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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안중근순국 100년>

monocrop 2010. 3. 21. 10:42

<안중근순국 100년> 부활하는 `동양평화론'

연합뉴스 | 입력 2010.03.21 09:11 | 수정 2010.03.2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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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성 기념행사 지양..평화사상 계승해야
(뤼순=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31살의 젊은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안중근 의사를 보듬은 곳은 고국 땅이 아니었다.

오는 26일로 순국 100주년을 맞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이국 땅 중국의 뤼순 감옥 부근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하얼빈 역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일제에 체포돼 창춘(長春)을 거쳐 랴오닝(遼寧)반도 남단의 철옹성인 뤼순(旅順)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시신이 온전히 수습되지 못했던 탓이다.

그를 처형한 일제는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지 않았다. 이승과 고별하는 그의 육신에게조차 안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뤼순감옥에서 형이 집행됐지만 지금껏 어디에 묻혔는지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감옥 북쪽의 야산 어딘가에 묻었다는 당시 일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2년 전 보훈처가 유해 발굴을 시도했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일대는 이미 20층 이상의 고층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개발지역으로 변모했다. 그의 유해를 찾을 길이 사실상 영영 사라진 것이다.

5m 높이의 붉은 장벽에 갇혀 그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 4개월여를 머물렀던 뤼순 감옥에서야 겨우 그의 숨결과 체취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뤼순 감옥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이 치열했던 1900년대 제국주의 러시아가 먼저 세우고 이어 일제가 정치범 수용소로 삼았던 뤼순 감옥이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몸바쳤던 '열혈 청년' 안중근을 추모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남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일제에 앞서 청나라를 차지했던 러시아가 1902년 85칸 감방을 갖춘 뤼순 감옥을 세웠고, 이후 러일전쟁 승리로 드넓은 만주 땅을 모두 차지한 일제는 이 감옥을 증축해 항일운동가들을 가두고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

안 의사가 그렇게 희생됐고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등 11명의 독립투사가 이곳에서 고초를 겪다 생을 마감했다.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뤼순감옥은 안식하지 못하는 항일 운동가 영혼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리는 듯 지금도 여전히 음산하다.

감옥 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세워진 일본식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로 팔을 벌리듯 감방이 나란히 배열된 2층 수용소가 봄빛 머금은 햇살에도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수감자들이 입었던 죄수복이며 고문 기구, 북쪽 담 옆에 있는 사형장까지 일제 치하의 모습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안 의사를 비롯한 항일운동가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악명 높았던 뤼순 감옥은 잘 보존돼 있다.

안 의사가 수감됐던 감방이며 교수형에 처해졌던 처형장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중국 정부는 뤼순 감옥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으로 명명, 관리해왔다.

뤼순이 군사기지라는 이유로 외국인의 접근을 통제했던 중국 정부는 2008년 뤼순 감옥에 대해 제한적인 관람을 허용한 데 이어 지난해부터는 전면 개방했다.

그뿐만 아니라 뤼순감옥 내에 '국제 항일열사 기념관'과 안 의사 추모관 건립도 허용했다.
광복회 등의 예산 지원으로 지난해 10월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기념관에는 안 의사와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등 뤼순 감옥에 투옥됐다 숨진 독립투사 11명의 흉상과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비록 그의 유골을 찾을 길은 희미해졌지만 안 의사를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그들의 애국사상을 떠올려 반추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중국 당국이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도 있는 안 의사 추모관과 항일운동가 기념관 건립을 허용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그가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쑨원(孫文)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의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그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며 추모의 글을 남겼다.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안 의사는 항일운동의 선봉장이자 동양 평화론 주창자로 깊이 각인돼 있다.

그럼에도 지난해 하얼빈의 안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행사가 우여곡절 끝에 비공식적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냉정하게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에 민감한 중국 당국은 한국인이나 조선족에 의해 안 의사가 '조선의 항일운동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국인'인 조선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거나 한국인들의 애국주의에 불을 댕기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의 안중근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21일 "백두산과 간도가 한국 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데 자극받아 중국이 동북공정에 나섰다"며 "안 의사로 말미암아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면 어떤 주장이 나올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은 안 의사가 한국 민족주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해법도 제시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침략의 원흉 이토를 사살한 통쾌한 거사에 초점을 맞추고 싶겠지만 중국인들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서야 한다"며 "민족적 접근이 아니라 그가 마지막 집필에 몰두했던 동양 평화론에 대해 연구한다면 중국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공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안중근 연구가도 "기념일만 되면 일회성 대규모 행사를 여는 것은 오히려 중국만 자극할 뿐"이라며 "안 의사가 살아생전 염원했던 동양 평화 사상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차분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가 아닌 '동양 평화 사상가'로 새롭게 부활시켜야 한다"며 "그것이 안 의사를 '불멸의 영혼'으로 남게 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pjk@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haohaor/

 

 

<안중근순국 100년> 진척없는 외교협상

일본정부 모르쇠 일관, 유해발굴 요원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안중근 의사 유언)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죄아닌 죄'로 먼 이국땅의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스러져간 지 한 세기가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묘역이 없다.

