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2일,29일(토요일) 오후 8시 KBS에서 방영한 역사추적 문무왕능비의 비밀편에서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를 보았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평소 역사의 의구심을 떨처버릴 수 없었든 나에겐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방송 내용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정조 20년 (1796년)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한 조각난 비문을 경주 부윤 홍양호가 탁본해둔 내용중 투후 제천지윤전칠엽(투侯齊天之胤前七葉)과 15대조성한왕(十五代祖星漢王) 이라는 글을 찾아 흉노(匈奴)와 연계시킨다는 내용이다.
이 비문은 신라 30대왕 문무왕의 치적을 적어 둔것으로 지금은 발견당시보다 회손이되어 경주박물관에 하단 조각만 남아있다.
성한(星漢)이란글은 법민 문무왕동생 인문의 묘비(경주 서악 소재)에서도나오고 신라 42대왕 흥덕왕능(경주 안강 육통리 소재) 비편에도 태조 성한(太祖 星漢)이란 글이 나온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와는 다른 내용이다. 물론 시조와 태조는 다를수 있다.
문제는 투후라는 내용이다.
방송을 보고 나름대로 추적을 해보았다.
기원전 121년경 한무제때 곽거병이 훈국에서 잡아온 포로중 일제(日제)와 윤(倫)과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이들은 훈국의 혼야왕이항복하기전 살해한 휴도왕의 아들과 그의 부인이였다. 한무제가 이들을 노비로 만들어 말을 키우게 했는데 일이 18세 되든해 한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에 두게 된다. 무제의 살해시도 사건으로 공을 세운 일제는 무제에게서 김(金)이라는 성을 하사 받고 더욱 중용된다. 그후 무제가 죽고 소제가 왕위에 올랐을 때 투후라는 작위를 일제에게 하사한다. 일제가 죽고 아들 건(建)으로 이어지고 건의 손자 당(當)때 왕망이 전한을 무너 뜨리고(9년) 신(新)나라를 세우는데 김당이 도와 준것으로 되어 있다. 왕망은 나라를 세우고 15년을 못 견디고 다시 후한 유수 광무제에게 다시 나라를 내어 주었다.(23년)
이후 김당 일행은 중국의 산둥반도로 이주(패주)했다가 후한 광무제의 추적으로 한반도의 황해도지역으로 갔다. 김당의 아들이 김성(金星)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들의 행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다만 후한의 광무제가 44년에 대동강 평양지역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는 신라 김씨 왕조가 훈국의 후예라고는 단정지을수가 없어서 삼국 사기를 살펴 봤다.
신라 3대왕 탈해가 알지를 발견(?)한 해는 65년이다.
이후 기록이 없다가 13대 미추 이사금이 왕위(262년~283년)에 오르는데 성이 김이다. 알지 이후의 계보를 보면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 구도-미추로 이어진다.
구도의 아들 말구의 아들이 17대 내물 이사금으로 재위(356년~402년)한다.
여기에서 구도의 아들 형재 미추와 말구 그리고 말구의 아들 내물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미추에서 내물까지 70년 넘는 시차가 발생한다.
삼촌 조카 사이라고 보기에는 7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고 느껴진다.
나중으로 접어두고 다시 족보를보면 알지(0)-세한(1)- 아도(2)-수류(3)-욱보(4)-구도(5)-말구(6)-내물(7)-눌지(8)-자비(9)-지증(10)- 법흥(11)-진흥(12)-진지(13)-용춘(14)-무열(15)-문무(16)
문무(재위 661년~681년)는 알지의 16대손이다. 그런데 비문에는 성한왕이 문무의15대조로되어 있고 김인문묘비나 흥덕왕 비문에는 성한왕을 태조로 적혀있다.
대체 성한왕이 누구 일까?
과연 그들이 두번 씩이나 망해버린 훈국의 후예들일까?
42년에 태어난 김수로왕도 훈국의 후예일까?
조선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이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보니 이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이 모두 김씨가 관련되어 있다.
삼국사기 편찬 책임자가 김부식으로 신라 김씨의 후예이고 삼국유사의 스님 일연도 세속 성이 김이다. 추사 김정희까지도 김씨이다.
해결 되지 않는 문제는 끝까지 파고들지 않고 덮어두는게 나의 지론이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후.
갑자기 간(干)이라는 칭호가 생각이 났다.
간이란 칭호는 북쪽 유목민들의 우두머리를 간이라고 하지 않았든가.
거서간, 마립간 그리고 몽골의 징지스간
왜 신라인들이 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
삼국사기를 다시 확인 해 보았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에 김부식외 10명이 관여하여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참고문헌중 신라편에는 김대문에 의하면 이라고 자주나온다. 김대문은 신라 성덕왕(704년)때 한산주 도독으로 있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 계림잡전, 고승전을 집필했다고 한다.
또한 최치원의 재왕 연대력도 참고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이전에 고려초기(1000년경) 광종때 삼국기라는 책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삼국사기와 구분하기위하여 고삼국기라 부른다.
김부식은 우리나라 참고 문헌 뿐만아니라 중국사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건을 기록한책도 다수 참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문제되는곳엔 논(論)이라고 소위 주석을 달아 두었다.
재검토하다가 지증 마립간편에서 수상한 글귀를 발견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논(論)을보면 초(楚)나라와 흉노(匈奴)는 중국이 아니라고 나온다. 왜 초나라와 흉노를 예를 들어 설명 했을까?
이것은 간이라는 호칭이 그리고 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훈국(흉노)사람이어서 저런 표현을 했던것이 아닐까?
만약 그것이 맞다면 다시한번 정리해보면 문무왕기념비의 전칠엽이란 휴도왕-김일제-김건-김건의아들-김당-김성-김알지 7명을 가르키고 15대조 태조 성한왕은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을 가르키는게 아닐까? 그러면 삼국사기와 문무왕비외 김인문묘비 그리고 흥덕왕능비에나오는 성한왕과 세대가 일치한다.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함에있어 남의 나라것을 함부로 담아서는 안된다.
특히 흉노라느니 동이라느니 하는 말은 우리자신을 욕되게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있었던 역사적사실을 적당히 뭉게어버리고 왜곡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내가 여기서 훈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기원전 400년부터 중국 북쪽 땅에 강성한 민족이 있었는데 한무제에 의하여 망한 나라이다.
이들의 유민이 유럽쪽으로 진출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야기하여 로마를 멸망시킨 훈족이다.
지금의 헝가리의 헝이 훈이라는 음에서 나왔고 가리는 그나라말로 땅 또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터어키도 투르크에서 나온말이고 투르크는 돌궐을 뜻한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 나라를 세운 한임의 나라 고조선을 세운 사람들의 뿌리가 바이칼호수와 그 부근인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발생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나인(차이나인:중국인)들이 무지하여 부르는 흉노를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을 흉노라 한다면 내 스스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감히 훈국이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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