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일본의 기원과 한국

<25> 백제 木氏

monocrop 2007. 10. 20. 13:44

<25> 백제 木氏

 

나라현 가모추바 1호분 `백제유물 가능성 높다`

 

나라현 고세시 가모추바 1호분은 고고학자들이 "백제식 분묘같다"면서 발굴을 미루어 왔다. 일부 사학자는 분묘형태가 고구려 적석총을 원류로 하여 백제시대에 흔했던 네모난 방분이어서 발굴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6월초 분묘에 구멍이 뚫려 발굴이 불가피해졌다. 분묘내부는 목관이었고 4세기께의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 철판을 엮은 단갑갑옷의 일종),화살통,철검,곡옥,동경인 소형의 삼각연신수경과 토기류였다. 일본학자들은 "백제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을 답사해 보면 유적의 위치가 갈성목씨일족의 거점이었다. 이 고분을 발굴한 고세시 교육위원회측은 "나라의 야마토조정(고대일본)이 대륙과 교류한 증거물"이라며 모호하게 발표했다.

일본학자들은 단갑과 화살통 등 무기류는 무시하고 동경에만 관심을 기울여 "종래에는 발견되지 않은 형태이며 단갑 등의 무기류와 함께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사카대학 후쿠나가 노부야 조교수는 "야마다이국(규슈)에서 온 심부름꾼에게 보내기 위해 중국 위나라에서 온 많은 기술자를 임시로 동원하여 단기간에 대량의 동경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같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일본 전국 150여개소에서 약 500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는데 동경 뒷면의 문양이 다양하고 모양도 각양각색이며 위나라 연호 명문이 있는 것도 있다. 이에 눈을 돌려 위나라로부터 일본전신이라는 야마다이국이 위나라로부터 동경 100개를 선물받았다며 자랑해 왔다.

그러나 야마다이국과 야마토조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3세기경 규슈의 야마다이국 히미코여왕은 신라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려는 것이다.

가모추바 1호분에서 출토된 동경을 빌미로 위나라의 기술자 동원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야마토조정이 전국을 지배하여 동경까지 배부한 것처럼 억설을 펴는 것이다. 동경은 지역,제작자,시대에 따라 문양 형태가 다르다. 동경제작 기술력을 가진 민족의 동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지방에서 발견된 동경 보다 약 100년 앞선 3세기께의 동경이 이미 규슈지방에서 출토된 바 있다. 동규슈 미야자키현 난고손백제촌) 미카도신사에 백제에서 전래된 동경 33개를 보관하고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발표하지 않았다.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 1~5세기께의 철검과 함께 동경이 출토되었다. 북규슈 마에바루 유적에서도 유사한 것이 나왔다. 가모추바 1호분 출토 동경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한국세력 진출을 해명하는 열쇠이다.                            도쿠시마 문리대학 이시노 히로노 부교수는 "현지생산의 많은 토기를 분묘에 부장한 것을 보면 현지인이 만든 동경이며 분묘의 매장자는 그 지역을 지배한 왕급 인물로 갈성목씨 전성기의 갈성습진언소쓰히코)의 분묘"라고 규정했다.

이미 앞서 밝힌 것처럼 갈성목씨는 갈성을 점거한 백제 8대성씨인 목씨이다. 백제인 목라근자 일족은 나라지방에 군림,목만치를 선조로 소가 가라코,소가 이나메,소가 우마코,소가 에미시,소가 이루카 등 9대에 걸쳐 약 300년간 지배했다.

백제목씨가 갈성목씨와 소가씨로 스스로 개명한 것인지 또는 후일 일본학자들이 "일본인화하기 위해 변조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일본학자들의 "야마토 왕묘" "갈성목씨 지배" 학설을 종합하면 가모추바 1호분 발굴로 야마토 조정은 백제인이 왕이었고 백제분국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4세기께 나라지방의 "야마토 조정 존재설"은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일본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의 체제성립과 "일본"국명의 제정연대 등에 대해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천황을 만세일계로 고대에 한삼국을 정벌했다는 등 역사를 왜곡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의 총인구는 선주민 아이누족과 일부 해양족을 포함하여 7만5천800명에 불과했다. 그 직후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자 9만4천900명으로 급증,8세기의 나라시대(710~784)에는 539만9천800명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일본국립민속박물관 고야마슈조오교수의 통계).

우리 삼한집단이 진출한 후 아이누문화(죠몬토기)는 종적을 감추었는데 삼한인에게 격퇴당해 북쪽 끝 홋카이도와 남쪽 끝 오키나와로 쫓겨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민족이 90%이상 차지한 것이 분명하다. 4세기께 나라현 히가시토노고분에서 발견된 15척 선단을 묘사한 선각화,그 동쪽해안의 미애현 다카라쓰카에서 출토된 선형하니오(흙으로 만든 장식물) 등 각처에서 발굴된 배 유물은 우리민족이 선편으로 건너갔음을 보여준다. 7세기에 일본 중앙부에 우리문화를 꽃피운 도읍지를 우리말 "나라"로 불리게 된 것만 미루어 보아도 삼한삼국인이 점거했음을 새삼 설명할 여지조차 없다.

일본은 한국 중국에서는 고대로 "왜지"로 통칭했다. 왜소한 인종이라하여 왜지,왜인으로 통칭하던 중 3세기에 왜인 사절이 가자 문서에 적다보니 중국사가들이 부득이 "왜국"( 국)으로 기록하게 되어 국명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당시 발해만 연안,큐슈일원에 동남아에서 올라간 왜소한 해인들이 많아 큐슈지방을 기준으로 왜국으로 통칭한 것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본"국명이 서기 607년에 제정했다고 주장한다. 이해 야마토국이 수나라 양제)에게 오노이모코를 사절로 보낼 때 "해 뜨는 곳 천자일본왕)가 국서를 보낸다"는 글귀를 썼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오노이모코가 가져간 국서는 수 양제로부터 "무뢰한 야만인의 문서"라며 문전축출당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억지주장을 펴는 것이다.당시 중국 주변국들은 중국 승인없이 국명을 제정할 수 없었던 시대였으며 이로 미뤄 607년 일본국명이 제정됐다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당군 합세로 백제가 660년 멸망하자 663년 백제 복국을 꾀하며 왜지에서 대군을 편성,부여 백마강(백촌강)으로 진격 항쟁했으나 전멸당했다. 이때의 출전군을 "왜군"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엄연한 "왜지의 백제인"이었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함에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 대거 왜지로 피난,망명해 갔다. 왜지의 "백제계 조정"은 고국에서 몰려 든 중신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30여년이 흐르면서 왜지의 한삼국인들은 본국에 의존할 근거가 없어져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8세기초의 702년,아와타노마히토를 당나라에 보내 측천무후)에게 왜(왜)자는 왜소한 인종,비천한 글자이므로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할 것을 상소하여 승인받았다. 고대 삼한인의 통치에 따라 우리민족이 제정한 셈이다.

그 동안 삼한삼국세력이 부침했던 나라지방은 702년의 국명제정을 고비로 통합,정돈을 서둘러 710년부터 "나라사대"를 열었다. 이에따라 712년 "고사기",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등 인식전환과 정치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일본사학자 추나노 요시히코씨도 "7세기이전에는 일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부산일보 연재물(2000)

http://wondreams.hihome.com/temasogo_ilbon-hankukbunku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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