   안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이 유해 소재지를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 직후 감옥 근방 야산에 묻혔는지, 아니면 유해가 일본 등 또 다른 곳으로 이장됐는지를 알고 있을 `전범(戰犯)' 일본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안 의사가 민족정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임에도 우리 정부가 손쓸 도리없이 일본의 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참혹한 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안 의사 유해 확보를 위한 외교적 교섭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정부가 본격적인 대일(對日) 외교전에 뛰어든 것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이다. 당시 외교부는 일본 정부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불가'였다.

   지난 2008년 3월 유해매장 위치 확인 자료를 재차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문서정리 차원에서 찾아봐도 없더라'는 무성의한 답변이 전부였다.

   지난 2월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도 `유해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데 협조해달라'고 비공식 타진했지만 일본 정부는 입장 변화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외교 교섭은 1993년 이후 안 의사가 순국한 장소인 중국을 상대로도 이뤄졌지만 일본에 의해 자행된 만행인터라 중국 정부 자료에도 한계가 있었다.

   정부가 각종 사료와 증언을 토대로 직접 현장 발굴에 나서거나 남북이 함께 유해발굴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성과는 전혀 없었다.

   지난 2006년 6월 남북이 공동 유해조사단을 중국 대련에 파견해 뤼순감옥 북서쪽 야산을 유해매장 추정지로 확정하고 2008년 3~4월 남측 단독으로 29일간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동물 뼛조각만 발견됐을 뿐 망국의 한을 품은 의사의 유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자 정부는 안 의사 순국 100년을 맞은 올해 강수를 들고 나왔다. 올 1월 안 의사 유해발굴을 책임진 국가보훈처 수장인 김 양 처장이 안 의사 유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일왕의 방한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한 것이다.

   김 처장은 "남의 나라 땅을 마냥 뒤질 수만은 없다"며 "일본이 가진 보다 정확한 자료를 갖고 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는 안 의사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정부가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현 상태로는 유해발굴은 요원하다는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으론 일본 정부가 안 의사 유해 관련 정보를 `극비외교문서'로 분류해 문서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부 관계자는 21일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이 안 의사 사형 이후의 사진은 물론 유해 매장지에 대한 기록도 반드시 갖고 있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금껏 발뺌하던 일본이 갑자기 자료를 내놓으면 또 다른 비난을 받을 수 있고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가 밝혀질 경우 이곳이 성지화돼 한국 내 반일의식이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엄포'에도 일본 정부는 꿈쩍도 않고 있지만 정부로서는 당장 뾰족한 수가 없어 외교적 교섭에 따른 안 의사 유해 확보는 앞으로도 난항을 거듭할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극비문서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로, 우리 자체적으로도 일본 문서고에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매장지의 흙 한 줌이라도 봉환하겠다는 의지로 끝까지 확인 노력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honeybe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0/03/21 09:10 송고

 

<안중근순국 100년> 순국까지 일관된 기개
"집행순간까지 매우 침착하고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과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침착하고 떳떳하게 죽음에 이르렀다."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인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 통역 소노키 스에요시가 사형집행 순간에 대해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의 하얼빈 의거 이후 5개월간 옥중생활을 하면서 재판과정에서 한 진술과 집필한 원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의지를 표출하고 짧지만 불꽃 같았던 삶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 재판이 열린 법정


◇ 재판에서 일제 침략상 밝혀
안 의사는 의거 후 하얼빈 영사관에 구금됐다가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점령한 중국 뤼순에 있던 감옥에 갇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그의 재판을 어느 나라에서 할지를 두고 고민하다 국제 여론의 관심을 피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장소를 뤼순으로 정했다.

   1909년 11월3일 감옥에 갇힌 안 의사는 미조부치 검찰관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사카이 경시로부터 강도 높은 신문을 받았다. 이후 열린 공판에서 안 의사는 자신이 한국 의병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인데 일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 실상과 이토의 죄상을 밝혔다. 첫 공판이 열린 지 일주일만인 1910년 2월14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마나베 재판장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 다음날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2월15일자는 안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도 태연자약했으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 판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미소를 머금었다고 전했다.

