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칠지도의 정확한 해석

[스크랩] 일본역사의왜곡 - 칠지도 명문 왜곡

monocrop 2007. 10. 11. 17:17


                    
칠지도 명문 왜곡

                                                                                                <칠지도 앞 뒤면>

 

 

 

 

 

 

 


일본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왜왕(倭王)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銘文) 중 일부가 예리한 도구에 의하여 글자가 손상되어 있다. 이는 칠지도(七支刀)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되자 일본인 누군가가 칠지도(七支刀)를 훼손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감춘 것이다.

일본인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칠지도(七支刀)를 왜 훼손하였는지 알기 위하여 칠지도(七支刀)에 적혀 있는 명문을 살펴본다.

「태화 4년(A.D 230년) 5월 16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마땅히 후왕들에게 줌이 마땅하다..중략..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온조)백제 왕세자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 생겼기에, 성음(구태백제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벽百兵宜( )供侯王( )( )( )( )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註 한자 중 ( ) 안의 글자는 후에 학자들이 보충한 것이다.]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내용이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52년조에 나온다. 

「신공왕후(神功王后) 52년(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秋 9월 丁卯朔 丙子(10일) 구저(久)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왔다. 칠지도(七支刀) 1구, 칠자경(七子鏡) 1면 등 각종의 중보(重寶)를 바쳤다. 이어 말하여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수원은 곡나(谷那)의 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산에서 제철(製鐵)하여 길이 성조(聖朝)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지금 내가 통하고 있는 귀국(貴國)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로써 천은(天恩)을 내리시고, 해서(海西)를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이 때문에 국기가 영원히 단단하다. 너도 마땅히 화호(和好)를 거두고, 토산물을 모아서 봉헌(奉獻)하기를 끊이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매년 계속하여 조공(朝貢)하였다. 久等從千熊長彦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鐵山以永奉聖朝乃渭孫枕流王曰今我所通海東貴國是天所啓是以垂天恩割海西而賜我由是國基永固汝當善脩和好聚斂土物奉貢不絶雖死何恨自是後每年相續朝貢焉」

[註:"그리고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 이전 문구는 일부 왜곡한 것이고, 이후 문구는 후에 가필한 것이다.]

 앞에 나온 칠지도(七支刀)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泰( ) 四年 

백제왕이 신공왕후(神功王后)에게 칠지도(七支刀)를 준 시기에 대하여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공왕후(神功王后) 52년으로 적혀 있고, 칠지도(七支刀)에는 泰(  ) 四年으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九台百濟)가 건국된 A.D 204년 10월경부터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이 붕괴된 A.D 247년 사이에 중국의 연호 중에서 泰(  ) 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의 太和 四年(A.D 230년) 뿐이다. 따라서 泰( )는 위나라의 연호이고, 구태백제왕(九台百濟王)이 신공왕후(神功王后)에게 칠지도(七支刀)를 준 연도는 위(魏)나라의 太和 四年이다. [註:太와 泰는 같이 쓰인다.]

후한(後漢) 때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尉九台)는 요동(遼東)에 자리잡고 있던 공손강(公孫康)의 지원을 받아 공손강이 한반도에 설치해 놓은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九台百濟)를 세우고 공손씨(公孫氏)가 사용한 후한(後漢)과 위(魏)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註: 공손강(公孫康)이 처남(妻男)되는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尉九台)를 지원하여 부여 무리를 한반도로 이동시켜 한(韓), 왜(倭) 지역을 장악한 것은 당시 공손씨(公孫氏)의 적인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칠지도(七支刀)에 적혀 있는 "泰(  ) 四年"을 동진(東晋)의 "太和 四年(A.D 36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들은 칠지도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52조에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라는 문구가 나오고, 침류왕(枕流王:A.D 384-385년)의 조부가 근초고왕(近肖古王)인 것에 근거하여, 백제가 신공왕후에게 칠지도를 준 때는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치세 때이고, 근초고왕은 A.D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하였으므로, "泰(  ) 四年"은 동진(東晋)의 "太和 四年(A.D 369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52조의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이후 문구는 후에 가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일어난 착각이다. 

