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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마 왕릉의 미스테리

monocrop 2006. 12. 15. 22:39

이 문제에 앞서 우리는 기본 역사적 개념부터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물이 현재의 국가 영토안에서 발굴되었다고 다 그들 것이다는 역사적

해석은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이 문제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지나의 동북공정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니 말입니다.

현 만주가 지나의 지금 통치 영역이라고 해서 고구려는

그들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물론 지방정권 운운하면서.

티벳이 그들의 통치 영역이라고 해서 그리고 얼마전 산동

에서 기원전 3000년 경의 고대유적 발굴- 이것은 현재 그들의 대학 교양

으로 그들식으로 만든 ' 중국 통사' 라는 책에서도 발해만 근처의 소호씨

의 지파가(동이족) 내려와 하북성과 산동성에 살다 이후 내륙으로 와

서 상(은)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대적으로 발해만의 동이 홍

산 문화가 있었던 시기이며.. 앞서도

언급했지만 난하 근처의 장도에는 백조관이라고 해서 우리 동이 (고조

선)의 청동수레와 새를 숭상하는 수많은 새들의 형상이 전시되어 동이

라는 분명한 글귀와 함께 말하고 있으며 산해경에서는 발해만 근처에 조

선이 위치함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이 수천년 이후 진한족이라는

그들 세력의 주체 이전자로 말하여 지나 역사라 말할수 있는가입니다.


달리 말하면 1만 5천년전 소도리 볍씨의 발굴로 한반도 그 지역 농경의

주체자가 과연 현 고조선으로 이어 질수 있는 우리의 정치적 주류라고

말할수 있는가. 물론 한반도가 그 만큼 일찍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기

후 조건을 갖추면서 문명이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매우 빠른 시기에 일어

났음을 알수 있는 근거는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토착세력이 이후

역사적 부분에서 한 구성원으로서 전체적 한국의 문화의 한 부분에 영향

을 주고 역사를 만들어 간 세력임에도 부정할수 없겠지요.

미국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지나처럼 현영토가 자신의 것이라고 토착

인디언의 역사를 자신의 것이고 억지 주장은 하고 있습니까

지금 일본에서는 우리백제 700년을 말하면서 도대체 아무리 패망의 국

가라는 말 몇마디로 한반도상의 백제의 그 빈약한 유물을 근거로 말하

는 모양새에 과연 백제라는 나라가 있는가라고 도리어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기존 개념과는 달리 우리의 백제가 라동현 선생님의

정사 연구처럼 본시 발해만에서 시국하여 이루어 졌다면 도리어 한반도

에서 나오는 그 당시 유물들을 지나유물이라는 식이 맞을수 있는지

다시금 고려해 보아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 현 무령왕릉의(?) 이해 할수 없는 문제들>


한반도 공주에서 발굴된 현 무령왕릉이라는 불리지는 유적이 백제

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안에 지석이 발견되었고

그 글귀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우선 삼국사기와 비교해서 알아 봅시다.

① 삼국사기 백제본기

- 익왈 무영왕 휘 사마(謚曰 武寧王 諱 斯摩)
- 출생 기록없음
- 즉위 501년
- 523년 계묘(癸卯) 5월 왕이 붕(崩)

② 지석(誌石)
- 칭호 사마왕(斯麻王)
- 출생 462년
- 즉위모름
- 523년 계묘(癸卯) 5월 7일 왕이 붕(62세)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죽은 사망일이 일치 한다는 점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일치성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견적 모양새와는 달리 내용적, 정황적으로는

백제 무령왕이라고 보기에는 무척이나 이해 되지 않는 부분들이

나타납니다.

무령왕을 잠시 소개하며

현재 우리가 막연히 대륙 요서 경략한 왕으로 알고 있는

백제 후대 전성기인 동성대왕의 둘째 아들인 25대 왕으로(501-523)

휘는 사마, 융 시호는 여륭으로 부왕(아버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첫째 위에서 언급했듯이 논란이 되는 부분이 사서의 사마(斯摩)"와 지석

의 사마(斯麻)에서 마의 한자가 다르게 나타나는 문제이다.

