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온 단군왕검의 편지
조선사 5백년 최악의 쿠데타 : 인조반정
쿠메의 한 무녀(巫女)가 독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오?"라고 묻자, 그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위의 시는 유명한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荒蕪地 : The Waste
Land )』입니다.
T. S. 엘리어트와 황무지의 이미지. ⓒ김운회 |
이 시에서 4월이 가장 잔인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4월은 쓸데없이 비가 내리고 바람도 불고하면서 마치 뭔가 살아 있는 듯 하지만 참된 재생(再生)과 부활(復活)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4월은 재생과 부활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재생과 부활을 요구하기 때문에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해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습니다."
(1)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위에 앉아
다음의 글들을 서로 비교하여 봅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4)]에 실린 글입니다.
㉮ 국사책 속의 병자호란(114쪽)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하였다. 군신관계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청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전쟁까지도 불사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이 짧았고 지역적으로도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 양반 사대부의 충성가(115쪽)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의, 「척화론(斥和論)」]"
어떤가요? 중국이 부모(父母)고 우리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외교를 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은 조선의 대표적 충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람은 조선의 충신이 아니라 중국의 충신입니다. 이 사람은 중국인보다 더 중국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기특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중국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이죠.
다음은 한국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사람의 글을 한번 봅시다.
㉰ 동방거유(東方巨儒) 송자(宋子 : 송시열)의 가르침(『肅宗實錄』)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肅宗實錄』9-2-12)."
송시열. ⓒ김운회 | |
이런 작태를 민중들은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럼 다시 다른 글 한편을 봅시다.
㉱ 서글픈 백성들의 노래(『眞本 靑丘永言』)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위에 치다라 앉아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리닫다가 두험 아래 자빠졌구나
모쳐라, 날랜 나이기에 망정이지 어헐질 번 하괘라(『眞本 靑丘永言』)
[해설] 두꺼비(조선 정부, 또는 양반 사대부)가 파리(백성)를 물고 똥거름 위에 달려 올라가 앉아 건넌 산을 바라보니 하얀 송골매(청나라, 또는 일본)가 떠있었네. 두꺼비 깜짝 놀라서 뛰어 내리다가 똥거름 아래 자빠지고 말았지. 그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라. 두꺼비 왈 "내가 이처럼 동작이 빨랐기에 이 정도였지. 다른 짐승 같으면 살갗이 터지고 크게 다칠 뻔 하였지 뭐야."
이 시조는 병자호란(1636) 당시의 조선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풍자를 담은 시조라고 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중화사상에 찌든 조선의 사대부들이 (백성들에게는 온갖 고혈을 다 빼먹으면서) 마치 '두꺼비가 파리를 문 채로 똥거름에 빠지고서도 자기니까 그 정도였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모습 속에서 오는 절망을 희화적으로 묘사한 것이죠.
다시 쥬신의 역사로 돌아가 봅시다.
쥬신족들은 한족(漢族)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민족적 공통성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도 쥬신(조선)들은 철저히 이들을 외면하고 중국에 사대(事大)하고 '작은 중국인' 행세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쥬신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거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란이나 몽골은 같은 쥬신으로 하나는 남부, 하나는 북부에 머무른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힘이 강성해지자 쥬신을 무시하고 깔봅니다. 한족(漢族)의 나라들과는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맺기도 하면서 말이죠. 이 때부터 몽골은 거란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 거란'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앞서 본 대로 한족(漢族)들에게, 또는 한족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숙신·쥬신·쥬신·루씬 등은 모두 비하하는 말로 인식됩니다. 앞에서 본 대로 여진(女眞)도 욕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따르면, 여진(女眞)이란 거란인들이 고구려·발해 계열의 유민들을 부르던 이름으로, 만족(滿族 : 만주족)의 선세(先世 : 선조들)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쥬신[朱先·朱里·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청태종은 쥬신(諸神 : Jusen, 또는 Jusin)을 대신하여 만주(지혜로운 자)라고 부르게 합니다.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쥬신이라는 말은 한족들에게 욕처럼 사용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반도 쥬신(조선인)이 쥬신을 욕하는 마당이니 오죽 하겠습니까?
과거에 김병연(김삿갓)은 그 조상을 욕하여 평생을 벼슬을 마다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도 쥬신들이 과거를 몰라서 그들을 비하했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제 쥬신의 역사를 알고서는 그런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반도 쥬신의 만주 쥬신에 대한 경멸과 천시는 쥬신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쥬신의 영걸 김누루하치(후일 청태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중국과 조선(반도쥬신)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 그리고 몽골과 쥬신[諸申 : 모든 쥬신족 - 일반적으로는 만주 일대의 쥬신인]은 언어는 다르지만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10, 13, 14)."
이 말은 같은 민족이면서 반도쥬신(조선)은 새끼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만주 쥬신을 오랑캐나 개·돼지 취급을 하는 데에 대한 커다란 실망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반도는 청나라 건국의 주체였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말입니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보면 몽골과 우리가 한 뿌리라는 식의 수많은 칼럼과 기사를 접합니다만, 실망스러운 것은 만주 쥬신이 실제로 우리와 더 가까운 존재인데 이것을 제대로 다룬 기사를 아직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 후금을 건국한 주체세력인 건주여진은 백두산 - 두만강 -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을 바탕으로 발흥해온 세력이었으므로 한반도 북부인들과는 많은 혈연적인 교류(결혼)도 있었고 경제적 교류도 활발했기 때문에 반도쥬신(조선)의 태도는 상당히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면서 반도쥬신(조선)은 스스로 '새끼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만주 쥬신인들을 오랑캐나 개·돼지 취급을 했으니 말입니다(『朝鮮世宗實錄』84 21年).
(2) 단군왕검(텡그리옹군)의 편지
반도 쥬신이 만주 쥬신에 대해서 얼마나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는 소중화 사상에 젖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불행한 예를 봅시다.
반도쥬신(조선)의 훌륭한 임금이었던 광해군이 '새끼 중국인'들의 쿠데타(인조반정 : 1623)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자 반도 쥬신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들이 밀어 닥칩니다.