( )月十六日丙午正陽  

학자들은 ( )월을 5월로 판독하고 있다. 이는 한(漢)나라, 삼국시대, 진(晋)나라 때 주조한 검 등의 명문(銘文)에 "五月丙午正陽"이라는 길상구(吉祥句)가 상용(常用)되었기 때문이다. 정양(正陽)은 한낮을 가리킨다.

[註:일부 사학자는 위 "五月..丙午正陽"을 길상구(吉祥句)로 보지 않고 중국의 연호 중에서 태(太.泰)로 시작하고 五月 十六日이 丙午가 되는 해를 찾거나, 十六日을 十一日로 보고 중국의 연호 중에서 태(太.泰)로 시작하고 五月 十一日이 丙午가 되는 해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낸 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백제의 시대상황과 맞지 않았다. 또 일본의 어떤 사학자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칠지도(七支刀)를 받은 달이 九月로 적혀 있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맞추기 위하여 (  )月을 九月이라고 주장하였다.]  

造百鍊鐵七支刀

위 百은 100이라는 뜻보다 모든, 아주 많은, 여러 개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여러 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벽百兵  

위 병(兵)은 병란(兵亂)의 해독(害毒)을 뜻한다.

위 문구는 칠지도가 「모든 병란의 해독(害毒)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宜( )供侯王 

위 의(宜)를 동사로 보아 「∼함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공(供)은「주다」는 뜻이 있고, 후왕(侯王)은 주로 고위관리나 신분이 높은 사람의 칼(刀)이나 거울(鏡)의 명문(銘文)에 사용되었다.

( )( )( )( )作  

훼손된 글자가 많아서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렵다. 일부 사학자는 훼손된 글자는 만든 사람의 이름일 것이라고 주장하나 ,  만든 사람의 이름을 훼손할 이유는 없으므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되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先世以來未有此刀 

「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다」는 뜻이다.

百濟王世(子)奇生

 위 백제는 곡나(谷那)에 철광산을 가지고 있던 온조백제이고, "王世(子)"는 온조백제 왕세자이다. 그리고 기(奇)는 진기하다는 뜻이고, 생(生)은 생겼다는 뜻이다. 위 문구는 「온조백제 왕세자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 생겼다」는 뜻이다.

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위 성음(聖音)의 성(聖)은 극존칭(極尊稱)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음(音)도 고대에 높임에 사용되었는 글자이므로, 성음(聖音)은 구태백제왕(九台百濟王)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위왜왕(故爲倭王)은「일부러 왜왕을 위하여」라는 뜻이고, 지(旨)는 임금의 뜻이며, 지조(旨造)는「(성음의) 뜻으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이고, 전시후세(傳示後世)는「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는 뜻이다. 위 문구는 성음(聖音:九台百濟王)이 일부러 왜왕(倭王)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뜻을 후세까지 전하여 보여라는 뜻이다.  

앞에 나온 칠지도(七支刀) 문구는 성음(聖音)이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보내는 문구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에 의하면 백제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받은 왜왕(倭王)은 신공왕후(神功王后)이므로, 신공왕후는 백제의 후왕(侯王)이었다. 또 신공왕후 때는 일본열도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이 세워져 있었으므로, 야마대연맹은 구태백제(九台百濟)의 후국(侯國)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왕기(欽明王紀)에는 임나(任那)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흠명왕기에는 速古王으로 적혀 있다), 구수왕(仇首王:흠명왕기와 신공왕후기에는 貴首王으로 적혀 있다)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백제 초고왕, 구수왕 시기에 대마도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는 야마대연맹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뜻이다. 즉 야마대연맹은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칠지도(七支刀)는 제작년도 등이 지워져 있다.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물품인 칠지도(七支刀)를 훼손(毁損)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왜곡과 관계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왜곡과 칠지도(七支刀) 훼손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백제 유민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지을 때 가장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와 백제(百濟)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는 일본국(日本國)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후국(侯國)인 사실을 감추고 거꾸로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종주국(宗主國)인 것처럼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왜곡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가 그 다음으로 중점을 두어 왜곡한 부분은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와 신라(新羅)와의 관계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만들 당시 일본국의 지배세력은 백제유민(百濟遺民)들이었고, 이들은 신라에 대한 패배감과 반감이 아주 강하였다. 그 때문에 백제유민이고 일본서기 저자인 안만려(安萬侶)는 일본열도왜가 신라를 정벌한 사실이 있었는 듯이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마음으로나마 백제유민들의 한(恨)을 풀고 패배감을 극복하려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중 왜곡이 가장 심한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를 보면 섭정전(攝政前) 조(條)에 신공왕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이어서 고구려왕과 백제왕으로부터도 복속을 맹세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 내용은 김부식(金富湜)님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위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었는 나라가 아니고 대마도에 있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서기 저자는 신라왕의 이름에 파사매금(파사이사금)을 적어 넣어 마치 위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반도에 있었는 신라, 백제, 고구려였는 것처럼 왜곡하였다. 

