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2 왜곡된 역사·향후전략

[스크랩] 고려(高麗)의 북방 영토는 만주(滿州) 일대였다.

monocrop 2007. 1. 10. 03:17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高句麗史) 발해사(渤海史)를 자국 역사라고 왜곡하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는데도 한국 외교통상부는 '조용한 외교'를 고집하며 중국의 역사왜곡을 사퓨?묵인하고 있는 입장이고 국내 강단사학계 또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중국 중앙정부의 치밀한 가이드라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중국 지방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중앙정부가 수동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고 국사해체론을 들고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현 시점에서 김기협 계명대학 교수가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을 포함한 여야의원 59명이 간도협약이 법적무효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한 것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김 교수는 프레시안 뉴스의 칼럼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건국 초기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두 나라 국경으로 보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 경계선은 고려시대보다 북쪽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몽고 정복 때까지 고려의 판도는 두만강에 미치지 못했고, 지금의 함경도 지역 대부분은 여진족의 영역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며칠 전 김원웅 의원이 보낸 뉴스레터에는 ‘간도협약의 원천적 무효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자랑스럽게 써 놓았다. 과연 대한민국 국회의 결의안이 1909년의 ‘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되찾아야 할 우리 땅, 간도”라는 말에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신라 통일 이래 한민족의 국가가 두만강 건너 간도지방에 지속적인 행정을 펼친 일이 없다. 두만강까지 국경을 넓힌 것도 조선왕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리고 조선인이 간도지방에 대규모로 이주해 조선문화를 지키는 사회를 이룬 것은 187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 이후 청나라 세력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 조선족사회 때문에 간도분쟁이 일어났으나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간도협약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강압하에 이루어진 을사보호조약의 원천적 무효를 주장하고, 그 조약을 근거로 행해진 일본의 수탈에 배상을 청구하는 일이라면 성패는 차치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을사보호조약에서 파생된 일체의 대외조약을 무효로 하자는 주장이라도 인정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간도협약 하나를 문제삼으면서 그 이유로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 한민족의 국가가 두만강 너머 간도지방에 행정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을까? 과연 고려의 강역은 두만강에도 미치지 못했을까? 아마도 김 교수 뿐만 아니라 한국의 태만한 역사학자들... 그리고 사기역사(詐欺歷史)를 배워왔던 한국의 학생들은 고구려, 발해 이후 한민족의 역사에서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을 통치한 적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매국사학자는 중국 측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고구려와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자의 말대로라면 한강 이북의 영토도 역사적 경위나 법리적으로 한국 영토가 아니라는 논리가 된다.)

고구려사(高句麗史)와 고려사(高麗史)를 반으로 동강낸 일본 역사학의 사기꾼 이케우치[池內宏]의 의도대로 국내 역사학계는 만주지역을 고려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사서(史書)와 고지도에는 분명 신라와 고려의 북쪽 경계가 만주(滿州) 일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강단사학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이케우치[池內宏]가 한국 고대사와 중세사 무대를 한반도 중부로 축소시킨 내용을 진실로 믿고 잇는 것이다.

아래 지도의 좌편(고구려 천리장성)은 명나라에서 '변장'이라 불렀던 것이고, 아래 지도의 우편(고려 강역)은 청나라에서 1660년 '류조변'이라 불렀던 곳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의 행정구역 수는 584개이다. 그런데 조선의 행정구역 수는 324개에 불과하다.(신라는 450개로 나온다) 조선왕조와 일본인들이 고려사를 얼마나 갉아 먹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1) 고구려(高句麗) 천리장성도(千里長城圖)와 고려 강역

잘려나간 고구려사(高句麗史)와 고려사(高麗史)

 

이 지도는 보다시피 중국인들이 만든 지도이다. 위 지도는 압록강 하류와 요동반도 그리고 한반도 서해안이 보이는 지도이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 강역이 확실히 표시되어 있다. 지도 좌편을 보면 고구려 천리장성이 요하 건너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함을 볼 수 있다. (실재의 고구려 천리장성은 지도보다 더 왼쪽/고구려 천리장성은 '부여에서 해유리까지')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의 고구려 강역도는 절대로 '요하'를 넘지 않고 있다. (나쁜 놈들!) 고려의 천리장성은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시원하게 뻗어 고구려 장성에 연결되어 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 강역이 '성문 이름'까지 표시되어 있다. 고려의 강역이 만주 일대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의 행정구역 수가 584개요 조선의 행정구역 수가 324개인 이유가 확실히 표시되어 있다.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의 매국책동을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반드시 부수어야 한다. 위의 '류조변시의도'에 나타난 고구려 및 고려의 천리장성을 현대의 대륙지도에 다시 옮겨 보겠다.

