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칼럼 (고대사 산책) 내용중 일부
(무령왕능지석과 사택지적비)
무령왕능지석에 있는 斯麻라는 휘는 8세기초에 서기저자들이 지은 휘다
이런 휘가 6세기초의 능에서 나온 지석에 어떻게 올라 있을 수 있을까?
무령왕능 발굴시 능 안의 유물이 교란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침수 또는 인위적인 교란 등의 설이 있다고 한다
인위적인 교란과 관련하여 사기 신라본기 헌덕기 14년 3월조에 공주에서 있었던 김헌창의 반란기사를 들기도 한다
『균정(均貞)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과 싸워 멸하고 여러 군이 웅진에 이르러 크게 싸워 참(斬)하기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헌창은 겨우 몸만 피해 성에 들어가 굳게 지켰다. 여러 군이 포위공격하기 열흘에 이르러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자(從者)가 머리와 몸을 잘라 따로 매장했는데 성이 함락된 후 그 시신을 고총(古塚)에서 찾아내 다시 베었다...』
이 기사에서 '고총=무령왕능'으로 보고 설명하는 설이다
그러나 지석에서 핵심은 斯摩가 8세기초에 일본서기 저자들이 지은 이름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위의 헌덕기 기사도 고려인들이 지석을 위작하여 넣어둔 후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꾸민 기사일지도 모른다
사택지적비도 백제 당대의 비로 보기 어렵다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 정월조에 백제 조문사절이 구주에 도착하고 2월에 백제 조사의 종자가 「그 전해 11월에 대좌평 智積이 졸했다」고 했는데 7월조에는 지적이 아들 둘을 데리고 왜에 사신으로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 왜는 백제의 제후국이었고 대좌평이라면 왕과 태자 다음 가는 나라의 3인자인데 연로한 대좌평이 아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제후국에 사신으로 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황극이란 천황도 신공을 재등재한 인물로서 가공의 인물이고 그 전에 몰한 서명천황은 백제 동성대왕을 꾸민 인물인데 무슨 조문사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도무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기저자들이 황극기의 대좌평 지적이라는 이름을 보고 사택이라는 성씨를 붙여 성명을 만든 후 비를 위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서기의 겉보기내용을 옮긴 백제본기의 신뢰성을 얻기 위한 물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반도에서 나오는 명문유물의 전부입니다 고구려 900년 신라 1,000년 백제 700년 역사중 왕의 명문이 발견된 것은 백제 무령왕릉 뿐입니다 (정통왕인지는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 왜 일까요 ? 이하 참고 바랍니다 (소개) 금석문 연대표 한반도에서 나온 금석문 연대표 일람입니다 이게 한반도에서 나온 명문의 금석문 전부입니다 이중 특이한 점은 다음 사항입니다 (1) 고구려 점제현 신사비 : 일본놈 금서룡이 하북성 갈석산에서 배로 실어와 조작한 조작품 (2) 백제 사택지적비 : 이곳이 부여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 명문으로 밝혀주고 있음 (3) 고구려 덕흥리 고분 : 고구려 강역이 하북성, 산서성 까지 였다고 기록하고 있음 참고 바랍니다 http://gsm.nricp.go.kr/about_ksm.jsp?view=chron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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