현군(賢君) 광해군의 실각은 조선사(朝鮮史) 왜곡의 절정을 초래합니다. 제가 보건대 이 사건이야말로 5백년 조선사(朝鮮史) 가운데 "가장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지요. 당시 광해군은 선조로부터 일종의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아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국난 극복에 중심역할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군무사(軍務司)를 주관하고 정유재란(1597) 때는 군량조달·모병 등으로 국난극복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은 전후 복구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불타거나 무너진 궁궐들을 재정비합니다.
광해군은 이 같은 대내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신중한 외교정책을 시행합니다. 물론 임진왜란을 적극적으로 도운 명나라를 외면할 수도 없지만 엄청난 세력으로 확장되고 있는 청나라와 적대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를 도왔으나 명나라가 전투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등거리 외교를 수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日本)과도 외교(外交)를 재개하여 전후 수습에 국력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능양군(인조)을 옹립하자(인조반정)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ㆍ제주도 등지로 유배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인조반정은 조선사 5백년을 통틀어 최악의 쿠데타였습니다. 이들 쿠데타 세력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나라에 30년도 채 안되어 다시 전쟁을 스스로 불러들입니다.
이들 쿠데타 세력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였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광해군을 폭군(暴君)의 대명사로 치부하게 합니다. 다행한 것은 최근 들어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 작업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도 광해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광해군의 묘소(경기도 남양주). ⓒ김운회 | |
물론 국난(國難)을 당하여 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무엇이든지 지나치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우리가 망하더라도 명나라를 구해야한다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
냉정히 따져봅시다. 임진왜란은 당시로 보면 매우 큰 국제전쟁(international war)입니다. 명나라가 반드시 조선만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은 더구나 아니지 않습니까?
명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은 국제 정치역학과 관련된 문제이지 단순히 조선을 아끼고 사랑해서 파병(派兵)한 것은 아니죠. 실제로도 일본군은 명나라를 친다는 것이 전략의 목표가 아니었습니까?
만약 명나라가 조선을 지키지 않았으면 어떤 결과가 왔을까요? 전선(戰線)이 중국 북부로 확대되고 결국은 곧바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이 위태롭게 됩니다. 실제로 일본군이 올라오는 속도를 감안해 보면 일본군의 국제적인 도발이 명나라에는 상당한 충격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전선을 외국(조선)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죠. 명나라에 있어서 조선은 일종의 안전핀(safety valve)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조선이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군대가 보병(步兵)을 주축으로 한 1~2만 정도에 불과합니다(실제로 보낸 병력도 이 정도 수준입니다). 앞서 본대로 명나라의 보기병(步騎兵) 30만도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이 정도의 병력으로 전체적인 대세를 좌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새끼중국인(소중화주의자)'들은 아예 북벌(北伐)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발전합니다. 하기야 죽는 사람 따로 있고 정책 입안자가 따로 있으니 무슨 정책이든 해놓고 보자는 식이 아닙니까?
후금(後金 : 청나라)이 크게 일어 설 당시 조선의 혼군(昏君) 인조(仁祖)와 새끼중국인들은 끊임없는 후금(청)의 화친요청을 거부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자초합니다. 당시 몽골과 만주의 지배자로 칭기즈칸의 천명을 받은 청 태종은 인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내립니다[『산성일기(山城日記)』(서해문집 : 2004)].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①]
"조선 국왕은 들어라. 짐이 요동을 점령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끌어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1627)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어찌 강대하다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인조)가 섬(강화도)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겠느냐 ![『산성일기』58쪽]"
즉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다릅니다. 병자호란(1636)의 원인을 상당한 부분 반도 쥬신(조선)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행 한국의 고교 국사교과서를 한번 봅시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와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 이르렀다(1627 : 정묘호란). …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 군신관계(君臣關係)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 주화론(主和論)과 … 주전론(主戰論)이 대립하였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1636 : 병자호란)[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113~114쪽]."
사실 청나라가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욕심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될 터인데 굳이 무리해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청나라의 비위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조선이 "후금의 백성을 끌어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와 같은 구체적 상황들은 나타나지는 않죠. 즉 그저 외교정책의 실패 때문이라고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실제의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조선이 국체(國體)를 유지한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쥬신계의 국가들이 같은 쥬신계인 조선반도를 직할령으로 지배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거란의 요(遼)나라, 여진의 금(金)나라 청(淸)나라, 몽골의 원(元)나라 등이 한반도까지 직접 지배하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 지배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반도까지 신경을 집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요.
합리성이 결여된 국가는 항상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가 파국(破局)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 이상한 정책을 내세웁니다.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것은 민중들이죠.
물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반도쥬신(조선)을 크게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약소국이 단지 그것만 가지고 외교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명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병을 한 것이지 조선을 수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요. 조선이 몽골·만주·중원(중국북부)을 평정하고 있는 강대한 국가(청)에 대하여서 끊임없이 오랑캐로 멸시한다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죠.
그러면 조선과 살을 맞대고 사는 만주 쥬신은 임진왜란(壬辰倭亂 : 朝日戰爭) 당시에 강 건너 불구경만 했습니까?
임진왜란(1592) 때 후일 청 태조가 되는 김누루하치는 조선의 임금 선조(宣祖)를 위하여 군대를 파병할 것을 제의합니다. 즉 당시 조선의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는 김누루하치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조선을 위하여 구원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선조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조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열도 쥬신(일본)의 군대를 피해 명나라로 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명나라가 거절하는 상태에서 오직 명나라의 원군(援軍)만을 기다리며 평안도 의주에서 기약 없이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김누루하치(후일 청 태조)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의 입을 통하여 원군 파병을 제안합니다. 그 내용을 직접 보시죠.
