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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을 지배한 고구려인들

monocrop 2006. 12. 19. 19:28

남북조 시대 북조인 북위는 당시 중원의 강자였다. 그런데 그런 북위를 좌지우지한 귀족세력이 있었으니, 그 세력은 바로 발해 고씨인 고조(高肇)이다. 그는 북위 고조(高祖)의 여동생인 고평공주와 혼인하여 상서공이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고, 자신의 여동생을 고조의 황후로 만들었다. 고조의 여동생은 문소태후(文昭太后)가 되어 세종(499-515)을 낳았다. 그의 조카딸은 세종의 황후(宣武皇后)가 되었고, 조카 고맹(高猛)은 장락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북위 황실과 3중의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조는 외척으로 족당(族黨)까지 형성하는 등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고조는 어떤 귀족이길래, 북위를 좌지우지한 것일까? 놀랍게도 고조 아니 그의 집안인 발해 고씨는 고구려와 관련이 높은 성씨이다. 북위를 좌지우지한 발해 고씨 집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그의 가문은 고구려에서 계속 살았고, 고조와 문소태후도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피속에는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100여 년 동안 고구려에서 살았고, 고구려에서 학문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즉 그들은 이미 고구려화된 중국인, 즉 고구려인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조가 470년 대에 고구려에서 북위로 가자 곧 여위장군에 봉해지고, 여동생은 황후가 되는 등 놀라운 출세를 하게 된다.

 

북위로 온지 얼마 안된 고조가 어떻게 해서 높은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위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는 그 이유에 대해 그가 후한시절 명문집안이었던 발해고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100여년 이상 고구려에 망명생활을 한 그들이 단순히 명문집안이라는 이유로 고속승진을 할 수 있었을까? 고조가 북위에 귀국하자 마자 권력의 핵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고조의 동생 고현(高顯)은 고구려대중정(高句麗大中正)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고구려대중정이란 고구려 출신 인물들을 천거하는 벼슬직으로, 이는 당시 북위에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조의 가문이 이들 고구려인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조의 집안이 고구려대중정이라는 벼슬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말한다. 고조의 집안인 발해고씨가 오랫동안 고구려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비 고구려인이라 할지라도 고구려의 입장을 반영하는 친 고구려성향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고조의 집안이 놀라운 출세를 한 배경에는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도 있다.

 

고조의 친척인 고잠(高潛)은 고구려에서 돌아오자 곧 북위로부터 개양남(開陽男)이라는 작위를 부여 받고, 부마도위(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또 다른 친척인 고윤(高允)은 북위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대접받았다.

 

*고잠의 할아버지인 고무는 형 고고와 함께 영가의 난(서진 몰락의 계기) 때 고구려에 망명하여 요동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잠 역시 고조와 함께 친 고구려적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친고구려적인 인물들이 대거 국정에 진출했기 때문에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례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고구려가 북위의 사신을 죽인 일이 있다"고 씌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위는 답서에 "고구려와 우리는 친하게 지낸다"고 답할 정도일까? 참고로 수 양제 때 발해고씨가 숙청된 것은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 국가의 대응책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볼 수 있다.

 