 

현대의 대륙 지도에도 고려의 영토가 만주까지임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려령(高麗嶺), 고려모(高麗貌) 라는 고려의 영토가 북만주(北滿州)에 표시되어 있다. 고려의 '철령위(鐵嶺衛)'가 한반도에 있는 강원도 철령이 아니라 요녕성의 철령임을 보여준다. 고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한반도의 함경도 영흥이 아니라 길림성(吉林省) '쌍성(雙城)' 지방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한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지역인 선춘령(先春嶺)이 북만주의 '흥개호' 근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은 이 선춘령을 한반도의 함경도 북청 근처에 그려놓고 있다.)

이런 천하의 매국노 무리들이 어떻게 한국인일 수 있는가? 이런 천하의 패륜아 족속들을 어떻게 석사, 박사, 대학교수로 불러 줄 수 있는가? 조국도 역사도 팔아먹고 마는 저 오랑캐 족속들을 어떻게 같은 민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저들의 패배주의 사상에 의한 자국 역사 파괴행위로 인해 중국인들이 마음놓고 '동북공정(東北工情)'을 기획했던 것이다. 천하에 죄질이 가장 나쁜 놈들!

프랑스는 나치스 세력에 부역한 자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오늘의 위대한 프랑스를 건설했다. 프랑스는 자국의 민족정신을 팔아먹은 언론인, 학자들, 지식인들을 가장 가혹히 문책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이름으로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는 말살되었다. 나머지 남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역사마저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본인들이 국내 사서(史書) 51종 20만권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환국 3301년, 배달국 18대 1565년, 단군조선 47대 2096년은 그렇게 거세당했다. 그 미치광이들의 칼춤을 뚫고 살아남은 것이 오늘날의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箕古史)인 것이다. 저 패륜적인 사대모화사상 친일식민사관 강단사학자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箕古史)를 위서(僞書)라 주장하고 있다. 그 더러운 입으로 아직도 조상을 모독하는 극언을 일삼고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신화이고, 단군(檀君)은 곰의 생물학적 후손이고, 한국 역사의 시작은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저들의 죄는 반드시 능지처참(凌遲處斬), 부관참시(剖棺斬屍)로 다스려야 한다.

(2) 고려의 대륙 9성(大陸九城)이 반도 9성(半島9城)으로 조작되었다.

[참고서적: 김영호의 '국사광복의 햇불']

단제(丹薺)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두만강 건너 700리 선춘령(先春嶺) 밑에 윤관(尹瓘)이 세운 정계비(定界碑) 가 있는데 9성의 위치가 왜 함흥평야로 내려오는가 ?“ 하며 “조선 역사상 1,000년 이래 제일 대사건” 이라고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속에서 지적하고 있다. 물론 뒷날의 공양왕실록(恭讓王實錄)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에서 공험진(公險鎭)은 두만강 이북 간도성에 있는 선춘령이며 그곳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양왕(恭讓王) 4년에 올랑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족에 속하는 (兀 : 우뚝할 올, 斡 : 관리할 알) 여진인(女眞人)들이 래조(來朝)했을 때 그들의 말중에 “시중(侍中) 윤관 공이 우리 영토를 평정하시고 비를 세워 고려의 경계를 하시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들 부족은 윤관의 북벌(北伐) 당시 동만주 송화강 하류(北伐當時東滿洲松花江下流)쪽으로 쫓겨난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정계비는 두만강 이북에 있다는 뜻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거양성 선춘령에 윤관의 입비처(立碑處)가 있고 비문에는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넉자가 새겨져 있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선춘령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가면(-> 수빈강(愁濱江) : 흥개호 인근에 있을 것으로 추정, 찾는중), 옛 성지(城址)가 지금도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사적(日本史賊) 이케우치[池內宏]가 한국 역사를 축소, 왜곡하기 위해 9성이 두만강 이북에 있지 않고 함흥평야에 있다고 '날조'한 것을 국내의 이적사가(利敵史家)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추가해설} 국내 역사교과서에서 기술된 동북 9성(東北九城)의 위치.