"우리(여진) 땅은 조선과 서로 접해 있어서 조선이 일본군[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대버일러이신)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의 휘하에 기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전투에는 매우 능한 군대입니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대버일러[원문에는 도독(都督) - 후일 청 태조 김누루하치를 말함]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좋은 분이니 반드시 정병을 뽑아 한 겨울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일본군을 정벌 살육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입니다(『宣祖實錄 』卷30 25年 9月 17日 甲戌)"
이에 대해서 조선의 피난정부는 이들이 "천한 오랑캐인 데다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하여 나라 전체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김누루하치의 군사지원을 거절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군대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민중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명나라와 손잡고 오히려 청나라를 치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후금(청)에 사신을 보내면서 가짜 왕자, 가짜 형조판서를 보내기도 하고, 후금(청)에 보내는 글에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청태종의 즉위식에서도 조선의 사신들(나덕헌·이확)은 절을 하지도 않았으며[『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청나라 대신들이 조선 사신들을 죽이려 하나 청태종은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고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에 돌아오자 자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냅니다], 후금(청)에서 보내는 사신을 철저히 박대하여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양국의 무역에 있어서도 명나라에는 최고급 예물(禮物)을 보내면서도 후금(청)에는 저질의 물품으로 교역하는 등 후금(청)의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게 합니다. 후금(청)은 끊임없이 조선을 끌어안으려 하는데 조선은 이를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습니다.
(3) 그 임금에 그 신하
다시 청 태종의 편지를 봅시다.
[청 태종이 인조에게 보낸 편지 ②]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皇帝)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인조)가 '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그 같이 말한 저의가 무엇이냐? 대저 누구를 황제로 칭하는 것이 옳은가 틀린가 하는 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天子)라도 외로운 필부(匹夫)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식으로 짐에게 말한다는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明)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를 한번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 된 자가 어찌 구하러 오지 않겠는가? 만일 명나라가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만백성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겠느냐? [『산성일기』58쪽]"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조선의 임금 인조는 만주 쥬신을 오랑캐들이라 세상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왕으로서는 편협하기 이를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인조를 포함한 당시 반도 쥬신(조선)들의 집권층의 생각이 이상합니다. 세상에 천자(天子)는 오직 한족(漢族)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숭상하는 유학의 기본도 모르는 행위입니다. 그러고도 이들이 유학(儒學)을 국시(國是)로 삼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이들은 중국(한족)의 종복(從僕)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습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만 새끼중국인 근성을 청산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동북공정(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에 대비하면 안 됩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새끼중국인 근성을 가진 자들이 조선 후기의 정권을 장악하여 중국[한족(漢族)]의 머슴 노릇을 하려는 기록들이 산처럼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어찌 씨[種]가 있을 것이며,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베 짤 때 귀족(貴族)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나아가 세상에 중화(中華 : 세계의 중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선 인조 시대의 정치 지배층들은 한마디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지요. 원래 유학에서 가르치는 바도 "원칙적으로는" 천자(天子)가 따로 씨[種]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원칙적으로" 유학의 기본은 누구든지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하면 천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죠.
제왕학(帝王學)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간이 다 제왕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인식입니다. 이것을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합니다. 즉 누구라도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격을 도야하여 군자(君子)가 되면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후일 청나라의 옹정제(雍正帝)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에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반한 화이론(華夷論)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합니다. 옹정제는 중화와 오랑캐는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보고 만주족도 중국의 황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옹정제는 황제(皇帝), 즉 천하의 군주가 되는 것은 혈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덕(德)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린 것이라고 강조합니다[小野川秀美, 「雍正帝と大義覺迷錄」『雍正時代の硏究』東洋史硏究會編 (同朋舍 : 1986) 309~321쪽].
그런데 말이죠. 인조나 당시의 집권층과 같은 편협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왜곡됩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청태종(김홍타이치)의 편지와 관련된 사건인 병자호란 당시 이 집권층들의 행태는 『산성일기(山城日記)』에 상세히 나옵니다.『산성일기』는 병자년 당시 왕을 수행한 성명 미상의 고위 관리(김상헌의 아들, 혹은 조카?)가 조선의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때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사료가치가 매우 높은 책입니다. 다만 이 책은 철저히 인조반정 세력의 시각에서 쓰인 책입니다.
병자호란은 지나친 소중화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새끼중국인들은 실질적인 수습을 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당시 조선(朝鮮) 조정(朝廷)의 모습은 가관입니다.
1636년 12월 16일, 청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에 당도하자 장수들이나 병사들은 겁을 먹어서 아예 싸울 의사조차도 없습니다[『산성일기』41쪽].
남한산성의 여러 모습. ⓒ김운회 | |
자기 가족들을 피란시키기 위해 아들을 피란지인 강화도 감찰사를 시킨 자도 있고, 그 자의 아들은 왕의 식솔들을 팽개치고 강화로 피난한 후 배를 내어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수들은 임금이 있는 지척에서 척화신(斥和臣)을 내놓으라 큰 소리로 떠들어대어 이를 승지(承旨)가 "도대체 어느 안전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고 말리자 군병(軍兵)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크게 노하여 장차 난동이 일어날 지경입니다.
인조(仁祖)는 국서(國書)를 보내어 청태종에게 잘못을 빕니다.
"제 나라가 대국(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형제의 나라가 되어 비록 땅을 나눠있어도 정(情)이 두터웠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것을 자손만대의 가없는 복이라고 했는데 그 맹세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 뜻을 거슬렀습니다. 제 천성이 유약하여 여러 신하에 속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즉 신하들에게 속아서 전쟁을 자초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청 태종이 황제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서 인조가 "이런 말을 조선의 군신들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던 기상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요. 원수처럼 대하던 청 태종에게 "자손만대의 가없는 복이라"는 둥 아부가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의연한 모습은 볼 수가 없군요. 그저 살기 위해 애걸합니다. 애초에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요량이었으면 아예 순사(殉死)를 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하지 말든가 해야지요. 이전의 그 높고 고결한 정신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정말 나라꼴이 갈 만큼 가버렸습니다. 그 위대한 반청(反淸)의 의로운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젠 감히 임금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알아서 기는" 조선의 신하들이 임금(인조)의 명도 없는데도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신하(臣下)를 칭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입니다.
"조선국왕 신(臣) 이종(李倧 - 인조의 휘)은 삼가 대청관온인성황제(청 태종)께 글을 올립니다. 신(臣)이 하늘에 죄를 얻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 척화(斥和 : 청나라와 전쟁을 하자는 주장)를 주장하는 신하들은 제 나라의 사대간(司臺諫)들이며,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 그 놈들의 죄입니다. 지난 해 그 자들을 모두 벌 주어 내쳤사옵니다[『산성일기』78쪽]."
