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2 왜곡된 역사·향후전략

[스크랩] 우리역사의 진실(6) : 한사군의 실체

monocrop 2007. 2. 3. 02:43
 

우리역사의 진실(6)


1.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가. 진개(秦開)와 연오군(燕五郡) 설치

연 대

내               용

BC350 

번조선(番朝鮮:단군조선중 하나)이 북막(北漠:東胡)과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

BC343 

연이 번조선에 화친을 청하여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다

BC341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다

BC339 

연이 안촌홀(安寸忽:安市城)을 돌파하고 험독(험독: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箕子의 후손들) 기후(箕詡)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薊城)의 남쪽에 이르니 연이 화친을 청하면서 아들을 인질로 보냈으며 연의 장수 진개가 번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BC323 

번조선의 왕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어 기후(箕詡)가 계승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하였다.

BC305 

번조선이 북호(北胡: 東胡)와 함께 연의 상곡을 공격하자 연이 진개를 보내 대항하였다.

BC300 

연의 진개가 번조선과 동호를 쳐서 조양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등 5군을 설치하였는데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한다.

*번한(番韓)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였던 昌黎(창여)를 말함

나.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조

연 대

내               용

BC226 

진시황이 연을 치자 연과 희(喜)가 요동으로 달아나다.

BC222 

연이 멸망하다.

BC215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을 방문하다.

BC214

진시황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지난날 중국 북부에 위치했던 진(秦), 조(趙), 연(燕)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다.

BC209 

진의 2대 황제 호해가 요동에 와서 그 아비(진시황)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요동의 갈석산이다.(주)

     * 갈석산: 진서 당빈전에 '진장성(秦長城)의 요새를 다시 쌓았는데 온성으로부갈석(碣石)에 닿았다'고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갈석산은 한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이 산에서부터 장성이 시작된다'했으며, 진서(晉書)에도 '수성현은 진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 위만과 번조선(단군조선 중 하나)의 멸망

연 대

내               용

BC202 

한고조(漢高祖:유방)가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綰)으로 연왕을 봉하다.

BC195

한고조가 죽자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위만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다.

BC194 

위만이 당시 이곳에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하여 수용된 연(燕), 제(齊), 조(趙)의 무리를 이끌고 처 들어와 번조선을 멸망시키다.

BC 

상하운장의 서쪽 중국 국경에는 진나라 당시 초소인 요동외요(遼東外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너무 멀어서 지킬 수가 없어 옛날 연(燕)과 진(秦)의 옛 요새였던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물러났는데 이 곳이 지금의 산해관(産海關)이다.

BC 

위만은 도읍을 새(塞) → 패수(浿水) →상하운장(上下雲障) → 왕검성(王儉城)으로 옮겨갔다.

*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서지망의 광녕(廣寧)이다.

 라. 낙랑군(樂浪郡)의 지리적 위치

    (1)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낙랑군은 동으로는 요하에서 서로는 난하 사이에 발해만 해안에 연하여 있었다. 낙랑군의 북쪽 즉 내륙에는 서쪽은 요동군, 동쪽은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대방현이 분리, 승격한 대방군 위치하였다.

    (2) 한서에 전하는 낙랑군의 속현은 모두 25개였는데 후한서에는 18개로 줄고, 진서에는 6개로 줄고, 6개가 대방군으로 나온다.

    (3) 낙랑군 속현

縣名 

朝鮮 

조선 

屯有 

둔유 

渾彌 혼미

遂城 

수성 

누方 

누방 

駟望 

사망 

帶方 

대방 

列口 

열구 

長岑 

장잠 

提奚 

제해 

含資 

함자 

海冥 

해명 

남邯남감 

浿水 

패수 

粘提 

점제 

增地 

증지 

昭明 

소명 

呑列 

탄열 

東施 

동시 

不而 

불이 

蠶台잠태 

華麗 

화려 

邪頭昧

사두매 

前莫 

전막 

夫租 

부조 

漢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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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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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晉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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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 

