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칠지도의 정확한 해석

칠지도01 - 명문해석

monocrop 2007. 10. 15. 21:17

글 : 고대사산책 / 2003-03-27 16:34:13 / www.coo2.net

 

 

 

칠지도 명문해석    

일본 나라[
奈良]현 덴리[天理] (*1)이소..가미진구[石上神宮]에는 백제에서 만들어져 열도로 건너간 칠지도가 수장(收藏)되어있다. 이 칠지도는 길이 74.9cm에 재질은 단조강으로 된 것이고 칼의 양쪽은 각 세 개씩의 사슴뿔[鹿角] 같은 가지가 있고 그 끝을 포함하여 일곱 개의 끝으로 갈라졌다고 칠지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자루까지 포함하면 팔지인 셈이다.  

(*1)
석상신궁은 일본 나라현 천리시 동부에 있는 신사로서 '연희신명식'에 「대화국·산변군에
石上坐布留御魂神社 물부씨가 제사에 임하는 무신(武神)으로 황실로부터 대대로 도검을 신보로 하여 봉납하고 조정의 병기저장고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하며 또 '연희신명식'에 「備前國 赤坂郡 石上布都之魂神社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칠지도에는 도신(
刀身)에 전면 34자 이면에 27자 전부 61자의 명문이 금상감으로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명치유신 직후인 1,873년부터 1,877년까지 그 신궁의 대궁사였던 관정우(菅政友) 1,874 8월에 표면의 녹을 제거하다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이 명문의 뜻과 칼의 성격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칠지도의 성격과 명문해석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아래와 같이 검토해 보았다.    


칠지도의 성격


칠지도의 성격과 관련된 설들을 대략 보면 다음과 같다.    

1)
서기의 표면기사 내용처럼 왜가 백제보다 우위였다고 보고 백제가 왜에 헌상한 것이라는 백제헌상설이 있다
.        
  
2)
백제가 서기 표면기사와는 달리 왜보다 문화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우위였으므로 백제가 왜에 하사했다는 백제하사설도 있다
.      

3)
기타 열도에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당시에 대륙국가였던
東晉 관련 있다는 동진하사설 등이 있다.    

위와 같은 기존의 학설들 중에 실사에 비교적 가까운 설은 2)번 설이다. 우선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국제정세를 볼 필요가 있다
.    

시대적인 배경
    

칠지도는 그 명문에 나오는 제작연대 '
泰和四年'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시피 이는 東晉 太和四年 변형된 기록이고 연대는 정확히 서기 369년이다. 이것은 백제가 가라지역이었던 지금의 전남과 경남지역을 침탈한 서기 360년대 중반 이후 가라가 개척한 열도까지 서기 368년 무렵 경진주신을 파견하여 가라왕 대기귀신(=소잔명존/아라사등)으로부터 나라를 양도[國讓] 받고 그 이듬해 서기 369년에 초고대왕의 장손자인 무내숙니를 열도의 후왕으로 봉하고 왜왕을 잘 섬기라는 뜻으로 내린 열도통치권의 상징인 홀()에 해당하는 것이다. 후왕은 임면되는 벼슬과 같은 것이었다.

백제의 해외영토 경략


백제는 초고대왕 시대에 당시 귀수태자와 더불어 대륙에 건너가 초기건국지인 요서의 대방고지를 회복하고 양자강 남쪽으로도 진출하여 강남백제군을 설치함으로써 동아시아 제일의 강자로 부상한 백제전성기의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가라까지도 침탈하고 가라가 먼저 개척했던 열도까지도 가라로부터 빼앗아 후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 서기 신공 46년부터 52년까지의 기사에 실려있는 내용들이다.    

경진주신의 파견은 서기 신대기9단 천손강림장에 나오는 천손의 천강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사기에는 근초고왕 3년부터 20년까지 기사가 공백이다. 바로 이 자리가 백제의 대륙진출과 가야병합 등의 내용이 결락된 부분으로 판단된다
.        

대륙백제에 대한 대륙기록
    

대륙의 요서·진평 두 백제군에 대한 기록은 간략하게나마 여러 대륙기록에 등장하는데 대략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 '
송서' 백제전;
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2) '
양서' 백제전;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之矣 自置百濟郡
3) '
남사' 백제전;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之矣 自置百濟郡
4) '
통전' 백제전; 晉時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5) '
구당서' 백제전의 백제강역; 東北至新羅 西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6) '
신당서' 백제전의 백제강역;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    
7) '
자치통감'에는 「扶餘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 永明六年
「위나라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패했다」
8) '
남제서' 백제전에는
永明八年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虜軍大破之
9) '
통전'에는 「城傍餘衆 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扶餘崇 竟不敢還舊國 扶餘氏君長遂滅    
10) '
만주원류고'에 「고대에 錦州, 義州, 愛琿
백제땅이었다」

위와 같이 많은 기록들이 대륙백제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4)까지의 내용은 요서·진평 두 백제군의 설치를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그 시기가
晉世라고 하였는데 진은 西晉 東晉 있다.      

