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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 그리고 살수대첩(薩水大捷)!

monocrop 2008. 9. 1. 19:33
  • 중국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 그리고 살수대첩(薩水大捷)!
  • 중국 수나라와 고구려 간의 전쟁, 그리고 살수대첩(薩水大捷)!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백만 대군으로 남쪽으로는 오, 월을 침범하고 북쪽으로는 유, 연, 제, 노나라를 뒤흔들어서 오랫동안 중국을 핍박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것도 바로 그런 고구려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46권 최치원열전] 중국 수(隋)나라의 두번째 황제였던 양광(楊廣), 그의 시호는 양제(煬帝)였다. 이 양제란 시호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했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으나 실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수나라가 일으킨 대고구려전(對高句麗戰)은 장장 16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장기전이었고 규모는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그때까지 이런 전쟁은 없었다. 그렇다면 수황(隋皇) 양제(煬帝)는 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고, 또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류에 있는 양주(兩州). 양주에서 한참 떨어진 외딴마을에 양제(煬帝)의 무덤이 있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봉분이었지만,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양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동안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봉분의 흙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 있었고, 누군가 무덤 꼭대기에 나무로 쐐기를 박아놓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제의 무덤은 그동안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만큼 수난을 겪어왔던 것이다. 양주시 향토사학자 "이곳에는 민간전설이 있는데 하늘의 신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렸다고 한다.무덤은 세부분으로 쪼개졌는데 사람들은 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전설의 내용처럼 양제의 무덤 옆에는 움푹 패인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듯 철저히 버림 받은 것일까? 그 실마리는 오히려 양제가 후손들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에서 찾을 수 있었다. 13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양제의 유산, 그것은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였다. 중국의 3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대운하는 양제 필생의 대사업이었다. 양제는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30년동안 4500만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는 집념을 보였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양자강과 낙구를 잇는 통제거와 낙구와 북경을 잇는 영제거다. 완성된 운하의 길이는 1300km에 이른다. 운하의 끝이 닿는 곳은 지금의 북경(北京)이다. 당시 양제는 휘황찬란한 황선(皇船)을 타고 양자강 하류와 북경을 오갔다고 한다.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 양제는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거대한 물길을 낸 것일까? 이효충(李效忠) 북경대학교 교수 "운하의 시작은 양제의 아버지인 문제(文帝)로부터 시작된 것지만 양제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운하는 남과 북의 물자와 인원을 이동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중국의 통일전쟁과 고구려 정벌을 위한 것이다." 운하의 끝인 북경 남부에는 탁군이란 지역이 있었다.이곳이 바로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다. 612년 1월, 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나설때도 전국각지에서 소집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당시 원정군 규모는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하는 좌군 52만 8천명, 우중문(于仲文)이 지휘하는 우군 52만 8쳔명, 양제가 직접 인솔하는 중군 26만 4천명, 이렇게 탁군에 집결한 수나라 군사는 모두 132만명!! 이들은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육군 1백만은 요하쪽으로 수군 10만은 동래지역으로 향했다. 수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출발하는 데에는 총 40일이 걸렸고 그 길이도 서울과 부산 거리인 432km에 이르렀다. 세계...더보기
출처 : Daum 신지식
글쓴이 : Love_You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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