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칠지도의 정확한 해석

칠지도 03 - 명문에서 딴 이칭들

monocrop 2007. 10. 15. 21:37

 

                                                                 글 : 고대사산책 / 2003-03-28 13:24:01/www.coo2.net

 

 

● 칠지도명문에서 딴 귀수대왕의 이칭

귀수대왕의 이칭들 중에는 칠지도 명문 중에 뒷면의 원문에서 딴 중요한 이름이 둘이나 있다.      


○ '구시[奇]'계열 이칭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德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위의 문장에서 구시[奇]는 풍토기에 보면 구스[奇]로도 읽고 있어 구스[久須]=구이스[貴須]와 같다. 또 '스'가 원순모음화현상을 일으키면 구이수[貴須]>구이수[貴首]가 된다. 구이수[貴首], 구이스[貴須]는 열도시호다. 또 '貴'를 경상도사투리처럼 '기[貴]'로 읽어 기수[貴首], 기스[貴須]가 되기도 한다. '구스'를 '구시'로 읽는 것은 '으'와 '이'는 서로 교체되어 쓰이고 있으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귀수대왕의 이 구시[奇]계열 이칭의 최초 어원은 8세기초에 기·기를 지으면서 귀수대왕의 휘인 '須'에 '귀할 貴'를 붙여 읽을 때 열도음으로 구이스[貴須]가 되는데 여기서 '이'가 탈락하여 구스[貴須]가 된 것을 이용한 것이다. 뜻은 "고귀하신[貴] 須님"이다. 여기서 '으'와 '이'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을 이용하여 '구시'로도 짓고 '奇'의 음을 '구시[奇]'로 정하여 귀수대왕의 시호 및 많은 '구시'계열 이칭들과의 연결고리로 삼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말하자면 칠지도의 명문에서 '奇生聖德' 앞에 놓인 '백제왕세자'가 '貴須'라는 시호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奇'의 음을 '구시/구스'로 인위적으로 정했다는 뜻이다. 8세기초 서기편찬 이전에는 발음이 구시[奇]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다음으로는 역시 貴須와 반도음이 같은 貴首를 같이 쓴 것이다. 首는 시조라는 의미로 판단된다. 그리고는 구스/구시[貴須], 구수[貴首] 등과 열도음이 같은 무수한 이칭들을 이용한 것이다. 뜻은 "고귀하신[貴] 시조[首]님"이다. 그런데 이것이 삼국사기에서는 "원수[仇]의 시조[首]"라고 나와있다. 원수는 고려시대에도 종종 내침하던 왜구를 가리키며 사기저자들은 일본왕실의 시조가 초고대왕, 귀수대왕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귀수대왕의 이칭 중에는 구시[久저/櫛/환/串/久西/久志], 구스[貴須/樟/國栖/久須/久素], 구지[久慈/鷹/久士], 고수/가수[香取], 고수[古首], 구즈[國소] 등이 있다. 초대왜왕으로서 칠지도의 주인공이었던 취지를 살려 칠지도의 '구시[奇]'라는 단어와 연결을 시키면서 이런 이칭들을 지어 기술한 것이다. '신령스럽다[奇]', '짝이 없다[奇]'는 뜻도 동시에 복합적으로 연결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ㄱ+아래아)수[香取]>(가수, 고수)가 되고 열도음 '고수'와 반도음이 같은 '古首'도 성씨록에 여럿 보인다. (환=木+患, 소=木+巢)    

武生宿니; 文宿니同祖 王仁孫 阿浪古首之後也(左京諸蕃)
櫻野首; 武生宿니同祖 阿浪古首之後也(左京諸蕃)  
文忌寸; 文宿니同祖 宇爾古首之後也(左京諸蕃)      

왕인은 문·무생(文·武生)의 조가 되었다고 한 그대로 무생숙니, 문숙니, 문기촌 등이 왕인의 후손으로 나온다. 성씨록 주에 '阿'가 '河'로 표기된 저본도 있다 하므로 아라[阿浪]는 가라[河浪]가 되고 가라[韓]로서 역시 반도를 뜻하며 신공기에 나오다시피 '三韓'을 의미하기도 하고 天이기도 하다. "삼한의 古首"는 귀수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무생숙이조에서 왕인의 손으로 나왔지만 동일인을 조손으로 기술한 것이다. 왕인은 文·武生이란 후손 성씨에서도 보다시피 귀수대왕을 전인적인 인격의 소유자로 묘사하기 위해 창작한 가공인물이다.  
                          