그러자 이조참판 정온(鄭蘊 : 15679~1641)은 이 국서(國書)를 쓴 자를 죽이거나 내쫓아서 매국(賣國)의 죄를 밝히라고 핏대를 높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행궁(行宮 :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에 (청나라) 대포알이 날아들어서 3층 자리 기와들을 두들겨 부수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망(存亡)의 기로(岐路)에 있는데 참으로 점입가경입니다.
체찰사(體察使 : 전란시 임금을 대신하여 군무를 관할하는 임시직으로 재상이 겸직) 김류(金? : 1571~1648)의 행적은 더욱 가관입니다. 김류는 인조의 측근 중의 측근입니다(야사에 따르면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왕이 될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이 바로 김류의 아내라고 합니다). 청나라가 위장전술로 우마(牛馬)를 두고 가자 김류는 군사들을 내몰아서 싸우라고 독촉하나 군사들은 위장전술이라고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김류는 비장(裨將)을 시켜 병사들을 칼로 마구 찌르니 병사들은 할 수 없이 나가서 싸우다 순식간에 3백여 명이 전멸합니다. 그러자 김류는 전사자가 40여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면서 다른 장수가 호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남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이 전멸한 마당에 퇴각 깃발을 늦게 들었다고 초관(哨官 : 대대장급)을 베어 죽입니다[『산성일기』52쪽].
뒤에 김류는 자신의 애첩과 딸이 청나라에 포로가 되자 청나라 장수에게 "천금(千金)을 줄 터이니 빼내어 달라"고 조릅니다. 이 때부터 포로 값이 올라서 또 한번 조선은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산성일기』99쪽]..
조선의 국왕이라는 인조의 행동은 더욱 한심합니다. 청나라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인조는 스스로 왕의 의복을 벗고 천민(賤民)들이나 입는 청의(靑衣)를 입고 진흙 바닥에서 절을 합니다.
즉 청 태종이 황금걸상에 앉자 인조는 걸어 들어가 삼공육경(三公六卿)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절을 하려 하는데 신하들은 돗자리를 깔기를 청하지만 인조는 "감히 황제 앞에서 어찌 스스로를 높일 수 있겠는가?"라고 합니다[『산성일기』52쪽].
그리고 난 뒤 조선의 조정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삼전도(三田渡)에 세웁니다. 그런 후에 다시 또 북벌(北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부산을 떱니다.
삼전도비(三田渡碑). ⓒ김운회 | |
그리고 한국에서는 요즘도 이 병자호란을 두고서 "나라가 외침을 당했을 때, 이 임금이 당하는 치욕적인 장면을 보라! "고 핏대를 높입니다.
그런데 뭔가 지나치고 이상합니다.
인조(仁祖)가 청나라에 항복할 당시의 사건을 매우 극적으로 그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국사 선생님들이나 홍보활동에 종사하는 분들이 하나같이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인조를 위협하여 인조는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기에 인조의 머리는 피범벅이 되었고 옆에 있었던 신료들이 모두 피눈물을 흘렸다고 가르칩니다.
즉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종합해 보면, 인조가 한번 절하고 머리를 땅에 찧을 때마다 청나라 관원이 성의가 없고 머리를 땅에 박는 소리가 적으니 다시 하라고 하였고, 이를 지켜보는 왕자들과 신하들은 차마 처참한 광경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았으며 한참 후에 보면 아홉 번이 어느새 수십 번이 되고 뒤돌아선 임금의 이마엔 어느새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는 식입니다.
제가 학창시절부터 군대생활을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렇게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만 키웠지요.
그러나 어떤 공식적인 기록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당시의 공식기록을 봅시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만약 황제가 남한산성까지 오지 않았다면 그저 항복문서만 보내도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용골대(청의 장군)가 말하기를'황제께서 심양(瀋陽)에 계셨다면 (항복)문서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황제께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仁祖實錄』15年 1月21日)."
그리고 용골대(청의 장군)는 조선 정부에 대해 실제 군대들간의 충돌로 인한 패전 상황에서의 항복 방식(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너무 참담하므로 이 방식에는 따르지 말고, 그저 조선왕은 (황제 경호상의 문제 때문에) 군사의 호위나 왕의 위엄을 갖추는 행위는 하지 말고[원문에는 "위엄 있는 차림(용포)은 없애고"] 5백여 명의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항복하라고 주문합니다(『仁祖實錄』15年 1月28日).
그리고 실제로 항복한 날의 모습을 봅시다.
「상(임금 : 인조)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 칸(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인조)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
-『인조실록(仁祖實錄)』15년 1월 30일 -
당시 이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황제에 대한 예[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자 청나라 관리가 전하(인조)를 인도하여 단에 오르게 하고 서쪽으로 제왕의 오른쪽에 앉게 하고 칸(청태종)은 남쪽으로 앉아서 술과 안주를 내어 잔치를 베풀었다. 칸(청태종)은 전하(인조)에게 단비가죽[?皮(돈피)] 옷을 2벌 선사하고 육경과 승지들에게는 각각 1벌씩 선사했다[『산성일기』96쪽]."