그런데 칠지도의 연호
泰和四年 4세기 東晉 太和四年으로 판단된다. 그것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가 사기에 나온다. 사기 근초고기 27년 정월조와 28 2월조에 「遣使入晉朝貢」이라고 연거푸 기술되어 있고 근구수기 5 3월조에도 「遣使朝晉, 침류기 원년 7월조에도 「遣使入晉朝貢」이라고 기술되어 있고 동 9월조에는 「胡僧滅難陀自晉至」라고 하여 당시 東晉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연호가 없어 타국의 연호를 쓴다 하더라도 외교가 빈번하고 가까이 교류하는 나라의 연호를 썼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물론 진에 조공을 했다는 겉보기기사는 대륙사서를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는 수평적인 관계거나 오히려 그 역이었을 것으로 본다
.      

이 연호가 3세기
연호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3세기의 백제사를 보면 위와 교류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고 서기 246년인 고이왕 13년조에 위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치는 틈을 타 백제가 낙랑변경을 침공했다는 기사가 있고, 책계왕 원년조에 대방과 혼사가 있었던 일이 있다. 또 분서왕 7 2월조에 백제가 낙랑을 침공하고 10월조에 낙랑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고 되어 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칠지도가 3세기 제작품이고 연호가 3세기의 대륙국가 연호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다만 이런 기사들은 이 당시에도 발해만 서안을 낀 요서지역에 백제땅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는 있을 것이다.            

6)
'자치통감'에 「위 영명 6년에 위가 백제를 침공했으나 패했다」고 되어 있는데 늦어도 4세기 중반 초고대왕세에 설치된 백제군이 5세기말 동성대왕세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사기 동성기 10년조 「
魏遣兵來伐 爲我所敗」라는 기사는 이 '자치통감'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요서백제에서 있었던 전역이다. 기마민족인 위가 기병 수십 만을 배에 태우고 황해를 건너서 백제를 침공할 "동기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고 본다.  

8)
'남제서' 백제전에는 그 2년 뒤인 「영명 8년에 위가 기병 수십 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하여 국경을 넘어들어 왔으나 동성왕이 네 명의 장군을 보내 습격하여 대파했다」고 한다. 역시 요서에서 있었던 전역이다. '
'란 육지에서 맞닿은 국경을 뜻한다. 위와 국경을 맞댄 백제땅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 내용이 사기에는 안나온다.  
  
9)
'통전' 기사는 요서백제가 소멸될 때의 기록으로 보이는데 백성들이 돌궐과 말갈에 산투했다 하고
君長 扶餘崇 결국은 망했다고 나온다. 돌궐과 말갈에 인접하려면 역시 요서백제를 상정해야 이해될 수 있고 부여씨 君長 곧 요서백제의 후왕이란 뜻으로 본다. 반도에서 망했으면 바다건너 돌궐과 말갈로 어떻게 투항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10) '만주원류고'에도 서만주로 보이는 錦州, 義州 愛琿 백제땅이었다고 나온다. 즉 요서백제에 대해서는 청인들도 발해만 인근에 백제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 열전에서 최치원은 고구려·백제 전성기의 강역을 증언하고 있는데 유···노와 강남의 오·월을 지칭하고 있다. 조선 영조때의 학자 홍봉한의 '문헌비고'에 「
나라 구천의 古都 둘러싼[] 대략 수천 리가 백제땅이었다」라는 기록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문헌비고'의 내용은 당시까지만 해도 삭제되지 않은 '남제서'를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기타 양자강 남쪽에는 오늘날 전북의
全州, 金山寺, 기린산 등과 같은 지명과 完山이란 지명, 전남의 光山 등과 같은 지명이 있으며 百濟鄕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바로 이 백제향이라는 곳 근방은 흑치상지 장군의 출신지로 판단되는데 黑齒 고대에 이곳 주민들의 생활습관에서 붙여진 별명으로 판단된다. 全州, 完山, 光山 등은 미추홀, 비자발, 비사벌, 완주, 완달, 광주, 추량화, 삼량화 등과 같은 '빛땅'계열 지명이다. 이런 지명들은 고대에 특정한 계통의 부족들만 전통적으로 쓰는 지명이다.        

※ "'
빛땅'계열 지명들" 추후 별도해설
  

흑치상지에 대해 사기열전에서 「백제
西部人」이라 했고 「백제 달솔로서 風達郡將 겸했고 刺史 비긴다」라고 했다. 風達(미상으로 기재)은 지명일 것이고 郡將 '통전'君長 글자만 바꾼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의 자사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는데 자사는 다스리는 직책이다. 정도가 아니다. '풍달'은 흑치의 경우처럼 아마도 양자강 남쪽의 어떤 지명의 별칭일 것으로 짐작된다. ''은 고려인들이 알아보기 어렵게 단순히 ''을 이두식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고 강남 어디에선가 ''자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면 그곳일 것이다.        

