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碑文의 미스터리
나는흉노왕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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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의 비편
비편에는'나는 흉노왕의 후손이다'라는 의미의 내용이 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金法敏(김법민), 즉 文武王(문무왕)의 陵碑(능비) 파편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전 조선 正祖(정조) 때인 1796년에도 陵碑(능비) 파편 두 개가 발견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拓本(탁본)은 淸(청)의 금석학자 劉喜海(유희해)에게 들어가 「海東金石苑(해동금석원)」에 실렸다.
이 碑文(비문)은 漢唐流(한당류)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古事成語(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이 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문무왕이 죽은 서기 681년이거나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新羅金氏의 내력,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의 治績,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碑銘 등이 적혀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屍身(시신)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散骨(산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四天王寺(사천왕사) 근방에 擬陵(의릉·가짜 무덤)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陵碑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을 화장한 곳으로 알려진 능지탑
이 비문 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능)枝가 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륜)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侯 祭天之胤傳七葉」이다. 侯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휴도)의 아들 金日(김일제)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金日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人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 스스로가 우리 조상은 匈奴人 金日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金日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 있고 中國 西安에는 金日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金日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單于(선우)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혼야왕과 休屠王(휴도왕)이 다스리던 곳은 옛 秦나라 땅 지금의 甘肅省 草原이었다. 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漢武帝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漢武帝의 명을 받은 청년장교 곽거병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야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休屠王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야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閼氏(注-알타이=금을 뜻하는 閼智와 같다)와 아들 金日, 그의 동생 侖은 끌려와서 곽거병의 포로가 되어 漢武帝에게 인계된다.
漢武帝는 그때까지 姓이 없던 金日에게 姓을 내리는데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金氏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王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漢武帝의 경호실장이 된 金日石單
1998년 중국의 언론은 甘肅省과 山西省에 살고 있는 金氏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金日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金日의 후손들이 들어왔던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漢武帝는 소년 金日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漢武帝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소년 金日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의 얼굴 또한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金日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스만 터키,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은 반역을 함께 도모할 패거리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金日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현장에서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金日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漢書를 읽어 보면 金日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金日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곽거병(당시는 사망)의 동생 곽光(곽광)과 金日를 불렀다. 漢書 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金日보다 못합니다』
金日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金日를 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詔書(조서)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 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金日를 侯(투후), 상관걸을 安陽侯, 곽광을 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金日는 새로 즉위한 임금 昭帝(소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昭帝의 즉위 1년 뒤 金日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金日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印綬(인수)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金日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金日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金日石單의 후손이 金閼智?
한편 곽광은 한무제를 이은 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昭帝가 죽자 다음 황제로 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宣帝는 곽광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宣帝 6년에 죽었다.
당시 宣帝의 황후는 곽광의 딸이었다. 곽광이 죽자 이제 그의 非行이 터져나왔다. 곽광의 아내가 宣帝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흉노人 金日의 동생 아들 金安上은 여전히 宣帝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金安上은 큰아버지의 친구였던 곽광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곽광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 버렸다.
宣帝는 마침내 곽광의 아내·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 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한 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代價를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金日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그들이 匈奴人이므로 漢族 사이에 권력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人 출신의 이런 성공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가진 인간성 덕분일 것이다.
金日 후손의 운명은 王莽(왕망)과의 인연으로 急轉(급전)한다. 王莽은 元帝의 황후 王氏 가문 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金日의 증손자 當의 이모부였다. 王莽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專橫(전횡)을 하다가 서기 8년에 漢을 멸망시키고 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王莽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金日 家門은 득세한다.
王莽의 新은 그러나 15년 만에 망하고 後漢이 다시 선다. 王莽 일가는 물론 金日 가문도 滅門之禍(멸문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金日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金閼智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王莽 시대의 五銖錢(오수전)을 들어서 王莽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사학자 김인배/1988년 역사비평. 글돋 註) . 三國志 東夷傳에 실린 「辰韓의 秦人」은 바로 秦나라 출신 金日 후손들이 경주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金日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慕華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慕華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漢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人 金日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新羅金氏는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新羅金氏의 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新羅金氏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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