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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monocrop 2015. 12. 15. 15:30

 

 

 

 

 

      

[스크랩]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고구려 토론방
사람이 하늘이다 | 조회 163 |추천 0 | 2013.07.17. 23:37 http://cafe.daum.net/alhc/51q2/6220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1. 머릿글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존재한다. 『한서지리지』의 현도군 속현 중에 이미 ‘고구려현’이 존재하였으며, 『신당서』에서는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삼국사기』등의 공식 기록인 기원전 37년보다 훨씬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심도있게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등의 공식 기록인 기원전 37년 건국하여 기원 후 668년 멸망하기까지 약 700여 년 동안 일어났던 고구려의 수도 변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는 졸본성(BC 37년 ~ AD 3년)에서 건국하여, 국내성(AD 3년 ~ 209년), 환도성(AD 209년 ~ 247년), 평양성(AD 247 ~ 342년), 환도성(AD 342년 ~ 343년), 평양 동황성(AD 343년 ~ 427년), 평양성(AD 427년 ~ 586년), 장안성(AD 586년 ~ 668년) 등으로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수도 변천 과정은 고구려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천도시기와 도읍의 위치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2. 본 글

 

   고구려의 수도 변천과정의 큰 흐름을 보면 ‘고구려는 추모왕이 요동에서 개국하였으며,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과 뒤이어 동천왕 시절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겪으면서 요동의 동쪽 천리 밖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장수왕 시절 서천하여 다시 요동으로 되돌아 왔으며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요동에서 시작하여 요동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추모왕이 나라를 연 졸본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며,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일대이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이다.

 

   이제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고구려의 수도 위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러 수도들 중 특히 위에서 언급한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및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는 고구려 수도 변천사의 핵심이며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명확히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세 곳의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기록이 부족한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도 유추할 수 있다. 참고로 관련사서들의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를 인용한다.

 

필자가 고증한 고구려 수도의 이동도

통설의 이동도

 

(1) 추모왕 졸본성

 

1) 도읍시기 : BC 37년 ~ AD 3년까지 40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

 

   졸본성은 고구려 시대의 전천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의하면 위도 39도에서 40도 사이에 위치하였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 요동성에 위치하며, 바닷가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졸본의 서쪽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다. 이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만족하는 곳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6회) <졸본성의 위치> 참조)

 

(2) 동천왕 평양성

 

1) 도읍시기 : AD 247 ~ 427년까지 180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일대

 

   <사료 1>『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일대이다.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의 동쪽 끝인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부터 동쪽 천리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부근이 된다(아래의 지도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참조).

 

   <사료 2>『후한서』 ‘군국지’에 유주 각 군의 위치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곡군 : 낙양 동북쪽 3,200리

요서군 : 낙양 동북쪽 3,300리

요동군 : 낙양 동북쪽 3,600리

현도군 : 낙양 동북쪽 4,000리

낙랑군 : 낙양 동북쪽 5,000리

 

   『후한서』 ‘군국지’ 의 기록은 상곡군으로부터 요서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의 상대적 위치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상곡군은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다. 상곡군의 위치는 연나라 5군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므로 재야사학이든 통설이든 그 위치는 일치한다. 한나라 시절 상곡군의 치소는 저양현沮陽縣으로 대략 현 북경 서북쪽의 거용관 부근으로 비정된다. 위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상곡군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는 400리 이다. 그러므로 요동군 양평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 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1,000여리 물리치고 연5군인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상곡군에서 요동군이 1,000여리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또 중국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는 갈석산을 중심으로 연5군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 내용과 일치한다(『기주협우갈석도』는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 참조).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통설에서 요동군 양평으로 비정하고 있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은 상곡군에서 2,000여리나 떨어져 있다.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위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요동군 치소인 양평에서 낙랑군 치소까지의 거리는 1,400리이다. 요동군 치소인 양평에서 요동군의 끝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 거리가 400여리 이므로, 결국 낙랑군의 치소는 요동의 동쪽 천리밖에 있었다. <사료 1>의 『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는 기록과 『후한서』 ‘군국지’의 낙랑군의 거리 기록이 일치한다.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사료 3>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에 “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 周武王 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하였다.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 『요사지리지』는 요령성 요양시 일대를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천왕 평양성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동천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료 4>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전란으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왕험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하였다.

 

   <사료 종합>

   『삼국지』『후한서』『양서』 등에 의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었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칠로도산七老圖山이 하북성 요동의 동쪽 경계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의 평양성은 칠로도산으로부터 천리 밖에 있는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가 된다. 또 『후한서』 ‘군국지’의 낙양으로부터 유주 각 군의 거리 기록에 따르면, 상곡군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의 거리가 400리이다. 그러므로 후한 시대의 요동군 양평이 대략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가 된다. 또 요동군 양평에서 낙랑군 치소까지 거리가 1,400리인데 요동군 양평에서 요동군의 끝인 칠로도산까지 거리가 400여리 이므로 결국 낙랑군 치소는 칠로도산에서 천여 리 동쪽에 위치하게 된다(위의 지도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참조). 이는 『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서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은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로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되었다. 마찬가지로 『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즉 『후한서』는 ‘동이열전 고구려’에서는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하였고, 동시에 ‘군국지’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즉 『후한서』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동천왕의 평양성 시절, 한나라 낙랑군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평주에 속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수도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영토가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장수왕의 평양성에서도 나타난다. 즉 한족의 사서들은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한결같이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파악한 뒤에 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3) 장수왕 평양성

 

1) 도읍시기 : AD 427 ~ 668년까지 242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

 

   <사료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의 기록에『15년(427)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하였다.