흑치상지에 대해 중국의 '
中國將帥全傳'에는 「百濟(今廣東欽縣西北)西部人」으로 소개하고 있다. 백제향은 지금의 '廣西壯族自治區 南寧市'라고 한다. 백제의 오부제란 요서백제 북부, 강남백제 서부, 열도 남부, 가라지역 동부(=東韓之地) 본국이 중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晋平이란 지명도 '中國歷史地名大辭典/劉鈞仁'에 지금의 廣西壯族自治區 위치했던 곳으로 나온다. 말하자면 요서백제군은 연··노 지역이고 진평백제군은 강남의 오·월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대륙의 많은 기록들이 백제 전성기에 대륙에 영토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고 그 시기가 진세라고 하고 있는데 칠지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그 연호는 4세기 후반의 동진의 연호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신대기
四神 백제·가야왕족

서기 신대기5단 사신출생장에서 일신은 초고대왕이고 월신은 귀수대왕이며 초고대왕의 장손자이자 당시 귀수태자의 장자가 바로 질아인 것이다. 질아가 무내숙니이고 소잔명존이 가야왕으로서 인대기에 아라사등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숱한 이칭들이 있다.

'
지렁이 질(
)'자의 질아란 불구라는 뜻이고 사신출생장에 보면 「3년이 지나도 다리로 일어서지 못하여 천반여장선에 실어 바람에 맡겨 띄워버렸다」고 나온다. 곧 서기 369년에 후왕으로 책봉 받아 부임을 했으나 아라사등과 그 아들들에게 회유되어 가야에 협력하여 본국백제에 반기를 들고 대항함으로써 백제 입장에서는 후왕노릇을 제대로 못하므로 불구라고 은유하여 표현하고 배에 실어 띄워보냈다고 포기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물은 다시 신대기9단 천손강림장에 천수일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여 위원중국(=열도)의 「반딧불[
螢火] 같은 빛을 내는 신」과 「파리 같이 시끄러운 귀신」을 평정하라고 보냈는데 「대기귀신에게 아첨하여 3년이 지나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같은 스토리를 달리 각색한 것이다. 신화를 꾸며도 신대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압축, 상징적으로 나오고 하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반디 같은 신이란 일신과 월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빛을 낸다는 뜻으로 가야계를 비하하여 표현한 것이다. 대기귀신의 오호아나[
大己]는 오호아나[大阿那]이며 무지[]는 가야왕족 수직돌림자인 '마다'계열 이칭 중의 하나다. 가라왕 아라사등이다.    

·신대기의 천손은 백제태자

  
신대기9단 천손강림장 첫머리에 「천조대신의 아들
正哉吾勝勝速日天忍穗耳尊 고황산영존의 딸에 장가들어 낳은 아들 天津彦彦火瓊瓊杵尊 낳았는데 고황산영존이 특히 귀여워하며 받들어 키웠는데 위원중국의 하려고 했다」라고 나오는데 위원중국이 열도를 가리키므로 그 열도의 왜왕인 것이다. 아시하라[葦原]는 우리말 '아시>아침'이고 '하라' ''이므로 뜻은 아침땅[葦原]이고 한자로는 새로 개척한 新土/新羅 뜻한다.  

초고대왕의 이칭


'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이란 긴 이름은 초고대왕의 이칭이고 인대기 신무전기에도 나오는 요속일과
速日이란 키워드로 연결되고 있고 성씨록에는 신요속일명, 신요속일, 요속일명 등으로도 나오는데 "[]>[]씨 성의, 이름에 ''자 들어간 왕[]"이란 뜻으로 지은 이칭이다. 열도어에는 '', '' 발음이 없어 '', ''로 발음된다. 백제왕성 ''를 음이 같고 글자모양이 비슷한 요[]>[]로 바꾼 것이다. 천조대신은 곧 일신이고 초고대왕이며 대수를 늘여 부자간으로 묘사했다. "[]는 하늘에서 빛을 비추는 것"이므로 해[]의 역할을 풀어서 지은 것이 天照라는 이름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곧 백제인 것이다.    

天照 고사기 응신기에 나오는 초고대왕의 이칭인 백제국주 照古王 '비출 조()'를 키워드로 하여 연결되는 것이다. 소꾸[], 소꼬[速古], 쇼오꼬[肖古], 쇼오꼬[照古]로 전부 같다. '승승(勝勝)'이란 일종의 경칭으로 보는데 아마도 대륙을 뒤흔들던 백전백승의 영웅이라는 의미로 붙인 듯하다.

