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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

monocrop 2006. 11. 28. 23:11

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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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우리나라 배달국에 있어서 여와(女?)는 소호김천씨의 할머니이며,

중국의 삼황에 해당하는 태호복희씨와는 남매지간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중국신화에서 인류의 창조는 여와라는 여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후한(後漢) 시대에 응소(應邵)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사람은 없었다.  

이때 여신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 하나 만들다 보니 나중에는 힘이 들어 많이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노끈을 진흙탕 속에 담갔다가 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랬더니 흩어진 진흙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원용국 씨는 그의 저서 <구약사>에서 모세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렁이가 팀나의 성전에서 발굴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두사신이 교미(상기 그림)하는 복희와 여와씨의 그림과 대조적이다.

 

 

태호 복희와 여와 (한재규)

 

 

여와의 이야기는 고구려의 을파소가 지었다는 '참전계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와가 흙을 빚어 사람의 상을 만든 다음 혼을 불어넣어 7일만에 사람이 되게 한뒤 그들을 모두 전쟁에 사용하니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스타인이 발견한 '복희 여와도'

19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신강성 위구르 투르판 분지에서 고분을 발굴하다가 7세기 전반에 멸망한 고창국 귀족의 그림을 발견했는데, 흰 명주에 선명하게 채색된 그 그림에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뱀으로 이루어진 남녀가 묘사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복희, 여와도이다.

 

이 그림속의 두 사람은 손에 규구를 나눠들고있었다. (* 規矩 : 자와 콤파스)

'통지'에 '한나라 시대 석각 그림과 벽들 그림 가운데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인 복희씨와 여와씨가 교미하는 모양을 흔히 볼수 있다' 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 그림이 곧 복희와 여와씨임을 알 수있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13년 (191)때 재상 을파소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참전계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와가 흙을 빚어 사람의 상을 만든 다음 혼을 불어넣어 7일만에 사람이 되게 한뒤 그들을 모두 전쟁에 사용하니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단기 4281(1948)년에 채록된 함흥지역의 '셍굿'두가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라 옛날에 생길 적에 어디서 생겼습니까.


 천지 암녹산에 가 황토라는 흙을 모아서 남자를 만들어놓으니 어찌 생산될까?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어원

 

'아담'이라는 이름은 수메르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본래는

아카드어AKKAD:아무르족 언어였다고한다.

 

아카드족은 아모리Amorie으로 아무로Amarru라는 형태로 발음된다.

이 족명은 곧 한Han 족으로 조선chosen족이다.'성서백과사전'

아무르에 '아담'은 '붉은 찰흙 인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곧 하느님이 '붉은 찰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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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께 제사 지낼때,

'붉은 황토'를 그 제단 주변에 뿌렸고, 신위를 만들때도 자단토紫壇土라는

'붉은 흙'으로 만들어 봉안했으며, 옹기와 토기도 '붉은 찰흙'으로 만들었다.

 

또한 고대 시베리아 에스키모족을 '적이赤夷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곧 동이족 가운데 붉은 피부를 가졌던 종족에 붙인 별칭이다.'

 

이 적이를 비롯한 고대 시베리아에서 둥지를 틀고 살았던 황인종들은

모두 한국인과 같은 혈통이다. 그래서 시베리아 평야와 만주평야를

하나의 지역명인 동야東野로 일컬었던 것이다.

 

'성경'의 인간 창조 설화는 우리의 '참전계경' 및 '풍속통의'의 부분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본따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27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본떠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한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유일신이라면 당연히 단수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왜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일까?

 

이 문제는 앞의 나반과 아만의 장에서 이야기했던 가나안의 최고의 신

 '이브-아담 (인간의 아버지)'의 별칭인 '엘El'을 통해야 풀수있다.

 

 

엘로힘의 어원

 

'엘'은 우리 말의 '얼'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했다.

 

이 '엘'이 바로 창세기 하나님, 곧 '엘로힘Elohim'의 복수형이다.

 

곧 '엘로힘'이 우리의 얼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은 고구려에서도 널리 쓰였던

우리의 순수한 고유어로서 '육체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뜨거운 샘물은 땅에서 솟아니고 얼은 육체에서 솟아난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가시적인 것이지만, 육체에서 솟아나는 얼은 불가시적인

 것으로, 곧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정신精神'을 말한다.