  
동생들과 면회하는 안중근 의사


◇ 자서전, '동양평화론' 집필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아무런 자료 없이 사형 집행을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을 이겨가며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그는 자서전을 완성했으나 '동양평화론'은 끝내 마치지 못했다. '동양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집행 연기를 청했으나 당국이 이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많은 연구자로부터 선구적인 제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동양 평화회의체를 구성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하며 공동 군대를 창설하는 등 세 나라가 협력하는 공동체를 결성할 것을 제시했다.

   이러한 지역 협력방안은 20세기 후반 동북아에서 논의되는 다자간 지역협력체 구상의 맹아적 요소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또 원고 외에도 많은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을 썼다. 유묵은 200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제까지 밝혀진 것은 57점이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사기념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 유묵 25점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물로 일괄 지정된 상태다.

   안 의사는 높은 기개와 강한 애국심,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이룩하려는 염원, 돈독한 신앙심 등을 유묵에 담았다.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 당당한 마지막 모습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인 1910년 3월25일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만났다. 어머니, 두 동생, 뮈텔 주교 등에게 쓴 유서 같은 편지 6통을 동생들에게 전하고 아내가 지은 한복 바지와 저고리를 전달받았다.

   또 면회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서는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해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그의 통역인 소노키 스에요시는 사형 집행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소노키의 기록에 따르면 사형은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됐다. 안 의사는 유언을 남길 것인지 묻자 자신의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본 관리들도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합심해 동양평화를 위해 힘쓸 것을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아내가 고향에서 보낸 흰색 저고리와 흑색 바지를 입은 안중근은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2분여간 기도를 한 뒤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을 받았다. 10시4분께였다.

   소노키는 오후 1시에 감옥의 장지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kimyg@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0/03/21 09:10 송고
 

 

<안중근순국 100년> 日 재평가 움직임 확산

Q.안중근 친필
안중근 친필 (이종백=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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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사상, 東亞공동체 구상과 맥닿아"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 일본인 데라시타 다케시(寺下武.57)씨는 3개월째 '한국.일본 2천500㎞ 도보순례'를 하고 있다.

   데라시타씨가 지난해 12월25일 대장정의 첫발을 뗀 곳은 도호쿠(東北) 지방 미야기(宮城)현이었다.

   미야기에 있는 사찰인 다이린지(大林寺)에는 안중근 의사가 생전에 쓴 글씨가 보관돼있다. 데라시타씨는 오는 26일 서거 100년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안 의사 기념관을 향해 6천300리 길을 가고 있다.

   일본생활협동조합에서 19년간 근무하며 평화운동을 벌인 시민운동가인 데라시타씨는 안 의사의 평화 의지에 감명받아 지난해 12월 조기 퇴직하자마자 순례에 나섰다고 한다.

   데라시타씨 뿐만 아니라 일본의 진보적인 인사 중에는 안 의사와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사상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본 내에서 안 의사에게 먼저 주목한 이들은 오사카가 아니라 도사(土佐)번(현재의 고치현)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안 의사 의거 직후인 1910년 6월에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된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였다.

   체포 당시 고토쿠의 품속에서는 안 의사의 사진과 거사를 칭송한 한시가 발견됐고 그는 1911년 1월 동양평화, 전쟁반대, 일왕 신격화 반대 등을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도사번 출신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검찰관이면서도 안 의사에게 감동해 처형 후 사직으로 항의했던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나 안의사의 관선 변호인이었던 미즈노 요시타로(水野吉太郞)가 그들이다.

   도사번 출신 법조인들이 1910년께 만주에서 일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도사번은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현 등)과 사쓰마번(薩摩藩.규슈 남부)의 동맹을 이끌어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배출하는 등 일본이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가는 길을 여는 데 앞장선 지역.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정작 일본 중앙 정치를 석권한 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슈번 출신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침략적인 '대동아공영권' 구상으로 치달았다.

   조슈번 출신 인사들에 밀려 일본이나 조선에 가지 못하고 변방인 만주를 떠돌던 도사번 출신의 관료들은 블록 경제 등 구상을 담은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물론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리스트'로 기록한 것은 물론 "하필이면 한일합방에 반대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합방을 앞당겼다"고 낮춰 평가했다.

   이런 공식 평가에서 조슈번 출신 권력자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시아보다는 서구를 모방하느라 급급했고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을 이룬 뒤에는 '미개한' 조선과 중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하지만 도사번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아시아 각국이 대등한 관계 아래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묶여야 한다는 동양평화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일본 진보 세력의 사상적 자양분이 됐다.

