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의 나라, 신라
옛날, 바닷가 작은 마을에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꺼비 한 마리가 이 아가씨를
찾아와 결혼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이 아가씨, 두꺼비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결혼한 바로 그 날 밤에 신랑은 두꺼비 허물을 벗고 얼굴은 해사하고 몸은 커서 씩씩한 사나이가 되어
있었죠.
그래서 아가씨는 이 두꺼비 신랑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꺼비에게 빼앗긴 동네 총각들이 두꺼비 신랑을 자꾸 못 살게 구는 겁니다. 동네 총각들은 두꺼비 신랑을 혼내주려고 쉬운 물고기잡이보다는 힘든
사냥내기를 해서 두꺼비 신랑의 콧대를 꺾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하얗고 말도 없는 녀석이 덩치만 컸지 무슨 사냥을 하겠냐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가까운 야산에서 사냥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꺼비 신랑, 말에
오르자마자 활을 날려서 여우·노루·오소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저렇게 날렵한 사냥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날 이후 두꺼비 신랑은 이 마을의 스타(star)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어촌마을이면 흔히 나타나는 '두꺼비 신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미술 해부학의
전문가인 조용진 교수는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두꺼비는 북방계 사람들이 남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피부 질환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피부병이 나으니 흰 얼굴이 나타나고 체격이 크니 씩씩한 남자로 보일
수밖에요.
사냥 일도 마찬가지죠. 남방계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일이 쉬운데, 그래서
남방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냥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두꺼비 신랑에게는 그것이 북방에 살 때의 본업이었죠. 그러니 쉬울
수밖에요.
결국 이 같은 경로를 거쳐서 북방계 두꺼비 신랑들이 힘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진 교수는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의 임금들의 얼굴은 북방계의 형상을 하고 있고 북방계의 관상을 좋은 관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마가 높으면(북방계) 관운(官運)이 있다거나 이마가 좁으면(남방계) 부모덕 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피부가 검다든가
쌍꺼풀이 있다든가 눈이 크면(남방계) 천한 관상이라고 하는 식이죠.
(1) 신라,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우리의 뿌리와 관련하여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가 신라입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 - 일본 등은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나 사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좀 다릅니다. 신라(新羅)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기도 어렵고 이들의 고분들 속에서는 기원이 불투명한 유목민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유물은 로마나 유럽에서 출몰한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결국은 병합되었지만 한반도 남단의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도
있고 말들도 묻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던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4세기 경 고구려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을 때
울주·동래 등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장기간 상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진출과 신라·가야경영?
『국학연구』 1988). 그리고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하였다거나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모용황의 군대 중의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가야 지역까지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금관가야 건국도 흉노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일단 신라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봅시다.
『삼국사기』에 신라를 구성한 6부족은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이 부족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 후일 최씨)이 숲에서 말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훌륭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시조(박혁거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라는
외래 유이민이 건설한 나라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세력이 신라를 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력은 부여계의 이동만큼 조직적이지 못하고 고조선이 쇠망한 이후 그 유이민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부족공동체 사회로
판단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조선의 멸망이 B. C. 108년 정도이고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건국이 B. C. 57년경(漢 宣帝 五鳳元年)으로 돼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신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나 고구려계의 국가보다는 고대국가 형성이 다소 느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고조선의 직계 왕가를 주축으로 그 주류세력이
남하했다기보다는 여러 호족들이 전란을 피해 남하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조 박혁거세라는 분도 신화(말과 알, 버드나무[楊山])로
판단해 보면 역시 외부(북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박혁거세(朴赫居世)라는 말을 한번 봅시다. 박(朴)은 '밝다[明, 또는 東]'는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혁(赫)이라는
말도 역시 '밝다'는 말인데 이 말은 한자의 뜻을 빌려서 쓴 말입니다. 이병도 박사는 거세(居世)는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으며 이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는 거슬감(居瑟邯 : 여기서 邯도 干의 뜻)의 거슬(居瑟)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본
건길지(?吉支)의 길지(吉支)와 일본에서 사용하는 고니키시(コニキシ : ?吉支)의 키시(キシ)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 2001) 1쪽]. 따라서 박혁거세라는 말은 동명성왕(東明聖王)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박[東 :
밝]혁[明]거세[聖王]이라는 말이지요.