이 기록은 앞서 본 『인조실록』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철저히 새끼중국인의 시각을 가진 (인조반정을 옹호하는) 사람이 쓴 글로 추정이 되기 때문에 위의 내용은 사실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청나라의 장수나 관원이 인조를 향해 모욕적인 언동을 했다거나 윽박질렀다거나 하는 일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보면 새끼 중국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인조(仁祖) 이후의 조선 시대는 얼마나 극심하게 역사를 왜곡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라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정작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패전의 책임을 져야할 권력자들은 오히려 북벌(北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온갖 역사 기록을 이상한 방향으로 호도하여 국민들의 적개심을 키워 그것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송시열(宋時烈)은 당시 삼전도비(三田渡碑), 즉 대청황제 공덕비의 비문을 쓴 이경석(李景奭 : 1595~1674)을 지목하여 또 공격하기 시작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116쪽 참고]. 송시열은 아마 끝까지 명나라와 의리를 지켜 전 국민이 모두 전멸 당하기를 고대한 모양입니다. 정히 그럴 의도라면 자기 홀로 나서서 순사(殉死)하면 될 일인데 왜 모든 국민을 다 죽이려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새끼 중국인들로 인하여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되니,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수습한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민중의 생활이란 비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도처에 민란(民亂)의 위기가 상존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仁祖)는 청에 대한 개인적 원한으로 새로운 국가 비전을 가지고 있던 자기 아들 소현세자 부부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으로 북벌이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이런 사람이 왜 청나라에 그 만큼 아유(阿諛)가 넘치는 국서(國書)를 보내고 비굴한 항복을 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의 쿠데타[인조반정(仁祖反正)]는 조선사(朝鮮史) 5백년의 가장 참담하고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었습니다. 쥬신의 역사에서도 불행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이었을 뿐만 아니라 쥬신이 곧추서는 데 결정적으로 실패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청나라는 쥬신의 문화를 철저히 수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조선이 그저 청나라가 믿는 대로 "조선은 만주 쥬신 부모의 나라"로만 가만히 있기만 해도 쥬신 문화(文化)를 수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으로서도 제2의 흥기(興起)를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에이, 그 일이 실제로 가능해?"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당시 만주의 인구가 극소수라서 대부분 만주 쥬신이 중국통치를 위해 중국의 중부까지 대거 내려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간격을 반도 쥬신들이 메워주었다면 만주 쥬신이 거의 소멸될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조선은 자연스럽게 만주의 고토를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면 반도 쥬신(한국)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주 쥬신(만주족)도 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조선의 새끼 중국인들이 반도쥬신(한국)을 "부모(父母)의 나라"로 부르던 만주 쥬신을 오랑캐 취급을 하면서 무모하게 굴다가 청나라의 정묘년 1차 침공(1627)을 받고 형제(兄弟)의 나라로 격이 떨어지더니, 병자년에 다시 2차 침공(1636)을 자초하여 이제는 아예 황제와 신하(臣下)의 격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어리석은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내부적으로 조선은 청나라를 철천지원수로 보고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1%도 없는 북벌(北伐)정책을 추진하지를 않나, 이제는 아예 "조선이 새끼 중국[小中華]"이라는 행태로 발전합니다. 그러면서 쥬신의 황혼이 깊어집니다.
이 사건을 쥬신의 큰 범주에서 한번 다시 볼까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1636) 때, 남한산성에 머무를 당시 백제의 온조대왕이 꿈에 나타나 인조를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뒤 2년 후에 인조는 엉뚱하게도 직산(稷山)에 있는 백제시조 온조대왕의 사당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인조는 조선(朝鮮)의 정체성(identity of dynasty)과 그 뿌리를 백제(百濟)에서 찾아서 백조 시조의 사당을 남한산성으로 옮겼던 것이라고 합니다(인조가 쥬신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아마 울구태나 동명성왕을 사당에 모셨겠죠. 온조왕이란 그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그저 소국의 왕에 불과한데 말이죠 : '백제는 없었다' 참고). 이후 정조는 사당의 이름을 숭렬전으로 하고(1795) 국가 주도로 제사를 올립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109쪽~110쪽].
즉 인조 이후 조선(朝鮮)은 백제(百濟)의 계승자임을 표방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지금까지 저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이면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후금, 즉 청나라는 바로 신라계(新羅系)이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금나라를 건국한 시조가 신라 출신이라는 점을 이미 말씀드렸죠?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라고 하기도 하고, 신라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신라(통일신라)가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대금국지(大金國志)』는 금나라의 시조(완안부의 시조를 의미)가 본래 신라에서 왔고 성씨가 완안(完顔)이었다고 하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금사(金史)』와 『요사(遼史)』가 신라와 고구려를 혼동했다고 지적하면서 신라의 왕의 성씨인 김(金)은 이미 오랜 세월을 걸쳐 전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이 신라 왕성인 김씨의 성을 따라서 나라 이름을 금(김)으로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金之始祖 初從高麗來 按通考及大金國志云 本自新羅來 姓完顔氏 考新羅 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往往 二國互稱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그리고 김누루하치를 비롯한 청나라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바로 금나라의 시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金始祖居 完顔部 其地有白山黑水 … 與大金正同 史又稱金之先出靺鞨部古肅愼地 … 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爲金曰愛新 可爲金源同派之證 :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그리고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自天聖後屬契丹世襲節度使兄弟相傳 其帥本新羅人 號完顔氏 女眞服其練事以首領推之自哈富 … 哈富生 … 次太祖次太宗 … 國號大金 金始祖 本從 新羅來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자 이상의 사실들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지나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진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나 해야 됩니까? 반도쥬신(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마치 발해와 백제 이후 한반도 역사는 쥬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역사의 섬'처럼 떠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가지고 있는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관련성을 도외시하고 너무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결과입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다소 지나친 듯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쥬신의 역사를 쥬신의 관계사를 토대로 보면, ① 삼국시대 이전 : 고조선·부여 → ② 삼국시대 : 고구려(반부여계)·백제(부여계)·신라(선쥬신[흉노] + 고조선 + ?)·가야(선쥬신[흉노?] + 부여계 + ?) → ③ 남북국시대 : 통일신라·발해(고구려계)·일본(백제계 = 부여계) → ④ 고려초기 : 고려(고구려계)·금(신라계·고구려계 연합)·일본(부여계) - ⑤ 고려후기 : 고려(고구려계)·몽골대제국(元 : 고구려계) - ⑤ 조선 초기 : 조선(신라계·부여계 연합 - 반고구려계)·일본(부여계) - ⑥ 병자호란 이후 : 조선(부여계)·청(신라계·고구려계 연합)·일본(부여계) 등으로 쥬신의 정치관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북위(北魏)와 요(遼 : 거란) 등 지나치게 한화(漢化)된 국가들을 제외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야하겠지만 일단 제가 개략적으로 나눠본 것입니다. 따라서 좀 더 깊은 연구가 진행되면 제가 하는 분석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저 복잡한 쥬신의 관계사의 가장 중요한 축은 아무래도 부여와 고구려라고 봐야겠지요. 이들 쥬신 역사의 호수를 거쳐서 몽골·만주인·일본인·한국인들은 몽골 쥬신·만주 쥬신·반도 쥬신·열도 쥬신들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물론 쥬신의 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고구려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거란(요나라)이 한반도에 침입(993)했을 때 고려가 집어든 카드도 바로 고구려지요. 어떤 의미에서 고구려는 낱낱이 흩어져 가던 쥬신들을 연결해주는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장군 서희(940~998)는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므로 거란이 점령한 땅도 사실은 과거 고려 땅이라고 합니다. 즉 단순히 영토만 점령하는 것으로 역사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 점을 좀 더 봅시다.