x

x

x

x

x

대방군 

x

x

x

x

x

x

x

            ※ x는 대부분 요하지역에 있는 현으로 고구려에 복속 된 것으로 추정됨


    (4) 한의 낙랑군은 요하서쪽 난하 동쪽의 발해만 해안지방에 있었는데 일제는 그들의 대륙 침략목적을 위하여 평양, 황해도 지역에서 출토된 낙랑국과 대방국의 유물을 조작하여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라고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5) 이러한 일본의 역사 조작 내지 왜곡(歪曲)은 일제시대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던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계속되었고, 오늘날에도 일본의 우익분자들에 의하여 역사교과서 왜곡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2. 한사군(漢四郡)의 허실(虛實)

가. 우리 사학계의 한사군(漢四郡)의 정체

  ※ 이병도(李丙燾)저「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1976. 3. 博英社)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학계의 한사군에 대한 견해는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樂浪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4개 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는 것이다.(한번 따져보자, 맞나 안맞나!!!!!)

 나. 우리 한(漢)과 위만조선(衛滿朝鮮) 간의 전쟁

    (1)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한무제(漢武帝)는 양복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제(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순체(荀彘)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고 하였다.

    (2) 제(齊)는 산동반도에 있던 나라이고 발해(渤海)는 당시나 지금이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므로 해군은 산동반도를 출항하여 발해를 건너 위만조선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3) 또 요동(遼東)은 지금의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한의 육군은 최동단 요동고새(遼東故塞) 즉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을 출발하여 왕검성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4) 위만의 마지막 도읍지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패수는 지금의 대능하(大凌河)이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검성은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사학계는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아 왕검성을 평양이라 주장한다.

    (5) 한(漢)과 위만과의 전쟁 결과에 대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우거(우거: 위만의 손자)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를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涉河)는 공(功)을 도둑질하였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戰死), 누선(樓船: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핑계로) 어려운 일을 당해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公孫遂)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가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6) 한과 위만 간의 전쟁은 위만조선의 왕 우거는 죽고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한(漢)의 장수 섭하는 공에 욕심을 내다전사하고, 공손수와 순체는 역시 전공을 다투다가 사형 하였으며, 양복은 전투에서 꽁무니를 뺏기 때문에 폐서인이 되는 처벌을 받아 전쟁을 치르고도 포상된 사람이 없으니 결국 이 전쟁의 결과는 한(漢)도 위만조선의 우거도 모두 함께 패한 셈이다.

    (7) 북부여기(北夫餘記)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漢)의 유철(劉鐵: 武帝)이 평나(平那)를 쳐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東明)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 고 하였다.

    (8) 이상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한무제가 해로와 육로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공격하여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전의 번조선 유민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니 결국 이 전쟁의 승자는 번조선의 유민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킨 동명 고두막인 것이다.

       ※ 동명성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주몽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7대왕 고두막루 칸을 말함(고두막루가 주몽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음)

  ※ 단군조선은 말(莫)조선, 번(番)조선, 진(辰)조선으로 구분하여 중국대륙을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한 국가임(단군은 1대1NXJ 47대까지 이어진 3천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임)

  ☞ 일설에는 馬(말)쥬신, 辰(진)쥬신, 佛(불)쥬신이라고도 함

 다.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의혹

    (1) 한편 한(漢)의 위만조선 정벌시 한에 투항한 자들이 한의 후(侯)에 봉해졌는데 다음표와 같다.