「섭정전 10월 전략. 화이진(和珥津)에서 출발하였다. 때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켜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바람은 순풍이 불고 범선은 파도에 따라갔다. 노를 쓸 필요없이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가 따른 파도가 멀리 나라안에까지 미쳤다. 이것으로 천신지지(天神地祗)가 모두 도와 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사람을 모아서 "신라 건국 이래 아직 바닷물이 나라안에까지 올라온 일을 듣지 못하였다.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을 하였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해에 빛나고 북과 피리 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신라왕은 멀리 바라보고 생각밖의 군사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다. 일본이라 한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다. 왕이라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들어 방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감고 스스로를 포박하였다. 지도와 호적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금후는 길이 건곤과 같이 엎디어 양마(養馬)의 일을 하겠습니다. 선이(船이)를 말리지 않고 춘추로 말의 빗 및 말의 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 바다가 멀지만 매년 남녀의 손으로 만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에 나오는 해가 서에서 나오지 않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가 역류하고 내의 물이 하늘에 올라가 별로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춘추의 조공을 빼거나 태만하여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아니하면 천신지지와 같이 죄를 주십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입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삼군에 호령하여 '자복하는 자를 죽이지 말라'라고 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보의 나라를 얻었다. 또 사람이 스스로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의 곳간을 봉하고 지도와 호적 문서를 거두었다. 왕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 그 창이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간지(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하여 금, 은, 채색(彩色)..중략..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때문에 신라왕은 항상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친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2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軍勢)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營外)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다. 이가 소위 삼한이다. 왕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冬十月從和珥津發之時飛廉起風陽侯擧浪海中大漁悉浮扶船則大風順吹帆船隨波不勞로楫便到新羅時隨船潮浪遠逮國中卽知天神地祗悉助歟新羅王於是戰戰慄慄身無所則集諸人曰新羅之建國以來未嘗聞海水凌國若天運盡之國爲海乎是言未訖之間船師滿海旌旗耀日鼓吹起聲山川悉振新羅王遙望以爲非常之兵將滅己國焉失志乃今醒之日吾聞東有神國爲日本亦有聖王爲王必其國之神兵也豈可擧兵以距乎卽素패而自服素組以面縛封圖籍降於王船之前因以頭之曰從今以後長與乾坤伏爲飼部其不乾船以春秋獻馬梳及馬鞭復不煩海遠以每年貢男女之調則中誓之曰非東日更出西且除阿利那禮河返以之逆流及何石昇爲星辰而殊闕春秋之朝怠廢梳鞭之貢天神地祗共討焉時或曰欲誅新羅王於是王后曰初承神敎將授金銀之國又號令三軍曰勿殺自服今旣獲財國亦人自降服殺之不祥乃解其縛爲飼部遂人其國中封重寶府庫收圖籍文書卽以王后所杖牟樹於新羅王門爲侯棄之印故其牟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爰新羅王波沙寐錦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仍齎金銀彩色及綾羅絹載于八十船令從官軍是以新羅王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其是之綠也於是高麗百濟二國王聞新羅收圖籍降於日本國密令何其軍勢則知不可勝自來于營外앙頭以款曰從今以後永稱西蕃不絶朝貢故因以定內官家屯倉是所謂之三韓也王后從新羅還之」

[註 신공왕후기 섭정전 10월조에는 신공왕후가 신라를 정벌하니 백제와 고구려도 가만히 그 군세를 엿보고 같이 신공왕후에게 항복하였다고 적혀 있다. 즉 백제, 고구려, 신라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이 신라, 백제, 고구려는 한반도에 있었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아니고 대마도에 있었는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소국(小國)이다. 고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무리 등이 대마도나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소국을 세우고 나라 이름으로 근국(根國:이주하기 전에 거주한 나라)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위와 같이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를 왜곡해 놓고 그 뒤 흠명왕기(欽明王紀)를 적기 위하여 흠명왕에 관한 사료(史料)를 보니 임나(任那: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A.D 167-214년), 구수왕(仇首王:A.D 214-234년)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었다.