부지영 선생(『일본, 또 하나의 한국』저자)은
박혁거세를 '비치세'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당시의 한자말을 읽는 방식은 이두식으로 읽었는데 이 점은 일본편에서 이미 일부를
보셨을 것으로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혁거세 역시 이두식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박(밝다) + 혁(빛) + 거세(居世)'에서
거세(居世)에서 거(居)가 일본 말로는 '이루(いる)'이므로 居는 '이'이고 世는 그대로 우리말로 세라는 것이죠. 그래서 '赫(빛) + 居(이)
+ 世(세)'로 '비치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제가 보기엔
'비치세'의 의미를 확장하여 '(세상을) 밝히세'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차이가 없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는 세상을 밝히는
임금[東明聖王]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따라서 부여계의 군주 이름과도 별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라 역시 쥬신의 성격을 가진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고대의 한문을 읽는 방식은 일본어의 발음과 대조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19세기
이전까지 박혁거세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일본에는 2천 7백여 곳이 있었고 아직도 2천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부지영, 『일본, 또 하나의
한국』(한송 : 1998) 75쪽].
신라 초기의 국호는 서나벌(徐那伐)인데 이병도
박사는 서(徐)는 '솟다[高, 또는 上]', 나(那)는 '나라(國)', 벌(伐)은 '성(城)', 또는 도시(capital)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서나벌은 '높은 나라의 도읍', 또는 '해가 솟는 나라의 도읍(the capital of rising sun)'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의 서울(Seoul)이 나타난 것이지요. 참고로 나라[國]의 고어로 사용된 한자어는 나(那)·라(羅)·야(耶)·로(盧) 등이고
도읍지를 의미하는 한자어는 불(弗)·화(火)·비리(卑離)·부리(夫里) 등입니다[이병도 ,譯註 『삼국사기』상 1쪽]. 그러니까 부여와 고구려는
불[火 : 해가 타오르는 모습을 상징]을 신라는 태양[日 :히·?·??·?]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라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여러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익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성호선생전집』46)."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때의 진한과 변한은 신라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당시에 신라는 남부여(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허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남부는 마한 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한왕은 그들이 진한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기록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246) 초기에는 고구려가 잘 막아내었으나 수도가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받아 고구려의 지도부가 남으로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당시 옥저로 달아났던 일부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김씨들의 특유한 묘제(墓制)로
이해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등장하는 것도 이 사건 및 미추왕(262~284)의 등장과 모두 시기가 비슷하여 어떤 큰 변화가 신라사회에
나타났다는 것이지요[정경희, 『한국 고대사회 문화연구』(일지사 : 1990)]. [그림 ①] 제 2 차 요동전쟁(고구려-위나라
전쟁)
[그림 ①]은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지명들, 죽령은 현재의 황초령, 미구루는 현재의 문천이라고 합니다(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하 제 35장 참고) ⓒ김운회 | |
이 시기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바뀌는 시기인데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親百濟 : 친부여)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락대제 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신라의 왕계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남하한 고구려의 장수들이나 호족 세력일까 하는 것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2) 금관의 나라, 신라
초기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기원전 57년경에 건국한 다음 기원후 1~2세기 경 지금의 경북지방과 경남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혀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입니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림 ②] 신라 천마총의 금관(왼쪽)과 백제 무령왕릉의 금관 장식(오른쪽) ⓒ김운회 | |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고 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출토된 금관총의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 출토지가 분명한 것과 나머지 3개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호암 미술관 소장 가야금관, 도쿄의 오쿠라 컬렉션(도굴품) 등이 있습니다[조유전·이기환, 앞의 책, 88쪽].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흉노족이나 선비족, 거란족의 무덤에서 황금 유물, 또는 머리장식이나 금관 등이 자주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금관은 알타이 문화권인 만주·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서 금으로 장식한 모자가 많이 발견되지만 인디아·태국·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김병모,『금관의 비밀』(푸른 역사 : 1998)].