일본왕실의 시조는 백제 초고대왕


요속일과 초고대왕을 성씨록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錦部首; 神饒速日命十二世孫 物部目大連之後也(산성국천신)
錦部連; 三善宿同祖 百濟國速古大王之後也(하내국제번)  
三善宿; 出自百濟國速古大王也(우경제번)    

物部; 石上同祖(좌경천신)  
石上朝臣; 神饒速日命之後也(좌경천신)  
物部; 布留宿同祖 天足彦國押人命之後也(화천국황별)  

'
금부수'조와 '금부련'조를 보면 금부씨의 조가 둘로 나오는데
錦部라는 성씨로 요속일과 속고대왕이 동일인물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출신국명이 나오므로 제번으로 분류되기는 했으나 성씨록에 유일하게 대왕으로 기록된 경우다.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는 해외영토를 회복·경략하고 왕의 서열을 (대왕>>후왕)으로 설정해 통치하던 제도였다. (백제왕 대왕>백제태자 왕>백제세손 후왕)이라는 서열이다. 석상씨와 물부씨도 요속일의 후손인데 석상은 석상신궁의 주제신이 초고대왕이므로 그것과의 연결고리이기도 한 것이다. 또 아마다라시[
天足]와 아마데라스[天照]는 같은 키워드로서 천조대신인 초고대왕인 것이다.      

서기기사에 달린 음훈을 보면 초고왕의 시호를 '세우고[
肖古]'라고 읽고 있는데 이것은 반도어 '세우고[/]'의 뜻이고 "왕실을 세운 인물"이라는 뜻이며 또 고황산영존과도 동일인임을 알려주는 연결고리로 달아둔 음이고 그것과 연결되는 키워드가 '高皇産'인데 "고천원에서 황실을 낳은"이라는 뜻으로서 결국 '세우고[肖古]'와 같은 의미로 시조라는 뜻이다.      

서기상의 천황들 중에 초고대왕을 등재한 (*2)인현천황에게만 유일하게 휘가 있고 신공기 55년조(서기 375)에 백제의
肖古王 훙한 후에 56(서기 376)조에 왕자 貴須 왕이 되었다고 하여 당년즉위를 피해서 익년즉위를 적용한 것처럼 기술한 의도도 시조임을 나타내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신공 64년조와 65년조의 침류왕과 아신왕은 당년즉위로 분명히 차별을 두고 있다. 또 초고대왕이 주제신으로 진좌한 신궁의 이름 이소..가미[石上]란 말도 第一神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2)
인현전기에 「
億計天皇 휘가 大脚이다(다른 이름은 大爲인데 다른 천황은 휘를 말하지 않았는데 이 천황에 이르러 혼자 쓴 것은 舊本 근거하였을 뿐이다)」 라고 나오는데 인현은 초고대왕을 등재한 천황으로서 화풍시호 億計 百年之大計라는 말에서 보다시피 億年之大計라는 말로 풀 수 있고 곧 백제가 망한 후에 열도에서 천황가를 이루어 대대손손 영원할 것을 기린 문구를 시호로 지은 것으로 판단되고 오호아시[大脚] '아시'는 아스까[飛鳥]와 같은 말로서 '아침'이란 뜻이고 아스까란 후왕국의 아침이 밝았다는 뜻이니 '큰아침'이란 천황가의 아침을 있게 한 인물이란 뜻으로 붙인 것이며 곧 시조임을 함축한 말이 된다. 오호스[大爲] "큰 업적을 남겼다"는 뜻이 되니 성씨록에 귀수대왕을 분식한 궁월군의 부왕으로 나오는 "공이 가득한 왕[功滿王]"이란 이름과 바로 의미가 통하는 휘인 것이다. 구본이라는 것이 곧 개작 전의 실사기록인 것이다. 서기 인현기 원년 정월조에 「황태자는 석상광고궁에서 즉위하였다」라고 나와 이 인물이 석상신궁의 주제신과 동일인임을 키워드기법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석상의 넓고 높은 궁[石上廣高宮]」이라 하여 예사롭지가 않은 이름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칠지도는 두 개


바로 여기 나오는 「위원중국의
」가 칠지도에 나오는 '왜왕'으로서 당시 귀수태자인 것이다. 형칠지도를 들고 동진 태화4(서기 369)에 도왜한 무내숙니(=질아/천수일명)가 가야와 결탁하여 배신을 하자 그 후에 다시 천수일명의 (*3)아들을 보냈지만 그 마찬가지로 보고가 없자 천치언을 다시 보내는데 이 인물이 귀수대왕의 중자인 침류왕이다. 처음 만든 형칠지도는 무내가 가지고 가야계와 같이 있으므로 침류가 도왜할 때 다시 칠지도를 하나 더 만들었는데 이것이 서기 신공기 52년조에 천웅장언(=침류)이 들고 도왜한 제칠지도로서 1971년 도찌기현 오야마시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칠지도는 나중에 인대기에서 다찌바나[
]라고 전혀 다른 사물로 은유되어 나오고 "여성은 영토를 은유하고 혼인한 여성은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은유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제칠지도는 제귤원(弟橘媛/橘皇后)으로 의인화되어 나오기도 한다. 다찌바나[]란 귤나무 가지를 말하는데 황금색 귤은 칠지도의 금상감 글씨를 비유한 것이다. 원래는 다지바나[大刀花]에서 나온 것이다. 칠지도의 가지가 마치 칼꽃이 핀 것 같은 형상이기 때문이다.    