 「흠명왕 2년(A.D 541년) 여름 4월, 아라(安羅)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와 졸마(卒麻)의 한지(旱岐)와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 사이기(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길비신(日本府吉備臣)과 백제에 가서 같이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註 성왕)이 임나의 한지(旱岐)들에게 "일본의 왕이 詔한 바는 오르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재건할 것인가. 각기 충성을 다하여 왕의 마음을 펼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중략.."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註 초고왕), 귀수왕(貴首王:註 구수왕)의 치세(治世) 때에 아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 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親交)를 맺었다.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二年夏四月安羅次旱岐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加羅上首位古殿奚卒麻旱岐散半奚旱岐兒多羅下旱岐夷他斯二岐旱岐兒子他旱岐等與日本府吉備臣往赴百濟俱聽詔書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日本王所詔者全以復建任那今用何策各盡忠奉展聖懷..중략..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安羅加羅卓淳旱岐等初遣使相通厚結親好以爲子弟冀可隆」

「흠명왕 2년 전략..가을 7월 백제는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가 신라와 더불어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那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 중부나솔 목리미순(木淳) 기신나솔(紀臣奈率) 미마사(彌痲沙) 등을 보내어 아라(安羅)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아라일본부(安羅日本府)의 하내직(河內直)이 신라와 내통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초고왕), 귀수왕(구수왕)이 당시의 한지(汗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子弟)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父兄)으로 알았다". 같이 왕을 섬겨 강적에게 항거하였다.". 秋七月百濟聞安羅日本府與新羅通計遣前部那率鼻利莫古那率宣文中部那率木淳紀臣奈率彌麻沙等(紀臣奈率者皆是紀臣聚韓婦所生因留百濟爲奈率者也未詳其父他皆效此也)使安羅召到新羅任那執事謨建任那別以安羅日本府河內直通計新羅深責罵之乃爲任那曰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式爲兄弟於是我以汝爲子弟汝以我爲父兄共事王俱距强敵」

[註:위에는 아라(安羅), 가라, 탁순국 등이 백제 초고왕, 구수왕의 치세 때에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백제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초고왕, 구수왕의 치세 때에 임나(任那:대마도)나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는 구태백제(九台百濟)에 복속하고 있었지 온조백제(溫祚百濟)에 복속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위 문구에는 임나(任那)의 왜(倭)가 백제에 복속한 시기가 구태백제왕을 기준으로 하여 적혀 있지 않고 온조백제왕을 기준으로 하여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著者)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를 지으면서 일본열도왜의 종주국인 구태백제를 말살하고, 한반도 백제 지역에 온조백제 한 나라만 있었는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歪曲)하였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한반도에 이잔(利殘:구태백제)과 백잔(百殘:온조백제)이 있었고, 이잔이 백잔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를 대비하면, 백제 초고왕(肖古王:A.D 166-214년), 구수왕(仇首王:A.D 214-234년)의 치세 때 일본열도에는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A.D 97년경부터 247년까지 존재한 소국연맹)이 세워져 있었고, 당시 야마대연맹의 여왕은 신공왕후(神功王后)였으며, 임나(任那:대마도)의 왜(倭)는 야마대연맹에 속해 있었다.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야마대연맹에 속했는 임나(任那)의 왜(倭)가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은 임나(任那)의 왜(倭)를 포함하여 야마대연맹에 속한 왜(倭) 전부가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야마대연맹의 여왕 신공왕후(神功王后)는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백제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겼다.

