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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북평,어양,상곡,태원> 공략의 의미

monocrop 2008. 9. 3. 22:43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 모본왕 2년(49년).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서한(西漢, B.C.206 ~ A.D.25)시의 어양(漁陽)은 현재의 밀운서남쪽 회유(懷柔)이고,
상곡(上谷)은 현재의 북경 서북쪽에 있는 회래(懷來)의 동남이었는데  진(秦)대에는

저양(沮陽)이라 하였고,
북위(北魏)대에 폐(廢)하였다가 수(隨),당(唐)대에는  역주(易州)를 상곡이라 하였는데,
역주는 현재의 역현(易縣)이다.
-[참조:고금지명대조 上谷-古郡名。秦治沮陽 ,(今河北懷來東南)。北魏廢。隋唐時的上谷郡卽易州。
 http://www.white-collar.net/02-lib/01-zg/03-guoxue/其他?史?籍/?史工具?/古今地名?照/dmdz.htm]

 

서한(西漢)이나 동한(東漢)당시의 상곡이 저양인지 역주인지 명확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으나,
모본왕 2년(49년)은 동한(東漢, A.D.25 ~ A.D.220)과 같은 시기로 그 이전 부터 역주를 상곡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동한의 행정구획은 서한의 13자사부에 신장의 서역장사부(西域長史府)를 추가한 정도로 동일하지만,
동한직전에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가 연속성을 끊는 것을 생각하면  왕망시기부터

역주를 상곡으로  칭하기 시작해 굳어 졌을 것으로 본다.

 

 서두의 본기 기록은 고구려가 단지 몇개의 군(郡)을 공격한 전투에 지나지 않는듯 생각되어 질 만큼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나 만일
역주(현재의 易縣)가 고구려가 공략한 상곡이라면  이 짧은 기록이 의미하는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더러는 고구려의 한(漢)나라 공략로상의 상곡을 진(秦)대의 저양, 회래(懷來)의 동남이나 탁록으로 비정하여  어양에서 태원에 이르는 장거리 공략을 두 개의 루트로 나누어 보기도 하는데,

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퇴로차단의 위험이 다분한 적진 깊숙한 곳 까지를  공격 하면서 공격군을 둘로 나누어 

그 한쪽이 서북 산악지역으로 크게 우회하여 태원에서 합류한다는 것은 자살 특공대가 아닌 바에야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것이다.
고구려의 공략로는 퇴로 까지도 충분히 확보하며 태원까지 나아가는 단일 공격로가 타당한 것이고,
이 공격로 상에 네곳의 표적이 나열되어 있어야 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볼 때,
"上谷=易州" 를 더욱 뒷받침한다.

 

그러면, 어양->상곡(역주)->북평->태원 루트로 고구려 군의 한(漢)공략이 이루어 졌을 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위의 도표는 서한대의 행정구획인 13개 자사부와 그 치소(治所:관할 관청지), 그리고 치소의 현재명을 간단하게 만들어 본 도표이다.
공략시점인 동한(東漢)대 에는 앞서 언급했듯 13개 자사부에 단지,서역장사부를 추가하여
14주(州) 체제로 구획되었었다.
한(漢)나라의 13부중 최 동북지역을 관할하는 행정구를 보면 위 표에서 보듯이 북경서남에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가 있고 그 치소는 광양군(廣陽郡) 계현(삽주-계縣)이며 현재의 북경성 서남쪽

구석에 위치한다.
그 남쪽으로 기주자사부(冀州刺史部)가 있고 치소는 고읍으로 현재의 석가장(石家庄)남쪽, 고읍(高邑)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유주부의 서쪽으로는 태행산맥을 넘어 병주자사부(幷州刺史部)가 있는데 그 치소는 진양(晉陽)으로

현재의 태원(太原) 서남부에 위치한다.

 

(클릭:확대)

 

고구려 공략로와 한(漢)나라의 3개 자사부의 관할 관청지를 지도상에 표시해 보면 위와 같은데,
그 공략로 상에는 네 곳의 공격지외에 3개 자사부의 관할 치소가 피할 수 없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양을 치고 상곡(易州)으로 향하는 길목에 유주자사부의 치소가 있으니 피할 수 없고,
북평을 거쳐 태행산맥의 관문을 넘기전 회피하기 어려운것이 기주자사부 치소이다.
석가장->태원 루트는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오가는 주요 통로로 절대적 이었고 일본 제국군도

이 루트로 넘어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


중요 군사 요충지인  이 관문의 동부를 관할하는 곳이 기주자사부이고 그 치소가 석가장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 치소를 파(破)하지 않고 관문을 넘는다는 것은 고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파(破)해야 할 지역이다.
마지막 공격지가 태원이 되고 있으나 역시, 태원 서남부 지척에 위치한 병주자사부 치소가

고구려의 태원 공격을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진 않을 것임은 자명하니 피할 수가 없다.

 

결국 고구려의 요서공략은 네 곳의 군(郡)단위 지역을 공격한 비교적 가벼운 전투가 아니라.
애초부터, 한(漢)나라의 13개 주부(州部) 중, 동북부에 위치한 3개 주부의 심장부를 겨냥한 

대전쟁이었다는 것이고,
이 3개 자사부지역 까지가 고구려의 완전 복속하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전쟁 이라는 표현을 썼지만,"乃復和親" 의 뜻을 새겨 보면

3개의 동북 자사부 지역이 원래는 고구려 강역으로 통치되었었으나 언제 부터인지 반기(?)를

들기 때문에 이에대한 징벌, 또는 응징적 성격의 공략으로 봐야하고,

이는 광대한 지역을 성공적으로 공략하는 위와 같은 전개가 가능함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이 전쟁으로  고구려가 확실하게 얻은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태행산맥을 넘는 관문,즉 서역으로 향하는 통로를 확고히 장악했다는 것이고

이는 6년 후인  태조왕3년(AD55년)에 요서십성을 축성함으로서 완결되어지는 것으로
요서십성 중의 일부는 태행산맥의 서쪽 관문을 방어할 만한 지역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또한, 이 공격로상의 어딘가에 태수 제융이 관할하는 요동군(遼東郡)이 있었음도
물론이다 .

 

공략당한 지역의 자사(刺史)도 아니고 언급된 네 개 공격지의 태수도 아닌 요동태수가

저 먼 동북끝 요녕성에서 태원까지 달려와 나서며 '마옵소서' 조아렸다고 한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어불성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

출처 : 향고도
글쓴이 : 향고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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