『삼국사기』와 『위서』 「고구려전」을 보면 양국 간에 정략결혼이 오갔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북위가 결혼을 먼저 청하고 고구려가 이를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위서』 「정준열전」과 「고조열전」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이 먼저 북위에 정략결혼을 청하여 고조의 여동생인 문소태후가 북위의 고조(효문제)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따져보면 위서 고구려전의 고구려가 북위의 결혼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은 무엇을 감추기 위해 거꾸로 글을 남긴 것이라고 여겨진다. 더욱이 중국 사가들은 기록을 할 때 위한휘치라 하여 한족의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로 볼 때 고구려의 장수왕이 북위에 먼저 결혼을 청하여 고조의 여동생을 북위 효문제(高祖)와 결혼시켜 북위의 왕을 고구려의 사위로 삼음으로써 북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북위의 정치에 일정부분 영향을 행사했다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가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는 옷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곡을 하며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비록 생전에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름은 널리 퍼져서 잘 알고 있다."고 애도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문소황후가 된 고조의 여동생은 세종(선무제)를 낳아 고씨가문과 북위 황실의 관계를 두터이 하였다. 선무제는 외가 사람들에게 극진하여 외삼촌인 고조 형제들에게 벼슬과 작위를 주고 외할아버지(고양)와 외할머니에게도 작위를 추증할 정도였다. 게다가 주살된 함양왕(咸陽王) 희(禧)의 재물, 노비, 땅, 집 등이 모두 발해 고씨의 소유가 되는 등 고조는 순조롭게 승진하여 상서우복야란 벼슬에 올랐고, 발해군을 포함하여 기주(冀州)의 대중정(大中正)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연락관이라고 할 지위까지 차지했다. 게다가 앞서 말한바대로 고조는 선무제의 고모이자, 효문제의 여동생인 고평공주와 혼인함으로써 상서공(상서령)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고구려를 배경으로 중앙권력에 진출하여 외척이 된 고조의 출신이 출자이토(出自異土)라 하여 기존의 관료들이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고조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맡은 직분에 열심히 정성을 쏟아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을 얻게 되자, 선무제는 그에게 6보(六輔)의 전횡과 함양왕의 주살로 빚어진 정치적 공백을 메우는 일을 맡겼다. 이처럼 정치를 주도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된 고조는 고구려에서 돌아온 탓으로 주변에 친족 등 많은 관료를 두지 못한 허점을 보완하고자 붕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붕당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끌어 갈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 붕당에 많은 사람들이 가담해서 그의 세력은 막강해졌다. 그런데 붕당에 가담한 인물 대부분이 발해 고씨인 점으로 보아 이 붕당은 고씨 동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할 수 있고 따라서 이 붕당은 고씨 동족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고조가 조직한 붕당은 정치적 폐단을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고쌍이 고조에게 뇌물을 바쳐 유주자사가 된 것이 한 예이다. 고쌍은 이전에도 북해왕(北海王) 상(詳)에게 보물을 상납하여 양주자사가 된 적이 있는데, 이 북해왕은 고조에세 살해되었다. 막강한 권력자로 올라선 고조는 자신이 주도하는 정치에 제왕(諸王)이 방해가 된다 하여 선무제의 양해 하에 제왕을 감금, 정치에서 손을 떼게 했다. 고조의 힘이 이정도로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여동생 문소황후가 선무제(세종)와 광평왕(廣平王) 회(懷), 장락공주를 낳은 것과 더불어 그의 배경이 당시 동북아시아의 막강한 제국 고구려인 점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도 무한할 수 없었다. 515년(문자명왕 24) 선무제의 사망과 함께 정치를 맡게 된 고양왕(高陽王)은 그 동안 억압당해 온 제왕들과 힘을 합쳐 고조를 살해하고 그의 죄악상을 세상에 폭로하였다. 고조를 제거한 제왕들은 고조의 붕당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복조치는 취하지 않고 그들의 관작만 빼앗는 데 그쳤다.

 

피살된 고조는 효명제의 즉위와 함께 영태후(靈太后)가 정치를 담당하면서 일부 복권되었고, 말제(末帝)인 효무제에 의해 완전 복권되었다.

 

북위의 정치를 좌지우지하 발해고씨의 일부는 분명 고구려 사람이었고, 그들이 설령 고구려인이 아닐지라도 고구려의 문화적 토대에서 성장하였다. 북위를 비롯한 북조의 문화에 고구려의 영향이 미쳤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북방의 유목종족들이 자신의 문화를 갖지 못하고 한족에 동화된 데 반해, 자신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고구려는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에 영향을 끼치며 권력의 일부를 가졌고, 북위에 영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 남북조 시대에는 많은 고구려인이 활약했다. 대표적으로 북연을 건국한 고운을 비롯해서, 북주에서 10주의 군사권을 지니기도 했던 고림(高琳) 등이 있었다. 원래 고림은 북위 12대 효무제의 서천시에 동행하여 추격하는 북제 신무제를 막애낸 공으로 300호에 봉해졌다. 535년(서위 문제 대통 원년, 고구려 안원왕 5년) 자작에서 후작이 된 고림은 400호를 더 받았고, 537년 북주의 태조(문제)를 따라 북제의 신무제를 격파하여 공작이 됨으로써 800호를 다시 받았다. 538년 다시 공을 세워 300호를 더 받았고, 시중이 되었다.    **

 

 

참고: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방학봉, 『중국을 뒤흔든 우리 선조 이야기』

        서병국, 『고구려제국사』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창천의 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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