    (2) 한에 투항한 위만조선인의 후(侯) 책봉

작위 

이름 

위 치

내         용

畫淸侯 

획청후 

參(삼) 

제(齊) 

한한 2년(BC 99년)에 조선의 망노(亡虜: 도망친 포로)를 감춰 주어 옥에 갇혀 병사함

平州侯 

평주후 

夾(협)

양부

(梁父)

원봉 4년(BC 107년)에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어 봉작을 없앰

溫陽侯 

온양후 

最(최) 

남양

(南陽) 

태초 3년(BC 102년)에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어 봉작을 없앰

秋苴侯 

추저후 

陰(음) 

발해

(渤海) 

정화 2년(BC 91년)에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어 봉작을 없앰

幾  侯

기  후

長(장) 

하동

(河東)

원봉 6년(BC 105년) 조선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하여 죽임

    (3) 한에 투항하여 후(侯)에 책봉된 사람은 모두 5명인데 3명은 수명을 다하고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작위가 없어지고 2명은 조선(朝鮮)과 내통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4) 여기서 조선(朝鮮)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漢)을 격파하고 요하 동쪽 지역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5)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韓)조에 '위략에 이르기를 우거멸망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했으우거가 말을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 辰, 番, 莫의 三朝鮮의 통칭)으로 가니 그를 따르는 자가 2천여호나 되었다'하였는데 여기서 진국(辰國)은 위만조선의 동쪽인 요하 동쪽에서 진조선(辰朝鮮)을 이어 받은 북부여(北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그 북부여의 일파인 동명 고두막이 한에 저항하여 한을 격파하고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6) 이상의 요동을 중심으로 한 정세 기록을 본다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4군(四郡)을 설치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 한사군(漢四郡)의 진상

    (1) 한사군은 한이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군현으로 중국측에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중국의 역사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에는 한사군(漢四郡: 樂浪郡, 玄菟郡, 眞番郡, 臨屯郡)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니 실제 한사군이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첫째 이유다.

    (2) 왜냐하면 만일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면 한무제 당시의 인물이었던 사마천이 쓴 그 당시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가장 권위있는 사기(史記)의 기록에 누락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3) 한사군의 이름은 후한서(後漢書)에 그 4개 군의 이름이 나오고, 무능서(茂陵書)에 임둔의 이름이 나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4) 한사군의 이름이 나오는 역사서 기록

역 사 서

연    대

내       용

後漢書

(후한서)

BC108년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3군을 설치했다.

BC107년

현도(玄菟)를 설치하였다.

BC 86년

낙랑을 남부도위(7현)와 동부도위(7현)로 나누었다.

茂陵書(무능서)

BC 81년

진번을 폐하여 현도에 포함시켰다.

    (5) 후한서(後漢書)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친 시기보다 120년 후에 저작된 것으로 사기에 비하여 신빙성이 떨어지며, 무능서(茂陵書)를 쓴 사마여상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치기 10년 전인 원봉 6년(BC 117년)에 죽은 사람이니 1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6) 또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는 진번과 임둔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가연전(賈捐傳)에는 '무제가 갈석(碣石)을 지나 낙랑과 현도로써 군을 삼았다'고 하여 여기에도 진번군과 임둔군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아예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7) 다만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의 요동태수에게서 재물과 병사를 얻어 그 옆에 있던 진번과 임둔 두 고을을 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한무제가 위만을 정벌하기 전의 일이다.

    (8)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치하였으나, 번조선의 후예 동명 고두막이 그를 따르는 번조선의 유민들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하를 건너 졸본지역에 새로운 나라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9) 이 과정에서 한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다시 요하 서쪽까지 팽창하였는데 혹시 이 때 진번군과 임둔군을 일시적으로 설치했으나 사기(史記)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되지 못하여 기록되지 않았거나, 후의 중국 사가들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

 마. 일제는 이러한 애매모호한 기록들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의 대륙침략 목적에 유용하도록 한사군에 대한 역사조작을 강행하였으며 당시 조선인 사학자들이 이의 주구(走狗) 노릇을 한 것이다.

 바. 역사적 사실로서 확실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의 설치이며, 그 위치는 요하 서쪽 번조선-위만조선이 위치했던 왕검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지 결코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중북부가 될 수가 없다.

 사. 이렇게 역사기록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 사학계는 그들이 일조해 온 일제 식민사관하에서의 역사조작을 뒤집지 못하고 연연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으로서는 더 없는 불행이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되찾아야 할 우리역사
글쓴이 : 스마일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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