(*3)
서기 신대기9단에 「천수일명이 가서 평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신이 대기귀신에게 아부하여 3년이 지나도록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배반삼웅지대인, 다른 이름은 무삼웅지대인을 보냈는데 이 역시 그 아버지에 따라 보고하지 않았다」라고 나오는데 이 인물이 초고대왕의 증손자이자 귀수대왕의 장손자로서 천수일(=무내)의 장자이며 두 개의 이름을 보면
=이고 背飯 반도음으로는 '배반(背反)'과 같아 백제왕실을 배반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글자를 바로 적지 못하고 살짝 바꾼 것이며 열도어로 소비[背飯]는 쇠새[+]라고 하는데 경행기에서 귀수대왕을 백조(=일본무존의 혼령이 화한 새), 그 장자 무내숙니를 인덕천황으로 등재하였을 때 오호사자끼[초료]라는 암호로 된 화풍시호를 붙인 것도 삼대를 내리 새로 분식하여 논리적인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자끼'>'사사끼'는 열도어에 복모음이 없어 반도어 '새새끼'를 단모음으로 발음한 것이며 대초료는 '큰 새새끼'라는 뜻으로 "귀수대왕의 장남"임을 나타내는 암호인 것이다.                  

천손강림신화는 백제의 구주평정사


천치언이 가기 전에 사실은 서기 370년에 귀수태자가 침류와 함께 불복하는 가야계를 정벌하러 구주평정에 착수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기의 (*4)천손강림신화인 것이다. 이 구주평정은 서기 370 10월경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서기 371 3월에 구주를 완전히 평정하고 가라는 패하여 본주로 도주하고 이 구주전투에서 대기귀신(=소잔명존/아라사등/반정)과 그 장녀인 반장희(=팔녀진원/신공)가 전사하는데 귀수대왕이 대기귀신을 죽인 것을 초고대왕이 나무라는 내용이 서기 신대기5단 이설1에 천조대신이 월야견존을 나무라는 대목이다. 보식신도 소잔명존인 것이다. 전쟁에 이겨도 적장은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으로 질책한 것이다.  

(*4)
귀수태자가 천손으로 분하여 구주에 최초로 상륙한 지점은 신대기6단 서주맹약장(일신이 낳은 세 여신은 천손이 강림하는 경로상의 지명임)신대기9단 천손강림장을 분석해보면 구주의 오이다[
大分]현 우사[宇佐] 해변으로 추정되는데 이 최초상륙지 근방에 지금도 九重, 臼杵川, 臼杵市, 臼杵灣, 串鼻, 串脇, 久住, 久住山, 久住高原, 久住赤川, 玖珠郡, 玖珠川, 玖珠, 龜石山 등의 '구스/구시'계 지명들이 50만 분의 1지도에도 집중적으로 보인다. 九州라는 지명부터가 貴首系 지명이다. 구저(臼杵)는 신공기에 나오는 백제인 구저(久 )와 반도음이 같고 구시[]도 구시라[串良]>구시라[久西良]로 쓰이고 있고 '구시라' "구시의 땅"이라는 의미다. 구스[久住/玖珠], 구시[龜石]. 신공기의 구저는 '오랠 ', '근본 저'로서 "영원한[] 시조님[]"이라는 뜻이다. ''자는 밑에 로서 "씨족의 첫 번째 인물"이란 뜻으로 시조라는 의미를 원래 담고 있는 글자다.      

일본왕실의 삼종신기도 열도통치권 상징


바로 이렇게 구주평정을 완료한 후에 이듬해 다시 제칠지도를 만들어 침류(=천웅장언)에게 주어 도왜시킨 것이 서기 신공기 52년조(서기 372) 기사다. 최초의 형칠지도는 고사기 응신기에 백제국주 조고왕이 횡도와 대경을 헌상했다고 나오는데 바로 이 횡도가 형칠지도인 것이다. 대경도 일본왕실의 삼종의 신기 중 하나인 동경을 지칭한다. 삼종의 신기는 초치검과 동경, 곡옥 등인데 초치검은 서기 신대기8단에 소잔명존이 시마네현 출운에 대규모 제철단지를 개척한 설화에 팔기대사(=사철광산 은유)의 꼬리에서 나온 칼로서 아라사히[
]의 이빨이 빠졌다고 할 정도로 철의 품질이 뛰어난 것인데 아라사히는 가라사히[韓鋤]라고도 하며 사히[]=사히[]는 반도어 (+아래아)[] '사이/소이 ' ''인 것이다. 이것은 아라가야에서 만든 칼을 의미하며 열도의 시마네현 출운의 사철로 만든 칼이 가라본국에서 만든 칼보다 품질이 좋았다는 의미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사슴 석 자)                
                  
'
어릴
'자는 형제간의 서열을 얘기할 때는 '버금 '에 해당하는 뜻으로 둘째에 쓰고 있다. 반장희란 이름은 서기 신대기9단 천손강림장 이설2에 나오는데 가라왕 아라사등의 장녀로서 아라사등의 이칭을 이용하여 "반정의 장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런 실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명문내용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명문해석
  

판독이 안 되는 글자는, 판독이 어려운 글자는 괄호 속에 일반적으로 판독하는 글을 넣고 본다
.    