'정신'은 곧 '마음의 신'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의 인지가 깨이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신(얼)은 누구일까? 바로 하느님이다.

 

우리 하느님님을 통해야만 비로소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난해한 복수형

문장에 관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하느님이 유일신인 동시에 '조화, 교화, 치화'의 작용을 하는

 복수형의 삼신삼신이기때문이다.

 

제주대학교 안창범 교수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에서 여호와를 성부 성자 성신의 3위 일체 하나님(하느님)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호와는 우리 민족이 3신, 3신 상제 또는 3신 하느님으로

일컫고 있는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수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용어는 기독교를 우리나라에 보급시키기위해

 포교전략상 '영어의 갇 God 또는 히브리어 엘로힘 Elohim'을

우리말의 하나님으로 국역한 것일뿐이다.

곧, 기독교측에서 우리 말의 하느님을 차용해 쓴것이다.

 

더욱이 서유럽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자체가 없고,

서유럽의 언어에도 하나님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다.

 

이러한 것을 보아도 하느님은 우리말의 차용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용어는 바이블에 보이나 이들이 3위 일체라는

용어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고, 갇 또는 엘로힘의 어디에도 3위 일체라는 뜻이

없다. 그러므로 3위 일체라는 용어 역시 우리 민족의 3신 일체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와의 유래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 이어 두번째로 등장한 인물이 아담의 배필인 '하와'이다.

흔히 하와를 아담의 첫번째 여자로 알고 있으나,

사실 첫번째는 '릴리스 Lilith'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릴리스는 바빌로니아 의 흡혈귀인 릴리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여하튼 하와는 우리 민족의 조상 '여와YHWH'와 그 이름이 같다.

 

수메르에서는 '하와'를 '갈비뼈 숙녀' 또는 '생명의 숙녀'로 설명하고

'성경'에서는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이는 성경이

수메르의 '갈비뼈 숙녀'를 취해 '아담의 갈비뼈' 곧, '하와'가 만들어진 것으로

상징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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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목을 끄는 것은 '여자가 남자의 몸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시베리아 베딜족(Bedil) 타타르족(Tatars)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

 라는 것이다.

 

하와Hawwah의 일명은 하바Haba이고, 헬라어로는 유와Eua인데,

이 '유아'는 우리의 '여와'와 동의음이다.

 

'성경' '창세기' 첫장에는 창조할 무렵에 이미 2가지 성(남.녀)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다. '창세기 1:27'

 

또한 '이것은 남자에게서 취한즉, 여자라 칭하리라'라는 구절로 남자라는 생명이

 여자와 함께 묶여져있다.'창세기 2:25',

이것은 곧 우리 태극에서의 음과 양이 공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원래의 여와는 그의 오빠 태호복희와의 관계 후 나뭇잎으로 부채를 만들어

 몸을 가렸다.

 

이것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친남매끼리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일뿐,

결코 타락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여자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해 간음죄를 지은 인간 최초의

원죄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 우주 창조적 신격인 여와를 서양으로 끌고가 상위 개념으로서의

서양과 서양 남성의 사고를 정당화시키기위해 여와를 타락한 존재로 부각시킨 것

이다.

이것은 성경이 쓰여졌던 그 무렵에 히브리족들이 지녔던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와, 문명개척을 위해 서쪽으로 떠나다.

 

상고대의 동양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졌던 여와는 그 무렵 한민족의 서방 진출과 함께 서방으로 건너가

'여호와 신'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마침내 진陣에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냈다.

 

그 무렵 복희씨는 누이동생 여와와 함께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던 것이다.

여와신은 아브라함의 가계 혈통에 따라 이드로까지 내려왔고,

또 그 사위 모세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가족 신앙에 지나지 않았던 여와신이 세계적 신앙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는 기원전 2166 여년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 1000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여와 신은 종주권을 잃어버리고

 히브리 지역의 여러 신들과 혼재되었다가 지방에 따라 두 갈래 모양으로 변화

되었다.

 

하나는 히브리 지역의 '여와-유와-하바-하와'로 인류의 어머니로 변신되었고,

또 하나는 헬라 지역의 '여와-여호와-야웨'의 창조신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곧 여와의 육신은 하와로, 여와의 영혼은 여호와로 전혀 다른 존재로

히브리족들의 신앙속에 심어지게 된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기원전 300년경에 비로소 '구약성서'로 편집되는데,

이 때 원래 하나의 존재였던 여와는 영혼과 육신이 나누어져 땅에서는 하와로

등장하고, 하늘에서는 여호와라는 서로 다른 존재로 등장했다.