일본의 역사 도적놈 이케우치[池內宏]에 의해 조작된 위치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국내의 사서(史書)와 중국 고지도(古地圖) 등에 의하면 동북 9성(東北九城)은 두만강 북쪽에 있어야 한다.

 

일본 역사학의 사기꾼 이케우치[池內宏]가 두만강 북쪽 7백리 홍개호 인근에 있던 윤관(尹瓘)이 쌓은 동북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에 있다고 조작한 내용을 광복 후 60년이 지나도록 친일식민사관 매국사학자들이 답습하여 조작된 역사를 국사 교과서에서 지금까지 교육하고 있다. 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

만주 일대를 다스렸던 실제 고려의 강역을 한반도 중남부로 축소시킨 일본 역사학의 사기꾼 이케우치[池內宏]나 그 자의 수하에서 충실히 교육받아 광복 이후 철저하게 한국 역사를 망가뜨린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나 그들의 제자들로 역시 우리 조상들의 활동 무대를 형편없이 축소시킨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이기백(李基白) 등은 모두 공통적으로 역사학 도적놈들이다.

상기 지도 노란선은 송령산맥 - 철령위 - 화주 - 고려모 - 선춘령을 연결하는 선이다. 고려의 강역은 과연 어디까지 였는가?

선춘령(先春嶺)의 고려 비석 -> 고려 경계는 두만강 북쪽 700리

▒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고려대학 박물관 소장]

 

1107년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이 총지휘하는 고려의 17만 대군이 수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여진족(女眞族)을 물리치고 국경을 넓혀 그곳에 육성을 쌓았으며,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 네 글자가 새겨진 비를 세움으로써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선춘령(先春嶺)의 위치는 어디일까? 다음의 고지도를 보자.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두만강의 북쪽에 있습니다..

현재의 지도로 보자.  지금 현재 선춘령(先春嶺)의 비석은 어디에 있을까?

 

 

1900년초 일본이 작성한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 기요' 극비보고서에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중국 연길국자가 서쪽 1리반 지점에 있는 포이하통하 강물에서 커다란 석비를 발견 하였는데 비문의 대부분은 알아 볼 수 없고 남은 20여자의 글자 중 다행히 무자년이라는 기록을 알 수 있다"

'무자년은 고려 예종(睿宗) 3년으로 윤관이 비를 세운 해와 일치한다.'

지금의 그 비석은 중국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고려지경(高麗之境)” 4글자가 씌여져 있었던 그 비석을 꼭 찾아 보고 싶다.

(3) 고려의 동북쪽 경계는 함경남도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밖이었다.

지금까지는 고려의 동북 경계는 함경남도 정도로 배워 왔으나 고려사와 고지도는 두만강 북쪽 700리 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사 권46에 의하면 서북쪽은 압록강,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춘령에 대해서는 중앙도서관 소장 한 61-77(고지도) 및 규장각 소장 고 4709-89-2(고지도)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림을 보면 위쪽 원안에 선춘령(지금은 윤관비로 표기)이 있으며 아래 원이 두만강 표시이다. 서북쪽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볼수 있지만, 만주원류고 신라항목과 고려사 137권 철령위 및 고려사 42권에 동령부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으로 불리웠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 강역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4) 고려(高麗)의 서경(西京)과 동녕부(東寧府)는 만주(滿洲)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고려의 서경이 한반도 밖에 있으리라고 상상도 해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사(元史) 귄 47에 의하면 "서경위동령부(西京爲東寧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동녕부(東寧府)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69년 서북면 병마사(權判西北面兵馬事) 영(營)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과 한신(韓愼), 삼화현(三和縣) 사람인 전교위 이연령(李延齡), 정원도호(定遠都護) 랑장 계문비(桂文庇), 연주 사람 현효철(玄孝哲) 등이 반란을 일으켜 부(府)주현진 60성을 들어 원(元)에 투항하였고 1270년 원(元)은 서경(西京)을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고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경계로 정하였다.(改西京爲東寧府)

우리가 평안도의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알고 있으니 서경이 동녕부(東寧府)가 되어야 한다.

과연 동녕부가 한반도 내에 있었는가 ?