위 내용은 당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짓는 안만려(安萬侶)를 매우 당혹스럽게 하였다. 왜냐하면 안만려는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에 신공왕후(神功王后)가 백제, 신라, 고구려를 복속시켰다고 왜곡해 놓았는데, 흠명왕에 관한 사료(史料)에 임나(任那: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흠명왕기에는 速古王으로 적혀 있다), 구수왕(仇首王:흠명왕기와 신공왕후기에는 貴首王으로 적혀 있다)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임나(任那)의 왜(倭)가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흠명왕에 관한 사료에서 그런 내용이 들어 있는 문구를 모두 지우면 흠명왕에 관한 사료를 대부분 지워야 하고, 그렇다고 하여 지우지 않자니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에 신공왕후가 백제, 신라, 고구려를 복속시켰다고 왜곡해 놓은 것이 탄로나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신공왕후(神功王后)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사실을 꼼짝없이 인정해야 될 형편이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난제(難題)에 빠졌을 때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는 일본열도왜(당시는 야마대연맹)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백제와 교류한 사실이 전혀 없었는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흠명왕에 관한 사료에 "임나의 왜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라고 적혀 있는 내용을 부정하려 하였다.

일본서기 저자는 그 방법으로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의 백제 관련 기사를 모두 원래의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아니하고 백제 초고왕(肖古王:A.D 166-214년), 구수왕(仇首王:A.D 214-234년)의 치세 때 이후인 신공왕후기 46년조(A.D 246년) 이후에 적어 놓았다. 이는 신공왕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의 치세 때 백제와 교류한 사실이 없었는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신공왕후가 초고왕, 구수왕의 치세 때 구태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긴 사실이 없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어설픈 위장은 곧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백제 관련 기사를 모두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의 치세 때 이후인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46년조 이후에 적어 놓았지만, 그 내용 중에 신공왕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교류한 사실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백제 관련 기사를 초고왕, 구수왕의 치세 이후 연도에 적어 놓은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앞의 방법이 실패하자 일본서기 저자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왕후기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 구수왕은 사실은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그 보다 훨씬 후대(後代)에 재위한 근초고왕(近肖古王), 근구수왕(近仇首王)인 것처럼 왜곡하였다. 이는 신공왕후를 근초고왕, 근구수왕 치세 때의 인물로 위장함으로써 신공왕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의 치세 때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는 사실이 없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왕후를 근초고왕(近肖古王:A.D 346-375년), 근구수왕(近仇首王:A.D 375-384년) 치세 때 인물로 위장하기 위하여 백제가 신공왕후에게 칠지도(七支刀)를 보내준 내용이 적혀 있는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52년조(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문구 하단에 "손자 침류왕(枕流王:A.D 384-385년)에게 일러..후략" 문구를 삽입해 놓았다. 이는 신공왕후기 52년조에 나오는 초고왕(肖古王), 귀수왕(貴首王:구수왕)이 진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이 아니고 침류왕의 부(父)인 근구수왕(近仇首王:A.D 375-384년)과 조부(祖父)인 근초고왕(近肖古王:A.D 346-375년)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전(倭傳)에 의하면 신공왕후는 정시(正始) 8년(A.D 247년)에 죽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침류왕(枕流王), 근초고왕(近肖古王), 근구수왕(近仇首王)은 모두 신공왕후 재위 때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신공왕후기 52년조에 적혀 있는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후략" 문구는 신공왕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위 문구를 신공왕후기 52년조에 삽입해 놓은 것은 신공왕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치세 때 인물이 아니고 근초고왕, 근구수왕 치세 때 인물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위 왜곡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의 즉위년도와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보다 120년을 앞당겨 신공왕후기 55년조, 56년조, 64년조, 65년조에 각 적어넣으면서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명칭을 초고왕(肖古王), 귀수왕(貴首王:仇首王)으로 적어 놓았다. 이는 신공왕후기 46년조 이후에 나오는 초고왕, 귀수왕이 진짜 초고왕, 구수왕이 아니고 근초고왕, 근구수왕인 것처럼 보강 왜곡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공왕후(神功王后) 55년(A.D 255년)  백제 초고왕 사망(A.D 375년)하다. 百濟肖古王薨」[註 255=375(근초고왕이 사망한 해)-120]

「신공왕후(神功王后) 56년(A.D 256년) 구수왕 즉위(A.D 375년)하다. 百濟王子貴須立爲王」[註 256=376(근초고왕이 사망한 다음해)-120]