 

곧 아브라함이 고대 한민족의 점령군들로부터 받아들인 여와신이 그뒤 이삭,

야곱으로 대를 이어 내려오며 사람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가족 신이

되었으나, 모세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는

과정에서 여호와 신이 된 다음 완전히 하늘위로 올라가 '질투의 신' '폭력의 신'

'전쟁의 신' '공포의 신'등으로 변했다.

 

 

여와, 유대족의 민족신 여호와로 바뀌다.

 

우리는 여와가 '성경'의 여호와로 변했다는 증거는,

본래 자비와 사랑의 어머니로서의 여성이었던 여와가 '구약성서'에서 여성신인

 여호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를 모태표상인 레헴rehem 또는 라하밈rahamim(자비를, 라힘rahim자

비를 나타내다 등의 의미로 자주 쓰고 있다.

 

특히 '구약성서' '예레미아'에서는 '여호와이신 어머니는 비애를 은혜로 바꾼다'는

등 여성적, 모태적 표상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12:5, 30:18

 

이처럼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가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로 해석되어졌던

것이다.

본래 하나의 명칭이었던 여와는 '성경'에서 하와와 여호와로 나뉘어 인류사의 첫

여성으로, 그리고 우주 창조신으로서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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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

 

한편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지역으로 이주한 동방족과 수메르족은 조상이 같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고대문화사'

 

문정창, 임승국, 김태영 등의 학자들도 '여와'가 이스라엘 민족신인, '여호와'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문정창은 '기원전 1200년경에 모세가 '창세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신을 '조선피플 chosen people'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곧 그들 사상의 고향을 가리키는 환국, 배달국, 고조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에서 해답을 찾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단기 4327(1994)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시되었던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유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이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수 있다.

 

진시황제의 지하 군단인 병마용들은 7,000명이 넘는 군사들과 말 500필, 전차 130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하군단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명령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다. 신체의 비례와 감정표현, 자세의 다양함등을 살펴볼때 오히려 살아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만약 고대에 이런 생동감 있는 조각품에 진짜 사람들을 섞어 놓았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으로 착각 했을 것이다. 또한 그 조각품을 만든 사람을 진짜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착각해 그를 추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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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방법을 여와가 전쟁 중에 사용했고, 그래서 후세인들이 여와를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가능성은 발해 연안의 북부 대퉁하 유역에 있는 우하량 돌무지무덤 부근의 여신교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3500년경의 '소조 여신상'의 세련된 조각 기법을 통해 충분히 제기해 볼수 있다.

 

지나측의 이러한 여와 이야기의 구성원리는 우리의 나반과 아만 이야기의 구성원리와 거의 같다. 여와가 황토로 사람을 만들고 오색의 돌을 반죽했다는 내용은, 인류 최초의 여인이었던 아만이 아이를 낳고 그 후손이 오색인종 이었다는 것과 같다. 또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과 그 대용품으로 등장하는 거북은, 나반과 아만의 혼례식때 나타난 4신수(주작, 거북, 백호, 청룡) 또는 5신수(곰 포함)과 같다.

 

원래 신화란 전래되는 과정에서 각색되고 첨삭되기 마련이다. 또한 원형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여과시켜야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복희와 여와는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천황의 아들과 딸로서 기원전 3528~3413년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배달국 태우의 환우의 막내아들 태호복희씨

 

복희와 여와는 태우의 환웅천황이 낳은 13남매 가운데 막내아들과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 무렵 우사의 직책에 있던 태호 복희씨가 환국시대의 '천부경'을 바탕으로 역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역桓易이다.

