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구주백제왕의 백제부흥운동

monocrop 2007. 10. 7. 19:11
 

660년 백제가 멸망하니 구주백제는 부여풍장을 백제대왕으로 즉위시켜서 백제 부흥을 위해 백제로 보내고, 천지천황은 그 틈에 구주를 빼앗아서 황극천황을 죽인다.

부여풍장의 백제 부흥군은 천지천황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복신은 부여풍장의 암살을 기도한다.

부여풍장은 복신을 죽여야 했으나, 이로 인해 각 곳의 백제 성주들이 부여풍장을 불신하고 당나라 장수로 다시 돌아온 백제 태자 융을 보고 투항하게 된다.

부여풍장은 일만의 왜병과 함께 백강촌에서 당나라 수군과 결전을 하는데 허무하게 패전하고 백제를 포기하니 백제 부흥의 불길이 꺼져버린다.

 

천지천황天智天皇(614~671)은 제명천황이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낳은 아들이며 어려서는 교기翹岐라고 불렀다.

중대형中大兄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중황中皇이라고도 했던 제명천황이 낳은 소생 중에서 장남이라는 뜻이다.

그의 시호인 아메미코토하루키와케天命開別는 하루키와케開別에서 구주백제왕이었다는 기록이 된다. 즉 흠명천황처럼 춘일시春日市의 장진궁長津宮에 구주백제왕으로 두 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655년 백제 의자대왕이 타락한 조짐을 보인다. 천재로 태어나 모든 권력을 가졌는데, 늙어가면서 주지육림의 탐욕에 사로잡힌 것이다. 656년 환락을 제어하려는 충신 성충成忠 등을 감옥에 보낸다.

그리고 660년에는 너무나 쉽게 나당연합군에 패전하여서 당나라 소정방에게 사로잡힌다. 소정방의 수군이 사비성에 이른지 3일만인 7월13일에 왕성을 함락당한다.

의자대왕은 당나라 수도에 끌려가더니 곧바로 병을 얻어죽고 낙양에 묻힌다.


무대왕의 조카인 복신福信이 임존성任存城(=예산禮山)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서 버티고,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도도기류산都都岐流山(부안扶安)에서 농성하였다.

바로 그때도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신라를 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으니, 이는 본토백제가 아니라 구주백제의 부여풍장이 별도로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660년 9월 복신福信이 구주 백제의 부여풍장에게 본토백제의 참상을 전하고서 백제본토로 와서 부흥군의 구심점으로서 백제대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또 태후인 황극천황에게 부탁하니, 황극천황은 즉시 부여풍장을 백제대왕으로 즉위시키고 왜국 군대로 호위하여 백제로 보냈다.

복신의 사자는 대화조정에도 이르러서 역시 의자대왕비였던 제명천황과 중대형황자(천지천황)에게도 참상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천지천황은 이때가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부여풍장이 비운 구주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점령하였다.

당시 동요에 파리떼가 서쪽으로 갔다고도 하고, 말꼬리에 쥐가 새끼를 낳았다고도 하였으니, 천지천황의 비열함을 노래한 것이었다.

천지천황은 구주의 축자로 건너가서 춘일시의 장진궁長津宮에 행궁을 마련하여 군대를 통솔하였다.

이때 황극천황은 축자에서 쫓겨나 남쪽으로 산을 넘어서 조창군朝倉郡의 귤광정궁橘廣庭宮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천지천황은 끝까지 추격하여서 궁에 불을 지르니, 황극천황이 서거한다. 조창궁에서 관을 만들어서 장례를 시작할 때에 귀신이 큰 갓을 쓰고 장례 행사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민심이 무도한 천지천황을 겁주는 것이었다.

천지천황은 황극천황의 관을 배에 실어서 대화로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여풍장은 백제의 항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조시弔詩를 지었다. 친어미인 제명천황보다도 길러주고 목숨을 살려준 은혜가 황극천황에게 있었다.

“지뫼(구주)의 하늘인 모후가 쇠하여, 지(구주)의 강물로 돌아가니, 파도도 엎드리고 물결도 고요하다. 곽속의 모후가 무모(武謀=천무천황)를 슬프게 하는구나. (그래도) 지뫼의 하늘은 넓으리라. 枳瀰我梅能 姑衰之枳舸羅儞 婆底底威底 舸矩野 姑悲武謀 枳瀰我梅弘報梨” 


천지천황은 스스로 구주백제왕을 칭하고서, 백제왕 풍장에게 물품과 군사들을 보내었다. 그래서 쥐가 말꼬리에서 출산을 하게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제본토로 건너온 부여풍장이 백제를 부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복신이 장수인 도침을 죽이고 그 병사들을 뺏어서 전권을 휘두르고 부여풍장에게는 제사만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복신이 부여풍장의 암살 계획을 세우니 부여풍장이 먼저 복신을 잡아 죽였다. 이때 복신은 천지천황의 밀지를 받았었는지 복신의 후예에게 천지천황이 후대하였다.

한편 의자대왕의 태자였던 융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살아돌아와서 당나라 병참을 책임지는 당나라 장수가 되었는데, 부여풍장이 장수를 죽인 일을 악용하여 백제 각 곳의 다른 의병들에게 복신처럼 죽지말고 부여풍장을 배반하여서 자기처럼 잘 살라고 선무하였다.

662년 가을에 부여풍장은 군산 앞바다에서 당나라와 일전을 겨루기로 하였다. 왜국에서 일만의 병사가 오기로 하였는데, 배로 400척이었다.

그런데 왜군은 전투를 급하게 서두르다가, 170척의 당나라 수군에게 백촌강의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왜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왜군은 보급품이 너무 적어서 전투를 서둘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부여풍장의 백제 부흥은 실패하였다. 부여풍장은 조용히 배를 타고 전장을 떠났고 뒤에 남아있던 주류성은 항복을 하게 되었다.

부여풍장이 패전후에 고구려로 갔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한줄 첨가되어 기록되었고, 이를 [삼국사기]가 받아적었다. 그러나 부여풍장의 패배가 훨씬 더 자세하게 기록된 [중국기록]에는 원래 이런 대목이 없다. 그가 일본에 돌아가 다시 천황이 되었다는 사실과 기록을 일본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수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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