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심장부에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 멸망 97년 후인 765년, 당나라 심장부인 산동반도 일대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하면 믿어지는가? 믿기지 않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당나라 심장부에 있던 또 하나의 고구려는 그 후 55년간 중원 대륙을 호령하였다. 그 나라는 제(齊) 다른 말로는 치청왕국(淄靑王國)이라 불리웠고, 그 나라를 세운 이는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 장군이었다.
지도- 제나라의 위치
1.당나라 심장부에 세워진 고구려
이정기는 본명이 이회옥(李 玉)으로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용맹과 유능하여 평로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정기는 고종사촌인 후희일과 함께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안록산군과 맞섰다. 이정기와 후희일은 안동도호 왕현지와 함께 안록산의 심복인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서귀도를 공격해 전사시켰다. 당은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했다. 건원 원년(758) 영주에 주둔하고 있던 왕현지가 임지에서 병사하자, 당의 숙종은 특사를 파견, 왕현지의 뒤를 이을 절도사를 그 부대 군인들의 추천으로 선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신망이 높은 장군 이정기가 동료들과 함께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평로군은 안록산 군에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에 빠지자, 761년 후희일은 부장 이정기와 함께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발해만의 묘도 열도를 건너 등주(登州)로 상륙하였다.
평로군은 인근의 청주에서 관군과 합세하였다. 평로군은 상원 2년(761) 5월 무술일에 유주에서 사조의 부대를 격파하고, 12월에는 범양(范陽)에서 사조의 휘하 장군 이회선을 무찔렀다. 당 조정은 크게 기뻐하며 후희일에게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의 직을 내렸다. 후희일은 보응 원년(762) 5월에는 치주(淄州), 청주(靑州) 등 6개 주의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안록산의 난이 끝난 후 후희일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불교 사원 건축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지역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이즘 치청군 내부에서 이정기에 대한 인망이 높아지자 후희일은 위협을 느끼고 이정기를 해임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은 영태 원년(765) 7월 신묘일 후희일을 추방하고 이정기를 추대했다.
당 조정도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 그에게 정기라는 이름을 주고 평로치청절도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사(海運押渤海新羅使)라는 관직을 주었다. 이어 당 조정은 요양군왕에 봉하는 등 무마책을 썼다. 이후 이정기는 점차 산동성 일대를 복속시켜 10개 주를 확보하고, 10만 대군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당시 당 조정과 대립한 최대 번진으로 손꼽히는 하북3진은 군사력이 각각 5~7 만명이었고, 세력권은 7~9주 정도였다. 『자치통감』은 이정기의 세력을 '이웃 번진들이 모두 두려워하다'고 기록했다.
이정기는 어느 정도 세력기반이 다지자, 관리 임명권, 조세 수치권 등 행정과 군사 · 외교권을 독점하면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777년 그는 이영요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의 최대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서주(徐州) 등 내륙 5개 주를 추가로 점령해 최강의 번진으로 자리잡았다. 이어 내륙 경략에 더욱 치중하기 위해 청주에 있던 치소(治所)를 운주로 옮겼다. 서주는 초한전쟁 시기 초패왕 항우의 도성인 팽성이며, 예로부터 중국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육상운수의 중심이었고 또한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장안에 있는 당 조정은 경제공황에 빠졌다. 다급해진 덕종은 780년 하북3진의 세력이 약회 된 틈을 타, 변주에 성을 쌓고 이정기 진압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정기도 이에 맞서 이듬 해인 781년 변주와 가까운 조주(曺州)와 제음에서 병사를 징발해 훈련시키고, 사촌형인 이유(李洧)에게 서주자사를 맡긴 다음 증원군을 파견한다. 이정기 군대는 당군을 연파하면서 서주와 가까운 용교(埇橋), 와구(渦口) 마저 점령해 대운하를 통한 남쪽지방과의 물자수송을 두절하였다.
치청으로써는 이 때가 최고 융성기였다. 『신당서』에는 치청 지역의 정치가 엄정하고 법령이 일치하고 세금이 가벼우며, 형벌이 엄중했다고 적혀있다. 이정기가 다스리던 15개 주의 영역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와 안휘성, 강소성 일부까지 포괄, 현재의 한반도보다 넓었다. 인구도 고구려의 69만 7천호 보다 많은 84만호(당 인구 840만호)였으니, 치청왕국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의 경제력이다.