조선 인구가 100만명이 안되는데 고려 인구는 210만이라면 그에 걸맞는 땅이 있어야 한다. 고려사(高麗史) 제42권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7월 동녕부에 출정, 동년 12월에 평정을 하였고 그 때 "요심은 본래 고려의 옛 강토이다(遼瀋元係本國舊界)"라고 하였고 또 강계만호로 하여금 방문을 붙이는데 요, 심(遼, 瀋 : 요양, 심양) 사람들에게 타이를 때에 "요양은 본시 우리나라 지경이다 (요양원시국계 : 遼陽元是國界)"라고 하였으니, 원나라 말경에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였다.

1370년 1월 동녕부를 평정하고 북방 사람들이 귀순하여 왔는데 "동쪽은 황성까지, 북쪽은 동녕부까지, 서쪽은 바다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의 지대에 적의 종적이 없어졌다(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라고 하였다.

분명히 남쪽에 압록이 있고 북쪽에 동녕부가 있으니 현재의 압록강을 고려 때 압록강으로 보면 동녕부는 만주에 있어야 이러한 기록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서경이 동녕부라면 서경은 만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경과 철령과의 관계를 나타낸 기록이 1388년 2월의 기록에 있는데, "사실 철령은 우리 서울로부터 겨우 3백리 거리에 있으며 공험진이 국경계선으로 되어 온 것이 한해 두해가 아니다(鐵嶺之山距王京僅三百里公 之鎭限邊界非一二年)"라고 했으니 철령과 왕경은 3백리에 있다는 것이다. 요, 심(遼, 瀋)의 북쪽에 철령(鐵嶺)이 있다.

또 1388년 기록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우왕(禑王)이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철령(鐵嶺)으로부터 북(北)으로 가면서 문, 고, 화, 정, 함(文 高 和 定 咸) 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驗鎭)까지는 자래(自來)로 우리나라의 땅이다." 라고 하였으니 철령의 남쪽 3백리 지경에서 서경이며 동녕부였던 지역을 찾아야 고려사(高麗史)에 의한 고려 땅을 밝혀 볼수가 있을 것이다.

☞ 참 고

공험진(公驗鎭)은 함경도 경원에서 6백리 밖에 있다고 되어 있고 고지도에서도 "고려계비 또는 윤공비"라는 비석이 있으니 철령에서 공험진까지도 밝혀보아야 할 것이다.

[관련지도]

 

- Box 한칸(1도)이 111km 정도이다.(270리)

- 중국 민족이 쌓은 성은 성표시를 하나 이민족(異民族)이 쌓은 성은 목책으로 표시하고 있거나 아예 표시를 않는 것이 중국 고지도의 특징이다.

- 고구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은 목책으로 표시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쌓은 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분확대도]

 

- 위로부터 철령 : 철령 남쪽으로 300리에 서경이 있었다

- 아래 심양, 요양이 있다

- 사서(史書)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서경은 이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

이곳은 바로 산해관에서 위로 올라가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동쪽이며 만주의 옥토인 "동북평원" 한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동북평원]

- 만주지역 중에 유일하게 강줄기가 여러갈래 뻗어있는 옥토이다


본문 내용 중 "철령(鐵嶺)으로부터 북(北)으로 가면서 문, 고, 화, 정, 함(文 高 和 定 咸) 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驗鎭)까지는 자래(自來)로 우리나라의 땅이다" 중에서 화(和)에 해당하는 화주가 지금은 쌍성으로 되어 있는데 옛이름이 '화주'이다. 바로 '철령'북방 고구려 천리장성이 끝나는 '부여' 우측에 있다.

[화주 = 쌍성]

[선춘령 = 공험진]

위의 본문 중 공험진의 위치에 관련된 사항이다.

공험진은 함경도 경원에서 6백리 밖에 있다고 되어 있고 고지도에서도 '고려계비 또는 윤공비'라는 비석이 있으니 철령에서 공험진까지도 밝혀보아야 할것이다. 즉 윤공비(尹公碑) 주위에 '공험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선춘령은 지금의 중국지도상 어디일까?

 

- 제일 위 중국 큰 호수(흥개호)와 고려영 사이에 선춘령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추가 지도이다.

[고구려 / 고려 천리장성]

이지도는 18세기초 '천하대총일람지도'로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도이다.

