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아리나 커넥션

아리나 커넥션 03-솔본 (아라니 tiger2020)

monocrop 2011. 5. 8. 01:40

글 : 아라니 (tiger2020)  /출처 및 원문보기

 

기내의 램프가 켜지며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케네디 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눈을 비비고 시계를 들여다 보니 현지시간으로 오전 9시였
다. 비행기는 예정시간 보다 두 시간이 연착됐다.
위구르 반군 취재에 이어 터어키 쿠르드족 PKK의 해방투쟁 취재를 끝으로 나는 10여년간 일했던 방송사
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방송사 조직내에서 나에게는 늘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프로그램과 할 수는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프로
그램 두 개 만이 존재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했다.
내가 뉴욕에 온 것은 마리나의 초청때문이었다. 그녀는 용케도 내 연락처를 잊지 않고 10년만에
연락을 해 왔는데 그녀는 내게 한가지 일감을 제안했다.
자신이 현재 일하고 있는 버클리대학 산타페고등연구소의 한국 프로젝트 용역을 좀 맡아 줄 수 있겠느냐
는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뉴욕에서 만나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고맙게도 내게 왕복 항공권과 호
텔숙박을 마련해 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부랴부랴 잡아 탄 나는 마리나와 약속된 맨하탄의 한 건물로 향했다. 차창밖으로 빗방
울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가 싶더니 이내 폭우로 변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택시는 월스트리트
를 겨우 지나 혼잡한 브로드웨이를 차량들과 뒤엉켜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나는 좀 초조해 졌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0년전 카자흐스탄에서 위구르 반군 취재의 현지 코디를 맡았던 마리나는 당시 MIT 박사과정에 있던 위
구르족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카자흐스탄 국립대학을 졸업한 후 곧 바로 국비장학생에 선발되었고 MIT
에서 패턴분석에 응용되는 A.I, 즉 인공지능 설계를 전공하고 있었다. 마리나는 잠시 휴학을 하고 동투
르키스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맨하턴 프린스가에 자리한 그들의 망명정부 건물에서였다. 마리나는 그곳의 대
외섭외 간부로 승진해 있었고 산타페 고등연구소에서 비교언어 컴퓨터 프로그래머로도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반가운 마음으로 재회했다.
나는 그곳에서 마리나와 그녀의 동료들로부터 따듯한 환대와 함께 위구르인들의 분리 독립운동의 현황
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중국이 신장지역에 대한 자원개발과 경제지원을 미끼로 그곳의 위구
르인들을 한족에 동화하려는 정책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한국에 널
리 알려 줄 것과 새로운 대중국 투쟁 계획에 참여해 줄 것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너무나 엉뚱하게도 그
제안이란 노스트라틱어(Nostratic language)라는 한 언어를 추적하는 프로젝트였다.
“1만년전의 고대 언어라구요?”
나는 의아한 느낌이 들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습니다. 고대언어죠. 우리는 노스트라틱어라는 고대 유라시아의 세계어를 통해 중국인들의 화
이론(華夷論)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고 이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믿고 있
습니다.”
자신을 발락이라고 소개한 백발의 곱슬머리 노신사가 내 의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마리나가 일하고 있는 산타페고등연구소에서 역사언어학을 연구하고 있는 위구르족 출신의 교수
였다.
“미국의 역사언어학자 중에 그린버그라는 교수가 있습니다.그는 하버드출신이지만 아주 독특하고 이
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최근에 어원분석(Etymological Analogy) 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언어들이 한때 구대륙에서 단일한 공통어군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유라시어’라고 명명했습니다. 처음에 학자들은 그의 발견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했었
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인류가 과거에 하나의 언어로 소통해 왔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린버그는 이로부터 아주 대담한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유전자처럼 돌연변이 요소를 통해
다양하게 진화한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따라서 생물학이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해서 최초의 인류‘미토
콘드리아 이브’를 복원할 수 있었듯이 언어학도 세계 언어들을 비교언어학적 방법으로 소급하면 ‘프
로토 워드’(Proto Word)라는 인류 최초 언어, 즉 마더텅(Mother tongue)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언어학자들은 그제야 비로소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죠. 그린버그는 적어도 4만년전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들의 언어를 찾으려했던 것이니까요. 문제는 그 언어를 찾아낸다 해도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
지는 신에게 여쭈어 보거나 아니면 사탄 루시퍼에게 4만살이 넘은 뱀파이어를 하나 소개해 달라고 조르
는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우리 모두는 점잖은 노교수의 유머에 폭소를 터뜨렸다.하지만 궁금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과 이들이 중
국의 화이론에 맞서려려는 고대언어간에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내 의문에 그는 진지하게 설
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았지요. 구대륙의 언어가 하나의 공통조어로 소급될 수 있
다는 그린버그의 전제를 받아들이되 우리는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중국어가 언제쯤 유라시어에서 분기됐
는 지를 추적했던 겁니다. 그것은 다시말해 언어를 통해 중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이 언제 형성되었느냐
는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어요 ”
내가 감을 잡고 무언가 적어야겠다고 수첩을 꺼내들자 발락이 안경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스터 한은 3천년전의 중국 상형문자 발음이 현재 중국어와 똑 같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에 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는 가방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
다.빨간색 표지에 노란색의 중국 상형문자들이 이리저리 디자인 된 책에는 ‘Sound & Symbol in
Chinese’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칼그렌이라는 스위스 언어학자가 19세기 청나라에서 상형문자들을 연구하며 쓴 책입니다. 그의 중국
식 이름은 꺼우번한(高本漢)이죠. 현재 언어학계에서 고대중국어를 연구하는데 참고하는 바이블입니
다. 19세기 이전의 중국인들은 고대 상형문자의 발음과 현재 한자의 발음이 같다고 생각했었죠.하지만
칼그렌은 중국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씌여진 시경이라는 경전에 쓰인 한자음의 운율이 현재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죠.예를 들어 볼까요?”
발락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화이트보드에 바다를 뜻하는 海자를 적었다.
“ 지금의 중국인들은 이 글자를 ‘하이’(海)라고 발음합니다. 하지만 칼그렌은 엄격한 운율을 적용
하는 시경에서 이 글자의 발음이 하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칼그렌은 이 고대의 경전 여러
곳에서 그런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한자의 뜻과 음가원리를 설명한 책 쇼우웬(설문)에서 이 글자
의 발음이 每(Mei)에 있다는 설명을 발견하고 이를 시경의 운율에 적용하자 잘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칼그렌의 발견은 현재 정설로 인정되고 있죠. 그렇다면 과거에 바다를 하이가 아닌 ‘메이’
또는 이와 가까운 발음으로 불렀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
나는 일본어로 바다‘우미’가 떠올랐다. 일본어는 내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외국어였다. 내 대답에
발락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빙고!’를 외쳤다.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 하지만 우리는 대륙의 알타이어계 안에서 투르크어와 퉁구스어간에 과거 물과 관련된 강,하천,호수
등의 어휘를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죠. 투르크어의 ‘크즐 수’(붉은 강) 나 ‘옥
시’(흰 강)와 같은 Su / Si 계의 언어와 퉁구스계의 아무르 또는 우르미와 같은 Mu/Mi등이 그것이었지
요. 거기에는 우리가 찾아낸 한국의 고대어 ‘매’(me)도 있었죠. 고..쿠르였던가? ”