아시다시피 신라의 금관(金冠)은 나무와 사슴의 뿔 모양처럼 생겼는데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사르마트(Sarmat)에서 발견된 금관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르마트 금관은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있고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중심으로 생명수를 표시하는 나무와 사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신라의 금관처럼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라 금관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그림 ③] 사르마트 금관(흑해 북안의 로스토프 지역) 국립중앙박물관 『스키타이 황금』(276-267쪽에서 재구성) ⓒ김운회 |
또 신라 금관과 유사한 다른 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나무 장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금테두리를 금꽃(金花) 스무 송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13cm 정도로 작은 것이라 여성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림 ④] 아프가니스탄 금관(틸리아 테페) ⓒ김운회 |
내몽골의 아로시등(阿魯柴登)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독수리를 숭상하는 일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쥬신의 토템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라 금관 가운데서도 새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뒤에 설명).
[그림 ⑤] 아로시등(阿魯柴登) 유물(내몽골 지역) ⓒ김운회 |
그리고 고구려와 기원이 동일한 탁발선비족(타브가치 : 북위 건설)의 금관 장식은 신라의 금관과 이미지가 대단히 유사합니다. 타브가치는 몽골쥬신 계열로 그들의 유적지인 서하자향(西河子鄕)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소머리, 또는 사슴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신라 금관과 같이 샤먼적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그림 ⑥] 선비족[타브가치(拓跋鮮卑)]의 금관 장식 ⓒ김운회 |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청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속에 인동초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림 ⑦] 고구려 금관(청암리 토성 금동관) ⓒ김운회 |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동양대)에 따르면 신라 금관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신라와 가까운 고구려만 해도 금동관에 신라 금관의 특징인 곡옥이나 세움 장식이 없죠. 다만 선비족들의 금제 관식이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를 머리에 장식한다는 측면에서 그 유사점을 찾아서 최병현 교수(숭실대)는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기마민족들에 의한 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의 김씨 왕족들이 등장하던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인데 이 말은 마루(宗) + 칸(王)의 의미로 추정되며 여러 부족 가운데 중심이 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신라의 금관은 이러한 금관들의 영향을 모두 받은 듯하면서도 각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킨 듯합니다.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枝形 :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브가치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물에서 사슴의 뿔 가운데 나무가 있죠? 그런데 신라의 금관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림 ⑧] 선비와 신라의 금관 ⓒ김운회 |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금관을 지탱하는 관(冠)은 사르마트와 틸리아테페의 형태와 유사하고 금관을 고정하는 것은 고구려의 금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선비족들의 보요관도 추상화되어 나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러시아 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러시아 돈강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금관에 붙어있는 둥근 잎새 모양의 구슬을 꿴 장식들[영락(瓔珞)]도 동아시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습니다. 새는 쥬신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조생부인은 신라 왕통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생부인은 지증왕의 어머님으로 눌지 마립간의 따님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님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골(聖骨) 중의 성골(聖骨)이라고 합니다(혹시 샤먼은 아니었을까요?).
신라 금관은 하나같이 많은 곡옥(曲玉)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태아(胎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과 다산(多産)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곡옥은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신라 금관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신라 금관이 출토되고 있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신라가 쥬신의 선주민(흉노)들의 후예들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 ⑨]입니다.
[그림 ⑨] 세계 금관의 총화, 신라금관 ⓒ김운회 | |
여기서 한 가지,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전기가야 토기문화와 신라의 4세기 이전 토기문화가 대체로 일치하며, 철기문화의 특징도 두 지역이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상 남·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에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쥬신족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얘기했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나무 이야기입니다. 쥬신의 나무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었죠? 바로 존 코벨 선생입니다.
존 코벨 선생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 선생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합니다[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죠. 그런데 그 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합니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고 합니다).
존 코벨 선생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입니다.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냅니다.
둘째, 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새가 등장합니다. 유네스코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의 서울 총회 기념로고(2004)는 솟대였지요. 이것은 바로 일본의 '도리'와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일 것입니다.
김병모 교수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김병모, 「고고학 여행」)."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동쪽 이시크(Issyk) 고분(B. C. 3세기경)에서 발견된 여인은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다고 합니다.『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서 대가(大家)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겠죠. 경주 서봉총(瑞鳳塚) 신라 금관도 머리 부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 또한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은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새와 태양에서 알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요. 그렇다면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알의 이미지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쥬신의 종교 및 정치적 수장인 샤먼의 지팡이의 머리에 달린 장식은 바로 솟대라는 것이지요. 솟대 위의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라는 애깁니다.
