추정된다. 이 유구의 연대는 토기의 형태를 볼 때 5세기 늦은 단계에 해당된다.

* 44호 유구 : 조사구역의 북측 경계에 걸쳐 있어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동서축 16m, 남북축 14m 이상의 방형 평면과 그 남측에 한 변 3m 정도의 입구부가 연결된 呂자형의 대형 건물로 추정된다. 북쪽의 대형평면은 口형의 溝가 감싸고 있는데 그 폭은 대략 1.5-1.8m, 깊이는 1.2m 정도로 일정하며 바닥에는 2중, 또는 3중으로 대형 판석이 깔려 있다. 溝의 축조 과정은 1차로 외곽을 굴토한 후 판자를 수직으로 세우고 내부 공간을 충전한 후 바닥에 판석을 배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북측 평면의 바닥은 점성이 강한 점토를 깔아 마련하였으며, 벽의 안쪽을 따라 주공과 판자를 세워 놓았던 흔적이 확인된다. 남측의 출입시설은 판석을 세워서 구획하고 외곽에 나무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리 많지 않다. 溝 내부에서 철제 낫 1점, 용도미상의 철편, 골제로 추정되는 구슬이 출토되었으며 북측 평면 내부에서는 불에 심하게 타서 일그러진 형태로 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구의 성격은 치밀한 설계와 많은 공력이 투입된 대형구조물이란 점에서 특수 공공시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출입을 극도로 통제한 점,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溝로 차단한 점, 溝의 바닥에 판석과 정선된 숯을 깐 점, 심한 화재로 폐기된 점 등을 고려할 때 모종의 제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 101호 유구 : 평면 방형의 대형 폐기장으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부에서는 주로 대형 토기류가 폐기되었으며 각종 동물뼈, 五銖錢, "直"銘 塼 등이 출토되었다.

* 206호 유구 : 남북축 12m, 동서축 10m 이상이며 깊이 3m 정도의 초대형 유구이다. 방형의 수혈을 굴착한 후 그 내부에 사질점토를 인위적으로 채워 넣은 특수 구조이다. 가운데에 직경 280cm 안팎의 원형 적석부가 배치되었는데 내부에서 다량의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조사를 완료하지 못하여 성격은 알 수 없으며 수혈과 적석부의 관계도 불분명하다.

5) 생활사 연구의 신자료

각종 유구에서 다양한 동물유체가 확인되었다. 9호 출토 말뼈를 비롯하여 46호 주거지에서는 돼지, 사슴 등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톱이나 예리한 도구를 사용한 처치흔이 발견되었고 인골도 확인되고 있다. 한편 서해안에서 서식하는 피뿔고동이 다량 검출됨으로써 한강을 통한 물류의 흔적이 엿보인다. 동물유체 및 인골에 대해서는 현재 과학적인 분석작업이 진행중인데 당시의 동물 사육 및 도축방법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6) 백제의 국가형성 시점의 논의

* 1997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시행한 성벽 절개조사에서 성의 규모가 드러나자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이 초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는 백제가 국가단계로 성장한 시점과 일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대규모 원거리 교역이 3세기 후반에 이미 가능하였다면 백제의 국가 형성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 각종 특수 용도의 시설물이 집중하는 경당지구의 조사성과를 미루어 볼 때 백제가 강력한 국가체로 성장하는 시점 및 그 과정에 대한 많은 정보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7) 하남위례성 위치비정 논쟁의 재연

475년 고구려군에 패배하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기까지 백제의 중심지가 현재의 서울 강남지역이었음은 분명하지만 도성이나 왕성의 구체적인 위치는 불분명하다. 그 동안 주목받아 온 유적으로는 풍납토성과 함께 몽촌토성을 들 수 있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준비과정에서 몇 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성의 대략적인 성격이 밝혀졌다. 막대한 양의 토기, 철기류와 함께 뼈로 만든 갑옷, 기와, 금동제품, 중국제 도자기와 벼루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점이 주목된다. 기와와 벼루의 존재는 일반가옥이 아닌 궁궐이나 관청, 사원 등 공공건물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당시로서는 최고 사치품이었을 중국제 도자기가 심심치 않게 출토되는 점은 이 성이 지배집단의 거처였음을 입증해준다.