고려 왕조 건립의 주체세력은 개성·평양·정주 등 조선반도 중북부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있으며 고구려에 대한 향토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 993년 (성종12년) 요나라의 침략이 있었을 때, 서희는 요나라 장군 소손녕과 회담을 벌입니다. 당시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하고, 평양을 서경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로써 이 두 국가는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고려의 압록강 이남의 영토권을 승인하게 됩니다. 쥬신의 문제에 있어서 고구려는 마치 문제 해결을 위한 블랙박스(Black Box) 같이 보입니다.
고려의 태조(왕건)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고구려(발해)가 멸망(926)한 후 대고구려(발해)의 마지막 태자를 왕족(王族)으로 받아들이고 수만 명의 유민(遺民)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을 지적할 수 있겠군요. 발해 역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는 발해와 고려이죠.
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청나라의 황족들은 본래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 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지요(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뿐만 아니라 금나라는 말갈과 옛 숙신의 땅이기 때문에 바로 고구려의 영역 속에서 건설된 것이지요. 금나라의 태조는 "여진과 발해는 모두 물길(勿吉)에서부터 나온 한 집안"이라고 말합니다(『金史』卷1 本紀1). 결국 금나라는 발해(대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위에서 금(금나라·청나라)을 고구려와 신라계의 연합세력으로 본 것이죠.
그리고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칭기즈칸의 지위도 최초에는 고구려 족장, 또는 고구려의 왕을 의미하는 '자오드 코리(札兀忽里)'였습니다(『몽골비사』134절). 당시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제후급인 '제후타오(招討) 코리(忽里)'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코리족의 족장(칸)이라는 것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고구려계로 분류한 것이고 이들이 고려와 동족의식을 가짐으로 해서 원나라 때는 고려 - 원의 밀월관계가 지속된 것이고요.
일본의 경우 야마도(大和) 왕조의 쇠퇴 이후 나타난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정권을 열어간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 : 1147~1199)도 백제인(남부여인)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 858~876)의 직계후손이었습니다[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 : 2000) 34쪽]. 그리고 미나모토 가문의 직계 손이 끊이자 일시적으로 미나모토의 처족(妻族)이었던 호조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1305~1358)로 그는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 정권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스스로 미나모토와 같은 씨족임을 밝히고 그 계승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부여계로 면면히 이어진 것입니다.
현재 일본(日本)에서는 정치(政治)를 '마쯔리고도(まつりごと)'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특이한 말이기도 합니다. 즉 원래 이 말은 제사(祭り事)에서 나온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이 정사(政事), 즉 정치(政治)라는 말로 전화된 것입니다.
결국 '마쯔리고도(まつりご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하나는 일본의 총리대신(수상)을 위시한 실제로 정무를 담당하는 신하들이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정(政 : 정치)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천황이 신(神)을 다시 모시는 것을 제(祭 : 제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석학 쿠메 쿠니다께(久米邦武 : 도쿄대학 교수)에 따르면, 이 제사는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죠[久米邦武, 「神道は祭天の古俗」『史學會雜誌』1891].
그리고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합니다.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무수히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입니다. 일본인들은 성명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로 높여 부릅니다. 바로 쥬신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죠. 참고로 조선의 왕조도 목기(木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죠? [놀랐죠? 이제는 일본과 한국의 은원관계(恩怨關係)를 좀 아시겠죠?]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아직까지도 쥬신의 텡그리옹군[단군왕검(檀君王儉)]의 전통, 즉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본의 수상도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천황의 신하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런 물고 물리는 복잡하고 유기적인 쥬신의 역사에도 황혼이 깊어집니다. 쥬신의 쇠퇴에 대한 책임은 앞으로도 중요한 연구의 과제입니다.
(4) 유조변(柳條邊)
만주 쥬신들은 쥬신의 불꽃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에는 틀림없지만 쥬신의 역사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쉽게 말해서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중원으로 만주인들이 대거 들어가면서 만주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황폐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여기에 중국으로 들어간 만주족들도 심각할 정도로 한족화(漢族化)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청나라 조정은 쥬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극소수의 인구로 한족(漢族)의 강력한 동화작용(同化作用)을 견디기는 힘이 들었습니다.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던 청나라 조정은 만주 쥬신들이 중국에 동화되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따지면 최소 10만에서 최대 1백만이 제대로 안 되는 만주 쥬신이 거의 수억(數億)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지배해야 했으니 그 고충이 오죽 하겠습니까? 상당한 부분의 중국 문화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중국을 통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청나라 조정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들의 특성, 즉 중국의 문화가 세계 최고라고 하는 '중화사상'과 "중국인들에게 패배는 없다.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불패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책에도 예외 없이 청 태조에 대해서 그저 '누루하치'라고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한국의 역사책에서 중국 황제를 이름만 부르는 예를 아직은 못 보았습니다. 어느 책을 뒤지어 봐도 명나라 태조(주원장 : 朱元?)를 '원장(元?)'이라고 부르는 예는 못 보았습니다.
만주 쥬신(청나라)은 그 수 자체도 극소수인데다 청나라 건국 이후 중국을 경영하기 위해서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입관(入關)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쥬신의 본향인 만주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땅으로 바뀌고 맙니다(『皇朝經世文編』).