'문기촌'조에서 '宇'는 우주(宇宙)라는 말에서 보다시피 '天'과 같은 뜻이고 백제를 가리킨다. '니[爾]'는 노[之]와 같은 소유격조사 '의'에 해당하는 말이고 '우니[宇爾]'는 '하늘의'>'백제의'라는 뜻이 되므로 宇爾古首>"백제의 古首"라는 뜻이다. 古首는 귀수대왕인데 '古語拾遺'에 「후쯔누시[經津主]가 香取神社의 제신」이라 하는데 이 인물은 귀수대왕이다. 바로 이 신사이름 (ㄱ+아래아)수[香取]>(가수, 고수)에서 파생된 이름이 '고수[古首]'인 것이다. 경진주신은 서기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에 등장하여 위원중국의 대기귀신으로부터 나라를 양도 받은 신인데 서기 368년의 일로서 당시 귀수태자였다.      

서기 신공기에 나오는 '구저'는 음[音訓]이 '구떼이'라고 되어있으나 '구시' 또는 '구지'로 읽어야 한다. 또 '저'는 '근본', '별이름'이라는 뜻이다. "영원한[久] 시조님[저]"이라는 의미다. 이칭을 지어도 예사로 짓지 않았다. 이 '저'자는 "氏 밑에 一"로서 "어떤 씨족의 첫 번째 인물" 즉 시조라는 뜻을 원래 담고 있는 글자다.  

※ "왕인 박사" 추후 별도해설

지명에도 광범위하게 쓰인 이칭

신대기 하9단 천손강림장을 분석해보면 구주의 오이다[大分]현 우사[宇佐] 해변에 처음으로 상륙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최초상륙지 근방에 지금도 九重, 臼杵川, 臼杵市, 臼杵灣, 串鼻, 串脇, 久住, 久住山, 久住高原, 久住赤川, 玖珠郡, 玖珠川, 玖珠, 龜石山 등의 '구스/구시'계 지명들이 1/50만 지도에도 집중적으로 보인다. 구시[串], 구스[久住/玖珠], 구시[龜石] 등이며 九州라는 지명부터가 貴首系 지명이다. 구저(臼杵)라는 지명도 신공기의 이칭 구저(久저)와 반도음이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구주 미야자끼[宮崎]현에도 東臼杵郡, 西臼杵郡이 있고 서구저군에 高千穗라는 신대기 지명이 나오는데 신대기 하9단에 천손이 日向·襲의 고천수봉에 내렸다고 나오고 그 강림한 산이름이 구시후루다께[환觸峯]라고도 하는데 고사기에는 구지후루다께[久士布流多氣]라고 나오고 같은 말을 한자만 달리하여 알아보기 어렵게 표현한 것이다. 후루[觸/布流]는 후루[降]>'내리다'라는 뜻이므로 역시 "구시가 내린 산"이라는 뜻이다. 구시[환]=구지[久士]는 전부 귀수대왕의 '구시[奇]'계열 이칭이다. 환일(환日)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해[日]는 왕을 은유한 말이므로 '구시히'는 귀수왕을 뜻한다. (환=木+患)                    
    
이 구시후루다께[환觸峯]를 신대기 하9단 이설6에서는 첨산봉(添山峯)이라고도 하고 있는데 소호리[添]는 서벌(徐伐)에서 나온 말이고 열도어에 '어' 발음이 없어 가장 가까운 '오'로 발음되고 받침 없이 풀어서 "서벌>(서버리)>소보리>소호리"로 변한 것인데 서벌은 서라벌, 신라, 금성과 같은 말이고 소호리야마[添山]는 결국 新羅山을 달리 표현한 말이며 이 신라는 경주신라가 아니고 바로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아침땅/새땅>새나라[新羅]를 지칭하는 것이다. 곧 가야가 먼저 개척해놓고 있던 열도를 접수하기 위해 백제가 구주를 침공하는데 수비하던 가야군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함축한 지명인 것이다.  