이 환역이 나중에 주나라에 전해져 '주역'이 되었다. 이 환역의 또 다른 명칭이 복희팔괘 또는 선천팔괘로, 태극기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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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 복희씨

 

환역을 만든 태호복희씨는 역사에 역리의 원조로 큰 자취를 남겼으며, 또한 그의 천天사상과 어진 인仁가르침은 뒤에 공자가 이어받아 유교를 창시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기원전 3418년 맏형 다의말이 아버지 태우의의 뒤를 이어 배달국 제 6대 환웅천황으로 등극하자, 앞에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태호 복희씨는 누이동생 여와씨와 함께 배달국을 떠나 서쪽의 진陣에 이르러 터전을 잡고 계속 서쪽 진출을 꾀하여 메소포타미아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영민했던 태호복희씨도 천명은 어쩔 수 없었든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여와씨는 오빠이자 남편인 태호복희씨의 유지를 받들어 메소포타미아에 지속적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바로 이러한 여와씨의 덕교德敎가 그 무렵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여와 신'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성경'에 수록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태호복희씨의 성은 원래 새중의 새인 봉鳳과 같은 의미인 풍風씨였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성이다. 그러나 15대 만에 대가 끊겨 '풍골 좋다, 풍채 좋다, 풍신 좋다'는 등의 용어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 2순위에 있던 염제 신농씨의 강시성이 되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다시 인류 최초의 성으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오석은 스타인이 복희 여와도를 발견한 옛 고창국에 대해 "여와의 신화는 중원의 원주민이 지나인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 원주민이란 오늘날 지나의 서남 변경에 자리한 산악지대의 소수 민족인 묘족이나 야오족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곧 고창국이 옛날 동이족의 일파였음을 시사했다.

 

또한 이일봉은 고창국의 지명인 투루판을 삼한의 하나인 번한 (또는 변한)으로 추정했다

출처 :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글쓴이 : sadko 원글보기
메모 :

여와

 

고구려의 영토 고창국

http://cafe.daum.net/bagdalhan

글 : 아리랑      2006.12.07 13:58

 

 

자치통감(資治通鑑) 第 196卷 唐紀十二 太宗(李世民 AD. 627 - 649年)

『大 德 言 於 上 曰,    其 國 聞 高 昌 亡 大 懼. 中略.    上 曰 高 句 麗 本 四 郡 地 耳.』

唐나라 사신 진대덕(陳大德)이 찾아와 왕에게 고하기를

고창국(高昌國)이 망했다는 소식을 高句麗王에게 알리자 크게 놀랬습니다.’라고 하자

唐나라 왕[당태종 이세민]이 말하기를 그곳은 高句麗의 본시 四郡地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 四郡地의 하나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토로번(吐魯番)에 있는 고창(高昌)과 교하고성(交河古城)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資治通鑑 第 198卷 唐紀 十四 太宗文武

『東 征 高 麗 西 討 龜 慈.』

고구려는 서역(西域)에 있는 [신강성(新疆省) 구자(龜慈)]까지 토벌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강역(疆域)이 얼마나 컸는 지는 상상에 맡긴다.



資治通鑑  第 201卷 唐紀 十七 高宗

『高 麗 百 濟 河 北 之 民』 이라 했다. 이 말은 高 句 麗와 百 濟는 지금의 河 北 省 백성이다.
위와 같이 본다면 漢四郡만이 아니라 漢나라가 망한후 高句麗 四郡地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사기사전(史記辭典) -

『朝鮮王右渠.   西漢時 朝鮮國王.   朝鮮王滿之孫.

  在位時. 廣泛氵季收漢亡人. 又不朝漢天子


元封二年(BC. 103年) 武帝下諭責之. 中略.

于是派樓船將軍楊朴等. 率軍五萬往討.

他頑强抵抗 漢兵屢挫. 其時朝鮮統治.

集團內部矛盾鬪爭激烈. 三年.

朝鮮尼谿相參派人 將他殺死降漢.

漢于其地置眞番. 臨屯. 樂浪. 玄菟四郡』


右渠는 朝鮮王이었다. 西漢때 朝鮮國王이며 朝鮮王滿의 손자이다.

右渠[우거]는 朝鮮王때 물에 떠도는 漢나라 사람들을 구해준 탓으로  朝鮮王을 버리고 漢나라 天子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朝鮮王 右渠는 바로  漢나라 무제(武帝 BC. 140 - 135年)이다. 이는 史記辭典 朝鮮王 편에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後漢書 東夷傳 高句麗편에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麗侯騶入塞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麗王爲下句麗侯.


왕망(王莽)은 크게 고했다. 이름을 고쳐 高句麗王이며 구려(句麗)는 제후국으로서 高句麗의 아래에 둔다.

현재 중국의 모든 역사나 연대표에는 모두 王莽이 新을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新이란 것은 新大王을 말한다.

