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민족과 우리나라
杜佑의 通典에 보면 다음과 같이 민족의 계보를 분류한다.
고대에 북쪽의 민족으로는 흉노와 동호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宕昌 黨項은 곧 三苗의 후예라고 말한다.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 실위 등 여러 나라였다. 흉노의 후예가 回紇 赫連이 되고 다른 일파는 突厥과 鐵勒이다. 돌궐에서 다시 사타가 갈라져 나오고 철륵의 일부는 설연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는 烏桓과 거란이 되고, 거기서 갈라진 분파가 선비다. 선비족은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의 무리를 요동선비 우문의 무리를 요동새외선비 독발에 적을 둔 이들은 서선비, 걸복은 농서선비, 탁발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이는 흉노에서 갈라진 민족이라고 판단한다.
이들 민족에 대한 삼재도회의 개략적인 언급은 이와 다르다.
“북방 민족의 종락은 매우 번잡하다. 하나라 때에는 훈육, 주나라 때에는 험윤, 진나라 때에는 흉노, 당나라 때에는 돌궐, 송나라 때에는 거란이라 하였다. 한나라 때부터 흉노가 강성하였고, 흉노가 약해지자 오환이 일어났다. 한말에는 선비가 오환을 멸하였다. 후위때에는 유유가 강성하였고, 유유가 멸망하자 돌궐이 일어났는데, 이정이 돌궐을 멸하였다. 오대와 송나라 때에는 거란이 다시 강성해졌고 몽고는 그 중의 일부다. 몽고는 뒷날 세력이 매우 강성해져 중국을 합병하기도 했다.”
중국의 통치 영역은 우임금이 천하를 구주로 나누어 三代시대에 그대로 따랐고 秦이 3개의 군으로 나누었으며 漢나라가 13개의 부로 나누었다는 게 조사제의 지론이다.
하나의 部를 6개의 군으로 하였으며 晋은 15개의 道로 당나라는 10개의 道로 송나라는 4개의 서울과 23개의 路로 원은 11개의 省과 23개의 도로 명나라는 2개의 서울과 14개의 성으로 경계를 나누어 통치하다가 뒤에 안남성을 폐지하여 13개의 성이었다.
순임금은 그 전에 이미 12개의 州를 창설하되 병주와 영주 등은 遼와 瀋 지역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원나라와 명나라 이후에는 수도를 북방민족에 가까운 연에 두어 나라를 다스렸다. 그 까닭은 원은 본래 북방계 민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방 민족의 입장에서도 그들 북방민족의 국력이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로 보여 진다. 특히 청나라 강희 말기에는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경계하여 다시 조정의 신임하는 장군 한 사람을 더 배치하였다. 몽고는 부족이 모두 48개였는데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대비달자가 가장 강성하였다. 위치는 흑룡강 북쪽이다. 그들 영토는 흑룡강에서부터 장성 밖은 물론 북쪽이나 서쪽까지 모두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서로 부족별로 영역이 나누어져 있어서 동 서 남 북의 영역에서 한결같이 황제를 자칭했다. 서남쪽은 황태극과 청태극, 동북쪽은 大鼻라는 厄羅斯, 喀爾喀이다.
한편 중국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의주에서 산해관까지는 1300여리다. 광녕에서부터 서쪽은 호로항구처럼 생겨 중국의 침략이 쉽지 않았다. 또 북방의 강성한 이민족을 염두에 두어야 하므로 한반도를 그들이 병합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지리적인 특수성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이밀에 의해 이미 제기된 문제였다.
“천자가 멀리 요동밖에 출정하는데 이곳은 유주에서도 천리나 되며 남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북쪽에는 강한 오랑캐가 있으며, 중간에 소통되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공이 휘몰아 薊로 들어가서 긴요한 목을 지키면, 고려가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그 뒤를 밟을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자세하게 음미하면 고려사에서 말하는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특수성을 중국과 결부시켜 한번쯤 생각해보는 구체적인 의미가 다시 짚어진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영고탑 동쪽에서 일어난 금나라도 사실은 이와 같은 대륙의 지리적인 특성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금나라는 고려사에서 말하는 동여진이다. 영고탑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2천여 리를 달려 호로항구를 거쳐 관문을 들어갔고 또 남쪽으로 가서 변경에 수로를 정했지만 망하게 되면서 호로항구가 지닌 지리적인 이점이 오히려 불리함으로 작용했다. 곧 남쪽의 송나라와 북쪽의 원나라가 양쪽에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이 호로항구를 빠져 나가지 못해 금나라의 왕족이 모두 멸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뒷날 동진이 이곳에서 다시 일어나 우리 국경을 침범하고 공갈과 위협을 일삼았지만 뒤쪽의 원나라를 의식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나라로서도 그곳 지형의 험준함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어서 대체로 그 명맥이 지속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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