천손의 원정경로 중에 구주 남단 지금의 대우반도에도 구시라[串卜], 구시라[久西良], 구시라[髮梳]라는 지명이 풍토기 대우국조에 보이고 현재도 대우반도의 가야[鹿屋]시 근방에는 구시라[串良], 東串良, 串良川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야[鹿屋]도 伽耶의 이칭이다. 라[良]는 那, 羅와 같으므로 '구시라'는 "구시의 땅"이라는 뜻이다.              
    
또 구주 서남단 야간반도 남쪽에는 지금도 구시[久志], 久志灣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고 서기 382∼384년에 있었던 귀수대왕의 본주원정경로에 해당되는 이바라기[茨城]현 히다찌[常陸]에는 구지가와[久慈川], 久慈郡 등의 지명이 1/50만 지도에도 보인다.      

또 이바라기현 久慈郡의 서쪽 도찌기[회木]현의 동쪽에는 위에 나온 나라스[那良珠]와 같은 뜻에 귀수대왕의 휘인 須가 들어간  那須郡, 那須, 南那須라는 지명도 있고 도찌기현의 현청 소재지인 우쯔노미야[宇都宮]의 동쪽으로 이바라기현과의 경계 근방에는 오호기스[大木須], 오기스[小木須]라는 지명도 있다. 나라[那良]>나라[國]는 那와 뜻이 같고 오호[大]는 近과 같고 기스[木須]는 기스[貴須]와 같으므로 오호기스[大木須]는 近貴須인 것이다.  (상수리나무 회=木+엄 밑에 万)/일본한자    
  

지명 히다찌[常陸]의 유래      

상륙풍토기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倭武天皇이 東夷國을 순수하며 新治郡을 지날 때 國造 毗那良珠命을 보내 새 우물[新井]을 파게 했는데 솟아나는 샘물이 맑고 깨끗하여 좋았다. 그래서 수레를 멈추고 물을 떠서 손을 씻으려는데 옷소매가 샘에 늘어뜨려져 젖었다[沾]. 그래서 소매를 적신다[漬]는 뜻으로 이 나라의 이름으로 했다. 그래서 사람들 속담에 "筑波山에 먹구름이 끼이고 옷소매[衣袖] 적신 나라[漬國]"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적실 沾/첨, 담글 漬/지)  

야마또다께루.노.스메라미꼬또[倭武天皇]는 서기 경행기의 야마또다께루.노.미꼬또[日本武尊], 고사기 경행기의 야마또다께루.노.미꼬또[倭建命], 성씨록의 야마또다께루.노.미꼬또[倭建尊]와 동일인물로서 귀수대왕을 달리 꾸민 인물이다. 니히바리[新治]와 쯔꾸바[筑波]는 이바라기현의 지명이며 서기 경행기 일본무존의 동국정토에 등장하는 원정경로에 해당하는 곳이다.  

국조 히나라스.노.미꼬또[毗那良珠命]는 복잡하게 조어된 이름이다. 우선 命은 존칭이고 '히[毗]'는 같은 음의 히[日]>해[日]를 뜻하고 '나라[那良]'는 반도어 나라[國]를 의미하고 '스[珠]'는 귀수대왕의 휘 '스[須]'를 한자만 바꾼 것이다. "해나라의 須님"이라는 뜻이 되는데 '해나라'는 반도인의 시각에서 "해뜨는 나라[日本]>열도"를 가리키므로 "열도의 須님"은 칠지도상의 초대왜왕인 귀수대왕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고 이것은 위에 나온 왜무천황, 일본무존, 왜건명(존)과 꼭 같은 뜻으로서 동일인물을 달리 이름 붙인 것이다.  

