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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또 하나의 샤라쿠 - 단원(檀園) 김홍도

monocrop 2015. 4. 12. 23:15

최근 난데없이 '바람의 화원''미인도'·등으로 드라마와 영화를 조선시대 화가들이 점령했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역사적으로 동시대를 살다간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쌍벽을 이루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풍속화는 소재의 선택, 구성, 인물의 표현방법 등에서 현저히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단원(檀園)김홍도가  <씨름><서당> 등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생활의 한 단면을 주로 다루었다면, 13세 어린 혜원(蕙園)신윤복은 <미인도><월야밀회(月夜密會)> 등 남녀 간의 춘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허준, 상도, 대장금 등의 사극 속에 의학, 상업, 음식 등 특정소재를 부각시켜 성공적인 시청률을 끌어올리면서 유발된 또 다른 신선한 소재의 필요성이 도화서나 화가라는 설정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더구나 김홍도와 신윤복은 우리가 자라면서 교과서를 통해 그 이름과 그림이 익숙한 조선시대 화가들 중 가장 대중적인 인물들이다.

강한 필력으로 서민들의 삶을 담았던 단원과 여성적인 섬세함과 풍자적인 묘사로 새로운 화풍의 세계를 열었던 혜원!!! 재미있는 것은 드라마 상에서 극과 극을 이루는 이 두 사람이 어진화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빌어 극명하게 다른 작품을 그려 보이고, 당대 선배화원들의 평가와 본인들의 작품설명을 통해 일반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비교분석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실제 두 사람이 교류한 흔적은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모두 화원 가문 출신으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반면 신윤복은 당대 실력을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를 쫓겨났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역사적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김홍도는 1745년 김해 김씨 김진창의 증손으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으며, 일곱 살에 도화서 김응환의 제자가 됐다.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된 뒤 1781년(정조 5년)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려 도화서 최고의 영예인 어용화사가 되었다.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를 그렸고, 1794년 중인의 신분으로서는 최고 벼슬직인 정6품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삽화를, 1797년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 인물화, 신선화(神仙畵),불화(佛畵),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화원이었다.

그의 그림은 정밀함에서 출발하여 시원스럽고 힘이 넘친다. 그리기에 쫓기기보다는 특징적인 모습, 더러는 가장 못난 부분이나 모습까지도 그대로 표현하여 사실성 중시란 기조를 항상 잃지 않았으며, 사생을 통한 사실묘사는 시대를 극복하는 그만의 창작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조선시대 판화에도 영향을 미쳐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는데, 특히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등은 그 정밀함과 다양함에 있어 조선판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품 또한 <군선도(群仙圖)>를 그린 것처럼 호방하고 신선과 같은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따르면 김홍도는 말년에 너무 가난해 조석으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지만 시장에서 본 매화를 사고 싶어 그림을 3000냥에 팔아 2000냥으로 매화를 사고, 나머지 돈으로 지인을 초대해 술잔치를 벌였다한다.

이러한 김홍도의 작품세계와 성품은 여러 가지 가설을 가져왔다.

김홍도는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과감히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는데,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탱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색채의 농담(濃淡)과 명암으로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나타내는 훈염기법(暈染技法)을 썼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세계 3대 초상화가로 불리는 일본의 천재 화가, 샤라쿠와 동일인물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본화단의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는 1794년(간세이<寬政>6년) 5월, 혜성처럼 등장했다 사라진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판화가다. 아름다운 배우의 모습보다 우스꽝스럽고 엽기적인 과장된 야쿠샤에(役者繪: 요즘의 브로마이드)를 그렸던 인물로 1794년에 등단해 10개월간에 140여 편의 초상화를 제작한 뒤 돌연 종적을 감췄다. 그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더구나 샤라쿠의 그림에는 일본인이 만들어낼 수 없는 독특한 화풍이 접목되어 있는데 이것은 김홍도 정도의 화가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세계라는 것이다.
 
샤라쿠가 김홍도였을 가능성은  여러 가지 사실로 이야기된다. 샤라쿠의 그림에 나타난 선이 김홍도의 필선과 아주 유사하며, 샤라쿠가 일본에 등단했다는 그 시기에 김홍도는 연풍현감이 된 후 행방이 묘연했으며, 더구나 실제로 그 시기에는 단원의 작품이 없다는 점…. 그리고 1764년 이후 30년간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없어 일본상황이 궁금했던 정조는 화약을 비롯한 일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1789년에 부산에서 병으로 사망한 스승 김응환을 대신해서 김홍도가 혼자 일본 대마도에 들어가 일본 지도를 모사해와 정조에게 바쳤던 스파이 전력 등의 사실이다.
 
1996년 9월16일 일본 아사히TV에서 <또 하나의 샤라쿠>라는 15분 분량의 기획 프로그램이 방영한 적이 있다. 도슈사이 샤라쿠가 바로 김홍도라는 일부 주장을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심층 취재한 것으로, 방송 후 단원 김홍도는 일본인들 사이에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었다. 일부학자들은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증발'한 김홍도와 일본에 갑자기 등장한 샤라쿠라는 화가를 같은 인물로 추정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정조가 김홍도에게 일본의 지형과 군비시설을 살피고 오라고 대마도로 보냈다는<초등산수습방첩(初登山手習方帖)>의 기록을 들었다.

현재에도 김홍도와 샤라쿠가 동일인물인가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계속되고 있고, 한국과 일본에서 소설, 영화 등의 흥미로운 소재로 선택되고 있다.
사실과는 상관없이 김홍도의 천재성은 국가나 시대를 넘어 무한히 증폭되고 있다.

김홍도<환어행렬도,1795>견본채색,156.5×65.3㎝,용인호암미술관소장

 

김홍도<송하맹호도 부분>견본수묵담채,90.4× 43.8㎝,호암미술관소장

 

김홍도<군선도 부분,1776>지본수묵담채,132.8× 575.8㎝,용인호암미술관소장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이치가와 에비조가 분한 다케무라 사다노산>

출처 : 생활속의 판화이야기
글쓴이 : 랩소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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