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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혁명>(Shostakovich,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monocrop 2012. 4. 10. 11:36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5번 <혁명>

Shostakovich, Dmitrii Dmitrievich

1906~1975


USSR Ministry of Culture Symphony Orchestra

Gennady Rozhdestvensky, Cond  


교향곡 5번 <혁명>은 쇼스타코비치가 31세 때인 1937년에 완성한 곡으로 그의 교향곡 15곡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며,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입니다. 어떤 작곡가이든 교향곡에서만큼은 5번이라는 숫자에 대해 그 배경을 떠나 베토벤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이 곡도 예외가 아니어서 쇼스타코비치의 ‘운명 교향곡’이라고도 불립니다.

 

  1악장 Moderato-Allegro non troppo-Moderato

 


  2악장 Allegretto scherzo

 


  3악장 Largo

 


  4악장 Allegro non troppo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서

1937년 11월 21일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운명에서 분수령이 된 날이라 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소비에트 사회의 최상층 인사들 즉 음악가, 작가, 배우, 화가, 그 밖의 온갖 유명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명예가 손상된 이 작곡가의 <교향곡 제5번> 초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작곡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고 가십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센세이션과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음표가 울리고 나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에 있었던 주요 쇼스타코비치 작품들의 소비에트 초연이 거의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거대한 도덕적 압력 하에서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 정직하고 사려 깊은 예술가가 행한 노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곡은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우는 박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곡가는 열에 들떠서 미궁에서 나가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그는 결국 어떤 소비에트 작곡가의 표현처럼 자기가 ‘이념의 가스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증언>(Testimony :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은 음악학자인자 저널리스트인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쇼스타코비치의 구술을 토대로 1979년 미국에서 출간한 작곡가의 회상록입니다. 국내에는 2001년 <드미트리히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이론과실천)이란 책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작품 이해를 위한 시대적 배경

1930년대의 소련은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당하는 공포정치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 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대였다. 문화예술은 암흑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어김없이 ‘형식주의’ ‘타락한 자본주의’ 등의 딱지와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해에 완성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1악장과 3악장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는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아무리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표현했다고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낭만적인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의 전진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 곡은 초연 당시 1시간이 넘도록 박수를 받았다. 연주시간 45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회상록 <증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곡의 피날레에서 나는 생기에 찬 낙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앞의 세 악장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느낌들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모호한 표현으로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전쟁이 끝난 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곡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베토벤의 9번이 그러했듯 쇼스타코비치의 최대 걸작이 나올 걸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귀엽고 유머가 넘치는 교향곡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주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스탈린 1인 숭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저열한 선전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 그 자체를 표현하는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다.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구체적인 회화나 조형물로 말하기 때문에 체제를 옹호했느냐 비판했느냐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음악, 특히 가사 없는 교향곡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판단하려고 할 경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음악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무한히 다양한 뉘앙스와 표현의 섬세함, 바로 그 점이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스탈린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포 정치 속에서도 살아 있는 인간의 의지를 묘사한―적어도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 의하면―교향곡 5번을 소련 공산당이 찬양한 것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이 시대를 웃으며 살아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지휘자 게르기에프는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더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프라하 뮤직 페스티벌에 참석한 레닌그라드 필의 전설적 지휘자 므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리니스트

  오이스트라흐(왼쪽부터).


시대를 넘어 불행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참으로 불행한 작곡가이다. 쇼스타코비치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불행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쇼스타코비치는 살아생전보다 오히려 죽고 나서 더 불행한 작곡가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소련 공산정권의 불길과 맞서 싸우는 소방관으로 캐리커처된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짓지 않고서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표제가 붙어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처음과 마지막 교향곡인 1번과 15번이 비교적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뿐, 하나같이 ‘혁명’ ‘전쟁’ 등과 같은 주제들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쇼스타코비치의 곡이라고 한다면 단연 그가 작곡한 <재즈 모음곡 2번>의 6 번째 왈츠일 것이다. 이 곡은 <번지 점프를 하다>와 같은 영화뿐 아니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인 <아이즈 와이드 샷>에도 삽입되었고, 최근에는 국악기인 해금 연주로 편곡되기도 한 곡이다. 약간 우울한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그의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글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그 곡은 고뇌하고 있는 한 예술가의 슬픔이 묻어 있는 곡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한 작곡가에게 이토록 어떤 확정된 이미지가 입혀진 작곡가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어떤 이념으로 말미암아 치장된 작곡가는 그것이 어떤 이념이든 간에 그의 음악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없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쇼스타코비치에게만큼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작곡가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미지올로기’로 향해 가는 이 시대에서 어찌 쇼스타코비치가 불행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은 한 인터뷰에서 이제 아버지의 음악이 좀 더 자유롭게 순수음악적으로 해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음악에서 좀 더 다채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출처 : 라라와복래
글쓴이 : 라라와복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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