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김알지,비밀과 계림14호보검,허황옥 관계는(링크된 글,클릭 요망)
<대월씨국이 있었던 아프카니스탄 시바르간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신라왕관,고령 지산동 금동관과 유사함>포토:블로그 펌
<경주 계림로14호분에서 발견된 특이한 형태의 보검,동일한 보검이 경주에서 수천km떨어진 중앙아시아 쿠차왕국 키질 석굴69굴 입구 천장벽화에 보인다. 이 보검은 5세기에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흉노족)의 아틸라 왕 시대에 유행했던 보검이다.카자흐스탄 보르보예에서 꼭 같은 보검이 출토 되었다.>포토:블로그 펌
정광산인 김문배 글
김해 許黃玉의 出自考(허황옥의 출자)
(인도아유디오가 아니다)-북방 월씨국(중국 감숙성 서쪽)(대월씨국(아프카니스탄북부 大夏지방) 옛 땅(감숙성의 서쪽 경계)에 계속 머물러 살고 있는 이들은 소월씨라고 불렀다. 대월씨가 강성했을 때에는 인도 항하 유역과, 극십미리, 아부한과 총령 동서 지역까지 점령을 했다
가야 허황옥의 出自地를 인도 아유타라고 기록된 곳도 있고, 남해금산 삼층석탑 기록에는 月氏國(월씨국) 허황옥이라 기록되어있다.
1세기에 북방 소월씨족(月氏族)의 이동(왕망이 전한을 찬탈하여 중국에 신나라를 세운다.그와 관련하여 이동)으로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중국 사천(四川)지방인 촉나라에 정착했다
허왕후(許王后)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데서 허왕후가 보주(普州)란 곳은 사천성(四川省) 안악현의 옛 지명이다.
중국에는 전한시대였다. 흉노족 왕망(흉노족 김일제 외손)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新)제국을 세운다. 북방 소월씨족(月氏族)의 허왕후는 왕망과 같은 흉노족 국경을 맞된 흑수왕성(감숙성서쪽)에있다가, 신제국 등장과 함께 중국에 정착한다.
<新제국이 만든 貨泉 화폐:화천이란 글자과 물고기문양으로 새겨져있다>
왕망이 개혁작업으로 만든 [화천]이란 동전엔 쌍어문양이 그려져있다. 물고기 두마리 문양이다. 김해수로왕능 문에 그려진 쌍어문양(물고기 두마리),허황후 오빠 장유화상이 세운 은하사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양, 월지국의 문양이다.
14년후에 전한의 장군 유수가 반란을 일어킨다. 왕망은 전사하고 마지막 왕망의 외척 김씨세력은 한반도로 피난길에 오른다. 먼저 오른 세력들이 김수로세력이다. 허황옥도 2차 피난길로 오른다. 이후 김알지 세력도 한반도 계림으로 이동한다.
<산동반도나 발해연안에서 배를 띄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고려문종때 문인이 쓴 것을 중 일연이 편집하였다)에 나오는 뱃길의 기록에서 단서를 찾았다>
진해 용원에서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기약된 시간에 만난다. 궁에 모신후 대화에서
<홍도는 저녁노을에 비친 바위가 붉은 대추처럼 보인다하여 홍도라고 했다사진:홍도독립문바위>
"수로왕: 어떻게 오셨는가?
허황옥: 노잡이 사공15명들과 왔습니다. (고공접사)본문은 항로를 나타내주는 중요한단서임.[妾也浮海遐尋於蒸棗(之島):바다에 뜨서 찐 대추섬을 멀리서 찾았고,移天逈赴於蟠桃(之島):하늘을 돌아 (방향을바꿔) 멀리 복숭아 섬에 다다렸다]
바다에서 蒸棗(之島)(증조지도: 찐 대추 섬)을 보았고,
하늘을 돌아(移天) 蟠桃(之島(반도지도)/복숭아섬)를 보았습니다.
윗 글에서 [蒸棗(찐 대추의 섬)]은 서해 섬이 있는 紅島(홍도:아침에 붉은 찐 대추모양의 섬)를 가르키고, [하늘을 돌아]는 밤하늘 북극성을 보고 물길과 방향을 바꿔서 즉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방향을 바꿔서 제주도 앞 바다로 방향을 바꿔서란 뜻이다.
蟠桃(반도의 섬: 바로 제주도를 가르킨다).
찐 대추의 섬(대추),기운이 서린 복숭아 모양의 섬(복숭아)는 과일을 가르키고 있지만 섬의 크기를 비교한다.
옛 사공들이 노를 젓고 오는 항해술은 해안의 섬의 지형지물의 모양을 보고 왔을 것이다.
