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설
구태백제(仇台百濟)는 부여왕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구태(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百濟)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 204년경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이다.
일부 사학자는 이 대방고지를 계() 동쪽 방면 또는 남만주 금주(錦州) 방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태백제(仇台百濟)가 세워진 대방고지(帶方故地)는 후한(後漢)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지금의 황해도 지방이지 계() 동쪽
방면이나 금주 방면이 아니다.
위구태가 세운 구태백제는 후에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의 정사(正史)에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에 군(郡)을 두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구태백제이다.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와
구태백제를 혼동하여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으로 진출한 백제를 비류백제(沸流伯帝)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사인 북사(北史)나 한국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비류백제나 온조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2) 건국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구태백제에 관한 문구를
살펴본다.
「북사 및 당서에도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
위 문구에 의하면
구태백제를 건국한 위구태는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였다.
그렇다면 위구태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위구태는 부여왕이었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내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이 해동(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 三國志 魏志 東夷傳 卷30 夫餘 [註 현도태수
공손탁은 요둥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 A.D 172년에 괴멸되자 A.D 190년경에 요동군 지역을 장악하여
요동후평주목(遼東侯平州牧)을 칭하였다. 그 뒤를 이어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손자 공손문의(公孫文懿:公孫衍) 3대가 요동지방에서
할거(割居)하다가 A.D 238년에 사마의(사마중달)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공손탁은 왜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을까?
이는 후한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한.부여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한은 A.D 4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와 교류하여 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시키고 후한과 부여가 고구려를 포위하였다. 그 뒤 A.D 120년에는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후한에 보내어
한.부여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부여는 이 동맹에 따라 다음해 고구려가 한군현을 공격하였을 때 왕자 위구태와 군사 2만 명을 보내어 한(漢)나라를
도왔다.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A.D 121년) 12월 왕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1만여 기병과 같이
현도성(玄城)을 포위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 한병(漢兵)과 합력하여 막아 싸워 왕군(王軍)이 대패하였다.
十二月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進圍玄城扶餘王遣子尉仇台領兵二萬與漢兵幷力拒戰我軍大敗」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그 뒤 A.D
136년에 부여왕이 후한을 방문하여 동맹관계를 강화하였고, A.D 190년경에 공손탁이 요동을 장악하였을 때 위구태는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후한은 한.부여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이 무렵 공손탁의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
부여왕 위구태가 구태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문구는 사실일까?
중국의 정사(正史)인 위서(魏書) 백제국전(百濟國傳)에는 백제국은 부여로부터 나왔다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구태가 처음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시작하였다고 적혀 있어 부여왕 위구태가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는 사실로 보인다.
백제국은 부여로부터 나왔다. 百濟國 其先出自夫餘」魏書 百濟國傳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웠다.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地」周書 百濟傳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처음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隋書 百濟傳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와서 구태백제를 건국한 시기와 장소를 살펴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위구태는 대방고지(帶方故地)에
구태백제를 건국하였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강이 A.D 204년경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부여왕 위구태가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十月 星于東井」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七月太白犯月」
위 "星于東井" 문구 중 "星"는 혜성이라는 뜻이나, 위 문구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대 무리라는
뜻이다. 또 "東"은 동쪽을 뜻하고, "井"은 역(易)에서 남쪽을 뜻한다. 그리고 "우물에 나타났다"는 것은 바다를 통하여 온 세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星于東井" 문구는 대 무리가 바다를 통하여 동남쪽 방향에 있는 한반도로 이동해 왔다는 뜻이다. 이는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 "太白犯月" 문구 중 "태백(太白=太陽:태백성은 금성을 가리키나 이 문구의 태백은 해를 가리킨다)"은 해가 하늘(위)에 있다고 하여
"위(尉)"자를 사용한 위구태(尉仇台)를 가리키고, "달(月)"은 월지(月支:달님의 아들 또는 마한이 다스린 지역을 뜻하는 용어) 즉 전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 지역에 건국된 온조백제(溫祚百帝)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또 고대 우리민족은
태백(太白)이 범(犯)하는 곳에는 전란(戰亂)이 일어난다고 믿었는데, "太白犯月"은 태백으로 지칭된 위구태가 월지(月支)로 지칭된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초고왕기(肖古王紀) 39년 10월조 문구는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대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동남쪽 방면 즉 공손강(公孫康)이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왔다는 뜻이고,
초고왕기(肖古王紀) 40년 7월조 문구는 위구태(尉仇台)가 전에 홍성 금마 마한(馬韓) 지역인 온조백제(溫祚百濟)와 익산 금마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는 뜻이다. 일부 사학자는 초고왕기(肖古王紀) 40년조 문구는 월식(月蝕) 현상을 적은 것이라 주장하나, 삼국사기에는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이 있었을 때 일식이나 월식이 있었다고 직설적으로 적혀 있으므로, 위 문구는 월식 현상을 적은 것이 아니다. [註 삼국사기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백제나 고구려가 요서나 중국동해안방면으로 진출한 사실이나 비류백제, 온조백제, 구태백제가 서로 관련된 사실, 궁중암투 등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의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구태(仇台)가 처음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구태백제의 수도는 대방군에 있지 않았다. 중국의 정사인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시조(始祖)가 구태(仇台)라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고마성(固麻城:웅진, 지금의 공주)에서 다스렸다고 적혀 있으며(治固麻城),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치성(治城:왕성)을 고마성(固麻城:웅진)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號所治所曰固麻). 이를 보면 구태백제의 수도는 웅진에
있었다. [註 한원(翰苑) 所引 괄지지(括地志)에 "國東北六十里 有熊津城 一名 固麻城"이라 적혀 있다. 즉 고마성을 일명 웅진성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