장성이 분명히 2개가 뚜렸이 보인다. 도대체 얼마나 큰 장성이 이었기에 이렇게 크게 그려졌을 것인가. 바로 기록에 나오는 고구려의 천리장성과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천하대총일람지도(天下大總一覽之圖)

 

18세기 지도에도 없는 고려 천리장성을 국내 교과서에는 아래와 같이 교육하고 있다. 고려 천리장성이 이렇게 표시되어 있는 고지도가 있는지 찾아보시길 바란다. 과연 있을까? 없다면 조작된 역사를 교육받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내 역사교과서에서 표시하는 고려의 천리장성

 

- 고려의 천리장성(千里長城)이 과연 여기 있었는가 ?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어디에 있었는가 ?

(5) 귀주대첩(龜州大捷)의 전투 장소는 어디인가?

 

 

1018년 요(遼)나라의 제3차 고려 침공 때에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姜邯贊)이 총지휘하는 고려군이 개경(開京)까지 남하했다가 퇴각하던 소배압(蕭排押)의 요군(遼軍)을 구주(龜州)에서 격퇴시킨 승전(勝戰)이 바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귀주대첩(龜州大捷)을 평안북도에 어느 지점으로 비정하여 왔다. 과연 그러한 것이 사실이었는가?

현재 국내 역사교과서에는 아래와 같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요(遼)나라 이후에 건국한 원(元)나라의 지리지(地理志)에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점이 발견되고 있다.

원나라의 지리지에 요양로(遼陽路), 광령로(光令路), 산북요동도(山北遼東途), 동령로(東寧路), 심양로(瀋陽路), 개원로(開遠路) 등 만주에 접한 지명들이 있었다.

현재 확인할수 있는 지명으로 요양(遼陽), 광령(光令), 심양(瀋陽), 개원(開遠)이 있는데 북쪽으로 개원, 그 남쪽에 삼양이 있고, 그 남쪽에 요양이 있고, 요양의 서쪽에 광령이 있다, 동령로는 '고려의 서경'이 '동령부'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강단사학계에서 동령로(東寧路)의 지명이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여 왔다. 그 원인은 고려인 최탄(崔坦) 등이 60여성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한 지역인데 서경(西京)을 동령부(東寧府)라 하였기 때문에 서경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동령부 지역을 한반도 내로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심양로 또한 고려인 홍복원(洪福源)이 40여성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한 지역이다.

지금까지의 입장대로라면 심양(瀋陽)이 고려 서경(西京)보다 북쪽에 있으니 심양로는 동령로보다 북쪽에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동령로 속에 포함되지 않은 '구주(龜州)'가 “심양로(瀋陽路)”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구주가 동령로(東寧路)에 포함하지 않고 심양로에 포함되어 있다면 구주는 심양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연구되어 질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기록에서 “요심”이 고려 땅임을 표현된 곳을 찾을수 있다. 요심의 서쪽에 송령이라는 산맥이 있음을 지도상 장성지역에서 찾을수 있다. “송령”은 고려가 성을 구축한 지명으로 나오고 있다. 고려 서북쪽의 지역을 이렇게 찾을수 있다면 동북쪽은 선춘령과 윤관비지도를 통하여 만주지역에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

구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던 그 지역을 정확히 찾아야 한다. 210만의 고려인들의 활동무대를 함께 찾아보자는 것이다.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 원문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요(遼)의 1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자, 현종(顯宗) 황제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20만 8천여명의 군사를 동원, 요군(遼軍)을 대적하게 하였다. 요군(遼軍)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해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크게 패하고, 자주(慈州)에서도 강민첨(姜民瞻)의 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이 개경에서 굳건한 수비진을 구축하고 있었고, 병력의 손실이 커서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철수하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큰 타격을 입고 귀주(龜州)에서 강감찬이 총지휘하는 고려군(高麗軍)의 마지막 공격을 받아 8만여명이 넘는 요군(遼軍)이 섬멸되었으며, 살아남아 본국으로 도주한 적병은 7천여명에 불과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흥화진(興化鎭), 구주(龜州), 영파역(迎波驛), 자주(慈州), 서경(西京), 신은(新恩), 연주(漣州), 위주(渭州)... 이것들이 과연 한반도 내에 있었던 지명(地名)이었을까?