新大王은 高句麗 第 6代 太祖大王의 막내 동생이라고 高句麗 本紀편에 기록하고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第四 新大王편에 보면 新大王은 죽은 후의 휘호가 백고(佰固)이다. 다시말해 佰固는 王莽이다. 고로 句麗병사를 동원해 漢나라를 격파했던 것이다.

王莽[왕망]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막내 동생으로 高句麗를 세우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王莽은 왕이 되기 전 이름이며 왕이 된 후는 高句麗 第 8代 신대왕(新大王)으로 77세 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청해성(靑海省) 靑海에 중국에서 2002年 6月에 세운 비석문-


비석의 내용을 보면 新이란 나라를 세웠다는 王莽이 감숙성(甘肅省) 靑海省까지 다스렸다는 기록이었다.

또한 靑海는 鮮海 즉 朝鮮의 바다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王莽과 高句麗편에서 說明한바와 같이 王莽은 高句麗 8代 新大王이다.

그렇다면 高句麗 8代 新大王인 백고(伯固)때 강역은 얼마나 될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동북의 길림성(吉林省)에서 남몽고일대와 청해성(靑海省) 동북부 지방과 감숙성 서부를 제외한 전 지방이며 남으로는 호북성(湖北省)이다.

동으로는 강소성(江蘇省)과 산동성(山東省) 까지 한반도의 12배정도가 되는 강역을 통치한 것으로  正史는 기록하고 있다.

高句麗 19代 廣開土王부터 20代 長壽王 이후의 강역의 분포는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하였다. 필자

의 高句麗 論文 139쪽 도표를 보면 현 中國大陸 전체는 물론 외몽고 중부 이상과 만주지방 전체 그리고 한반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高句麗가 넓은 강역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황제(黃帝)이후 金天氏, 高揚氏, 高辛氏, 堯, 舜, 夏, 殷, 周까지 天子의 나라였다. 그 후 秦나라가 天下統

一을 한 후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망한 후 馬韓을 건국하면서 天子들이 지배하여 왔던 강역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던 것이다.

馬韓國은 8代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漢나라고 이름이 고쳐지고 다시 天子의 자라가 되었다.

그러나 漢나라 말기 王莽은 句麗 병사를 동원하여 漢나라를 멸망시킨 뒤 高句麗로 이어지면서

高句麗는 19代 廣開土王에 의해 大天子의 나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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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 馬韓 [=漢(한고조 유방=準왕(기자조선41대 마직막왕=哀王)  ) – 漢[2대 혜제=왕만=위만조선] – 後漢[ =구려=고구려]

출처-율곤 이중재선생님

자치통감(資治通鑑) 第 196卷 唐紀十二 太宗(李世民 AD.627-649年)
☆『大德言於上曰; 其國聞高昌亡大懼. 中略. 上曰; 高句麗本四郡地耳.』
을 해석해 보면;

☆"陳大德이 (高句麗에 史臣으로 다녀와서) 上(唐太宗)에게 고(言)하기를 '高句麗는 고창국(高昌國)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라고 하자, ..... 上이 말하기를 '高句麗는 본시 四郡地였다.'라고 말했다."가 됩니다.--- ☆문장 주어에 대한 오류!!

"그렇다면 高句麗 四郡地의 하나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토로번(吐魯番)에 있는 고창(高昌)과 교하고성(交河古城)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라는 해설도 근본적으로 문구해석에서부터 오류로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문장의 主語에 대한 오류!!!

資治通鑑 第 198卷 唐紀 十四 太宗文武
☆『東征高麗, 西討龜慈』
를 해석해 보면;
☆"(唐이) 동쪽으로는 高(句)麗를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龜慈를 토벌했다."는 말이 됩니다.

"고구려는 서역(西域)에 있는 [신강성(新疆省) 구자(龜慈)]까지 토벌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강역(疆域)이 얼마나 컸는 지는 상상에 맡긴다."
☆라는 해설 또한 마찬가지(문장 주어)의 오류입니다.!!!!