   창원대 도진순 교수는 21일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과 일본 민주당이 내건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서로 맥이 닿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일강제합방 100년을 앞두고 최근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안중근 재평가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다.

   일본 시민들과 학자들이 중심이 돼 발족한 '한국병합 100년 시민네트워크'(이하 시민네트워크)는 지난해 3월 교토의 류코쿠(龍谷)대학에서 안 의사의 자료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에서는 안 의사가 감옥에서 쓴 유묵(遺墨)과 처형 전 사진 등이 전시돼 일본 시민들을 만났다.

   전시회와 함께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과 하얼빈 의거의 의미, '한일합병'의 부당성 등이 다뤄지며 안 의사에 대한 일본 내 재평가 작업도 진행됐다.

   역사 문제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본의 지식인들도 "정확한 의미에서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국가의 경제와 외교 등을 연구하는 일본 싱크탱크인 ERINA의 미무라 미쓰히로(三村光弘) 박사는 "테러리즘에는 이권이 결합해 있기 마련인데 안 의사는 아무런 이권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 신념으로 행동했다"며 "테러리스트보다는 일종의 양심수나 정치범으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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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순국 100년> 고종황제 막후설
이태진 안중근하얼빈학회장 "'의사'보다 '장군' 호칭 써야"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일본의 외무대신에게 보고된 정탐 기록에는 당시 의거 배후에는 고종황제가 있다고 나옵니다. 잘못된 정보는 아닐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중근하얼빈학회 공동회장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하얼빈 의거의 막후에 고종황제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오는 26일 그의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이 교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고종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안중근이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그 사실을 알았을까? 그게 큰 의문이었는데 재미있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안중근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 전시회에서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글씨 가운데 대부분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서(書)'라고 서명했다. 이 교수는 '삼가 절한다', '삼가 드린다'는 뜻으로 '서' 대신 '근배(謹拜)'라고 쓴 유묵에 관심을 뒀다.

   '근배'가 적힌 유묵은 보통 받는 사람 이름도 함께 나와있지만, 유묵 3점은 이름이 없다는 점이 이 교수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특히 '사군천리(思君千里) 망안욕천(望眼欲穿) 이표촌성(以表寸誠) 행물부정(幸勿負情)'이라는 유묵은 '천 리 밖의 임금을 걱정합니다. 바라보는 눈이 뚫어질 듯합니다. 작은 충성을 표시했으니 내 충정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이는 왕에게 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임적선진위장보무(臨敵先進爲將義務. 적을 맞아 먼저 전진하는 것이 장수의 의무다)' 같은 유묵에 대해서는 지휘자의 신분으로 국가를 위해 해야 할 본분을 밝힌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교수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한 '안중근 장군'론으로 흘러갔다. 그는 안중근에게 '의사' 대신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힌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호칭도 있어야 합니다. '의사'라면 의거를 혼자 한 걸로 돼버립니다. 법정에서 안중근을 단독살인범으로 몬 것은 일본의 의도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의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잘못됐으며 이를 바로잡으려면 군인 신분으로 했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얼빈역에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5번)


이 교수는 "독립운동가 연구는 조직보다 개인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일본과 싸운 사람들이 맨주먹으로 싸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조광 고려대 교수나 신운용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은 장군이라는 호칭은 역사성이 없으며 안중근은 일개 군인으로 평가할 수 없는 사상가였다면서 '장군' 호칭을 사용하자는 이 교수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그런 의식은 안티밀리터리즘(반군사주의) 때문이다"고 반박했다.

   그는 "의사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가 많다. 우리 민족이 시대를 이겨내려 한 노력을 왜소화할 수 있으며 개인 중심의 역사를 만들어버리는 우려도 있다"면서 "본인이 한 얘기인데 지금의 기준으로 '장군'이라는 용어를 꺼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수감중의 안중근


그는 안 의사를 "공부할수록 놀랍다"면서 "자기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남긴 기록만 있는데 평소 쓴 기록이 나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전통교육을 잘 받은 인성과 탁월한 지능이 결합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을 유교사상, 또는 유불선(儒佛仙)이 결합해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선교사를 통해 신지식도 많이 받아들였다. 직접 읽지는 못했더라도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접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안 의사가 당시 많은 사람이 읽던 중국 근대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칸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또 "유묵 가운데 '운제(雲齊)'라는 당호(堂號)가 있는데 하늘 세계에 있을 자기 집을 얘기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은 모습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면서 "안중근은 나라가 없는 삶은 천한 것이라고 인식해 목숨에 연연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kimy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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