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etc; ... 미분류

[스크랩]외꾸눈 당태종의 고구려콤플렉스와 지나인의 21세기판 신라찾기

monocrop 2007. 3. 2. 02:27

외꾸눈 당태종의 고구려콤플렉스와 지나인의 21세기판 신라찾기

글쓴이 : 노만수 (eunoe) 글 올린 시간 : 2004-08-13 오전 10:4

조 회 : 3280 추천 : 13

정관음(貞觀吟) ' 까오리빵즈(高麗棒子gaolibangzi,고려좆) 들쯤이야 한낱 주머니에 든 소지품일 뿐(自謂囊中一物耳)이라고 큰소리 치더니, '검은 꽃(玄花, 눈알)'이 '흰 깃 (白羽, 화살)'에 박혀 외눈박이 될 줄이야(那知玄花落白羽)' 고려시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당나라 2대 왕, 태종(太宗, 598-649) 이세민(李世民)이 외꾸눈 된 곡절을 읊은 시다.

정관은 바로 태종 이세민의 연호인데, 수나라를 멸하고 돌궐, 토번을 혼내준 그는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최대라이벌 고구려를 친히 정벌차 출정한다(고구려 보장왕 3년, 644년). 그러나 안시성(安市城)에서 양만춘 장군의 백우장전(白羽長箭, 흰 새의 깃털을 단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고 철군, ' 고려좆들의 땅을 절대 넘보지 말라던 위징만 살아있었더라도'라고 후회했다.

이후 '외꾸눈 당태종 임종기'는 까오리빵즈땅에서는 사실이었으나 지나(支那)의 한족(漢族) 땅에서는, 남사스럽고 남보기 챙피해서 입에 꺼내기도 싫은 야사가 되어버렸다. 공자는 일찍이 노나라 역사 <춘추>를 지으며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고 하며, 춘추필법을 역설했는데 이는 어찌된 일인가. 물론 신라 위주로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 또한 <삼국사기>에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고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도 보이지 않는다.

신구당서 <태종본기本紀>는 백전백승의 이세민이 정관 19년 9월 안시성에서 고려미물들에게 패해 철수하였다고 하였다. 정관 20년에는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 23년 5월에 52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사인을 강목(綱目)에서는 이질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까오리빵즈에게 얻어맏은 화살로 생긴 병일진대, 그 진의는 기록돼 있지 않다. 이를 두고 단채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지나땅에는 위서가 많으니 그것을 경계하라고 하며, 공자도 周나라 왕이 정후(鄭候)에게 화를 당하고 노나라의 은공( 隱公) 소공( 紹公) 등이 살해되어 쫓겨남을 기록하지 않는 편견이 있었고 그것이 지나인의 춘추필법의 논리, 자기 입맛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지나인의 못된 버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 원래는 선비족 혈통이었으나 지금은 '위대한 夏華族황제'가 된 당 태종의 죽음은 하나의 미(迷, 수수께끼)라서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당나라 시기 임상병록은 화살로 인해 곪은 상처을 내종(內種)으로 기록하고 눈병은 항문병으로 둔갑시켜, 고구려놈들과 싸워 얻은 병으로 죽은 영웅의 치욕을 당시의 이질과 싸우다 죽은 전설로 위증, 위안삼아왔다. 올해 5월 중국에서 출판된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주족)의 <황조비사(黃朝秘史)>(해남출판사)는 '李世民暴死之迷'에서 사정이 이렇다고 전한다.

당태종이 정관21년 중풍이 들어, 진시황처럼 사방천지에서 불로장생약을 구했는데 다음해 그런 약을 제조할 줄 안다는 200백살 먹은 인도승녀에게, 장생약을 구해 먹었다. 그런데 과다복용을 해, 다음해 '장로불사약 독'으로 죽었단다. 이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장생약(長生葯)에 의해 죽은 첫번째 황제라는데, '믿거나 말거나'인 것같다. 지금 서해를 끼고 한창 터지고 있는 역사전쟁(중국공산당이 '고구려사=지나사'라며 까오리빵즈들의 영혼을 강간, 선전포고해 개전된)을 보자면 지나인들은 아직도 당태종이 걸린 '고구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 같다.