[그림 ⑩] 쥬신 신앙의 상징 솟대의 모습(경복궁) ⓒ김운회 | |
신라의 금관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 쥬신의 어떤 나라보다도 알타이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도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미추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천마총(天馬?)이라든가 황남대총(皇南大?) 등]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이러한 양식은 알타이를 역사적 무대로 삼았던 이른바 흉노의 무덤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목곽분이 이전에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김(金)씨계 인물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최병현,『新羅古墳硏究』(일지사 : 1988)]"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약화되면서 쥬신족들이 대규모로 남진해 오고(5호16국 시대), 그들의 일부가 경주까지 내려와 김씨(알타이, 또는 아이신) 왕조를 세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라는 흉노계로, 오르도스 철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부는 유럽 쪽으로 가서 헝가리 건국의 주체가 되고 동쪽으로 이동해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종선,『古新羅 王陵硏究』(학연문화사)].
글쎄요. 이런 분석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엔 4세기에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아닌 듯한데요. 일단 이 의문들을 푸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계속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지요.
이종호 박사는 신라와 흉노의 유물은 서유럽 훈족에게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이종호,「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66호].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인 PD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엉뚱하게도 청동으로 된 솥입니다.
청동 솥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인데 가야 지방에서 발견되고 그 형태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훈족은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바로 그 형태라는 것입니다(요즘으로 치면 차 뒤 트렁크에다 버너와 코펠을 싣고 다니는 것이지요). 청동 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그림 ⑪] 기마 인물형 토기(국보 91호) ⓒ김운회 | |
제가 보기에 이것은 신라인들이 서유럽까지 갔다기보다는 흉노의 일부는 서유럽 쪽으로 가고 일부는 남진하여 경주·가야 등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흉노가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로 들어 왔다고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인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의문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풀리고 있습니다.
최근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사천왕사에 있는 문무대왕의 능비(陵碑)에 있는 비문의 내용입니다.
(4)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림 ⑫] 휴도왕의 지배영역 ⓒ김운회 | |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쥬신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쥬신의 나라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족(漢族)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진(秦) 나라에서 이주해온 신라의 일부 유민들도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므로 신라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여기서 신라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니 한번은 거론해야겠군요.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나라 유민들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의 기록으로 보면 『후한서』의 기록과는 달리 진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의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姓)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산촌장은 이씨(李氏), 고허촌장은 최씨(崔氏), 대수촌장은 손씨(孫氏), 진지촌장은 정씨(鄭氏), 가리촌장은 배씨(裵氏), 고야촌장은 설씨(薛氏) 등으로 성씨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儒理尼師今).
그런데 위의 기록(진 나라 사람들의 이주)과 관련한 문제는 시기적으로 진나라 말기라면 B. C. 3세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김일제와는 일단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진(秦)나라는 정통 중화를 표방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민족입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아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신라 왕족인 김씨들도 진시황(秦始皇)과 연계를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나라 자체가 흉노의 계열인 점도 있겠지만 이것은 간단히 해명될 문제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즉 신라 건국의 비밀을 밝히는 많은 견해 가운데 휴도왕을 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인 부소와 연계를 시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는 당시 정치적 정변의 희생물이었지만 총명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전등사의 삼랑성(정족산성)을 쌓은 단군의 세 아들의 이름도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라고도 합니다. 머리 아프죠? 일단 넘어갑시다].
간단히 말하면 진(秦)과 신라(新羅) 및 금관가야(伽倻)의 지도층은 공교롭게도 그 조상을 모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동일하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호씨(少昊氏)는 원래 동방의 큰 신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64쪽]. 한 마디로 '새의 나라'지요. 소호씨는 산동반도 - 요동 - 한반도 등(일반적으로 보는 동이의 영역)에 이르는 쥬신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신입니다.
후일 소호씨는 서쪽으로 가서 서방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가을의 신인 욕수와 더불어 서방을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 사는 외눈박이 일목국(一目國 : 눈이 작은 흉노로 추정됨) 사람들도 소호씨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소호씨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신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대부분 쥬신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나시는 모양이죠?). 소호의 후손이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기도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163~165쪽]. 영락없는 쥬신의 신입니다. 이 점을 좀 살펴봅시다.
