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칠지도의 정확한 해석

[스크랩] 김태식 연합뉴스 칠지도 관람기를 통해 본 북한학자 김석형 론

monocrop 2007. 10. 11. 17:19

 

<칠지도-이소카미 신궁에 소장된 칠지도>
<11년만에 공개된 칠지도(七支刀) 관람기> 2004. 1.31

    (나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인구 36만 남짓한 일본 관서지방 중소도시인 나라(奈良)는 한국의 경주에 비견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 

    서쪽으로 오사카(大阪), 북쪽으로 교토(京都)와 인접한 고색창연한 이 분지  도시의 곳곳에는 '칠지도'(七支刀) 특별전을 알리는 선전포스터가 방문객들을 맞는다.

    '특별진열 야마토(大和)의 신(神)들과 미술 : 칠지도와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신보(神寶)'라는 화려한 수사 아래 포스터는 칠지도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포스터 배경 그림으로는 고색창연한 철판같은 유물을 이용하고 있다.  이  또한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가장 유서깊은 신궁(神宮)이라는 나라시  인근 덴리(天理) 소재 이소노카미신궁에 전래되고 있는 철 방패(鐵盾) 유물이다.

    지난 28일. 이번 특별전이 열리는 나라국립박물관(관장 와시즈카 히로미쓰.鷲塚泰光)을 찾았을 때, 한국기자단을 전시장으로 안내한 이 박물관 이노구치 요시하루(井口喜晴) 상급연구원은 두 점이 세트인 이 대형 방패가 한국산이라고 말했다.

    5세기 후반에 제작됐다는 주장이 유력한 이 방패에 대해 이노구치씨는  "일본에서의 철 생산 개시 시기라든가, 「일본서기」 및 「삼국지」(三國志) 등 문헌기록을 참조할 때 (철광석 원료는) 전남 곡성에서 산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 4일에 관람객을 맞기 시작한 나라박물관 신관 2층 전시실에는 이 방패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가운데 주인공 격인 칠지도는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소노카미신궁 관련된 다른 유물 다수도 찬조 출연을 하고 있다.

    이 중에는 1870년대에 이소노카미신궁 궁사(宮司.주지)로서 칠지도 보고자인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신궁 구역 중에서 일반인의 접근이 봉쇄된  금족지(禁足地)라는 곳에서 발굴했다는 각종 구슬류와 철기 및 동경류가 포함돼 있다.

    총 길이 74.8㎝. 나뭇가지 같은 '새끼날'이 각각 3개씩이 양쪽으로 어긋나게 뻗어있는 이 독특한 칠지도 몸통 앞뒤에는 총 60여 자에 달하는 금상감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을 둘러싸고 이 쇠칼이 백제가 왜 왕실에 헌상했다느니,  하사했다느니, 아니면 단순 선물이라느니 하는 격렬한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쇠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실물은 난생 처음 접한 기자는 무엇보다 금상감된 명문이 종래  각종  첨단기법 등을 통해 판독되어 출판물로 알려진 것만큼이나 선명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금상감이 남아있는 글자는 육안으로도 그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라박물관 가지타니 료지(梶谷亮治) 학예과장은 칠지도 공개는 2000년  도쿄국립박물관 이후 4년만이며, 관서지방에서는 93년 교토국립박물관 이후  11년만이라고 말했다. 

    가지타니 과장은 "매년 연초에 신사(神社)별로 돌아가면서 소장 보물을  공개하고 있는데 올해는 이소노카미신궁이 그 차례가 되어 칠지도를 선보이게 된  것이며, 다른 특별한 목적이나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다음달 8일까지 계속될 이번 칠지도 공개는 "종전에는 고작 7-10일 정도만 공개되었으나 이번에는 한달 이상 계속된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말도 했다.

    칠지도에 대한 반응, 특히 한국측 관심을 묻자, 가지타니  과장은  "한국의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 관람도 많다"면서 "개막식 때는 1천명이 몰렸고,   그저께 칠지도 강연회에는 전체 좌석 200석이 모자랄 정도로 꽉 찼다"고 전했다.
    기자가 칠지도를 관람한 28일 오후에는 한산한 전시장에 50명 가량 되는 한국단체 관람객들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확인결과 이들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운영하는 박물관 대학 수강생들이었다.

    가지타니 과장은 "전시회 폐막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찾을  수 있도록 한국 기자 여러분이 홍보를 많이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박물관측은 한국기자단에게 전시실 전반은 물론이고 칠지도를  포함한 전시유물 전체에 대한 사진촬영을 허가하기도 했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2005.03.07 06:38:04
<칠지도를 둘러싼 한ㆍ일 내셔널리즘> 2004.1.31

    (나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자진 월북해 김일성대학에 자리잡은  김석형(金錫亨.1915∼1996)은 1963년 이른바 '삼한 분국설'을 주창하고 나선다. 

    그해 「력사과학」 1집에 발표된 그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은 1966년「초기조일관계사」라는 방대한 저서로 체계화한다.

    삼한 분국설이란 한반도 삼한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열도  각국에  일종의 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 분국(分國)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당시 일본학계에서 미친 충격파는 논문 발표 직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하타다 다케시가 붙인 논평이 "파천황"이라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종래 일본학계가 주창하던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 한반도인들이 고대일본을 건설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김석형이 내세운 근거는 많으나, 일본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전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라는 쇠칼에서 확인되는 명문 60여 글자도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1870년대에 명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일본학계에서는 이  칠지도(七支刀)가 바로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백제가 왜 왕실에 '헌상'한  '칠지도'(七枝刀)이며, 이는 백제의 왜에 대한 복속을 말하는 제1 증거물로 확실시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남북한에서는 반론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연구도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석형은 대담하게도 칠지도는 백제  왕세자가  후왕(侯王. 제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약 4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삼한 분국설은 상당 부분 파기되거나 수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남북한 역사학계가 광개토왕비문과 함께  칠지도를  앞세운 일본학계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즉, 임나일본부설)을 벗어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이를 가장 뚜렷하게 증명하는 대목이 김석형 논문을 시발로 칠지도에 대한 남북한 역사학계의 연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석형은 과연 무엇 때문에 삼한 분국설을 들고 나왔을까?

    김석형은 1966년 「초기조일관계사 연구」에서 임나일본부(미마나  미야케)설을 "귀신 단지 속에 나와 '합리주의'의 외피를 쓰게" 된 학설이라고 혹평하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15 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다른 부면에서는 상당히 대담하게 고쳐졌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나 초기 한일 관계 서술의 중심 문제에 이르러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재생된 일본 군국주의의 남한 재침 기도와  관련하여 '미마나' 설이 제국주의자들의 총애를 받게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남한 재침 기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이 출간된 1966년은 한일국교정상화(1965년) 이듬해이며, 문제의 논문이 나온 1963년은 이를 위한 한일 외교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김석형이 말하는 일본의 '남한 재침 기도'는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일본에서 칠지도가 일본제국의 민족적 영광의 표상이었듯이 김석형 이후 남북한에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 왕실에 하사한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거꾸로  일본에 대한 민족적 우월성을 확인케 하는 증거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칠지도가 구축한 한일고대사는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가  말한 대로 "우리가 아는 고대의 역사는 근대 국민국가 욕망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taeshik@yna.co.kr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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