이정기가 다스린 지역은 곡물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으며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다. 당 제국 재정수입의 절반이 소금에서 났으니 치청의 독립은 당 재정에 막대한 손실이었다. 치청의 철과 구리 생산량은 1백만 관이 넘었는데 당의 철, 구리 총 수액고인 1천 2백만 관과 비교해보면 치청의 경제적 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치청은 비단 생산지로 유명했다. 당시 비단의 주요 생산지는 치청, 하북, 회남, 검남, 산남이었다. 당 현종 때 국가의 비단 수입액은 740만 필이었다. 이 중 약 3분의 2를 하남도와 하북도가 부담했으니, 치청 8개주의 생산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정기는 당나라 정벌 준비 중 781년 8월 등창으로 갑자기 병사하고 마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2. 이납의 제나라 건국
이정기가 781년 병사한 후 그의 아들 이납(李衲)이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납은 이정기의 죽음을 숨긴 채 내륙 경략을 계속하나, 치청과 동맹관계에 있던 산남동도(山南東道)의 양숭의(梁崇義)마저 관군에 대패하고 사망하는 등 주변상황도 불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당숙인 서주자사 이유와 덕주(德州)의 이사진(李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卿) 등이 작당해 당에 투항하였다. 결국 운하는 1년 만에 개통되고 장안도 평상 분위기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납은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이듬해인 782년 회서(淮西)의 이희열(李希烈)과 남북 양동작전을 전개해 변주를 재탈환하였다. 운하 통운은 1년만에 닷 끊겼다. 다급해진 덕종은 멀리 영남까지 총돌원령을 내리고 선무절도사 유현좌를 앞세워 이납을 치게 했다. 그러나 당시 당 조정에서는 무리한 군사징발과 논공행상에 대한 무장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결국 783년 장안 서북방에서 치청 토벌을 위해 관동(關東)으로 출병하던 경원군(涇原 軍)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했다.
덕종은 봉천, 양주 등지로 피난을 가야 했다. 덕종은 '자신을 비판하는 조칙'을 발표하고 반당 행위를 해 온 번진들에게 관직을 주면서 회유했다. 치청으로서는 위기의 순간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즈음 이납은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왕위에 올라 백관을 두었다. 치청의 영토가 대체로 전국시대 제나라와 일치하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齊라 하였다. 이납은 당과 화해하고 수성(守成)에 힘썼다. 792년 이납은 3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정기로부터 통치기반을 물려 받은지 12년 만의 일이다. 덕종은 이납이 죽자 애도의 표시로 3일 동안 조회(朝會)를 폐했다.
이납의 사후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대를 이어 제나라 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사고는 망명자를 후대하고 반당 세력을 끌어들여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사고는 지방관을 임명할 때 그들의 처자를 중앙에 머물게 해 반란을 예방했다. 이사고는 지방관을 임명할 때 그들의 처자를 중앙에 머물게 해 반란을 예방했다. 이사고 집권기에는 당 조정과의 관계는 무난했으나 번진들 사이에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청북부에는 소금 산지로 유명한 체주 와 이납 때부터 군사 요충지로 쓰인 덕주가 있었다. 이를 놓고 하북 3진의 하나인 성덕(成德) 번진과 전투가 게속 벌어졌다. 이정기가 산동지역을 장악하고 자립한 사건은 한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정기 가문은 발해와 신라를 상대로 국제교역에도 힘썼는데, 이는 신라 지방세력의 성장을 가져왔고, 결국 이들이 신라를 대체하게 되었다. 주요 재정원이던 산동지역을 상실한 당제국도 양자강 하류지역을 세로운 재원으로 삼아야 했다.