駕洛國記에 나오는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을 통해 허황옥의 배는 서해안으로 내려와 제주도 앞바다로 지나 진해 용원 앞바다까지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계간 역사연구89년도 여름호/허황옥의 출자고/사학자 김인배/필자와 공동저자)
여러 정황으로 봐서 결코 인도 아유타국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인도 여인이라면 許씨 姓과 이름도 인도말과 맞지않으며, 인도 아요디아(아유타)는 허황옥이 김해에 도착한 시기(기후48년)에는 18년전에 없어진 나라이다(아요디아는 기후30년에 멸망). 18년동안 배를 타고 왔다는 것도 언어도단이다.(문정창설)
가야 김수로왕의 김씨, 중국기록에는 흉노족 휴도왕,(KBS 11월5일 역사기행에서 휴도왕성 탐방,휴도왕때 한나라에 투항한다. 흉노와 국경을 맞된 곳에 흑수국성유적이 있다. 그곳이 월씨국이다.KBS팀 확인) 중국 감숙성 서쪽지역이다.기원전125년경.훗날 월씨국도 아프카니스탄 북부지역으로 옮겨가서 대월씨국이 된다.) 김일제 후손으로 기록되어있다(문정창 가야사/문정창은 여러 사례를 들어 허황후는 인도인이 아니라고 했다)
가야와의 모든 계연성이 없다고 한다.허황후의 능비에는 普州太后로 기록되어있다 보주는 중국에 있다. ), 아유타는 어디에 있었나, 한단고기 기록에는 노자가 북경 서북쪽 지방- 아유타에 가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고 한 기록을 엿볼 수 있었다(이곳이 월씨국이다)
월씨국에서 정치적 변화(한나라와 전쟁)가 있어 다시 이동한 것이 대월씨국이다. 흉노(훈족)이 전한 시대 아프카니스탄에 세운 나라가 "大月氏國"이다.
이 대월씨국이 있던 곳이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시바르간이다. 이곳 금관과 신라의 금관이 비슷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같은 훈족(흉노족)의 문화이다.
중앙아시아 파지리크 고분의 적석 목곽분과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묘제 동일함도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동일 민족의 동.서양 이동의 흔적이라 봄이 더 타당하다.
5세기 경 유럽을 떨게 만들었던 훈족(흉노) 아틸라 왕의 보검과 경주 계림로14호 분에서 발견된 보검 장식을 볼 때 원류는 동일문화민족이 만든 각 각의 솜씨들이다.
월씨국의 위치에 관한 정보
사막 중간중간에 솟아난 오아시스에는 사람이 들끓고, 잇달아 도시가 건설되었다. 돈황, 누란, 미란, 투루판, 쿠차, 알마아타, 카불,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탁실라 등은 일종의 도시국가로 시대에 따라 흥망이 교차했다. BC 127년 장건을 앞세운 한무제의 서역 경략도 실은 실크로드 선상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들을 장악, 흉노제국 너머 월지국과의 교역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나가사와 가즈도시 지음, 이재성 옮김,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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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支國(월지국:달지국:목지국)은 서역 말로 kusana(쿠사나) 또는 月氏國(월씨국)이라고도 하며, 西域(서역)의 큰 왕국이다. 이 종족은 원래 중국의 감숙성 돈황과 祁連(기련) 사이에 살다가 BC 174년에 흉노에게 쫓겨 伊犁川(이리천)과 悉陀犁耶川(실타리야천)의 상류인 熱河(열하)의 남방으로 옮겼으나 BC 158년경에 다시 烏孫(오손)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samarkand(사마르칸트) 지방에 근거를 정하고 塞種(새종)을 征伐(정벌)하고 위水(위수) 연안의 大夏國(대하국)을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제3세 迦 色迦王(가니색가왕) 때에 세력이 크게 떨쳐 서쪽으로는 페르샤(이란)의 동부에서부터 중앙아세아 인도에 걸친 乾陀羅(건타라) 왕국이 되자 불교의 外護者(외호자) 가 되고 500명의 阿羅漢(아라한)을 모으고 大毘婆沙(대비파사)를 편찬함. 그 후 불교가 大成(대성)하여 支婁迦懺(지루가참)등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불경을 전하고 支亮(지양), 支謙(지겸), 法護(법호), 支法度(지법도), 支道根(지도근),支施崙(지시륜) 또는 支姓(지성)의 著者(저자) 모두 月支國(월지국) 사람들이다. 이 나라가 멸망한 것은 미상이나 5C경으로 보고 있다. <불교 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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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씨국(月氏國)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 .
月氏. 古國名. 先居甘肅西境. 漢時爲匈奴所破. 西走阿母河. 臣服大夏. 都河北. 曰大月氏. 留居故地者爲小月氏. 大月氏强盛時. 奄有印度恒河流域. 克什米爾. 阿富汗及蔥嶺東西地…
월씨(月氏)는 옛 나라 이름이다. 처음에는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경계에 거주했다.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에게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망을 간 곳이 아모하(阿母河) 강 주변이었다. 월씨(月氏)은 대하(大夏) 국의 신하(臣下)로 복종했다. 도읍지는 아모하(阿母河)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들을 대월씨라고 한다. 옛 땅(감숙성의 서쪽 경계)에 계속 머물러 살고 있는 이들은 소월씨라고 불렀다. 대월씨가 강성했을 때에는 인도 항하 유역과, 극십미리, 아부한과 총령 동서 지역까지 점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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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이미 1989년 부산 항도일보에서 필자와 공동저자가 100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들입니다. 거의 20여년이 지난 지금 문무왕비문 해석으로 재 조명됨을 알립니다. 그 땐 재야사학자 상상에 의한 추정 정도로 치부하였으니까? 정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글돋선생)
08년 11월22일 KBS 에서 방영한 동영상입니다.
