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아리나 커넥션

아리나 커넥션 01-솔본 (아라니 tiger2020)

monocrop 2011. 5. 8. 00:50

글: 아라니 (tiger 2020) / 출처 및 원문보기

 

 

2004년 봄이었다.손바닥만한 내 여덟평 사무실에는 책이며 잡지며 온갖 서류더미들이 마치 전등사의 돌탑들 마냥
여기저기에서 속절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한 서탑(書塔)들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그것들
을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곡예걸음을 해야만 했고 가끔 몇몇은 결국 그 탑들을 건드려 내 작은 사무실을 아수
라장으로 만들고는 어쩔 줄 몰랐다.
어느날 저녁, 나는 결기에 찬 행동으로 그 탑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탑들의 잔해를 사무실 바닥 한 복
판에 산더미처럼 모아 놓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겨야 한다는 해묵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였지만 정작 나는 마음먹었던 정
리는 커녕 파지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종이더미속에 파묻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자료
들을 뒤척거리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 저것을 들추던 나는 2002년 발간된 사이언스 잡지에 눈길이 쏠렸다.
사육견의 기원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이 아니라 동아시아로 부터였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메리카
인디언의 개들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개는 지금으로부터 1만5천년전 양자강 하류의 한 사육견종으로 부터 비롯되
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는 유전학적 연구결과였다.
“믿을 수 없어요. 개를 잡아먹는 동양에서 개가 처음으로 사육됐다니..”
사이언스지의 기사에는 내가 스크랩해 둔 호주 ABC방송의 여성 앵커 멘트가 오려져 있었다. 난 왜 이런 걸 스크랩
해 두었던 걸까. 스크랩을 넘기자 이번에는 저자 피터 사볼라이넨 박사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왔다.
“개의 사육은 인간이 문명을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계기였을 겁니다.우리는 동아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
죠”
인터뷰 기사에 함께 실린 호주의 개 딩고(Dingo)를 보며 영락없는 우리 시골마을의 누렁이라는 생각에 혼자 킥킥
거리던 나는 이 딩고라는 개가 사람을 떠나 다시 야생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길들여진 개
가 다시 사람을 떠났다?그럴 수 있는 걸까.. 어쩌면 호주에 처음 이 개들을 데리고 이주한 집단이 어느 날 다른
종족에 의해 절멸됐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데려온 주인들에게만 충성하려
했던 것 아닐까. 마치 우리 진돗개들 처럼 말이다.
야생으로 돌아간 딩고의 사진을 한 참이나 드려다 보던 나는 사무실 전화와 핸드폰이 갑자기 경쟁이라도 하듯 한
꺼번에 울려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서로 다른 전화기들이 합성해 내는 그 기괴한 소음으로 인해 도
대체 어느 전화를 먼저 받아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렸던 내가 허겁지
겁 사무실 전화 수화기를 들었을 땐 이미 발신자가 포기한 후였다. 마치 무슨 중요한 일감이라도 날아가 버린 느
낌이었다.
하지만 핸드폰 발신자는 집요했다. 소파뒤로 넘어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힘겹게 집어든 나는 헬로우를
연발하는 어떤 외국여성의 목소리에잠시 당황했다. 근 20여년간 영어를 입에 달고 일을 해 왔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혀 모르는 외국인의 전화를, 그것도 심야에 받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자신을 마리나라고 소개하며 나에게 그 동안 잘 지냈느냐는 인사를 건네왔는데 정작 나는 마리나라는 이
름을 도통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내가 정중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그녀는 다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한텡그리!’하고 외쳤다.
한텡그리?
순간 나의 머리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랬다. 마리나였다.
10년전이었던가? 시간이 갑자기 되돌아가는 것 같았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오래
된 어떤 기억속으로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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