  

   <사료 2> 『송서』는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로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 『송서』 ‘고구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 이라 한다(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송서』 ‘백제’

 

   위 『송서』 ‘고구려’ 기록에서 장수왕 시절의 수도 평양성이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서』 ‘백제’ 기록은 고구려가 요동 동쪽 1천여 리 밖의 동천왕 평양성에서 요동군에 있는 장수왕 평양성으로 천도한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료 3>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출생지가 요동군 평양성으로 나온다.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 ...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모이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 寔爲朝鮮)』 『연남산묘지명』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이고 자는 원덕으로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 『연남생묘지명』

 

   위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연남산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조선을 계승하였으며, 평양을 조선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연남생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료 4> 『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高麗之地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수서』 ‘배구전’

 

   『『당서』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지금의 해주).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다(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治三郡)』 『삼국유사』 ‘고조선’

 

   『18년(607) 처음에 수양제가 계민의 장막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황제를 만나 보았다. 황문시랑 배구가 황제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 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十八年初 焬帝之幸 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隠與之見帝 黄門侍郎 裴矩 說帝曰髙勾麗本 箕子所封之地 漢晉皆爲郡縣 今乃不臣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但)』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사료 5>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대청광여도』『청국지지』 ‘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아래의 지도 ‘『당토명승도회』에 나타난 고죽국과 고조선성’ 참조)

 

   <사료 종합>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인『송서』는 장수왕의 평양성에 대하여 한나라의 요동군 지역이며,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천리 이상 이동하여 한나라 요동군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내용을 잘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대청광여도』『청국지지』‘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수왕의 평양성은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동천왕의 평양성과 장수왕의 평양성은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고, 위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당서』 ‘배구전’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기자를 봉한 땅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한족들의 사서는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모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

 

『당토명승도회』에 나타난 고죽국과 고조선성

 

(4) 고구려 시대 4곳의 평양성

 

   고구려 시대에 4곳의 평양성이 있었다. 첫째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고조선 평양성, 둘째로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의 동천왕 평양성, 셋째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의 장수왕 평양성, 넷째로 현 한반도 북한지역의 평양성이다.

 

    앞에서 『연남산묘지명』에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東明之裔 寔爲朝鮮)”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조선을 계승한다는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여러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마다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누르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곳 평양성이 고조선의 왕검성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족의 역사서들은 이 4곳의 평양성마다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 역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사서들에 나오는 한나라 낙랑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알아야 고구려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고구려시대 4곳의 평양 위치도

 

   ① 고조선 평양성

 

   고조선 평양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이다. 이곳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으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였으며,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 참조). 고구려가 이곳을 평양성으로 삼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정시 만성현의 연혁을 『중국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만성현滿城縣의 옛 이름이 영락현永樂縣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永乐县 :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중국백과사전』‘영락현’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동위 흥화2년(540년)에 영락현을 설치하고 낙랑군의 치소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의 이름을 영락현으로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의 시호이다. 현의 이름에 광개토태왕의 시호를 사용한 것은 광개토태왕이 요동과 낙랑 등을 모두 회복하고 이곳을 평양성으로 삼아 거주한 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간접적인 증거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천보원년(742년)에 영락현을 만성현滿城縣으로 개명한 것도 이곳이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② 동천왕 평양성

 

   동천왕 평양성은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 산상왕과 동천왕 시절은 고구려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고구려는 산상왕 시대에 ‘발기의 난’으로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고구려의 서부지역이었던 하북성 요동이 모두 공손씨에게 넘어가고 고구려는 멀리 동쪽으로 천도하여 새로 나라를 세웠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3회>’ 참조). 그리고 뒤를 이은 동천왕 시절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당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동천왕은 분열된 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과 평양성 천도를 합리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동천왕의 평양성이 본래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다는 설을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어 왕검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했다(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조선의 왕검성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이고,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스스로 동천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이라고 하였으므로, 한족의 역사가들은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이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고구려 역사의 대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본래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로 동쪽으로 2천여 리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③ 장수왕 평양성

 

   장수왕 평양성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이다. 장수왕은 선대의 광개토태왕이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으로 잃어버렸던 요동을 다시 회복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본래 고향인 요동군으로 되돌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 또한 요동군은 해양세력의 중심지로 대륙을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천도를 하기위해서는 180년 동안 동천왕 평양성에서 세력을 형성하였을 기득권층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하여,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야 말로 진정한 고조선의 왕검성지역이라는 설을 유포할 필요가 있었다.