「신공왕후(神功王后) 64년(A.D 264년) 구수왕 사망(A.D 384년)하고, 침류왕 즉위하다. 百濟國貴須王薨王子枕流王立爲王」[註 264=384(근구수왕이 죽은해)-120]

「신공왕후(神功王后) 65년(A.D 265년) 침류왕 사망(A.D 385년)하다. 왕자 아화(阿花)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百濟枕流王薨王子阿花年少叔父辰斯侵奪立爲王」[註 265=385(침류왕이 사망한 해)-120]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전(倭傳)에 의하면 신공왕후는 A.D 247년에 죽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은 신공왕후보다 훨씬 후대에 존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위에 나온 문구는 신공왕후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註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왕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치세 때 인물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신공왕후를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치세 때 인물로 왜곡하였으나, 신공왕후가 5세기 중반의 인물이 됨으로써 A.D 201년부터 269년까지 재위하였다고 적어 놓은 일본서기의 왕체계가 불신받게 되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왕후 재위시기를 그대로 두고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즉위년도와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보다 120년 앞당겨 이들의 즉위와 사망 사실을 신공왕후기 후미에 적어놓으므로써 이들을 신공왕후 시대의 인물로 위장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여왕이 되어 신라에 사신을 보낸 연도는 A.D 173년이고, 삼국지 위지 왜전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죽은 연도는 A.D 247년이므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신공왕후 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그 후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을 보니 칠지도를 만들어 왜(倭)에 보낸 연도가 "泰和 四年"으로 적혀 있었다. 신공왕후 치세 때 "泰和 四年"으로 볼 수 있는 연도는 위(魏)의 "太和 四年(A.D 230년)" 뿐이다. 만일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왕후에게 보낸 연도가 위(魏)의 "太和 四年"인 것이 탄로 날 경우, 신공왕후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과 교류한 사실이 없었는 것처럼 신공왕후기를 왜곡해 놓은 것이 모조리 탄로나게 된다. 이러한 난제에 빠졌을 때 일본인 누군가가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왕후에게 보낸 연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칠지도 명문 중에서 제작년도 등을 지워 버렸다.

[註 현재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왜곡한 사람은 A.D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석상신궁의 대궁사(大宮司)를 지낸 관정우(菅政友)로 추정된다. 그는 "任那考"를 쓴 일본의 극우 우익 학자로서, 그는 "任那考" 서문(序文)에 "대저 皇國의 (역사 중) 韓國에 관련되는 것들은 장래에도 여전히 끊어지지 않겠거니와 지금 세상의 형세를 보면 後世에 영향을 끼칠 수단이 될 때도 있을 것이므로..후략"라고 적었다. 이를 보면 관정우는 일본의 극우 학자로서 한국과 관련되는 것이 후세에 일본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정우 전집에는 관정우가 칠지도(七支刀)의 녹을 닦아내고 칠지도의 명문을 읽은 동기에 대하여 "아주 시커멓게 녹슬었는데 金色이 조금 보이는데 있어 의심이 나서 그 위의 녹을 조심스레 제거하다 보니 비로소 문자가 나타났다..중략..이것은 내가 이 신궁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칠지도의 명문을 훼손한 사람을 관정우로 추정하는 것은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 문구의 "和" "五" "六" 등 글자가 훼손되어 있었고, 훼손된 "泰(  ) 四年"을 "泰始 四年"으로, "(  )月"을 일본서기 신공왕후기 52년조에 맞추어 "九月"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泰始 四年은 漢土의 연호로써 晋의 泰始 四年은 6월11일, 8월 12일, 9월 13일 어느 것이나 병오이며..후략..이 해는 우리 신공왕후 섭정 68년 戊子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보면 녹을 벗겨내고 칠지도의 명문을 처음 읽은 사람도 관정우이고, "泰和"라는 글자가 훼손된 후 "泰始"로 처음 읽은 사람도 관정우이다. 관정우는 칠지도의 명문 문구와 신공왕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았다는 일본서기 신공왕후기 52년조 문구를 서로 연결하면서도 신공왕후가 백제로부터 칠지도를 받은 때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치세 때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泰和"의 "和" 부분을 훼손하고 "泰(  )"를 "泰始(A.D 265-274년)"로 읽었다.]

                              

출처 : 韓國의 歷史와 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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