資治通鑑 第 201卷 唐紀 十七 高宗
☆"『高麗百濟 河北之民』이라 했다. 이 말은 高句麗와 百濟는 지금의 河北省 백성이다. 위와 같이 본다면 漢四郡만이 아니라 漢나라가 망한 후 高句麗 四郡地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라는 문구의 해설은 "高(句)麗와 百濟는 (黃)河의 北쪽 땅에 사는 백성들이다."가 옳은 해설이 된다고 봅니다.
그 시절(唐과 자치통감이라는 사서를 쓸 당시에 河北"省"이라는 행정기구는 기록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역사의 비밀"이라는 싸이트에 글을 올리거나 해설을 하시는 분들도 별 생각없이 쉽게 지나치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사기사전(史記辭典) -
☆『朝鮮王右渠. 西漢時朝鮮國王. 朝鮮王滿之孫.
☆在位時. 廣泛?季收漢亡人. 又不朝漢天子
☆元封二年(BC.103年) 武帝下諭責之. 中略.
于是派樓船將軍楊朴等. 率軍五萬往討.
他頑强抵抗 漢兵屢挫. 其時朝鮮統治.
集團內部矛盾鬪爭激烈.
☆三年. 朝鮮尼谿相參派人 將他殺死降漢.
漢于其地置眞番臨屯樂浪玄토四郡』

"右渠는 朝鮮王이었다. 西漢때 朝鮮國王이며 朝鮮王滿의 손자이다."
"右渠[우거]는 朝鮮王때 물에 떠도는 漢나라 사람들을 구해준 탓으로 朝鮮王을 버리고 漢나라 天子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라는 해설은
☆"우거는 (위만)조선의 왕을 하던 시절에, 漢에서 도망하여 떠도는 백성들을 데려갔고, 漢의 천자에게 입조하지도 않았다."
"朝鮮王 右渠는 바로 漢나라 무제(武帝 BC.140-135年)이다. 이는 史記辭典 朝鮮王 편에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 우거는 漢나라 무제(武帝 BC.141-87)이다."가 옳은 것일 겁니다.
이 후는 계속되는 元封 二年(BC109년)과 三年(BC108년)에 해당하는 기사 내용입니다.

後漢書 東夷傳 高句麗편에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麗侯騶入塞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麗王爲下句麗侯.'라는 문구를
"왕망(王莽)은 크게 고했다. 이름을 고쳐 高句麗王이며 구려(句麗)는 제후국으로서 高句麗의 아래에 둔다.
현재 중국의 모든 역사나 연대표에는 모두 王莽이 新을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新이란 것은 新大王을 말한다.
新大王은 高句麗 第 6代 太祖大王의 막내 동생이라고 高句麗 本紀편에 기록하고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第四 新大王편에 보면 新大王은 죽은 후의 휘호가 백고(佰固)이다. 다시말해 佰固는 王莽이다. 고로 句麗병사를 동원해 漢나라를 격파했던 것이다.
王莽[왕망]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막내 동생으로 高句麗를 세우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王莽은 왕이 되기 전 이름이며 왕이 된 후는 高句麗 第 8代 신대왕(新大王)으로 77세 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라 하고 있는데

☆윗 부분은 王莽이 高句麗 2대 유리왕 시절(BC.19-AD18.) 유리왕의 아들(?) 중 하나를 잡아 죽이는 것을 적은 구절로 보이는데,
"왕망이 장수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라고 명령하자, (엄우가) 구려후 추(騶)를 새(塞)의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 목을 잘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이를 크게 기뻐하였고,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호칭을) 바꾸었다(강등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 역시 오역이 해설 상의 오류를 낳은 것으로 보입니다.

왕망(王莽)은 실제적으론 AD5년부터 AD23년까지 약19년간 漢나라를 (許氏 金氏와 어울려) 劉씨 대신 통치하고, 國名도 新으로 바꾸며 皇帝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高句麗 8代 新大王인 백고(伯固)는 태조왕의 동생, 또는 태조왕의 아들 혹은 차대왕의 아들이라고 해설되고 있으며, 재위기간은 AD165-179이라고 해설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역사서 문장의 주어(主語) 하나를 잘못하면 이렇게 계속되는 큰 사건으로 비화되며, 편년까지 잘 못되게 새로이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됩니다.

上之將伐高麗也,薛延陀遣使入貢,上謂之曰:「語爾可汗:今我父子東征高麗,
汝能為寇,宜亟來!」-자치통감원문

東 征 高 麗 / 西 討 龜 慈- 동으로 고려를 정벌하고 서쪽로 구자를 벌한다

서쪽로 구자를 벌한다- 이말은 구자가 당의 땅이 아니고 고구려 멸망시 당이 이땅[고구려의 영역]을 친다는
뜻이 아닌가

중국 산동대학에서 발간한 史記辭典에는

조선왕만은 漢나라 2대왕 혜제임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