당태종에게 유일하게 패배를 안겨준 이민족 고구려족과의 싸움을 지금도 있는그대로 중국신문들은 전하지 않고 '중앙왕조(당나라)대 지방정권(고구려)의 전쟁'에서 당나라가 고구려를 '못된 애 얼르듯 싸대기 한대 갈겨주고 혼내주었다'는 식이다. 지나역사상 유일하게 패배를 몰랐다고 기록한 '정벌전쟁의 황비홍(당태종)'이 한낱 '수박(까오리방즈들의 태권도)이나 연마하던 변방의 활꾼'들에게 삼전삼패했다니, 지나족으로서는 도대체 시나리오도 써볼 수 없는 기괴한 무협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총알도 피하던 황비홍이 화살도 못 피해 외꾸눈이 되어 고려좆들의 땅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지금도 올림픽 메달을 휩쓰는 까오리빵즈들의 궁술을 그 당시 너무 얕본 탓일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맞고 만것을. ** 지나역사에서 한족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넷을 꼽으라면 제갈공명, 당태종, 강희제, 모택동이다.

물론 강희제(1645-1722)는 한족이 아니라 청나라 만주족 황제이다. 하지만 그는 90년대 들어와 그전의 '한족만의 중화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성격의 '중화민족(한족, 만주족, 회족, 티벳족, 몽고족 등 56여 민족은 같은 민족이다는 허구적, 상상의 공동체민족론) 중화주의'의 이념적 대리욕망이 된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후 사회주의이념이 연기처럼 사라진 '이념의 블랙홀' 지나대륙을 새로운 애국주의(중화민족제일주의)와 대국주의로 대동단결시킨 것이 바로 강희제다.

현재 중국 최고의 역사소설가로 꼽히는 이월하의 <강희제>가 기존의 베스트셀러 기록을 갈아치우고 그것을 원작으로 한 역사드라마 <강희왕조>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는 90년대에 80년대 한족의 영웅 당태종을 제치고 중화민족 최고의 황제영웅으로 등극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주족 강희제와 건륭제가 한족의 명나라 판도를 넘어 처음으로 지금의 중국영토와 비슷한 만주(동북3성), 내외몽고, 신장, 티벳 등을 팔기군으로 평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강희제는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민족개념 바로 '중화민족(한족과 다른 소수민족은 원래 하나의 중화민족) 이데올로기'에 가장 어울리는 상징영웅이 될 수 있었다. 신해혁명부터 문화대혁명까지 핍박하던 만주족을 제일의 영웅으로 만든 저간에는 한족이 아닌 다른 이민족이 중국의 영웅이 되어야 '중화민족 대가족주의(통일적 다민족국가론)'라는 민족담론의 아구가 맞아 떨어져 제대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 90년대 이후 중국의 공산당은 56여 민족이 피도 말도 땅도 풍습도 다르건만 중화민족이라는 전무후무한 민족개념을 공산당의 국가통치담론으로 요기나게 써먹고 있다. 심지어 한족에겐 있지도 않은 몽고반점이 중화민족 모두에게 있다고 만주족, 조선족들에게 가르친다.

영어의 네이션(nation)을 일본인들이 민족이라는 한자로 번역한 이후 이를 중국에서도 받아들어 19세기말 장병린(章柄麟, 1868-1936, 손문, 황흥과 함께 신해혁명의 삼대이론가, 한족민족혁명주의자)이 처음 '중화(中華)민족'이라는 말을 만들 때만 해도, 그것의 의미는 중국의 '中'자와 하화족(夏華族, 고대의 한족명칭)의 '華'를 결합한 '중국의 한족'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양계초의 중화민족론이 나오는데 그것 또한 '만주족 청나라를 뒤업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멸만흥한'에 다름아니었다. 지금은 '중화세계 통일논리'에 일차적으로 복무하는, '태초에 56개민족은 하나의 중화민족'이라는 의미로까지 변질되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중화세계란 지금도 중국인들이 곧잘 술김 반 진담 반으로 내뱉는,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한 현재영토 플러스 전통적 고유영토(조선, 오키나와, 대만, 외몽고, 북인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본, 버어마, 태국, 월남)까지를 포함한 지나식 지리적 공간개념이다.




