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 한국인이 만든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법륭사.
1993년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일본에서는 최초로 등록되는 등,
세계적 불교문화의 보고로서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법륭사.
그 건축양식이 고구려와 백제 양식이다.

-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金堂)벽화를 베낀 그림 -

법륭사의 본존을 안치한 성서로운 전당이 바로 금당이다.
유명한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金堂)벽화를 일본인이 베낀 그림. 실제 그림은 1949년 불나서 타버림.
<실제 담징의 금당벽화>는 위 그림보다도 훨씬 더 깊이 있는 멋이 있었을 것임.
담징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 등의 제작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 승려 호조[法定]와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법륭사〔法隆寺〕에 기거하면서, 오경(五經)과 불법(佛法) 등을 강론하고 금당(金堂)벽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 구세관음상 -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모습을 본떠 제작.(일본국보)
- 백제관음상 -
법륭사에 전하여지고 있는 백제관음상(아스카 시대-일본국보-)
일본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최재석(일본고대사의 진실 - 1988 )에 의하면 법륭사의 창건주체에 대하여 알 수 있다.
' 법륭사 (호류지)는 670년에 재건된 것으로
그 즈음 671,679,681,685,687,752년에 신라로부터 가사,불상등의 불교용품을 수입하여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재건 호류지의 조성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불교용품은 만들 수 있는데, 절은 세울 수 없다던가
혹은 그 반대인 논리는 있을 수 없다.
불가분 하나의 불교문화를 형성하는 것이고 크게는 같은 범주의 기술인 것이다. (138쪽) '
그리고 그 당시의 일본건축은 맨땅에 기둥을 박는 방식으로 나무가 썩게 되어 20~30년마다 개축을 필요로 하는데 반해 ,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초석입주(礎石立柱) 방식으로 일본에 처음으로 지워진 것이
법흥사-法興寺(588~596. 배제 위덕왕이 기술자를 보내 짓게 한 절. 지금은 飛鳥寺(아스카데라)라고 불리고 있음)였다.
8세기 중엽 세워진 호류지 동원(東院)이 맨땅에 기둥을 박는 방식이므로 그때까지도 독자적으로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방식>의 가옥은 지울 수 없었다...
(143쪽 등)
일본의 불상을 보면 이른바 '아스카'시대까지는 금동불이 존재하고
8세기이후에 해당하는 전반기에는 금동불이 없어지고 목조불시대가 되었다가
다시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와서 금동불의 시대가 된다.
'나라'시대까지의 금동불이 돌연 단절된 것은 금동불의 재료(금속, 밀랍, 안료)를 입수할 수 없는 것과 동시에 그 만드는 기법의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세기중엽부터 7세기말까지 일본은 시종 한국불상을 얻거나 구매한 점.
7세기까지는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뛰어난 여러 불상이
돌연 8세기 이후에는 단절되어 버린 점.
재일본 고대 금동불 유형은 거의 한국 고대불과 동일 내지 유사한 점..
불상제작의 재료가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은 점.
그리고 당시 일본은 불경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
등으로 보아 일본 고대 금동불은 한반도에서 건너 간 것이라 알 수 있다. (146~148쪽)
'사카모토 타로'는 저서 '성덕태자' 에서
'최근의 법흥사 터의 발굴결과에 따르면 탑을 둘러싸고 동서북위 3면에 금당이 있고
회랑이 그것을 돌며 ,남으로 중문을 열고 ,북으로 강당을 둔 배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淸岩里廢寺에서 볼 수 있는 가람배치와 같은 것으로,
경내에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은 부여출토의 것과 비슷하여
백제도래의 공인이 만든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라 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최소한 적어도 백제계 공인이 만들었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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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일본 국보 '법륭사 구세관음' 백제 제작 입증 고문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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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이면서 미국의 동양미술사가인 페놀로사(1853∼1908)가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일본 나라 법륭사 유메도노 소장 '구세관음'이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모습을 본떠 제작한 것임을 증명하는 일본 고대문서가 공개됐다.
일본 고대문화사 전공인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는 3일 6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구세관음'이
백제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이 부왕인 성왕을 추모해 만들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사찰 소장 고문서의 하나인 '성예초'를 공개했다.
이 고문서는 일본 응경연간(1394∼1427)에 호류지 스님이었을 가능성이 큰 성예(성예.1350∼?)라는 사람이
일본 고대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쇼토쿠태자(성덕태자)의 사적을 기록한 것.
그런데 이 문서에는 '위덕왕이 부왕 성왕을 연모하여 그 형상을 본떠 존상을 만드나니 구세관음이 바로 이것이다'(고위덕왕 연모부왕 상소조현지존상 즉구세관음상시야)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성예초'에는 이 대목과 함께 '위덕왕'의 생전 이름인 '여창'이라는구절이 여러군데 등장하고 있어
이 관음상이 위덕왕이 제작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고 홍교수는 말했다.
이와관련, 불교미술사 전공인 동국대 사학과 김상현 교수는 홍교수가 제공한 이 고문서를 토대로
지난달 2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미술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
'백제 위덕왕의 추선불사와 그 유적.유물-일본 몽전관음의 백제 성왕 유상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김교수는 '성예초' 기록으로 볼 때 이 관음상은 위덕왕이 553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해 전사한 아버지 성왕을 위해 그 모습을 본떠 만든 뒤 일본에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몽전관음'이라고도 일컫는 높이 178.8㎝인 이 구세관음상에 대해 대부분의일본 미술사학자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세계적인 작품'이라며 백제 작품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저명한 동양미술사가인 페놀로사는 1884년 이 관음상이 '조선미술의 위대한 보물','세계 무이의 조상'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연합]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