이로써 80년대 이후 학계의 주류 견해는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에 비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7년 이후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통설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의 규모,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의 양, 유물의 양과 질적 수준 등에서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능가함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공공건물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와와 塼이 경당지구에서 다량 출토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함께 짝을 이루어 백제의 도성체제를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중에서도 풍납토성이 보다 중요한 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4. 유적훼손과 망민(網民)

작년 9월 이후 풍납동 유적발굴조사를 현장 지휘해온 위치에서 이번 유적 훼손행위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도의적 책임을 벗어날 수 없기에 국민여러분과 풍납동 주민들께 일단 사과부터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백제 초기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평소 풍납토성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발굴초기부터 엄청나게 출토되는 유물과 복잡다양한 유구의 출현에 흥분하면서 관심은 오로지 유적의 성격규명, 그리고 앞으로 이 유적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만 집중되어 있었지 주민들의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발굴진행과정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막대한 작업량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시공사의 자금난으로 인한 조사경비의 고갈은 계속하여 발굴단을 괴롭혔다. 작업이 연장되어 동절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조사단은 정상적인 작업이 불가능해짐을 우려해 일시 철수를 고려해 보았으나 조사지연으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를 감안하여 조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씩 현장에 머물다 보니 주민들의 억울하고 참혹한 사정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고전하는 발굴단원들을 독려하며 작업을 강행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연이어 출현하는 중요 유구와 유물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발굴단의 이런 사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마침내 주민들의 불만이 발굴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사경비를 부담할 의무가 있는 시공사는 극심한 자금난으로 경비의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어 발굴단은 수천만원의 적자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발굴단은 한편으로는 조사를 진행하면서 조사비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발굴조사경비는 사업자 부담이 원칙이라는 냉정한 현행 법규로 인해 단돈 100원 한푼 지원해 주는 기관이 없었다.

1월 중순 시공사는 마침내 부도처리되었고 발굴도 중지되었다. 이때부터 재건축을 통해 집 한채 장만해 보려고 몇 년간 참고 견딘 주민들과 이들을 위해 온갖 고충을 감내하고 조사를 강행하던 발굴단은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발굴조사의 완료 없이 건축행위는 있을 수 없다는 당위로 인해 재건축조합은 발굴단에 조사의 속개를 끊임없이 요구했고 추가 발굴비용은 주민들이 갹출해서 지급하게 된 것이다. 발굴조사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면서 생긴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하던 주민들에게 발굴경비의 부담은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마침내 4월 25일 3차 현장설명회가 개최되는 날 주민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영문도 모르고 참가했던 학계의 원로들은 당황했고 8개월째 현장에 거주하면서 얼굴이 알려진 필자는 아주머니들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자 그분들은 온순하게 경청하였고 봉변을 각오하고 있던 필자에게 그들이 보인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울면서 살려달라고 절규한 것이다. 우리의 누이이고 어머니같은 이들을 누가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것인가.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발굴단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5월 8일 작업은 일시 중지되었고, 마침내 13일 유적훼손 행위가 자행되었다.

맹자(孟子)는 위정자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행위로 백성을 그물질하는 짓, 즉 망민(網民)을 경계하였다. 법을 어긴 백성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몰고간 책임은 위정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문화재를 훼손한 행위는 중대한 범죄행위임이 틀림없고 이러한 사태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발상의 대전환 없이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유적 훼손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고 망민되는 백성들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풍납동의 현 사태는 유적보존과 학술연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만명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대책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몰락해가는 우리의 이웃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루 빨리 주민대표, 정부당국자와 지자체의 관련자, 학계인사, 시민단체 등이 주축이 된 풍납동 종합대책위원회의를 결성하고 더 이상의 주민 희생없이 신속하게 당면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를 제안한다.

지금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부분은 풍납토성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미 많은 부분이 고층 아파트 건축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나 아직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유적의 성격에 대한 단정은 시기상조인 감이 없지 않으나 최근의 발굴조사를 통해 분명해진 사실은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에 못지 않게 중요하였거나 아니면 보다 중요한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그 동안의 논쟁거리가 해결되었다기 보다는 앞으로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 부분이 훨씬 많다. 서울 강남의 중요 백제유적인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군의 성격이 명쾌히 해명되지 않은 채 더 이상의 추가조사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앞으로 풍납토성은 미궁에 빠진 백제 전기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권오영, 고대사분과)

 

http://www.koreanhistory.org/wzold/001.ph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