사서의 마는 갈거나 닳아지는 마이고 뒤의 마는 삼마의 글자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뜻에 상관없이 음만을 빌려 사용하는 이두식

- 이부분의 연구를 보면 고구려와 신라의 이두방식은 동일하다고

한다- 이라는 표현을 빌린다고 해도 과연 대국의 통치자의

이름을 다른 글자로 혼돈해서 남겨 놓을수 있는지의 의문이

들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이 부분이 나의 가장 이해 되지 않는 부분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처럼 당신 이름이 뭐요 하면 김 아우개요처럼 성명을 같이

사용하지만 사서에서는 엄격히 성과 이름의 의미인 휘(諱)라는

것을 구분해서 기록한다. 가령 성은 고이며 휘는 주몽이다처럼

그런데 이 휘라는 글자의 뜻을 보면 많이 사용되는 의미가 꺼리다

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바로 제왕의 이름을 무슨 일반

평민모양처럼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왕의 경우는 후대에 반드시 시호( 그의 행동과 업적에

맞추어)나 묘호(제사시의 칭호)등을 사용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광개토 태왕이나 장수왕. 기타 세종대왕은 시호이며

법흥왕을 지증왕으로 함은 묘호라고 부른다.

하여튼 광개토대왕비문의 초기 원문에서도 보이듯 추모왕이나 유리왕

이라는 문구가 앞서에서 고구려 건국의 설명을 위해 휘를 언급하는

모양새는 있지만 실제 그 본인의 지석에 휘를 대동해서 왕으로

지칭하는 전례는 있을수 없는 왕가의 예법이다.

이는 마치 장수태왕을 거련왕 거련왕, 세종대왕을 자왕

자왕하고 부르는 것과 같은 부덕한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미 우리도, 학계도 알기에 무령왕릉이라고 그 시호로

지칭하지 본 원문의 사마왕릉으로 아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마왕의 명칭은 휘라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르는

모양새가 나옵니다.

그리고 소진철 교수가 방문한

광서장족자치구에 있는 옹령현 백제향 사람들은

"우리는 오래전 산동성 백마강에서 온 사람들"이라 하였는데

조선일보 12월 11일자 광서장족자치구에서 발견된 고분을

보면 기원전 한나라 고분이라고 하지만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왕릉 내부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연관성에 관심이 가지는

부분이기도 하며 차후 심도 있는 우리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공주에서 발굴된 사마왕(斯麻王)에 대한 지석(誌石) 연구 >


(사마왕릉 내부 전경)



(사마왕 지석)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백제 사마왕이 62세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12일에 올려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復終居喪在西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병오년 12월 백제왕대비가 돌아가시니 서방에 사매장했다가
기유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묘를 만들었다.

錢日万文右一件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
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백제 사마왕은 前其件(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의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를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 : 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세상의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번역 : 학술원논문집 1972년 11호, 백제문화 1991 제 21집 참고)

☞ 癸卯---523년, 乙巳---525년, 丙午---478년, 己酉---529년

김성호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 의하면

백제의 웅진도읍은 63년간(475-538)에 불과함에도
공주읍을 중심으로

- 송산리
- 주미리
- 교촌리
- 신기리
- 폐목리 일대에

수백기의 고분군이 집중되어 있으니 어떻게 설명 할수 있을까 ?
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 관련사진 >

▒ 무덤내 유물위치도


▒ 지  석


▒ 오수전




< 분  석 >


1. 출생, 즉위, 사망 관계에 대한 기록

① 삼국사기 백제본기

- 익왈 무영왕 휘 사마(謚曰 武寧王 諱 斯摩)
- 출생 기록없음
- 즉위 501년
- 523년 계묘(癸卯) 5월 왕이 붕(崩)

② 지석(誌石)
- 칭호 사마왕(斯麻王)
- 출생 462년
- 즉위모름
- 523년 계묘(癸卯) 5월 7일 왕이 붕(62세)


2. 삼국사기 분석


(1) 지 명 : 고구려와 분쟁지명

수곡성 마수성 고목성 장령성 횡악산 가불성 원산성 위천 등이며
(水谷城 馬水城 高木城 長嶺城 橫岳山 加弗城 圓山城 葦川)
현 한반도 지도상에 없음

신라와는 분쟁 기록 없음

(2) 일식(日蝕) : 516년 3월 1일(백제에서 관측한 일식 26개중 무령왕시대 일식기록)

일식 기록 하나로 관측지를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볼수 있는 지역을 참고하기 위해 소개한다
한반도 전체와 중국양자강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볼수 있다.
☞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제공




(3) 대수(大水) : 512년 5월

- 한반도에서 5월의 대수는 이례적인 일이면 가능하다.
- 중국에는 그 가능성이 한반도 보다 높다고 한다.