앞면에 「
泰和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百兵, ( )供侯王□□□□

뒷면에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 )奇生聖() 故爲倭王旨造 ()()
  

이 문구들을 해석해 볼 때 앞면의 경우는 아래와 같다.    

1)
연호
泰和四年 동진의 太和四年인데 중국의 연호를 차용은 하되 글자가 복잡해짐을 무릅쓰고 의도적으로 뜻이 같은 다른 글자로 새긴 것으로 보이는데 서기 369년이다. 백제는 원래 연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8세기초에 기·기를 지은 후 글자를 복잡하게 변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도가 명백하면 쉬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변조는 ''자 속에 ''가 들어있으므로 충분히 가능하다.    

2)
달은 대체로 5월로 읽고 있고 병오정양(
丙午正陽)이란 음양오행의 오행인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에서 나온 길상구. ()은 남녘에 해당되고 남쪽은 화기(火氣)를 뜻하므로 불기운이 가장 성할 때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쇠를 녹이고 두들겨 만드는데 가장 길한 시간대에 맞춰 제조했다는 뜻이다.

3)
造百練鐵七支刀 > 「백련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라는 의미이고 백련이란 백 번을 단련했다는 강조의 뜻이다.  

4)
( )
百兵」은 판독이 어려운 글자 때문에 설들이 여러 가지로 엇갈리는 구절인데 백병(百兵) '大軍' 또는 '大兵' 정도의 의미로 본다. 3)항의 같은 강조용법으로 '크다', '많다'는 의미로 본다. (-) '임금', '물리칠', '놀라 물러날' 등 여러 가지 뜻을 가진 글자다. ( )는 생(), (), () 등으로 읽기도 하는데 문법적으로 동사 '( )'을 수식하는 부사로 보이고 이 문구의 문맥을 보면 칠지도의 위력을 과시하는 문구로 이해되므로 벽( ) '물리칠'이나 '놀라 물러날'의 의미로 판단된다.  

둘 다 뜻은 비슷한데 「( )히 대군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 )히 대군도 놀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  

그렇다면 ( ) '가능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 중에서 글자 모양이 생(
), (), ()에 가까운 것을 고르면 맞을 것 같다. 예컨대 능()이나 보다 획이 약간 간소하면서 가능하다는 뜻을 가진 글로 본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뒷문장도 문맥이 쉽게 통한다.      

5)
( )供侯王」이란 구절에서 판독이 어려운 글자를 '()'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마땅히 후왕을 받들고 받들라」라는 정도로 이해되는데 그러면 후왕의 백성이나 후왕의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 되어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 칠지도는 후왕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앞문장의 해석에 따라서 공(
) '줄 급()'의 뜻으로 보고 「마땅히 후왕에게 주기 위해」라고 해석하면 문맥이 자연스럽게 통한다. 따라서 ( ) '하기 위해' 또는 '하려고'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본다.

6)
□□□□
」에서 넉 자가 보이지 않는데 이것 역시 문맥상으로 봐서 최초에 이것을 만들라고 지시한 인물의 이름으로 본다. 흔히 장인의 이름이라고 추측하는데 아니라고 본다. 이 글자가 지워졌다는 것은 서기기술태도를 볼 때 그 호칭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지운 것으로 판단되고 "백제대왕(百濟大王)" 또는 "백제왕구(百濟王句)"가 아닌가 본다. ''는 초고대왕의 휘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형식이므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둘 중에서 택한다면 "百濟大王"으로 본다. 이유는 이 칠지도에 전부 세 인물이 등장하는데 나머지 둘도 이름은 안보이고 왜왕, 후왕이라는 이름만 나와 있기 때문이다.        

뒷면의 내용을 보면


1)
先世以來未有此刀 >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도다」라는 뜻으로 열도의 왜왕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百濟()( )奇生聖()」에서 앞부분은 문맥상 "백제왕세자"로 대체로 보고 있는 것 같고 맞는 것으로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이 뒷부분인데 기()는 열도발음으로 통상 '구시[]'로 읽고 있고 풍토기에서는 '구스[]'로도 읽고 있다. 이 경우도 '' ''가 교체되어 쓰이는 사례 중의 하나다. 원래 뜻은 일반적으로 반도어로 '기이하다' 열도어로 '신령스러운'이라고 풀이하는데 특이하게도 흔히 숫자를 다룰 때 쓰는 말로 "짝이 안 맞다"는 뜻이 있다. 기수(奇數).  

