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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후삼한에서 쿠샨왕조까지

monocrop 2007. 11. 3. 01:51

 북부여 2대 단제 때의 기록 안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는데, 중마한에 새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번조선이 위만에게 넘어가자 번조선의 대신인 오가들이 상장군 탁을 추대하고 탁의 고향인 월지로 대거 이동하여 그곳에 중마한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가들에게 땅 백리씩을 주어 각각 진한과 변한이라 했다고 했는데, 이를 후삼한이라고 한다.

원래 조선의 삼한 중에서는 진한이 상국이었으나 후삼한에서는 중마한이 상국이 된 것이다.

중국의 사서들에는 마한이 제일 큰 나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후삼한 시대의 마한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후삼한의 주요 거점인 중마한이 있던 월지의 위치를 알면 쉽게 풀릴 수 있는데, 당시 월지는 중원의 서쪽과 서북쪽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후삼한 역시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

 

 월지는 중원의 서북쪽인 내몽고와 감숙성, 청해성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월지는 전국시대와 진나라, 한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일대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월지족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조선에 속한 동이족의 한 분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 출신의 탁(卓)이 번조선에 들어와 상장군이라는 직책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며, 이 지역에 후삼한을 쉽게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땅이 애초부터 조선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의 삼한에서는 단제가 직접 관할하는 진한이 상국이었으나, 월지에 이르러 세운 중마한(후삼한)은 마한이 상국으로 강역도 가장 넓었다.

중국의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말하고 있는 삼한은 바로 이 후삼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후한서> 동이전의 내용을 보자.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개의 나라를 거느리고 있다.”

 

 


단군조선의 삼한을 기준으로 하면 진한의 서쪽에 번한이 있어야 하고, 마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어야 옳다.

그런데 여기서는 진한의 서쪽에 마한이 있으며, 진한의 남쪽에 변진(번한)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또 조선의 삼한에서는 진한이 가장 큰 상국이었던 데 반해 여기서는 마한이 가장 큰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말하는 삼한은 중마한을 기준으로 한 후삼한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아니라면 조선의 삼한과 후삼한을 혼동했거나 조선의 삼한 중 마한과 변한 혹은 진한을 잘못 기록했다는 말이 되는데, 사서의 기록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오류는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이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말하는 마한에 속한 54개국 가운데는 월지국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이로써 마한은 조선에 속해있던 마한과 조선이 멸망한 후 월지에 이르러 세운 중마한이 동시에 병존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아방강역고>에서 마한이 그 첫 왕인 강왕(康王) 탁(卓)에서부터 8대 목왕(穆王)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상장군 탁이 마한을 건국한 일이 틀림없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한이 두 곳에서 동시에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 시조 온조왕 26년과 27년에 온조왕이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기사가 있다.

다음은 온조왕의 말이다.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상하의 마음이 이반되니 그 형세가 능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만일 마한이 다른 나라에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과 간은 형세가 될 터인즉, 그때 뉘우친들 소용이 없으리라. 그러니 먼저 쳐들어가 취함으로써 훗날의 어려움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

 

 


온조왕은 이렇게 말한 뒤 마한을 쳐서 병합해 버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백제에게 병합되어 버린 마한이 뒤에서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즉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70년 기사에 고구려가 마한과 함께 중원을 정벌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이다.

 

 


“왕은 마한, 예맥(濊貊)과 함께 요동을 침공하였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강한 의혹을 갖게 된다.

마한은 이미 백제 온조왕에게 분명히 멸망했는데 그 후 고구려 태조대왕 때 다시 나타나서 고구려와 함께 군사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한이 두 곳에서 병존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김부식은 다음과 같이 의구심을 피력하고 있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한 후에 다시 일어난 것일까?”

 

 


마한이 두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으니 의심이 들만도 하다.

어쨌든 이러한 <삼국사기>의 내용만 보더라도 마한은 분명히 두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마한(중마한)에 속해 있던 월지족의 상황을 <사기> 흉노전을 통해 살펴보자.

 

 


“이 무렵에는 동호(東胡)가 강하고 월지도 전성기였다.”

 

 


여기서 동호는 동이(東夷)와 같은 뜻으로 조선을 일컫는 말이며, 선비족도 포함하고 있다.

<사기> 흉노전에 의하면 당시 흉노족의 모돌선우가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빌미로 동호가 많은 것을 요구해 왔으며, 나중에는 땅까지 요구하자 흉노가 동호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때의 동호는 조선이나 북부여가 아니라 선비족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사서들에 따르면 흉노족은 월지도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후삼한 중 마한에 속해있던 월지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한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월지족은 후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파미르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등지에 대월지국(大月支國)을 세운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그리고 후삼한 역시 서쪽의 티베트와 신강성 일대까지 진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후삼한 중에서 상국이었던 마한의 잔영은 지금의 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단길의 길목이기도 했던 신강성 지역에는 현재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타클라마칸’을 중국에서는 ‘탑극라마간(塔克라瑪干)’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끝에 있는 ‘마간(瑪干)’이라는 글자이다.

마간이란 바로 마한(馬韓)마한(馬汗)에서 비롯된 말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韓’‘汗’에서 ‘干’으로 전음 되었기 때문에 결국 간(干)한(韓, 汗)과 같은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마칸(瑪干)’‘마한(馬韓)’과 같은 말이며 ‘馬’가 아닌 ‘瑪’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당시 마한이 가장 큰 상국이었기 때문에 ‘王’자를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유추하건대 ‘타클라마칸’에서 ‘클라’‘큰 나라’라는 뜻이 아닐까?

결국 ‘타클라마칸’은 ‘큰 나라 마한’이라는 의미가 아닐는지.

 

 특히 마(馬, 瑪)와 관련된 지명들은 현 청해성 일대에 가장 많으며 인근의 사천성, 티베트, 신강성, 감숙성, 그리고 내몽고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티베트’라는 말도 고대 토번(吐蕃)에서 비롯된 말이며,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토로번(吐魯番, 투루판)이라는 지명도 후삼한의 번한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청해성과 인접한 사천성에는 송번(松番)이라는 지명도 있으며, 그 서남에는 선수(鮮水)라는 강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표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신강성과 인접한 감숙성의 돈황은 석굴사원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곳에 있는 벽화는 고구려 벽화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구려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어 왔었다.

고구려풍의 이 벽화들도 고구려와 같은 계열인 후삼한과 관련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마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후삼한의 일부는 그 후 중원의 서남쪽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며, 또 일부는 월지와 함께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마한이 초기에만 등장하고 뒤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도 흉노와 선비족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월지족은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대월지국(BC 130~45)으로 발전하였으며, 대월지국은 쿠샨왕조(기원전후~AD 5세기 중엽)로 발전하여 남으로 인도의 북부 일대에까지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쿠샨왕조는 간다라 예술과 대승불교를 중원으로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인도 서북쪽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가림토 문자와 비슷한 것도 후삼한과 월지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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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우리 핏줄의 역사를 제대로 알면 세계사가 보인다.

 

( <실증 한단고기>에서 인용했습니다. )


출처 : 희망의 메세지
글쓴이 : 햇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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