(4) 위(魏)와 백제전쟁(488년) 및 개로왕(△) 시대지명




(5) 조공

512년 4월 및 521년 11월에 양(梁)나라에 사절보냄
양나라에서 같은 날자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양국간 거리가 1개월 이내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6) 21년(521) 12월 양(梁)고조는

백제왕을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을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다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으로 삼다라고 하여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몇자의 수정"이 있다.



3. 斯麻王陵과 誌石 분석



(1) 삼국사기 무령왕의 휘 "사마(斯摩)"와 지석의 "斯麻(斯麻)"의 차이점은 "마" 이다.

발음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이두문 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왕의 칭호를 문자가 틀리게 쓰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양서에는 여융(餘隆)이라는 이름밖에 없다.

(2)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라는 직함은 같다.

삼국사기와 내용이 같다.
삼국사기에는 진동대장군과 영동대장군(鎭東大將軍과 寧東大將軍)을 같다고 했다.

양서에는 보통 2년 12월에 鎭東大將軍을 寧東大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3) 사망년대와 월이 같다.

사망년월이 같다는 거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4) 삼국사기에는 무령왕능의 위치 기록이 없고, 사마왕릉에는 접 한 두개의 능이 있다.

고구려 초기와 신라의 왕릉은 어디에 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에는 의자왕릉을 빼고는 단 하나의 왕릉위치에 대한기록이 없다

또 한 보통 경우 왕릉주위에 다른 능이 있다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사마왕릉에는 붙어서 두개의 능이 있다는 것이 예외이다.

☞ 검은점 위 가는 사마왕릉이고 그 전면 약 20미터에 두 개의 묘가 나란이 위치해 있다





4. {삼국사기}의 武寧王과 誌石의 斯麻王를 비교분석


(1) 무령왕의 백제 수도는 웅진인데 웅진조건은 중국에 일치된다.

웅진은 백제가 패망하는 기록에 있으므로 가장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패망의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구당서, 신 당서가 동일하다.

이곳에 등장하는 지명에서

- 평원
- 황산
- 동성
- 잠산
- 독산
- 동명
- 덕안
- 주류성
- 항성
- 백마하

등이 있는데 반도에는 없다.

고조선시대의 기자능과 九黎시대 치우능이 있는
중국에는 위 지명이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웅진을 수도로 했던 무령왕릉은 어디에 있는가 ?
과연 공주의 능이 무령왕릉인가 ?


(2) 사마왕의 출생년대는 개로왕의 한성 시대인데 한성조건은 중국에 일치된다.

지석에 있는 사마왕의 출생년대는 개로왕시대이다.
개로왕시대 한성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한 지역인데

지명으로

- 숭산
- 하수
- 사성
- 그리고 하수를 따라 만든 제방,
- 벽돌로 만든 성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3) 斯麻가 시호인가 아니면 휘인가?

▒ 백제본기에서의 휘 소개

전지왕(405-420)--------휘 映
개로왕(455-475)--------휘 慶司
문주왕---------------없음
삼근왕---------------없음
동성왕(479-501)-------휘 모대(마모)
무령왕(武寧王)(501-523)-휘 사마(斯摩)
성왕(523-554)---------휘 명농
위덕(554-598)---------휘 창(昌)
혜왕(598-599)---------휘 계명
법왕(599-600)---------휘 선
무왕(600-641)---------휘 장
의자왕---------------없음

삼국사기의 사마(斯摩)는 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지석의 사마왕(斯麻王)은 휘로 볼 수는 없지 않을까?

광개토대왕비등 어느 곳에도 "휘"를 기록하지 않고
"시호"를 기록하여 능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석에 있는 사마왕은 "휘"가 아닌
"시호"로 볼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4) 익산 미륵사의 과부아들, 자칭왕(自稱王)인 무강왕(武康王)과의 관계

익산 미륵사를 창건한 왕은 무강왕이라고 한다.
그는 과부의 아들이며 "스스로 왕"이라고 한 백제왕이라고 하였다.

이 자칭왕과 공주의 사마왕은 어떤 관계일까.
"남제서"에서 백제가 태수로 임명한 지명이
"북제서"에서는 그 지명에 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있다.

혹시 사마왕이나 무강왕은 같은 예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다.