** 사실 '지나인의 영토욕심(대국주의 욕망)'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현재의 중국인의 4대영웅들은 모두 영토따먹기에 능한 이들이다. 제갈공명은 오랑캐 남만(南蠻)의 운남성과 귀주성을 차지했고, 이세민은 돌궐족을 중앙아시아로 몰아내며 청해성과 감숙성을, 그리고 모택동은 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사회주의라는 허울아래 중세의 청나라시대로 돌아가, 강희제가 '옥신각신 반 굳히기' 했던 땅 '티벳, 신장, 내몽고'등 이민족의 터전들을 인민해방군의 총칼로 완전히 굳히기, 꿀컥 삼켜버렸다.

다만 강희제가 취했던 대만만 어쩌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國父) 모택동에게도 수난의 시대가 있었다. 등소평이 정권을 굳히기 한 70년대말부터 때략 80년대 말까지다. 자기 입에 숟가락은 달고 나온다는 모택동의 인구정책 탓에 대륙이 폭삭 주저앉겠다는 둥, 애비와 자식, 선생과 제자가 서로 '사상맞고소'를 하던 4인방의 문화대혁명 탓에 애비 에미도 서로 못믿게 되었다는 둥, 그래서 80년대 중국에서는 당태종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수많은 드라마, 문학작품, 연극, 논문들이 쏟아져나왔다.

모택동이 대약진운동 실패, 측근기용, 문화대혁명이라는 오점을 남긴 반면에 당태종은 황제 등극이후 특히 말년에도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등용, 한족역사(한나라, 수당, 송, 명)상 가장 명예로운 정치 치세인 '정관성세'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상처난 중국인의 자존심을 당태종이 달래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에게도 일찍이 일본의 중국역사가 진순신이 지적한바, '고구려컴플렉스'라는 치명타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족들 끼리끼리 부르던 '동쪽의 오랑캐나라(東夷族)' 고구려족과 싸우다 병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고려조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도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 후조선(後朝鮮) 성종 때 김종직은 목은의 '정관음'을 <청구풍아>라는 책 속에 넣어 주를 이렇게 달았다.

'당 태종이 눈 다쳤다는 사실이 중국역사책에는 적혀 있지 않으나, 목은이 이렇게 시를 지어 기록한 것은 목은이 중국유학할 때 그곳에서 견문(見聞)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 물론 한족의 자존심, 당태종이 까오리빵즈의 화살을 맞고 한쪽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죽었든, 불로장생약 과다복용으로 죽었듯, 양귀비와 놀아나던 그의 후손 당고종에 의해 고구려가 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하다.

지나인들에게 '챙피한 정사'(외꾸눈 당태종 임종기)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풍문의 야사로 재창조하게 할 정도로 콤플렉스를 안겨준, 동국(東國)의 용맹한 한 고대국가가 왜 망했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아주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도 항상 그랬던, 지나족의 이이제이 전술!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끼리 왕권을 다투다 맏아들 남생이 당나라편이 되어버리고, 신라는 그전에 이미 '땅욕심만 채울 수 있다면' 이웃이고 종족이고를 다 내팽개 친 채 '딴나라 당나라'인 상태였다. 지나땅이든 까오리빵즈땅이든 옛날이든 지금이든, 전설이나 야사가 아닌 이 너무나도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서 오늘날 우리는 역사전쟁의 전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지나족의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그들에게 늘 유효했던 '삐엔지앙꿍청(邊疆工程-변강공정-변방다스리기프로젝트)의 핵, 이이즐이(以夷制夷yiyizhiyi-오랑캐 지들끼리 싸우게 해 오랑캐를 다스린다)! 지나족은 지금도 고려땅에서 남생이를 찾고 21세기 판 신라를 찾고 있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남까오리(고려)와 북까오리. 여당까오리빵즈와 야당까오리빵즈들. 서로가 서로를 상종못 할 오랑캐로 바라볼 때 '지나족 변강공정'의 깃발은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고려좆들의 21세기 하늘위에서도 펄럭, 펄럭인다는 것.

우리가 민족의 생존권과 민족의 영혼문제 앞에서조차 갈라질때 수많은 남생이들이, 신라의 성골이라는 신분보다 당나라 군대의 '까오리반도가이드' 직책이 더 소중하다고 말한 어느 신라왕자처럼, 자기안일만을 위해 '이민족패권주의 깃발'을 앞 다투어 흔들 수 있다는 것, 까오리빵즈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http://blog.naver.com/gawuli.do 김산 8. 11 쓰다.

 

 

출처: 젊은둘째 [공개]   카페지기(카페지기) 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