3. 황혼에 진 고구려의 꿈
805년 당의 덕종이 사망하고 태자인 이송이 즉위하니 묘호는 순종(順宗)이다. 순종은 몇 월 지나지 않아 죽고 장자인 이순이 즉위하니 묘호는 헌종(憲宗)이다. 이듬해인 806년 제나라에는 이사고가 사망해 이복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이사도는 할아버지 이정기 못지 않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시대를 잘 탔다면 할아버지 이정기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헌종은 당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번진을 타도하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헌종은 덕종의 양세법(兩稅法) 시행으로 재정에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황제 직속의 금군(禁軍)을 증강했다. 차례로 군소 반당 번진을 토벌한 헌종은 원화 9년(814) 7월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소양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오원제(吳元濟)가 세습 승인을 요청하자 이를 허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자립은 문책한다는 명목으로 토벌군을 일으켰다. 다음목표가 제나라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사도는 원화 10년(815) 초 선제공격을 감행, 강회(江淮) 하음창(河陰倉)을 불태우고 교량들을 파괴했다. 하음창은 당 조정이 회서 번진과 제나라 토벌을 위해 150간의 창고를 짓고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해 놓은 곳으로, 이 곳에 저장된 쌀만 2백만 석이었다. 이어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에 10여 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병사와 밀정을 상주시켰다. 하음창은 낙양 근교에 위치해 있었는데, 낙양은 장안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 당나라 2번째 도시이다.
이사도가 낙양 근교를 공격했다는 것은 이사도가 마음만 먹으면 장안을 공격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당시 번진 토벌론을 강력 주창한 배도와 재상 무원형에게 이사도는 장안에 자객을 보내 무원형을 암살하고, 배도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이사도의 강경책으로 민심은 소란해지고 조정 대신들이 제나라에 대한 토벌 반대론을 제기했으나, 헌종은 단호히 배격하였다.
원화 10년 12월 헌종은 마침내 제나라 토벌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당 토벌군은 서주에 치소를 둔 무녕군 절도사의 군대였다. 무녕군은 해상왕 장보고가 속한 군대였다. 또한 당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제나라를 치는 병력을 급 파하도록 요청했고, 당시 신라왕 헌덕왕은 군사 3만을 보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지난날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행위를 다시 되풀이하고 있으니......
당 토벌군이 제나라군 9천을 격파하고, 우마 4천두를 노획하고, 치청의 평음을 점령하자, 강회의 친당 번진과 투항해온 번진들이 속속 가담해 제나라는 사면초가의 상태가 되었다. 원화 13년(818), 창주 절도사 정권이 체주 복성현을 점령했고, 10월에는 무녕군 절도사 이색이 연주를, 뒤이어 천옹 절도사 전홍정은 운주를 점령해 제나라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유오가 정세가 불리해지고 더군다나 자신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실이 발각되자 이사도를 죽였다. 원화 14년(819) 2월의 일이었다. 제나라가 멸망하자 당은 제나라의 고구려게 장군 1200여명을 대량 학살하였고, 제나라 멸망 소식을 들은 당 조정은 기뻐 3일 간 잔치를 벌였다. 이로써 55년간 중원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 유민이 세운 제나라는 황혼에 지고 말았다.
우리는 그동안 중원을 호령한 마지막 고구려인 이정기 장군을 몰랐다. 이정기 장군....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멸망이 100년이 지났는데도, 이정기는 자신의 조국 고구려를 잊지 않았고, 결국 고구려를 부활시켰다. 그는 당나라 정벌을 꿈꾼 한민족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다. 비록 그의 꿈은 꺼졌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제(齊)나라에 관한 짤막한 상식 (출처: 주간조선 )
*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 독립세력으로서 당으로부터 자립(765년).
*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중원을 호령한 고구려계 국가
* 당의 물자보급로인 운하를 장악: 당 장안 주민 1년간 식량수급이 안되어 굶주림.
* 제나라가 위치한 산동지역은 소금의 산지이자, 발해 신라 왜가 만나는 교역의 중심지: 제나라의 경제활동 가늠.
* 독자적인 법령과 조세제도를 구비하고, 문무백관을 임명한 뒤 자체적 지방행정 단위와 통치조직을 갖췄다는 점에서 당 황실에 의해 왕으로 책봉된 여타 번진(藩鎭)세력들과 구별되는 엄연한 독립국가.
* 제나라에는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정기 일가가 지배할 당시 고구려어가 쓰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민족의 풍습이 유행.
참고문헌: 이덕일, 장군과 제왕2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주간조선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윤내현, 우리고대사
고준환, 신명나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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