먼저『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시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百濟本紀 義慈王)"
이 기록은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삼국사기』편찬자)이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록만으로 나타난 것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어 보면
진시황(秦始皇) → 부소 → 휴도왕 → 김일제 → 김알지 → 내물왕 → 문무왕
등의 계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강조합니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일제의 후손이 한쪽으로는 가야로 가고 한쪽은 신라로 왔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갑시다. 즉 위에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황제는 농경민인 한족의 신인데 소호씨는 이미 보셨다시피 쥬신의 신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왜곡이나 해석상의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황제가 동방의 신들을 낳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이죠. 즉 황제 이후에 쥬신이 있는 듯이 묘사한단 말입니다('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참고). 이런 식의 신화 조작은 중화사상이 구체화되는 한(漢)나라 이후의 일로 생각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소호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지요(『史記』第一 五帝本紀).
일단 제가 보기에 김일제 이전은 고증 및 연구가 어렵기 때문에 김일제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을 토대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알타이 지역의 쥬신 선민족(흉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일단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면 다소 수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예로 제철기법과 편두로 나눠 살펴봅시다.
먼저, 2000년 「황남대총 발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장식ㆍ정광용 두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경주지역에 유행한 대표적인 기술체계는 저온환원법에 의한 제강법이었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백제지역에서 유행하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하다고 합니다.
박장식 교수(홍익대)는 B. C. 1500년부터 사용된 철의 제강법은 크게 두 가지, 중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뉘는데 유럽식은 액체상태의 주철(탄소함량이 많아 단단하나 쉽게 부서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로 도구를 제작한데 반해 중국식은 탄소를 거의 함유하지 않은 순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 두 가지 철강법이 동시에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유럽식 기술이 쓰인 반면 백제는 전통 중국식으로 철을 다뤘다 합니다.
보존과학자인 정동영 박사 또한 황남대총 출토 금동제품의 분석을 통해 신라의 금동제품이 금순도 98% 이상의 아말감도금의 방법을 이용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여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신라와 흉노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를 봅시다.
편두(扁頭)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두개골이 인위적으로 변형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편두를 하면 말 타고 투구를 쓰고 전투하기가 쉬워 생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편두와 같은 습속은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습속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두라는 것이 마치 흉노족의 자취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흉노의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편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해보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서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제2권)"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흉노의 일반적인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지?? 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편두(??三國志?? 魏書 東夷傳)"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인데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여 개의 변형두개골 즉 편두가 보고 되었습니다. 아니, 금령총은 그렇다 쳐도 김해라면 한반도의 남단인데 그 곳까지 이 습속이 나타나고 있다니오?
놀라운 일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신라인들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이 왜 유달리 작은지를 알 수 있게도 하는 것이지요. 편두가 아니면 이 왕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두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족이나 왕족들은 편두라는 얘기지요.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편두(扁豆)는 지존(至尊)의 상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두는 북방계의 남하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後漢書)』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이것은 머리를 작게 만들려는 것이다" : 『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두를 마치 '몬도가네'식(엽기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는 분통을 터뜨리며 한족(漢族)의 역사가(歷史家)들이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건륭제는 기본적으로 만주 쥬신들이 자신의 습속에 대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개탄하면서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고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欽定 滿洲源流考』卷首 諭旨)"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족들은 이민족들을 엽기적으로 몰아가서 야만인으로 몰아 부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류의 일은 명나라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장에서는 편두라는 만주의 풍속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멀리 전하여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와 북방의 연계성을 더욱 쉽게 분석할 수 있지요.
신라가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고분 발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과 2003년 각각 발굴된 삼연(三燕) 시기 선비족의 무덤인 랴오닝(遼寧)성 베이퍄오(北票)시 라마(喇口麻)동 묘지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고구려 태왕릉이 바로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연(三燕) 시기란 4세기 초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 붕괴하고 쥬신이 남하하여 세운 전연(前燕 : 337~370)·후연(後燕 : 384~409)·북연(北燕 : 409~438)의 시기를 말합니다. 전연과 후연은 모용(慕容)씨의 나라입니다.