「적시다[漬]>히다[漬]스」, 「적신 나라[漬國]>히다찌.노.구니[漬國]」에서 후에 히다찌.노.구니[常陸國]가 되었다는 스토리인데 결국은 8세기초에 사서를 지으면서 귀수대왕을 흠모하는 의미에서 본주원정경로의 지명을 짓기 위해 관련된 설화를 인위적으로 꾸민 것이다. '히다찌'란 반도어 '해돋이'라는 말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높다. "반도어 해>열도어 히", '돋이'의 원형은 '돋다'>"(밑에서) 솟아오르다, 올라오다"라는 뜻인데 명사형 '돋이'를 받침 없이 소리나는 대로 읽으면 구개음화현상에 의해 '도지'가 되어 '히도지'가 된다. 그런데 '도'는 (ㄷ+아래아)>(다, 도)로 갈라지는 현상에서 '다'와 교체되어 쓰일 경우가 많으므로 '아래아'를 매개로 '히도지'는 '히다지'와 같아지는 것이다. 결국 원래뜻은 "해가 뜨다(솟아오르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고 실제로 이바라기현의 히다찌지역은 관동지방 중에서도 태평양에 가장 돌출한 곳으로서 그 근방에서는 아침에 해가 가장 일찍 뜨는 곳이므로 붙여진 지명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실제로 지금도 히다찌[日立]시가 있다.

서기 경행기의 일본무존이 본기 속에서는 황자로서 원정 중에 전사했지만 단순히 황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풍토기에서는 천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일본무존의 처로 본기 속에 나오는 제귤원(弟橘媛)을 풍토기에서는 귤황후로 부르고 있다. 물론 제귤원이 사람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제칠지도를 의인화한 것이며 신공기 52년조에 천웅장언(=침류)이 들고 도왜한 것이다. 형칠지도는 서기 369년 무내숙니가 가져간 것이고 제칠지도는 3년 후인 372년에 침류왕이 가지고 간 것이다.  

이런 사례들 말고도 백제계 지명이나 가야계 지명은 숱하게 많아서 4세기 중반의 백제왕족 가야왕족을 떠나서는 열도의 지명조차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 성덕태자는 귀수대왕

서기 추고기에 나오는 유명한 성덕태자는 귀수대왕을 모델로 창작한 인물로서 칠지도의 기생성덕(奇生聖德)이란 구절에서 따서 이칭으로 바로 활용한 것이다. 귀수대왕을 성덕태자로 꾸민 것은 초고대왕의 재위기간이 길어 귀수대왕은 태자시절이 무척 길었기 때문에 태자 때부터 부왕인 초고대왕 못지 않게 대륙과 열도를 넘나들며 탁월한 활약을 했다.    

그런데 막상 왕에 오른 후에는 재위기간이 9년으로 짧은 데다 칠지도상에 있다시피 초대왜왕으로서 열도기준으로는 시조이므로 8세기초에 후손들이 무척이나 애통해하며 위대한 태자로도 꾸민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초고대왕은 신대기에서 상징적인 시조로 나오고 귀수대왕은 2인자로 나오지만 인대기에서는 서기상 가장 위대한 천황인 천무천황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이걸 보더라도 '奇生聖( )'에서 '( )'자를 音으로 판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지도는 백제가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부상한 4세기 중반[晋世/東晋] 대륙과 열도로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감행하여 정복국가로 변신한 백제의 초고대왕이 만들어 서기 369년에 장손자 무내숙니를 열도의 후왕으로 봉하고 그에게 내린 후왕실의 신보로서 열도통치권을 상징하는 홀(笏)이며 이와 관련한 해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대륙기록에 나오는 백제의 대륙진출시기와 그 시대적인 정황 및 백제의 가라병합과 열도진출을 상정하지 않으면 백제헌상설이니 동진하사설이니 하는 전혀 터무니없는 설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성덕태자" 추후 별도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