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의자대왕 부부의 백제대왕, 일본천황

monocrop 2007. 10. 2. 02:20
 

641년 의자대왕이 백제 대왕으로 옮겨가니

의자대왕 첫째부인인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구주백제왕은 의자대왕 둘째부인인 제명천황이 데려온 아들인 중대형황자가 즉위하였다.

그런데 641년에 구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백제 무대왕의 아들인 효덕천황이 구주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구주백제왕에서 쫓겨난 중대형황자는 645년에 대화에서 변란을 일으켜 황극천황을 퇴위시키고, 효덕천황을 천황으로 세웠다.

1. 의자대왕비 황극천황

        義慈大王妃 皇極天皇

                [陵碑] 寶王天皇 [紀] 天豊財重日足姬天皇


황극천황皇極天皇(594~661, 68세)과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1, 61세)은 [일본서기]에서 동일인으로 조작되었지만, 죽은 날이 틀리고 동일인이 아니다.

황극천황은 641년에 천황이 되었으나 친자식이 없었고, 구주의 제명천황에게서 데려온 부여풍장(622~686)을 어려서부터 길러서 친해졌다.


그런데 641년 구주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백제 무대왕의 아들인 경황자輕皇子가 변란을 일으켜서 구주백제왕이 되고 중대형황자가 제명천황과 함께 대화로 쫓겨났다.

이때 백제의 대좌평 지적智積과 제왕자弟王子(=의자대왕)의 아들 교기翹岐 왕자 등 40인이 구주에서 쫓겨났다고 하였는데, 교기翹岐가 천지천황의 이름이고 그의 모인 제명천황과 여동생 간인황녀가 다 쫓겨났던 것이다.

이때 또 백제국주百濟國主(=구주백제왕九州百濟王)의 모후가 서거했다고 하는데, 이는 경황자와 제명천황의 모후로서 길비희吉備姬였다. 국주國主는 일본에서 군 단위의 지방왕을 의미한다.

의자대왕의 모후인 누대공주糠代姬는 618년에 서거했고, 본래 백제국주 중대형황자의 모후인 제명천황은 663년에 서거했으므로, 641에 서거한 백제국주의 모후는 오로지 백제 무대왕의 부인이며, 그래서 그 아들인 경황자가 변란을 일으켜 구주백제왕, 백제국주가 된 것이 확인된다.

경황자(596~654)는 제명천황(601~661)의 오빠로서 무대왕의 아들이었다.


643년 9월에 무대왕의 모후인 길비희吉備姬 오오타마왕大俣王(562~643)이 죽었는데, 당시 천황이 극진히 간호했다고 한다. 이는 친딸인 제명천황이 그랬다는 것이며 당시 천황인 황극천황과는 아무 상관없다.


한편 대화조정의 고인대형古人大兄의 외숙부인 소아대신하이蘇我大臣蝦夷는 일본의 최고 권세가였고 백성들이나 왕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의 아들 소아신입록蘇我臣入鹿은 자기들 부자의 쌍묘雙墓를 미리 생전에 크게 만들었다. 이때 성덕태자의 묘소지기를 동원하여 성덕태자부인의 원성을 받았다. 그러자 일년후 소아신입록은 성덕태자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 일가를 몰살시킨다.


이때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조용히 삼륜산에서 벌을 키우고 있었다. 부여풍장은 때를 기다리며 조심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기황자翹岐皇子는 칼을 빼어들었다.

교기황자는 그를 구주에서 쫓아낸 구주백제왕과 손을 잡아서 구주의 장수를 빌렸다. 그리고 구주의 사신이 천황에게 표를 올리는 날에 소아신입록을 나오도록 하여서 대전에서 황극천황이 보는 앞에서 소아신입록을 살해하였다. 이때 고인대형황자도 목격하고 나와서 한인韓人들이 소아신입록을 죽였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가라인韓人, 즉 구주인九州人이 살해했다고 발설한 것이다.