이것은 쥬신의 역사에 가장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우물도 말랐으며 비옥한 경작지들은 모두 '황무지(荒蕪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잘 지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황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튼튼한 벽조차 무너집니다. 저는 걸어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많이 다녔는데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주인이 떠난 곳엔 이상하게도 그 튼튼한 담벽들도 무너져 내린 경우를 말입니다. 그리고 흉가(凶家)처럼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인간의 기운도 사라지게 되어 땅이 우리에게 주던 어떤 친근감(親近感)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꼭 고향(故鄕)을 지켜야 하나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뿐이지요.
청나라 조정은 한족(漢族)들이 절대로 만주의 성역(聖域)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저한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시합니다. 그래서 천리에 이르는 거대하고 긴 유조변(柳條邊 : 버드나무 방책)을 설치합니다. 봉금정책을 쓴 의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는 ① 쥬신족들이 중국인(한족)들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② 중원에서 패망하게 되면 언제든지 고향인 만주로 돌아가려는 목적 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봉금정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조변(柳條邊)입니다. 이 유조변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봅시다.
청나라 때 설치한 유조변(柳條邊). ⓒ김운회 | |
청나라 조정은 한족들이 동북지방(東北地方 : 만주)에 왕래하지 못하도록 1667년 이후부터 산해관·희봉구 등 9곳에 변문을 설치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경계로 삼아 한족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이 버드나무 방책은 산해관을 시작으로 동북으로 흥경(興京 : 씽징)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르는 약 975km에 이릅니다. 이후 다시 345km의 버드나무 방책이 다시 만들어집니다. 청나라는 유조변을 통하여 쥬신의 고향이 한화(漢化)되는 것을 막고 몽고의 유목구역을 확정하여 이들이 요동의 농경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청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철수할 경우를 대비한 것입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이 만주로 들어오는 것을 엄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많고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버드나무를 심었을까요?
그것은 버드나무가 바로 쥬신의 신령스러운 나무, 즉 신목(神木)이기 때문이죠. 한국(Korea)에서도 무당이 귀신을 쫓을 때 버드나무를 사용하고, 사람이 죽으면 버드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입에 물리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부여나 고구려의 시조의 어머님이 유화부인(柳花夫人)으로 역시 버드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에 있어서도 버드나무는 신목(神木)입니다. 버드나무를 통해 복을 비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만주족(만주 쥬신)입니다. 금과 후금을 건국한 만주족의 삼신할머니인 포도마마(佛多??)도 버드나무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이 버드나무는 진통제나 마취제의 기능을 가진다고 합니다. 몽골계 민족의 발원지인 흑룡강 중상류 일대나 동몽골 일대에는 버드나무 이외의 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이 버드나무 방벽, 즉 유조변(柳條邊)을 보면 현재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중화민족의 일원이 아니고 이들 고유의 정치 문화 역사적인 영역이 존재함을 명백히 한 것이니까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궁금할 것입니다. 이 유조변이라는 것이 정말로 의미가 있나 하는 점이죠. 만주족들이 정말 아무런 미련 없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 말입니다. 상당수의 만주족(滿洲族 : 만주 쥬신)이 현실적인 지위와 부를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 한족화(漢族化)된 경우도 많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의문들을 정확히 해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족(漢族)에 의해 청나라가 망했다기보다는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죠. 바로 몽골 원나라의 경우입니다.
몽골 대제국 가운데 중국을 통치했던 원나라가 멸망했을 때 몽골은 중국에 대한 일체의 미련을 버리고, 한족(漢族)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게 "그저 몽골의 초원"으로 돌아가더랍니다.
당시 한족(漢族)들은 몽골이 "아무런 미련 없이" 그저 초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기가 질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현하여 '원(元)의 북귀(北歸)'라고 했습니다.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죠. '북귀(北歸)'란 동물의 습성을 표현하는 말로 가을에 날아온 기러기가 봄이 되면 북으로 날아가듯이 몽골은 그저 북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이죠(물론 각종 귀금속들은 가지고 갔겠지만요). 이 같은 속성은 『한서(漢書)』에 기록된 흉노의 속성과 그대로 일치합니다[司馬遼太郞, 『몽골의 초원』(고려원 : 1993) 88쪽].
쥬신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에 비하여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병(騎兵)과 활쏘기는 중국인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군사적인 탁월성으로 중국을 지배했다고 생각합니다.
쥬신이 초원을 보호하고 한족(漢族)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했던 이유는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땅이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힘의 원천이 되는 대초원을 한족들이 차지할 경우 자기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점을 좀 알아봅시다.
(5) 쥬신의 영광과 좌절
청나라 지도부는 만주 쥬신이 극소수의 인구로 중국을 지배한 것은 말 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에 능하기 때문인데, 만약 한족(漢族)이 만주로 오면 그들도 이 같은 무예를 갖추게 되어 중국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청나라 역사서 도처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건륭제(乾隆帝)는 "성경(盛京)과 길림(吉林)은 우리 조정이 일어난 용이 흥하는 땅[興龍之地]인데 한족이 유입되면 만주의 풍속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東華續錄』48)"라고 하여 영구히 한족들의 이주를 금하여 봉금정책을 강화합니다(『吉林通志』1「聖訓志」). 여기에는 농업이나 장사에 서툰 만주인들이 사업수완이 좋고 땅 개간에 능한 한족(漢族)과 경쟁이 될 수 없다는 생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건륭제. ⓒ김운회 | |
그러나 쥬신의 전통을 지키려는 청나라 조정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한족(漢族)들은 끊임없이 만주로 유입됩니다. 청나라 조정은 궁여지책으로 만주 쥬신을 다시 이주시켜도 보지만 이미 대세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제 만주 쥬신은 심각할 정도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만주는 비어 있었는데 이 지역을 한족들이 대거 밀려오고 중국 땅에 있던 만주족들은 원래의 강건한 기풍도 약화되어 사실상 중국인이 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죠.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만주족이 급속히 한족화(漢族化)되어버리자 만주족의 자제와 결혼한 몽골인들조차도 다시 한족화(漢族化)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朝鮮) 왕조는 철저히 중국화(中國化)를 자청하고 형제들을 오랑캐로 부르고 천시합니다.