이것을 인물에 적용한다면 "짝이 없다"라는 뜻이 되고 뒤집어서 얘기하면 '최고', '제일'이라는 뜻이 될 수 있는데 바로 이 뜻으로 본다. 또 맨 뒷글자는 흔히 '()'으로 판독하기도 하는데 '()'으로 판독하는 경우도 있어서 보다는 취한다. 그렇다고 보고 전체를 해석해 보면 「백제왕세자는 성스럽고 덕스럽게 태어나기 짝이 없느니라」 즉 말을 바꾸면 「백제왕세자는 세상에서 제일로 성스럽고 덕스럽게 태어났느니라」라는 정도로 해석된다. 흔히 아주 특이한 인물을 일러 奇人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단지 기이하다는 뜻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특징이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최고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이런 4세기의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된 8세기의 서기상의 구절을 예로 들어보면 신대기9단 천손강림장 첫머리에 「천조대신의 아들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이 고황산영존의 딸 고번천천희를 취하여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을 낳았다. 황조인 고황산영존이 특히나 귀여워하며 받들어 키웠다. 드디어 황손인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을 위원중국의
삼으려고 했다」라고 나오는데 분위기가 너무나 흡사하다. 천손 니니끼[瓊瓊杵]가 귀수태자였던 것이다. 천손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구절에서 천조대신의 손자이고 고황산영존의 외손으로 나오므로 천손이라 이른 것이다. 천조대신과 고황산영존은 초고대왕이고 실사상으로는 니니끼[瓊瓊杵]와 부자간이지만 신화를 그렇게 꾸몄을 뿐이다.  

이러한 취지가 '신찬성씨록서문'의 「
國家降天孫而創業」이라는 구절에도 반영되어 있다. 「국가가 천손을 내려보내 나라의 대업을 열었다」는 뜻이다. 여기 국가가 바로 백제인 것이고 천손이 초고대왕세의 귀수태자인 것이다.        

奇生 귀수태자의 이름으로 보고 ( )의 글자를 으로 보고 성음(聖音)>성엄[聖臣]>"성스러운 엄치"라고도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좀 무리한 것 같다. 이 경우 "백제왕세자 귀수는 성스러운 엄치이느니라"정도가 될 수 있을 듯하나 굳이 ''자를 안 쓰고 '소리 '자를 쓴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은 이런 홀()에 새기기에는 격이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반도어 엄[]은 열도어로는 '' 발음이 없어 가장 가까운 ''로 발음되고 받침 없이 읽어서 오미[]가 된 것이다. 또 구시[]를 귀수태자의 이름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 휘인 있기 때문이다.

3)
故爲倭王旨造」라는 구절은 「고로 왜왕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만들었으니」로 해석되는데 문맥이 물 흐르듯이 너무나 부드럽게 연결된다. 역시 백제왕세자가 왜왕인 것이다.  

4)
()() > 「전하여 후세에 보여 주라」라는 뜻이 된다. 의미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문구를 보더라도 구시[]가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후세'라고 표현할 때는 이 물건이 그 당시의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열도 후왕실의 신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왜왕은 백제왕이 바뀌면 따라서 바뀌게 되고 후왕도 바뀌게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등장인물 셋의 관계는 "(백제왕) 대왕>(백제태자) 왜왕>(백제세손) 후왕"이라는 서열이 명백히 나타난다. 후왕은 당연하게도 열도의 후왕을 가리키고 이것은 벼슬처럼 임면되는 자리로서 왜왕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하는 것이고 독립된 왕권이 아니었던 것이다
.                  

내용을 정리해보면
    

太和四年 5 16일 화기(火氣)가 가장 왕성한 시를 택해 백련철로 만든 칠지도는 (능히) 백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으로서 마땅히 후왕에게 주려고 백제대왕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런 칼은 없었도다. 백제태자는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덕스럽게 태어났느니라. 고로 왜왕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만들었으니 전하여 후세에 보여 주도록 하라』    

여기서 후대에까지도 시대의 연속성을 감안하면 「...성스럽고 덕스럽게 태어나느니라. 고로 왜왕으로 섬기라는 뜻으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    

전체적인 대의는 『백제 초고대왕이 열도에 후왕으로 부임하는 장손자 무내숙니에게 열도통치권을 상징하는 홀을 만들어 내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덕스런 그의 부왕 백제 귀수태자를 왜왕으로서 받들어 섬기고 또 그런 뜻을 후세에도 전하여 모든 후왕들이 왜왕들을 세세손손 잘 섬겨라』라고 이르는 내용인 것이다
.
    