전문가들은 2004년 4월 출판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보(2004년 제2기)』에 나타난 라마동 묘지 출토 각종 마구(馬具)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뿐만 아니라 가야와 백제, 왜의 마구의 연원까지 추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00여기에 달하는 라마동 묘지에서 나온 부장유물은 3670여 점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생활용품·무기류·마구 등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토기는 고구려와 유사하고 각종 마구들은 신라초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는 전체 형태가 왜의 5세기경의 대표적인 금제품인 오사카(大板)부 하비키노(羽曳野)시 곤다마루야마(譽田丸山) 고분의 출토품과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미술사가인 권영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당시 고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세력권에 있었으며 황남대총 유물은 그 문화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라는 고대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동해안 통로를 통해 4~5세기 국제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황남대총 축조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전기 초원문화와 이후의 후기 초원문화로 나누고 중앙아시아 흉노족이 한나라 멸망직후의 국제정세 혼란을 틈타 신라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합니다.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 가지형의 모양새는 알타이 주변과 중앙아시아 수렵민족의 신앙적 상징과 거의 같고 금장식편(영락)이 달린 형식은 중국에 없고 러시아 돈강 유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의 유물과 비슷한데다 얇은 금판을 새 날개 형태로 오리고 수많은 영락을 단 금관 장식이나 금제 귀고리, 허리띠 조형 등은 로마와 터키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권영필,「황남대총과 신라의 국제교류」『황남대총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자료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0)].
저는 이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어왔던 흉노 세력(김일제 후손의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선택적으로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금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5) 북으로 가는 신라, 남으로 가는 부여
황남대총의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죠. 바로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바로 유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리 목걸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인숙 박사는 유리 분석실험을 통해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유리가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로마의 유리는 중국이나 바다가 아니라 초원의 길을 통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이라고 합니다. 적석 목곽분은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스키타이 민족(기마민족)의 매장 풍습인데다 유물들도 기마민족들의 애호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초원의 길에는 이들 스키타이인들과 또 다른 주인공, 흉노(쥬신의 선민족)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체로 초원길 서부지역은 스키타이, 동부 지역(알타이)은 흉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B. 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유지됩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신라는 로마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의 환경에 걸맞게 변형·발전시킴으로써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을 로마와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수일 교수는 로마의 누금감옥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 장식품들이 신라에는 흔하게 나오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계통과 부여-고구려-백제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 쪽이 보다 고조선계와 흉노(쥬신 선민족) 쪽에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쥬신이라도 한족(漢族)과의 교류와 그 영향력의 강약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좀 더 흉노적이라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들이 다르다는 말은 아니지요. 희한한 말이겠지만 한족(漢族)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보다는 경제력·제도·문화의 면에서 세련되지는 못하면서도 금은 세공 기술이나 유물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는 나라가 신라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금관의 나라, 신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웠지만 여명기의 신라에 대하여 개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분석 범위도 광범위하여 매우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모두 종합하고 여러분들이 보다 읽기 쉽게 요약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신라의 금(金)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신라의 후예(後裔)들에 의해 후일 나라 이름이 금(金)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후예 만주 쥬신은 금(金)이라는 같은 이름의 나라를 만들어 두 차례나 중국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이미 본 대로, 금나라를 세운 시조는 경주 김씨로 대립하는 부족들을 화해시킴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었고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고서 정착합니다. 후금은 바로 이 나라를 이은 나라지요. 금나라는 신라와의 연계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비롯한 다른 여러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도 금나라 태조(아골타) 계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의 태조가 고려 예종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국서 내용은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금나라의 태조가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여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 渤海 同本一家)"라고 하고 있지요.
금나라 태조의 말씀에서 금나라(금·청)가 바로 신라계와 고구려의 후예(신라·고구려 연합세력)이며 고구려 - 발해 - 금(반도에서는 고려) - 후금(청) 등으로 이어지는 쥬신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금(금·후금)나라를 건설한 만주쥬신은 황족의 성은 경주 김씨로 반도 쥬신과는 항상 친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17세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몽골 칸국의 황실인 보르지긴 씨족도 알탄오락(黃金氏族), 즉 김씨(金氏)로 되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부여·고구려·백제 등과 마찬가지로 쥬신의 공통된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성격이 일부 알타이 서부 지역과 유사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조선계와 선쥬신계(흉노계)의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는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쥬신의 대륙문화에 중앙아시아·로마 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복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쥬신의 전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즉 부여는 남쪽으로-반도부여(백제)로-열도부여(일본)로 향하는 동안, 신라는 북쪽으로-만주(금)로-중국(청)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김운회/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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