이제 쥬신은 몽골과 만주에서 급격히 쇠퇴·사멸하고 있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여기에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내몽골에서 대량으로 쥬신족들을 학살하고 한편으로는 한족(漢族)을 만주 전역에 대대적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이제 쥬신의 미래는 기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고유 영역과 쥬신의 영역(알타이 동부 - 몽골 - 만주), 티벳 등 청나라가 확장했던 영역들이 모두 현대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동북공정(東北工程 : 대쥬신 역사 말살)'이라는 프로젝트가 필요하게 된 배경이 되었지요.
쥬신의 본고향인 요동과 만주가 이제는 쥬신의 무대에서 거의 사라져갑니다. 대부분의 만주 쥬신들은 사실상 한족(漢族)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족(漢族)들은 가급적이면 다른 민족이 한족과 조금만 피가 섞여도 한족으로 포괄적으로 부르는데, 흉노의 경우는 2백만이 되지 않았고 만주족은 (최소로 잡으면 10만) 1백만도 되지 않는데 굳이 이를 잘게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국 적(상대)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제압해버리는 소위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전략(Divide and Control)"의 일환입니다.
그 결과 세월이 흐를수록 한족(漢族)들은 나라가 망해도 점점 그 영역이 확대되는 반면에 주변민족은 중국을 통치해도 그 수가 줄어들거나 동화되기 일쑤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면 거의 대부분이 결국은 한족(漢族)에 동화(同化)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죠. 현재 중국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만주족은 겨우 20만 정도가 명맥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인구 13억 가운데 94% 정도가 한족이고 나머지 6%에 좡족·몽골·휘·마오·조선족 등 55개의 민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좡족이 전체 인구의 1.33%이고 가장 적은 종족은 2천명이 채 안되지요. 참고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의 화합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수십만 명의 몽골인들을 학살하고 쫓아내어 현재 내몽고자치주에서 원주민이었던 몽골인은 6%에 불과하다고 합니다(티베트도 대동소이하지요).
이제 우리가 쥬신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는 몽골의 2백~3백만, 만주의 1백만 이하(어떤 전문가는 쥬신의 특성을 제대로 유지하는 만주인은 20여만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7천만, 일본의 1억 5천만 등으로 이제는 주로 한국과 일본 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거의 원수지간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불화의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일본에 있습니다. 특히 일본은 임진년의 국제전쟁(1592)을 도발했고 36년간 한국을 강점(强占)하여 국체를 없앴습니다. 쥬신의 역사에서도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일단 일본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결단을 내려 진심으로 사과하고 한국은 기꺼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화합(和合)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그나마 궁벽하게 웅크리며 남아있는 마지막 쥬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두 나라는 앞으로 쥬신의 보존과 회복이라는 원대한 문제를 생각해야지 지엽적인 작은 문제들에 집착하여 쌍방이 국력을 낭비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6) 쥬신의 황혼
찬란한 역사를 뒤로 하고 쥬신의 황혼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제가 쥬신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즉각적으로 민족적인 벨트를 구성한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의 공유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여러 가지의 원인으로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 분리되어 민족적 동질성을 많이 상실했다고 한다면 단순히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 운동의 당위성도 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찾아가는 행위 또는 그 역사적 진실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삼국지 바로읽기』를 통하여, 『나관중 삼국지』가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중화사상을 오히려 우리가 옹호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듯이 지난 수백 년간의 한국사의 교육방식이나 이데올로기의 옹졸성을 지적하는 것은 시대적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쥬신이 고유하게 가진 동질성을 회복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꿈만은 아닙니다. 만약 과거처럼 중국만이 아시아의 패자인 상황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현대는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많은 다양한 변수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동아시아에는 오직 한족(漢族)만이 남게 되는 이 현실에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보존하려는 것을 지나친 생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같은 쥬신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은 범쥬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협소한 일본이라는 섬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자신의 뿌리를 지켜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일본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원죄(原罪)를 지고 있기 때문에 범쥬신적인 전통을 부활시키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일본은 2차 대전에 패한 후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 : 경제학)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 정치학),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 역사관) 등을 중심으로 일본의 새로운 부활을 희망했습니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합니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에 대하여 면죄부를 줌으로써 다음 세대의 운신의 폭을 넓힙니다.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는 비교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일본 사회의 전근대성을 철저히 추적함으로써 일본이 세계 경제대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학문의 천황(學問の天皇)이라고도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를 수립한 '계몽'의 기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쓰카 히사오·마루야마 마사오·시바 료타로. ⓒ김운회 | |
특히 이 가운데 쥬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몽골어를 전공한 시바 료타로인데, 그는 이 문제에 무관심하였고 오히려 열도 쥬신의 편협한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오규 소라이(荻生?徠 : 1666~1728)와 과거 일본 근대화의 영웅들인 사까모토 료마(坂本龍馬)·요시다 쇼인(吉田松陰)·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일본은 범쥬신의 전통을 회복할 만한 학문적 전통이 새로이 수립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쥬신의 전통이 회복될수록 일본이라는 구조가 범쥬신의 구도 속에 함몰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일본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안주하여 사까모토 료마(坂本龍馬)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안주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시대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사상이나 사상가도 없었다는 것이 반도 쥬신(한국인)의 문제입니다. 그만큼 많은 문제들이 반도쥬신(한국)에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스스로의 인식의 틀로써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서는 오직 중국을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그 시각에서만 세상을 보더니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한국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시각에서 보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적 시각에서만 세상을 또 봅니다. 도대체 한국인(Korean)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궁구하는 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쥬신의 황혼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에서 나와야 합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일본은 쥬신적인 전통보다는 일본 고유의 새로운 역사공동체를 모색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어 중화 패권주의와 그의 부산물인 동북공정에 "실질적으로" 대항하는 세력은 남한 지역의 극소수 지식인에 불과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별로 남지 않은 쥬신이 13억 한족(漢族)과 대항하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정말이지 동아시아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쥬신의 위기가 이처럼 심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김운회/동양대 교수
출처 : 학성산의 행복찾기
글쓴이 : 학성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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