 

   위 『연남산묘지명』의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는 기록처럼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조선성(왕검성)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위의『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서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으로 기록한 것도 장수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의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역사가들은 장수왕의 평양성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본래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④ 한반도 평양성

   현 북한 평양지역은 상고시대 마한 또는 마조선의 수도였다. 그리고 대무신왕 15년(32)에 고구려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최씨 낙랑국의 수도였다. 『주서』『북사』『수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삼경三京을 두었는데, 평양성과 국내성과 한성漢城을 말한다. 현 북한 평양에는 ‘한성漢城’이라 새겨진 성벽각자가 발견되어, 평양지역은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인 한성漢城으로 비정된다. (http://coo2.net/bbs/zboard.php?id=qna&no=2894 참조)

 

   현 북한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주류세력들이 한반도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교가 성행하면서 기자로부터 정통성을 찾는 과정에서 북한 평양지역이 자연스럽게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북한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굳어진 배경에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반도는 옛날부터 한사군의 땅으로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적‧유물들을 조작하여 식민지 역사관을 만들었고, 오늘날 주류사학계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류사학계 스스로가 중국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5) 기타 고구려 수도

 

   추모왕의 졸본성, 동천왕의 평양성, 장수왕의 평양성은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나머지 고구려 수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 유리명왕 제1국내성

 

   유리명왕의 제1국내성은 207년간(AD 3년 ~ 209년) 도읍하였으며, 도읍위치는 난하 중류의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 일대로 비정한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가. 졸본성에서 제사지낼 돼지가 달아나서 국내 위나암에서 찾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내성은 졸본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는 점.

 

   나. 국내 위나암은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험한 산과 큰 강물이 흐르는 지형이라는 점.

 

   다. 유리명왕 28년(AD 9)에 부여 사신이 왔을 때 왕이 부여왕에게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 하였다. 국내성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라.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세 아들인 남생, 남건, 남산이 대립하였을 때, 남생이 웅거한 성이 국내성이었다.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당나라 황제가 남생에게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남생을 현도군공으로 봉한 것은 남생이 웅거한 국내성이 현도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 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사료들을 종합하면 국내성은 현 중국 하북성의 난하 중류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마침 그곳에 해발 1,977M의 도산都山이라는 산이 있다. 도읍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도산都山 일대를 고구려의 제1국내성(제1환도성)으로 비정한다.

 

   ② 산상왕 환도성(제2국내성)

 

   산상왕의 환도성(제2국내성)은 38년간(AD 209년 ~ 247년) 도읍하였으며, 도읍위치는 현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비정한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괄지지』를 인용하여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하였고,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지』 ‘위지동이전 동옥저’ 기록에 불내성不耐城은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단단대령은 유리명왕의 제1국내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사이에 존재해야 하므로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을 나누는 칠로도산七老圖山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내성不耐城인 국내성과 인접한 환도성은 칠로도산七老圖山 동쪽으로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비정된다.

 

   ③ 평원왕 장안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성이 곧 장안성이라고 하였다. 장수왕의 평양성과 평원왕의 장안성은 거의 비슷한 위치로 파악되므로 별도의 고증은 생략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 리이다. 국도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일컫는다(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 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 「三京」)』 『수서』 ‘고구려’

 

3. 마무리 글

 

   지금까지 고구려의 수도변천 과정을 살펴보았다. 앞에서도 누차 언급한 바와같이 고구려 수도 변천사의 핵심은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및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들 지역은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명확하게 그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추모왕의 졸본성은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위치하였다.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사이의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장수왕의 평양성도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이와같이 고구려의 천도는 동서로 1천여 리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였다.

 

   그런데 통설의 고구려 수도 변천과정은 어떤가? 졸본성(요령성 환인지역)에서 국내성(요령성 집안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후 산상왕의 환도성과 동천왕의 평양성은 계속 국내성 지역을 맴돌고 있다. 여러 사서에서는 분명히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천왕의 평양성이 계속 국내성(요령성 집안지역) 부근을 맴돌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통설에서 고구려 시대의 요동의 위치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지』등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상실했을 때의 강역이 분명 사방 2천리라 하였다. 그런데 통설은 요동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으로 비정함으로써 요동 동쪽의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될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이 1/4 이하로 축소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동천왕의 평양성이 국내성지역에서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할 공간이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송서』와 『연남생묘지명』을 참조하면, 장수왕의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1천여 리 이상 이동하여 요동군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통설은 어떤가? 장수왕의 평양성이 뜬금없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 한반도 평양은 통설을 따르더라도 한나라 낙랑군지역이다. 『연남생묘지명』에는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 위치와 관련하여 『연남생묘지명』보다 더 확실한 유적은 없다. 그러므로 통설에서 장수왕 평양성을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이다. 아울러 통설에서 주장하는 모든 고구려 수도들은 사서와 유적들을 토대로 그 위치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통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요령성 환인지역 같은 첩첩산중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발해만을 배경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하북성 요동에서 건국하여 일찌감치 해양세력인 동이족의 대표주자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북방 유목세력의 대표주자인 흉노족와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인 한漢족과 더불어 대륙의 패권을 다툰 아시아의 강자였다. 이제 북방 유목세력과 남방 농경세력과 동방 해양세력 등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역사속으로 뱃머리를 돌린다.(다음호 계속)

 
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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