명문은 8세기에 이미 삭제


결자는 명치유신 후에 석상신궁의 대궁사를 지낸 관정우가 지웠다는 설이 있으나 기·기 편찬시에 기·기의 표면분식기사와 내용이 배치되는 글자를 당연하게도 8세기초에 이미 삭제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기·기 편찬시에 삭제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기사도 서기에 나오고 한 때는 칠지도가 널판 바닥에 거꾸로 꽂혀있었다는, 마치 명문삭제에 대해 핑계를 대는 듯한 서기 신무전기 기사도 있어 명치유신 후에 삭제했다는 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        

또 연호
泰和 원래 동진의 太和이던 것을 > 8세기초에 알아보기 어렵게 바꾸었을 가능성도 많다. ''자 속에 ''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충분히 변조 가능하다고 본다. 이것이 정확히 동진의 태화4년이라는 것도 바로 밝히기를 꺼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럴 경우 백제 초고대왕세의 작품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명문의 문구를 분식이칭에도 활용


또 이면의 문장에서 따낸 두 단어가 기·기 편찬시에 인물을 꾸미는데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서 이칭에 쓰이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백제가 망한 후 8세기 초에 백제·가야사를 치밀하게 개작하고 기·기와 풍토기, 성씨록, 만엽집 등을 편찬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    

※ "
칠지도명문에서 딴 귀수대왕 이칭" 별도해설
        

석상신궁의 주제신은 초고대왕
  

칠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석상신궁의 주제신은 초고대왕인데 이것도 초고대왕을 등재한 서기 이중전기에 화공을 당해 피하다가 석상신궁에
하는 사건이 나온다. 太子便居於石上振神宮」라는 구절이다. 신궁에 한다는 것은 그 신궁의 제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초고대왕의 이칭에는 ''자가 들어간 것이 꽤 있고 따라서 돌과 관련된 일화도 몇 가지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를 암호화된 연결고리로 만들었을까? 여기에도 절묘한 언어의 유희가 동원되었다. ''자는 단순히 돌이란 뜻이 아니고 그 어원이 역시 반도어에 있었다.
  

                    
열도어로 '
' '이시[]'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찌[]'와 어원이 같다. '이찌[]'의 어원은 반도어 ''이다. 이것에 명사형어미 ''를 붙여 받침 없이 풀어 읽으면 '이치'가 되고 한글로는 ''지만 열도어로는 '이치'> '이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단독으로 발음할 경우는 ''이나 '' ''과 음가가 같다. 여기서 ''을 마찬가지 요령으로 받침 없이 풀어 읽으면 '이지'가 되는데 이것은 사실상 '이찌'와 같다. 고어에서는 지옷과 쌍지옷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인데 마찬가지로 풀어 읽으면 '이시'가 된다. 따라서 이시[
]는 이찌[]와 같은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가미[]는 가미[]와 열도발음이 같다. 그러면 石上 第一神이라는 뜻이 되어 역시 시조라는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초고대왕이 일본왕실의 시조신이라는 것은 이렇게 다각적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음은 이소..가미[石上]라고 하는데 '이소[]'라고 읽는 것은 발음을 살짝 바꾼 것이다.

한자에 '(
)'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 글자가 서기에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의 발음이 열도어로 '이소[]'. 뜻은 <고어사전/암파문고/2000>에 보면 「물속[水中]의 돌, 물가[水邊]의 돌, 돌 많은 물가[水邊]」라고 나오는데 역시 약간은 차이가 있지만 돌은 돌이다. 바로 이 발음으로 대치한 것이다. ''에 명사형어미 ''를 붙여 읽었다고 해도 틀릴 것이 없다.          

아침의 경우는 명사형어미로 '', ', '', ' 등 무려 네 가지를 붙여서 다양하게 활용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아침이라는 뜻의 '' ''를 붙인 것이 '아사[
]'. ''를 붙인 것이 "아침을 당긴다"는 뜻을 가진 아신왕의 이칭 '아시히기[脚日木]'가 있다. ''를 붙인 것이 '아스까[飛鳥]'. ''를 붙인 인명으로 阿蘇君 있고 지명으로 구주에 阿蘇山 있다. '//[]'과 비슷한 용례로 아침의 사국시대 고어형태인 '//'과 빛[]의 사국시대 고어형태인 '[比斯]', '[比自]'을 들 수 있다.    

이 석상신궁의 주제신이 초고대왕이라는 것은 역시 침류왕을 등재한 현종전기에 보면 초고대왕으로 비정되는 인현천황의 어릴 때 이름이
大石尊이라고 나오고 인현이 즉위하는 원년 정월조에 「皇太子 於石上廣高宮 卽天皇位」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仁賢이란 시호를 풀어보면 ''王仁에서 딴 것이고 , , 등의 뜻이 있는데 ''으로 보면 "왕인보다 크다", '나을 '으로 보면 "왕인보다 낫다"는 뜻이고 이것은 곧 왕인보다 서열이 앞선다는 의미가 된다. 왕인이 귀수대왕이므로 인현은 초고대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