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형황자는 황태자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황극천황과 부여풍장을 사국도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구주로 탈출하여서 다시 구주백제를 세우고 왕이 된다.
이에 구주를 빼앗긴 효덕천황이 간인황후와 중대형황자로부터 버림받아 죽고,
중대형황자는 모후인 제명천황을 다시 천황으로 세우고 계속 황태자로 남는다.
중대형황자는 간인황후와 밀통하다가 그녀의 아들마저 모반죄로 죽여버린다.
부여풍장이었던 천무천황의 능비에는 대해인황자大海人天皇라 하였고 [일본서기]에서는 아메노누나카하라오키노마히도天渟中原瀛真人天皇라고 하였다.
아메天는 성이고 이름은 무武다. 대해인大海人은 존경해서 높인 말이다.
누나카하라渟中原는 모정왕茅渟王이라고 했던 무대왕이 도성으로 삼으려던 익산益山 지방의 옛이름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와 관련되는데, 백제가 망한 뒤에 그는 백제 부흥을 위하여 김제金提의 벽성避城(=碧城)에 도읍했다가 주류성으로 옮겼던 적이 있다.
오키노마히도瀛真人는 영瀛이 대해를 의미하고 특히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동영東瀛을 의미한다. 마히도真人는 마히도間人황녀처럼 어릴 때 왕자로서 붙인 이름이 된다.
소아대신을 죽이고 황극천황을 폐위시키며 효덕천황을 세우고 스스로 황태자가 된 중대형황자는 자신의 모후였던 제명천황을 받들어 일본천황으로 모시고, 이전의 황극천황은 사국도四國島 고지시高知市로 유배하였다.
사국도 고지시高知市의 조창신사朝倉神社에 황극천황이 지금도 모셔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론 의자대왕의 적자인 부여풍장도 함께 보내버렸다. 황극천황이 중대형황자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부여풍장을 살리기 위해서 데려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황극천황과 부여풍장, 그의 부인 액전희額田姬가 어느새 사국도에서 구주九州로 탈출하였다. 이때 액전희額田姬는 흥겨워서 노래하였으니 [만엽집萬葉集]에 사국도의 북쪽 항구 숙전포熟田浦에서 떠나는 노래가 남아있다.
황극천황은 구주의 축자筑紫에 가서 의자대왕의 적자이며 그녀가 어려서부터 키워온 부여풍장을 구주백제왕으로 세웠다. 그녀는 스스로 동조東朝라 하였는데 태후궁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태후로서 수렴청정이 있었던 것이다.
황극천황은 활발하게 외교를 하였고 의자대왕의 백제는 반란했던 구주를 다시 얻으니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날 구마모도熊本市의 아나국사血戶國司가 하얀 꿩白雉을 잡아 받치니, 황극천황은 상서로운 조짐이라 하여서 650년에 연호를 세워서 백치白雉로 개원하였다.
즉 구주백제를 일본과 백제로부터 독립국으로 선언한 것이다.
650년, 신년하례를 미경궁味經宮에서 하였는데, 황극천황의 도읍인 후쿠오카福岡縣의 축자태재부筑慈太宰府의 궁이었다. 2100명의 승려를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2700개의 등을 밝혔다. 당시 고승인 민법사旻法師는 후쿠오카의 아담향阿曇鄕 아담사阿曇寺에서 설법하였다.
후쿠오카 축자태재부筑紫太宰府 위치에 관세음사觀世音寺를 지었고, 백제는 금동불상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구주백제왕 부여풍장에게 아우인 새성塞城, 충승忠勝 등이 오사카로부터 따라왔었고 구주는 그들을 환영했다.
이때에 오사카 대화조정에서는 지금 신라를 치자고 의논하였으니, 사실은 구주백제를 치자는 논의였다.
[일본서기]에서 효덕천황의 백치白雉 원년은 황극천황이 구주에서 다시 등극한 백치 원년을 왜곡해서 기록한 것이다. 효덕천황이 두 번 개원한 것이 아니라 구주의 부여풍장이 새로 개원한 것이다.
중대형황자는 구주라는 큰 배경을 잃어버린 효덕천황에게 구주의 왜경倭京에나 가보라고 구박하고서, 효덕천황의 황후이자 자신의 정부인 여동생 간인황녀와 제명천황, 그리고 모든 신료들을 데리고 나라현으로 옮겨갔다. 끈 떨어진 효덕천황은 쓸쓸히 죽었다.
효덕천황 고분은 왕능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능이다.
중대형황자는 아직도 천황이 되기에는 출신이 미약했으므로, 모후인 제명천황을 천황으로 새로 세우고 계속 황태자를 하였다.
백치 5년인 654년에 태국인(승려?)들이 구주에 왔는데, [제명천황기]에는 3년에 온다. 또 [제명천황기] 7년에 이세왕伊勢王이 죽는데 천지천황기 7년에 똑같은 기사가 있다. 즉 [제명천황기]와 [천지천황기]의 중복을 의미한다.
구주왕조의 기록을 없애기 위해서 [일본서기]가 뒤죽박죽 기록된 것이다.
제명천황 원년 655년에 공중空中에 용龍을 탄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공중은 본래 가라伽羅를 말하고, 이는 당시 구주九州를 의미하는 것이니, 부여풍장이 구주에서 등극하여 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명천황은 대화에서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 다무봉多武峰 위에 관궁觀宮, 혹은 천궁天宮을 세웠는데 부왕인 백제 무대왕武大王을 기린 것으로 고려된다.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나라현 수마사須磨寺의 오륜탑五輪塔도 무대왕을 축원하는 것이었다.
제명천황 4년에 중대형황자는 애인이자 여동생인 간인황녀의 아들을 모반죄로 죽여버린다.
간인황녀의 애통함이 시가로 [만엽집]에 남아있다. 중대형황자는 간인황녀가 죽었을 때는 승려를 330명이나 만들어 출가시켰을 정도로 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잠재적 위협은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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