소아신입록의 아비인 소아신하이도 운이 다한 것을 알고 집에 불을 질러서 따라죽었다. 이때 일본의 중요한 역사책들이 불타버렸다.



2. 무대왕 왕자 효덕천황 

   武大王 王子 孝德天皇

                [陵碑] 輕王命 [紀] 天萬豊日天皇



645년 6월 교기황자翹岐皇子(=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는 소아씨를 제거한 뒤에 직접 황제 즉위를 하지않고 실권만 잡았다.

외삼촌인 구주백제왕 효덕천황이 구주로부터 들어와서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효덕천황은 구주백제를 백제에서 떼어내어 일본에 붙이고 천황이 된 것이다.

그것이 교기황자의 제안이었으니, 효덕천황은 통일 일본의 천황이 되는 것을 꿈꾸고 대화로 온 것이다.

대신에, 효덕천황은 다음 천황이 되는 황태자에 중대형황자를 세워주는 것까지 서로 결맹한 조건이었다.

중대형황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그 자신이 의자대왕의 적자가 아니고 제명천황이 백제에서 시집오기 전에 낳아서 데려온 아들이었기에, 본인이 직접 천황으로 즉위하는데 심한 저항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황극천황이 양위해줄 가능성이 무대왕의 아들인 효덕천황에 비해서 훨씬 적었던 것이다. 교기翹岐라는 그의 이름에서 제명천황의 꼬리에 묻어온 아들이라는 뜻이 숨어있는 것이다.

또, 혹시 백제에서 군대를 파병하여 구주백제를 수복하기 위해 대화 조정을 치고 들어오면, 그 책임을 효덕천황에게 씌우고 살아남으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효덕천황이 645년에 즉위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통해서 구주백제를 일본 조정에서 관할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본이 큐슈를 포함하여 만국萬國을 다스린다고 선포하였고, 처음으로 연호를 세워 대화大化라고 하였다. 일본이 대국화大國化가 되었다고 연호를 대화大化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 대화개신의 개혁정치는 중대형황자가 이루어나갔다.

중대형황자는 천황에게 할 말이 있으면, 꼭 사람을 보내서 효덕천황에게 말했으니 혹시라도 마음 변한 효덕천황에게 암살당할 우려를 없앴다.

중대형황자는 효덕천황에게 여동생인 간인황녀間人皇女를 시집보냈는데, 그녀는 오래도록 중대형황자와 밀통하였다. 이는 효덕천황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공작이었다.

이때 의자대왕의 서장자인 고인태자는 머리를 깍고 중이 되기로 약속하여서 살해 위기를 잠시 모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석달 후에 살해되었다.


효덕천황이 말하기를 백제, 임나, 일본은 세가닥의 동아줄과 같다고 하였다.

백제는 본토백제, 임나는 구주백제를 의미하는데 구주백제가 사라지고 일본의 임나로 환원된 것이다.

이후로 구주백제에는 구주백제왕이 없어지고 대신에 축자대재수筑紫大宰帥와 여러 국사國司를 두어서 다스렸다.

효덕천황은 오사카 해안인 난파難波로 도읍을 옮겼다. 궁성 이름은 나니와나가지노도요사키궁難波長柄豊碕宮이라고 한다.

이때, 의자대왕은 백제본토에서 왕자 융을 태자로 세우고, 신라 김유신의 침략으로 7성을 빼앗겼다. 645년 다시 백제가 신라 성 7개를 빼앗았다. 그러면서 구주백제를 되찾을 군대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다.

효덕천황은 계속해서 개혁정치와 공포정치를 하였다. 또한 사치와 낭비를 줄여서 장묘제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였다.

관위제도도 개정하여 19계의 관위를 만들었다.

중대형황자는 자신에게 위험이 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장인까지 희생하는 피바람을 또 일으켰으니 그 딸이 스스로 굶어죽었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수심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