원사(元史)에서 “동령로(東寧路)”에는 고려인 최탄(崔坦) 등이 서경부 주현진(州縣鎭) 6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 토산 중화진에 '귀화'가 있다고 했으며 60여성의 지명으로는 정원부, 곽주, 무주, 황주, 령주, 자주, 가주, 순주, 은주, 숙주, 덕주, 창주, 철주, 태주, 개주, 삭주, 선주, 성주, 회주, 맹주, 연주, 운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심양로'에는 태종(太宗) 6년 고려인 홍복원 등이 서경도호 “구주” 등 4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한 기록이 있다. 관할주 명칭에는 신성주, 요성주, 가홀주, 건안주, 남소주, 목저주, 개양주, 대나주, 창승주, 마미주, 적리주, 여산주, 연진주, 안시주 등 14개성은 명칭이 나오는데 나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요(遼)의 침략군을 격퇴시킨 장소였던 구주(龜州)의 명칭이 분명히 '동녕로'에는 없는데 '심양로'에 등장하고 있으니 '구주'는 동령로 지역이 아닌 '심양로' 지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히 태종(太宗) 4년의 기록인 '高麗人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40餘城來降'의 구절에서 알수 있듯이 "태종4년에 고려 사람 홍복원이 서경도호부 산하 구주 등 40여성을 들어서 원나라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구주대첩(龜州大捷)의 전투 지역이 평안도에 있었다고 한다면 동령로 항목의 60성에 기록이 있었어야 하는데 구주가 심양로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원사(元史) 또는 신원사(新元史) 기록이 잘못 기록되었다고 하여도 둘다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면 이미 심양과 요양은 본래 고려 땅이라고 한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제42권 공민왕 19년(1370) 7월 동령부에 출정하여 동년 12월에 평정하였고 그 때 "요심(요양과 심양)은 본래 고려의 옛 강토이다(遼瀋元係本國舊界)"라고 하였고 또 강계만호로 하여금 방문을 붙이는데 요 심(遼 瀋) 사람들에게 타이르기를 "요양은 본시 우리나라(고려) 지경이다(遼陽元是國界)"라고 하였고 원나라 말경에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려사」권42 공민왕19년(1370년) 1월 동녕부를 평정하고 북방 사람들이 귀순하여 왔는데 "동쪽은 황성까지, 북쪽은 동녕부까지, 서쪽은 바다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의 지대에 적의 종적이 없어졌다(東至皇城北至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之一空)"하였다.

남쪽이 압록강이라 하였으므로 상기지명들은 전부 압록강 북쪽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남쪽에 압록이 있고 북쪽에 동녕부가 있으니 현재의 압록강을 고려 때 압록강으로 보면 동녕부는 만주에 있어야 이러한 기록이 가능한 것이다. 서경(西京)이 동녕부(東寧府)라면 서경은 만주에서 찾아야지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서경과 철령(鐵嶺)과의 관계를 나타낸 기록이 1388년 2월의 기록에 있는데 "사실 철령은 우리 서울로부터 겨우 3백리 거리에 있으며 공험진이 국경계선으로 되어 온 것이 한해 두해가 아니다.(鐵嶺之山距王京僅三百里公險之鎭限邊界非一二年)"라고 했으니 철령과 왕경은 3백리에 있다는 것이다. 요, 심(遼, 瀋)의 북쪽에 철령이 있다.

또 1388년 기록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니 우왕(禑王)이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철령(鐵嶺)으로부터 북(北)으로 가면서 문, 고, 화, 정, 함(文 高 和 定 咸) 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險鎭)까지는 자래(自來)로 우리나라의 땅이다" 라고 하였으니, 철령의 남쪽 3백리 지경에서 서경이며 동녕부였던 지역을 찾아야 고려사(高麗史)에 의한 고려 영토를 밝혀 볼수가 있을 것이다.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경도 경원밖 6백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그 지역 인근에는 고지도에 "고려계비 또는 윤공비"라는 비석표시가 있으니 공험진의 위치는 아래 흥개호와 고려영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남선(崔南善)의 국난사(國亂史)에서 천리장성(千里長城) 조를 보면 "한편으로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축성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는데 현종10년 5월에는 영평진(永平鎭)을 쌓고 현종 14년 12월에는 요덕진(耀德鎭)을 쌓고 현종 16년 9월에는 상음(霜陰)현에 성을 쌓고 현종 17년 2월에는 순덕(順德)에 성을 쌓고 현종 18년 2월에는 현덕(顯德)에 축성하고 동년 11월에는 청새(淸塞)진을 축성하고 현종 19년 7월에는 용진(龍津)진에 축성하였으며 현종 20년 8월에는 경도라성을 11년만에 완성하였다. 현종 21년 2월에는 인주(麟州)에 축성하고 동년 9월에는 영덕(寧德)진에 축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영평, 요덕, 순덕, 현덕 등은 한반도지명이 아니다.

