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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성왕비문과 수성왕성및 서부전선

monocrop 2007. 3. 6. 03:25
수년전에 수성왕비문이 소개되었다.
▲ 수성왕비문
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시조지손 일월지자 부여고읍의 계승자 수성왕 10년, 동서남북수는,
현도를 다스리는 □영동백수사리현도로서 비류에 도읍했던
유리명제 축다(수성왕의 조부)를 계승하여,
안구태장세예악하고 백제, 고구려왕은 졸본부시조 추모왕의 뜻을 대신하여 민태국안한다.
백수(수성왕)의 뜻을 받들어 3년만에 현도군에 국도를 세워 계승한다.
始祖之孫日月之子 承故夫余故邑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 □寧東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
以百濟高句麗殊 代天府 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공始三年功建國都 玄菟郡 계繼...

비문과 같이 유리왕은 33년(서기 14년)에 양맥(梁貊)을 차지하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이때 영동백수사리현도(寧東百殊司吏玄菟)라고 칭한 것이니, 현도군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주요한 사실은 수성왕 10년(서기 155년)에 수성왕이 동서남북지방왕을 모두 동원하여서 현도에 고구려 도성을 세웠다는 것이다. (功建國都 玄菟郡)
현도에 있던 수성왕의 고구려 국도는 지난 기사에서 찾은 현도군성의 동남쪽 있다.
▲ 부신시 수성왕성 주변지도
▲ 현도성과 수성왕성
▲ 수성왕과 백왕성
수성왕성의 규모는 한변이 대략 4km정도다. 중심축의 도로는 7km에 가깝다.
성 서남쪽의 지명이 백왕도(白王都)인데 수성왕의 동생 백고왕이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동남쪽 차하얼산은 차대왕(수성왕)과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수성왕과 백고왕은 한나라의 요동과 현도를 공략하는데 이는 청하문시와 그 동쪽이다.
산상왕 때에 요동국 공손강에게 투항한 발기의 난과 중국유민들의 반란으로 도성이 불타는데 이곳으로 보인다. 이후 산상왕은 환도성(법고시 한대산)을 지어 옮겨갔다.

훗날 조국을 팔았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과 그 아들 천헌성이 쫓겨들어간 국내고도성(천헌성비문에 따름)도 이 성으로 고려되는데, 천헌성이 본래 소맥(소수맥)에서 태어났고, 당시 당나라가 연남생에게 현도군개국공이라고 책봉했기 때문이다. 즉 소수맥구려는 이 국내고도성이었던 수성왕국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발해 때에는 현도주를 두었는데 일본사신이 발해의 안내로 당나라에 들어갈 때에 거쳤던 곳이다.

한편 당나라가 발해로 갈 때에 요동성에서 동북으로 고개모신성을 지났다. 서개마의 동쪽에 고개모가 있어야 할 것이며 요동성이었던 청하문에서 동북으로 방향을 잡으면 부신시 동북 교외에 있는 해주영과 사해를 만난다. 해주영이 고개모성, 사해향이 고개모신성으로 고려된다. 개와 해는 칸과 한처럼 혼용되거나 바뀔 수 있다.
고개모성과 신성은 장축이 2km 정도의 성이다.
▲ 고개모성과 고개모신성
다음으로 고구려 서북부전선의 핵은 신성이었다.
[한원]에서 신성은 남소의 70리 남쪽이라 하였는데 남소수는 교래하(敎來河)였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서 1118년 1월, 금나라 아골타가 칭제한 그 해에, 요국장수 연왕 순이 요나라토벌군을 이끌고 휘주徽州(=부신시阜新市 구묘향舊廟鄕) 동쪽에서 금나라 군대를 만났는데,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궤멸되었다. 연왕은 휘하 오백기로 장백, 어무로 물러났고 이는 의무려산 아래다.
이때 금나라군대는 신주(新州)로 쳐들어갔는데 절도사 왕종보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금나라 여진족은 신주를 약탈하고 돌아서서 성주成州(=부신시 홍모자향紅帽子鄕), 의주懿州(=탑영자고성塔影子古城), 호주豪州(=서남와고성西南窪古城), 위주衛州 등 항복한 4주를 약탈했다.
따라서 신주는 구묘향 서쪽이 되는데 고구려 신성과 같은 위치이다.
이는 지금 내몽고의 나만기(奈漫旗)에 있는 신진(新鎭)이 된다.
신진에 있는 신성 역시 험준한 성이다. 성의 남북 길이가 6km다.
▲ 고구려 신성
현재 구하(구河)가 흐르는데 신성은 본래 고구려 구차홀(仇次忽)이었다고 했고, 개모성의 개물은 한자어로 구하(狗河)로 바뀔 수 있다.
신성의 전투 소리가 항복한 개모성에서 들을 수 있었으므로 매우 가깝다.
▲ 개모성과 신성
신성 남쪽에 훌륭한 고성이 있다. 개모성은 본래 정읍병열(井邑倂列)이라하였으니 쌍읍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지명은 서애(西涯), 동애(東涯)이다. 두 성의 동서 길이를 합치면 5km를 넘는다.
개모성 사람들은 당나라에 끌려가서 요녕성 금서시 동북에 개주를 만들기도 했다.
▲ 진주개모성
발해는 본래 개모성을 진주(辰州)라고 고쳤는데 요나라가 이를 요동반도로 옮겼다.

만리장성도 몽고족 원나라의 지배나 여진족 청나라를 막지 못했다.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 단결하는 마음없이 이민족의 침략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인은 일치단결하여 유비무환의 성을 쌓고 수나라나 당나라의 수십회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연개소문 이후에 독재의 후유증으로 동족이 적군의 향도가 되고, 우방이던 말갈, 거란의 연합을 잃으니 고구려는 더 버티지 못햇다.
고구려 수도에 다시 고구려인의 깃발을 보란듯이 세울 때는 언제나 다시 올 것인가?
고구려의 머리가 어디 있는지 도통 모르고, 고구려의 꼬리만 잡고서 꼬리가 고구려의 전부인 양 바라보는 작금의 현실이 먼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천사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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