1.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성한왕은 누구인가?
문무왕릉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 전7엽’이라는 암호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투후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라는 뜻. 그리고 ‘7엽’은 일곱 개의 잎사귀, 즉 7대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15대조 성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신라의 성한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일까? 그리고 과연 성한왕은 누구인가? |
▲대능원 |
2. 흉노족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유사성.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 |
▲기마인물형 토기 |
▲동복 |
3. 투후 김일제의 나라 투국은 존재했는가?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 |
▲산동성 하택시 투국의 옛성 |
4.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
그렇다면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도 신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화천 |
5. 성한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
▲해동비고 |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
펌)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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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碑文의 미스터리
나는흉노왕의 후손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의 비편
비편에는'나는 흉노왕의 후손이다'라는 의미의 내용이 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金法敏(김법민), 즉 文武王(문무왕)의 陵碑(능비) 파편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전 조선 正祖(정조) 때인 1796년에도 陵碑(능비) 파편 두 개가 발견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拓本(탁본)은 淸(청)의 금석학자 劉喜海(유희해)에게 들어가 「海東金石苑(해동금석원)」에 실렸다.
이 碑文(비문)은 漢唐流(한당류)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古事成語(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이 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문무왕이 죽은 서기 681년이거나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新羅金氏의 내력,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의 治績,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碑銘 등이 적혀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屍身(시신)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散骨(산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四天王寺(사천왕사) 근방에 擬陵(의릉·가짜 무덤)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陵碑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을 화장한 곳으로 알려진 능지탑
이 비문 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능)枝가 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륜)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侯 祭天之胤傳七葉」이다. 侯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휴도)의 아들 金日(김일제)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金日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人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 스스로가 우리 조상은 匈奴人 金日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金日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 있고 中國 西安에는 金日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金日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單于(선우)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혼야왕과 休屠王(휴도왕)이 다스리던 곳은 옛 秦나라 땅 지금의 甘肅省 草原이었다. 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漢武帝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漢武帝의 명을 받은 청년장교 곽거병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야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休屠王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야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閼氏(注-알타이=금을 뜻하는 閼智와 같다)와 아들 金日, 그의 동생 侖은 끌려와서 곽거병의 포로가 되어 漢武帝에게 인계된다.
漢武帝는 그때까지 姓이 없던 金日에게 姓을 내리는데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金氏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王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漢武帝의 경호실장이 된 金日石單
1998년 중국의 언론은 甘肅省과 山西省에 살고 있는 金氏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金日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金日의 후손들이 들어왔던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漢武帝는 소년 金日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漢武帝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소년 金日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의 얼굴 또한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金日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스만 터키,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은 반역을 함께 도모할 패거리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金日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현장에서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金日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漢書를 읽어 보면 金日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金日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곽거병(당시는 사망)의 동생 곽光(곽광)과 金日를 불렀다. 漢書 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金日보다 못합니다』
金日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金日를 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詔書(조서)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 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金日를 侯(투후), 상관걸을 安陽侯, 곽광을 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金日는 새로 즉위한 임금 昭帝(소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昭帝의 즉위 1년 뒤 金日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金日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印綬(인수)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金日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金日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金日石單의 후손이 金閼智?
한편 곽광은 한무제를 이은 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昭帝가 죽자 다음 황제로 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宣帝는 곽광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宣帝 6년에 죽었다.
당시 宣帝의 황후는 곽광의 딸이었다. 곽광이 죽자 이제 그의 非行이 터져나왔다. 곽광의 아내가 宣帝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흉노人 金日의 동생 아들 金安上은 여전히 宣帝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金安上은 큰아버지의 친구였던 곽광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곽광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 버렸다.
宣帝는 마침내 곽광의 아내·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 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한 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代價를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金日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그들이 匈奴人이므로 漢族 사이에 권력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人 출신의 이런 성공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가진 인간성 덕분일 것이다.
金日 후손의 운명은 王莽(왕망)과의 인연으로 急轉(급전)한다. 王莽은 元帝의 황후 王氏 가문 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金日의 증손자 當의 이모부였다. 王莽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專橫(전횡)을 하다가 서기 8년에 漢을 멸망시키고 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王莽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金日 家門은 득세한다.
王莽의 新은 그러나 15년 만에 망하고 後漢이 다시 선다. 王莽 일가는 물론 金日 가문도 滅門之禍(멸문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金日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金閼智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王莽 시대의 五銖錢(오수전)을 들어서 王莽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三國志 東夷傳에 실린 「辰韓의 秦人」은 바로 秦나라 출신 金日 후손들이 경주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金日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慕華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慕華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漢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人 金日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新羅金氏는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新羅金氏의 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新羅金氏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200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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