발락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 다른 한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나는 발락이 고구려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어떨떨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게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겁니까?”
내 질문에 발락은 대답대신 다른 젊은 연구원에게 매직을 내미는 제스쳐를 해 보였다. 그의 대답을 원한
다는 싸인이었다. 그는 중국어 전문가였는데 발락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한 후 내게 말
했다.
“언어학적 입장에서 볼 때 중국 고대 한자음이 시대를 따라 이리 저리 변화한 이유를 설명할 어떤 보편
모델이나 방법이 없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과거 중국어에 남았던 꼬리자음이 소실되면서 성조가 생겼다
고 보지만 왜 그런 현상이 다른 알타이어나 우랄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지 설명못하는 것이죠.우리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한자가 상형문으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지금의 중국어 즉 한족의 언어
를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것 뿐입니다. 다시말해 한자의 초기 사용자와 후대간에 어족교체가 있었
다고 봐야한 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한자를 처음 고안한 집단은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겠군요.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버
렸으니까… ”
나는 그와 발락의 시선을 피해 일부러 책을 뒤척거리며 대꾸했다. 이들이 행여라도 한자를 위구르어라
고 말할 것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내 사전 방어표시였다. 그러자 그는 내 손에서 책을 가져가 한 페이지
를 찾아 보여 주었다.
“칼그렌은 바람을 뜻하는 한자 風(풍)의 음가가 과거 상형문자에는 현재와 같은 펑(feng)이 아니라
‘프람’(pram)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또 뿌리를 뜻하는 本(본)자도 과거에는 지금의 발음인 번
(ben)이 아니라 파르(par)라는 사실을 알았어요.우리는 이 고대음가들이 다른 어족들 간에 서로 차용되
기 어렵기 때문에 이 상형문들과 가장 가까운 음가의 어군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국은 한국어였
지요. 즉 風의 한국어 ‘파람’, 그리고 本의 ‘뿌리’처럼 말이죠..”
나는 잠시 멍해졌다. 중국의 상형문자가 중국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계통의 언어를 사용한 집단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한국의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는데 이미 한국의 몇몇 언어학자들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중국이 외교적으로 문제삼을 것을 우려해 정부에서 본격적인 연구단계로
진입하는 것에 주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발락의 표정을 살폈다. 발락은 계속하라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중국어는 한 개의 단어가 단음으로 구성될 뿐, 한 단어에 두개의 자음이 겹치는 복자음을 허용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대 상형문자들은 대개 복자음체계였고 성조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상형문자들의 발음이 알타이어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증거죠. 다만
그 알타이어의 프로토 타입으로 존재했던 과거 미지의 어군과 고대 한국어 간의 관계가 저희에게는 숙제
로 남은 겁니다”
그러자 발락이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중간에 끼어들었다.
“이런 현상이 중국 고대 상형문에만 유일한 것은 아니에요. 과거 수메르어의 설형문자의 경우도 그랬
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수메르인이었지만 나중에 아카드와 바빌로니아인들이 수메르의 설형문자를
빌려서 그들의 발음을 적었어요. 적어도 수메르 문명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설
형문자가 바빌론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과거 수메르와 바빌론의 땅은 거리상 이
곳 맨하탄과 뉴저지만큼이나 가까왔지만 그들의 언어는 오늘날 영어와 중국어만큼이나 달랐죠.”
내가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자 그가 제안을 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멀리서 오신 우리 솔롱고스 박따르 손님께서 첫날부터 지치신 것 같으
니.. 제가 편하게 식사라도 하며 한 잔 할 곳으로 모시죠”

박따르!. 발락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발락이 이미 나와 그들의 지도자 오마르와의 만남을 알고 있다는 은근한 표시였다. 내가 마리나
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였다. 순간 10여년전에 보았던 그 거대한
한텡그리산과 오마르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왔다. 나는 그를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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