정종 원년(1035) 5월 래원(來遠) 성사절 안서가 흥화(興化)진에 보낸 통첩, 6월 영덕진서 거란 래원성에 보낸 통첩에 고려가 돌성을 쌓아 대로를 막으며 목책을 세워 군사행동을 저지한다고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해 9월 "서북지방 송령(松嶺)이동에 장성을 구축하여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송령은 요심의 서쪽에 있던 의주,의주(懿州,義州)지역의 장성상에 지금도 송령문이라는 지명이 있고 중국 고금지명사전에서도 이 지역에 송령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018년에 구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다. 그런데 1035년에 송령에 장성을 구축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송령' 동쪽의 심주지역에 '구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원사의 구주 부분에서는 이 자료 이상 더 찾아볼 자료가 없으니 다른 여러 가지 기록에서 구주의 위치를 더 확인하여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 과연 한반도에서 있었는지 만주지역에서 있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철령에서 3백리 떨어진 거리에 고려의 서경이 있었다고 고려사가 전한다.]

 

 

제일 위 중국의 큰 호수(흥개호)와 고려영 사이에 선춘령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까지가 고려의 주 강역이다. 고려영(高麗嶺) 노야령(老爺嶺) 옆에 대려령(大麗嶺)이 있고 훈춘 서북에 고려령이 있다.

 

 

[고려모(高麗帽)=빈공(賓公)이라는 지명이 옛 “고려모”라는 곳이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읽어보지 않고 고려사(高麗史)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한국 역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민족(韓民族)이 간도(間島)지방에 지속적인 행정력을 펼친 적이 없기 때문에 간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말하는 김기협 계명대학 교수는 과연 학자라는 명함을 달고다닐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사(高麗史)의 시작은 만주와 요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의 행정구역이 584개이고 신라가 450개이고 조선은 324개이다. 고려의 북방 영토가 만주 일대였다는 것은 원사(元史)의 지리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김기협 교수는 고려의 판도가 두만강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정신나간 주장을 하고 있다. 만주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우리 민족의 영토였고 조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함경도 평안도가 여진족의 영토였다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이다. 고려의 쌍성총관부가 함경도 영흥에 있었다는 말도 틀리다. 고려의 쌍성총관부는 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쌓은 동북 9성도 지금의 북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를 하는 자들이 지금의 제도권 사학자들이다. 간도는 반드시 수복해야 할 우리의 영토일 뿐이다.

서양인들이 그린 조선의 지도에도 분명히 간도가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간도협약이 법적무효가 아니라고 김 교수는 주장하는가?

고려의 북방 영토는 분명히 만주일대였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도 간도는 우리 민족의 생활무대였다. 그런데 국내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고구려 천리장성이 어디에 표시되어 있는가? 고려의 강역은 또 어떻게 되어 있는가? 다 잘라 먹었다. 다 팔아 먹었다. 다 빼어 버렸다.

사대모화사상과 친일식민사관의 색안경을 낀채 스스로 자국의 역사를 축소시켜 일본과 중국의 한국 역사 왜곡에 도움을 주고있는 이 땅의 매국사학자들이야말로 나라의 경계를 엿장수 마음대로 중국에다 팔어먹은 진정한 이름의 원조 매국노들이다. 저들은 껍데기만 한국인일 뿐이지, 이름과 성만 김아무개 박아무개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와라바시 뺀또'씨들이거나 '코 뻬이징' 씨들이다. 조상을 팔아먹고 나라의 역사를 송수리째 팔아먹는 저들에게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분노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은 한국인의 껍데기를 둘러 쓴 중국인들이며 일본인들이다. 우리는 저들의 매국 패륜 책동을 반드시 부수어야 한다

출처; 배달한민족사(http://www.baedalguk.com)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일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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