(5) 영동대장군의 영동(寧東大將軍의 寧東)은 "남제서"의 백제 지명이 있는 중국의 위(魏)와의 접경 지역


백제 무령왕은 488년 백제와 위의 전쟁 13년 뒤에 즉위하였는데

남제서에서 백제가 통치했다는
- 광양
- 청하
- 대방
- 낙랑(하북성),
- 성양(산동성),
- 광릉(강소성)의 지명으로 보아

영동(寧東)은 중국의 강회(江淮 : 양자강, 회수 지역)지역을 나타낸 말로 보이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의 벼슬 이름으로 보여진다.





(6)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곤지왕의 아들로 기록(삼국사기는 곤지는 무령의 조부)

▒ 금송(金松)

관목은 금송(金松)으로 생산지는 일본 고야산과 절강성 태주(台州)에서 생산



☞ 역사스페셜에서는 일본 특산물로 금송을 소개하고 있으나
중국 절강성에서도 나는 나무이다


청동거울 및 우수전은 남경 것과 닮았다(흡사하다)



연꽃벽돌도 공주것과 남경것이 닮았다(흡사하다)

* 금송 + 연꽃벽돌 + 청동거울 + 무덤양식 = 중국식 ?
* 대륙백제의 분왕이 아닌지 의심 ? (운영자 생각)


▒ 금동신발의 영토

일본규수--고마모도--후마나야고분--익산입점리
금동신발과 금동관모로 보아
신발과 관모로 백제전체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





▒ 흑치상지

남양군도 부남(캄보디아), 탑등(북인도), 곤륜, 양자강연안 등에는
음식을 먹으면 이가 검어지는 지역이 있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이라는 책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당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
-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 원문 >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47,


흑치상지(黑齒常之 : ?∼689年)

- 당고종이치, 무칙천시명장 : 唐高宗李治, 武則天時名將
- 백제(금광동흠현서북) 서부인 : 百濟(今廣東欽縣西北)西部人  
- 신장칠척유여, 효용선전, 유모략(身長七尺有余, 驍勇善戰, 有謀略)

黑齒常之早先在本蕃任達率兼郡將. 顯慶五年(660年),
唐高宗派蘇定方破灰百濟, 黑齒常之率部下前去送降款,
遭到唐軍兵士的 劫殺戮, 黑齒常之見狀,
忙帶了十幾人逃回本部, 不幾日收羅兵士三萬余人.
蘇定方破兵圍攻, 黑齒常之率部報死相 ,
唐軍大敗, 黑齒常之一擧收復失地二百多 城池.
龍朔三年(663年), 唐高宗下詔招降黑齒常之, 常之隨卽率部降唐, 被任左領軍員外將軍.

☞ 출처 : 대륙고려 홈 (http://kym5006.new21.org/ccc1.htm)


< 흑치상지 묘비는 남경박물관에 보관 >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문답란 글 일부 인용)

- 붕과 묘(崩과 墓)는 어울리지 않는다. 붕과 총이라면 모를까 ?
- 대비와 대부인(大妃와 大夫人)도 어울리지 않는다


< 참 고 : 3국의 일식관측 지역 >






(과연, 정녕 왕의 무덤일까 ?)


< ▒삼국시대 무덤비교 >


한반도 땅을 통틀어 삼국시대 왕의 무덤중 명문의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은
1971년 발굴된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백제 사마왕(무령왕)의 무덤이 유일하다

왜일까
고구려 900년, 백제 700년, 신라 1,000년의 광대한 역사중
한반도에서 확인된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백제 사마왕 무덤 1기 뿐이다

도대체 왜일까 ?
나머지 왕의 무덤 등은 모두 후대사람들이 추정할 뿐이다
무슨 근거가 있는 추정인가 ?

과연 한반도가 삼국의 주무대 였는가 ?

무덤의 단순비교를 통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객관적 상식은 없을까 ?
시간이 날때마다 각 왕릉의 현황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우선 3가지 무덤만 비교해 본다

의문에 대한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
  


< ▒ 삼국시대 무덤비교 >






< ▒ 무덤속 글자비교 >


백제가 강성했을 시절 왕의 무덤이고
고구려 강성시 일개 지역지도자의 무덤 묘지명 비교이다

그 규모는 물론 나머지 사항들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과연 정통왕의 무덤일까 ?


(사마왕 지석)



(유주자사 진 묘지명)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대고구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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