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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병마용의 왕은 진시황이 아니다

monocrop 2006. 11. 29. 00:48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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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1편:펀글)


옮긴이 :  박달


이글은
차이니즈나이트,(저자:강효백)이라는 중국인 이야기책에서

저자 허락없이 펀글입니다.


대륙고려사(
http://ginsengchicken.com/history/)게시판에서

아리랑님이 쓰신 글입니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진시황릉에서 남동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지하 4~5미터에서 발굴된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끝을 보위하는 동부순위대로 추정, 발표됐다.

발견 당시부터 병마용은 전차전의 전투대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실물크기의 진흙으로 만든상과 말은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모두 6천여개쯤 되었다.


지금까지 모두 3호갱이 발견되었는데


1호갱은
거대한돔으로 덮인 것으로
신장 178~187센티미터크기의 병사가 3열종대로 늘어선 병마용과
40여승의 목조전차가 안치되어 있다.

1호갱보다 규모가 작은 2호갱의 병마용은
주력부대를 보조하는 부대일 것이다.

제일작은 3호갱은
서로 머리를 막대고 토로 양측에 정렬해 있어 경호부대로 보이는데
그곳에서는 사슴뿔, 짐승뼈등이 출토되었다.


1984년
당시 시안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었던 천징웬은
학술잡지, 대자연탐구, 겨울호에서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논문을 발표해
중국천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첬번째,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당시의 군진과는 전혀다른 양상을 듸고 있다.
1호, 2호갱에서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는 모습인데
사기, 문헌통보, 회남자 등의 사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고전은
진시황이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활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 당시 차전을 벌렸다는 역사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이 진을 통일하던 시대이전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두번째,
병마용의 병사들은 각양각색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일부는 모자까지 쓰고 있으나 전쟁 필수픔인 투구를 쓴 병마용은 볼 수없다.
이 것으로 보아도 병마용은 적진을 향애 진격하는 군대가 아님은 물론,
진시황을 경호하는 호위대로 보기에도 병사들의 차림새가 허술하다.


세번째,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천하통일을 이룩한후 내린 첫번째 조치는
그간 개인적으로 소장해온 청동기를 전부 회수한다는 명령이었다.

그 후 6국으로 부터 수도로 운송한 후 무게가
각기 24만근되는 동상을 12개나 주조했다.

진시황은 청동기를 전부 거둬들이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청동기를 소장하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그렇다면
2호 갱내의 청동으로 된 80량의 전차는 누가 감히 황명을 어기고 제조하고
또 순장까지 했겠는가?


네번째,

병마용의 색깔은 진시황의 터부를 위반하고 있다.
진시황은 검은색을 통일제국의 색깔로 정하고 의복, 깃발, 휘장에
전부 검은색을 사용할 것을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마용의 병사들은 진한 빨간색, 진한 녹색의 도포와, 파란색, 보라색,

흰색 등의 화려한 긴바지를 입고있는게 이상하다.


다섯번째,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끼와 병망요의 모자와 여성처럼 쪽진머리모양,
병마용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한 결과
전국시대 초나라의 풍속과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다.

이어 천징웬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나라28대 소왕의 모친,
즉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태후이며
(진선태후는 진소왕 시기에 41년동안이나 섭정을 한 여걸로
후세사람은 그녀를 진나라의 측전무후로까지 부르고 있다.),

병마용은 진선태후의 유해를 그녀의 고향 초나라으로 운구하는 행렬이다.

천징웬의 주장은
1984년 병마용 발견 10주년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와 학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저명한
진.한시대연구 전문사학자 임검명은 1985년에 발간된 학술지,
문박제 1기에서,

진용지미,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아래 두가지 이유를 들어 천교수의 주장에 부분적 지지를 보낸적이 있었다.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문헌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못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병기의 대부분은 청동기인데,
이것은 철제무기를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하던 진시황 당시의 야금기술 수준과
부합하지 않는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2편:펀글)

박달


이글은
차이니즈나이트,(저자:강효백)이라는 중국인 이야기책에서

저자 허락없이 펀글입니다.


앞글에 이어 문제점을 계속 짚어 보면


첫번째,

사마천의 사기에서 사마천이 그렇게 몰두해쓴 '진시황본기'인데
병마용에 관해서는 단 한구절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게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사기외에 회남자, 문헌통보등 중국의 웬만한 고서란 고서를 전부 헤집어

보아도 마찬가지다.


두번째,

병마용 양측에도 우리나라 경주의 신라고분만큼 큰 고분이 2기가 있다.
저 2기와 병마용의 관계는?


세번째,

진시황릉은 세계최대 쿠푸왕 피라미드보다 10배이상 크고 넓다.
병마용 6천개가 아니라 6천만개를 묻어두어도 남을만큼 광활한

진시황릉을 그대로 놔두고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묻어둘 필요가 있을까?

또한
진시황릉에서 병마용부근까지 1.5킬로미터 외곽으로 더나아가
거기서 원을 그려 산출되는 총면적은 19.925킬로미터로
1999년 12월 중국이 포르투갈로 부터 회수한 마카오의 면적보다 넓다.

만일 그렇다면 진시황릉은 야산이 아니라 가히 산맥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진시황릉이 중국 천하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통일했다하더라도
황릉이 마카오 보다 더 넓어야 했을까?


네번째,

순장이나 부장품은 능원안에 있지,
능원밖에서 발견된 예는 중국의 공간과 시간에서 단한 건도 없다.
어떠한 순장이나 부장품도 능원에서 5리나 떨어진 지하에 묻어둔적이 없다.

최근 1999년 9월28일 일반인에 개방된
시안의 한양릉의 도용과 장쑤성 쉬저우의 한양묘의 병마용도

전부 능원안에 있다.


다섯번째,

병마용 발견 당시 중국 당국은
병마용이 기껏해야
진시황릉원의 동쪽끝을 보위하는 동순위대애 해당한다고 발표하고 난후에
부지런히 진시황릉 주변 4방을 발굴해 왔다.

그러나 나머지 남서북순위대의 발굴은 실패하고 말았다.

병마용의 주인이 정말 진시황이라면
유사이후 동서남북 4방을 다함께 중시해온 중국이 동쪽에만

병마용을 묻어 두었을 리 없다.


여섯번째,

병마용의 정확한 위치는
진시황릉의 정동쪽이 아니라 남동쪽에 있다는점이다.
진선태후의 고향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동쪽에 있다.


일곱번째,

당시 진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과 가축을 산채로 옹관에 넣어 순장하는게 주된 풍습이었다.

더구나 사서도 증언하고 있듯이
진시황은 '분서갱유'시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것도 모자라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을 건설한 노역자 수만명을 산채로 파묻어버린
'생매장'방면에 자타가 공인하는 위인이다.

그런 진시황이 자비심을 발휘해서
순장 대신 그토록 많은 도용을 파묻을 필요가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점이다.

중국역사상 순장의 악습은
하, 은나라대 왕후장상들의 보편적인 장례습속이었으나
주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장은
춘추전국시대의 진, 송 형국등
주로 중국회수 이북에 위치했던 나라에서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그 반면
회수이남의 초, 월, 오등에서는 순장 대신
도용,목각,옥기등 각종 부장품을 매장했다.

도용은 순장의 폐단을 피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과 가축들의

대용품으로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위의 순장에 관한 중국 역사와 진선태후가 초나라이었다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나오는 중국사료에는
'진시황병마용'대신 '진시대에 만들어진 도용"이라는 뜻의
"진용(秦俑)"이라고 적는 예가 부쩍 늘고 있다.

출처 :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글쓴이 : 내속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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